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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20화 (20/1,007)

[20] 돈이 열리는 나무 ==============================

○돈이 열리는 나무

“요즘 아이들은 다 이렇게 당돌하나?”

“이 아이만 특별한 것이겠죠.”

비서는 상관의 반문에 담담히 대답했다.

“그렇지. 확실히 직접 가서 봤을 때도 좀 다르긴 했어.”

삼보컴퓨터 부사장 이용권은 비서의 말에 동의하는 듯 고개를 끄덕였다.

당돌하다는 건 유재원에 대한 이야기였다. 조금 전 전화가 왔는데, 토요일에 만나 뵙고 싶다는 내용이었다.

당연하게도 이용권은 유재원에게 연락이 왔다는 소리에 타자 연습기 저작권에 대한 보고가 나올 줄알았다.

일주일 전쯤 본인이 직접 그 시골로 내려가서 어디서도 받은 적 없는 접대를 해주지 않았던가. 그런데 정작 비서의 입에서 나온 건 창업 소식이었다.

“ID 테크놀로지라고?”

“네, 무한의 꿈을 현실에서 이뤄낼 기술을 만들고 싶다는 포부를 담았답니다.”

당돌하다는 대목은 여기에서 나왔다.

형님이자 사장인 이용태가 창업한 삼보 컴퓨터라는 이름도 나름 거창 것이었다. 불교의 삼보가 연상되긴 한데, 형님이 칭한 세 가지 보물이란 인재, 기술, 서비스였다. 그 셋을 모아 세계 최고의 컴퓨터 회사가 되는 것이 삼보 컴퓨터의 비전이었다.

그런데 ID 테크놀로지에 비하면 새 발의 피였다.

“크, 대단하구먼. 그런데 왜 하필이면 그 첫 번째가 타자 연습기의 자체 유통이라는 거지? 우리가 원한 건 딱 저작권뿐이잖아.”

비서의 보고 내용 중 핵심은 유재원이 ID 테크놀로지라는 작은 회사를 차렸고, 회사의 첫 아이템으로 타자 연습기의 제작과 유통을 하기로 했다는 것이다. 이용권 부사장이 저번주에 직접 내려와 준 성의가 있으니, 제일 먼저 삼보 컴퓨터에 보여주고 싶다는 거다.

“타자 연습기라는 아이디어는 정말 좋긴 한데, 그거뿐이잖아. 5학년이 프로그램을 아무리 잘 만들어 봐야 딱 그 수준일 텐데.”

이용권 부사장은 매우 아쉬웠다.

유재원의 아이디어는 정말 천재적이었다. 코딩 실력도 발군이다. 하지만 그걸 소매시장용 프로그램으로 낸다는 건 어불성설이다. 특히 재벌들이 거느린 컴퓨터회사들도 열심히 타자 연습기를 만들고 있는 만큼, 장관상과 신문에 기사 몇 개 나서 생겨난 이름값이 사라지면 금세 도태될 거다.

그런 흐름이 뻔히 보였던 이용권은 유재원과 고리를 만들어 키워주고 싶었다. 몇 년만 더 노력하면 정말 이름난 프로그래머가 되었을 텐데. 도대체 누가 헛바람을 넣었던 걸까?

“거절하시겠습니까?”

비서의 물음에 이용권 부사장은 잠깐 생각했다. 그러더니 또, 처음처럼 질문으로 답했다.

“내일 형님, 아니 회장님 스케줄 중에 비는 시간이 언제지?”

“오전 10시부터 점심때까진 일정이 없으십니다.”

“딱 좋군. 그때 회장님과 함께 유재원이를 만나기로 하지. 형님께는 내가 설명할 테니 ID 테크놀로지 쪽에도 그렇게 통보해줘.”

“알겠습니다.”

이용권의 의도는 간단했다.

회장님과 함께 만나서 유재원에게 사업은 병정놀이나 소꿉장난이 아니라는 걸 보여줄 작정이다.

악감정은 절대 아니다. 애정이 있어 그러는 거다. 누군가 불어넣은 헛바람을 단숨에 빼서 잘 키워주고 싶은 욕심이다.

다음 날.

10월 17일, 아침.

부모님의 걱정스러운 배웅을 받으며 유재원은 서울행 길에 올랐다.

반면 부모님의 우려와 달리 유재원은 한껏 들뜬 상태였다. 그도 그럴 것이 토요일이라도 국민학생까지도 학교에 나가 공부해야 했던 때였다. 그나마 오전 수업만 하고 끝나는데, 교과서의 내용은 이미 머릿속에 있어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참 아까운 때였는데, 이제부터는 본격적인 사업을 시작하니 마음이 들뜨는 건 당연했다. 그렇다고 행동까지 가벼워지는 건 아니었다.

가슴은 뜨겁게, 머리는 차갑게!

“그 양반은 대체 무슨 생각인 거지?”

유재원은 갑자기 규모가 커진 삼보 컴퓨터와의 미팅 자리를 어떻게 하면 완벽하게 만들지 고민이 시작되었다.

“설마, 사업은 애들 장난이 아니라는 걸 보여주려고 그러나? 그러면 그냥 말로 하면 되지, 그 자리에 왜 회장님까지 동행하지?”

유재원은 아직 실감이 나지 않겠지만, 88년도는 아직 낭만이 살아 있는 시대였다.

사람들에겐 돈이 없어도, 가오는 있었다.

비록 대통령이 군부 출신이긴 해도, 시민들이 직선제를 쟁취해서 만든 민주주의 하의 대통령이었다. 게다가 88 서울 올림픽을 성공적으로 치른 후였기에, 사회가 분위기가 활기찼다. 물론 이에 대한 여파로 대학교에서도 공부하는 날보다 데모하는 날이 더 많았고, 많은 공장에서도 파업이 일어났다.

전자는 민주화에 대한 열망이고, 후자는 분배에 대한 불만이다. 강도는 후자가 훨씬 컸다.

아직도 하루 일당이 만 원도 안 되는 시절이었는데, 물가는 미친 듯 올랐다. 전 정권에서 국가폭력으로 눌러놓았던 물가가 폭발하듯 터졌다. 동시에 신도시 개발이 시작되면서 돈도 무지막지하게 풀리며 물가 상승을 가속화했다.

일부를 제외하고는 실질 소득이 오르긴커녕 떨어지는 직업들이 속출했다.

이러한 것들을 유재원은 일종의 성장통이라 보았다. 그러니 국가에서는 순리적으로 풀리길 기다리며 지원을 해줘야 하는데, 군부 출신 대통령이라 그런지 들고나온 대책은 형편없었다.

공안 정국!

간첩단 사건을 또 조작해서 파업하는 사람들, 데모하는 사람들을 때려잡기 시작했다. 그러다임수경과 문익환의 무단 방북 사건이 터지면서 공안 정국이 절정에 이른다.

“시작이 내년 3월이던가? 아직은 돈이 최고의 가치는 아닌 때라는 거지.”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이상한 쪽을 빠졌던 유재원이다. 공안정국 전에도 뭔가 큰 이벤트가 있던 것 같은데, 지금은 당장 눈 앞만 볼 때다.

하여튼, 이용권 부사장은 분명 자신에게 호감이 있었고, 덕분에 삼보 컴퓨터의 회장님까지 나오는 거로 미팅의 격이 올라갔다.

무려 회장님이다.

그냥 뒷방 구석에 계시는 회장님도 아니고, 창업주이자 컴퓨터 전문가였고 박사 학위도 가지고 있었다.

위기는 곧 기회다.

이용권 부사장의 생각대로 놀아나 줄 마음은 조금도 없는 유재원이다.

그런 분이 나왔다면, 위기감은 높아지지만, 동시에 큰 기회도 된다. 명색이 회장님이신데 실무자들처럼 가격이나 수량을 가지고, 100원 단위, 1개 단위까지 입씨름하진 않을 거라고 본다. 반대로 강렬한 호감을 얻게 된다면 회장님답게 통 크게 지갑을 열어 줄 수도 있는 거다.

“뭐라고 중얼거리는 거냐?”

“아, 아무것도 아닙니다. 습관이에요.”

고속버스 옆자리에 앉은 아저씨의 물음에 유재원은 말을 얼버무렸다.

어쩌다 동승인이 된 분이 아니라 여주시에서부터 함께 서울 출장길에 오른 행에 오른 일행이다.

유재원에게 비록 사업자등록증이 나오긴 했어도, 여전히 혼자서는 못하는 게 많았다. 그걸 도와주실 분으로 어렵게 모셨다.

학교 선생님들과 연관이 있던 분은 아니고, 현미유 공장 사장님의 도움으로 이번 출장에 빌려왔다.

전생에 수립했던 계획에서는 그 존재감이 없었던 사장님이었다. 그런 분이 유재원과 대면도 없이 지분도 투자해 주시고, 능력자도 빌려주시는 고마운 분이 되었다.

조만간 시간을 내서 꼭 인사를 드리러 가겠다고 다짐했다.

“그런데 내가 재원 군에게 도움이 되려나 모르겠네.”

자신 없는 소리를 하신다.

그도 그럴 것이 컴퓨터와는 완전히 담을 쌓으셨던 분이기 때문이다. 출장용 가죽 서류가방을 챙기시긴 했어도, 그 안에 있는 건 모두 종이책, 종이서류였다.

“걱정하지 마세요. 컴퓨터와 관련된 건 제가 다 할게요. 대신 계약서를 쓰거나 계약을 할 때는 100% 맡기겠습니다. 다루는 제품만 좀 다르지, 다 똑같은 일이잖아요.”

“그건 그렇지. 법률 쪽은 확실히 내 전문이지.”

컴퓨터 벤처기업 소리에 살짝 자신감을 잃었던 분이 목소리를 높였다.

이분의 이름은 최강욱, 직업은 변호사였다.

사시 7기로 기억의 궁전에도 이름이 저장된 분이었다. 그만큼 실력은 확실하다는 뜻이다. 지금은 비록 현미유 공장 사장님의 힘으로 빌려왔지만, ID 테크놀로지 소속으로 만들 작정이다.

“그런데 바로 삼보 컴퓨터로 가는 거냐?”

“아뇨. 백화점부터 갑니다.”

명색이 회장님이 나오신다는데, 예의를 차리는 복장은 기본이지 않겠는가. 그런데 유재원의 집에는 그런 옷이 없었으니, 사 입기로 한 것이다. 여기에 최 변호사님도 한 벌 해드리기로 했다.

"백화점은 왜?"

이유를 물어보던 최 변호사가 아차 한 듯한 표정을 짓더니 다른 말을 이었다.

"왜 그러세요?"

"박 사장님의 당부를 깜빡했었군. 재원 군을 국민학생이 아니라 동등한 사업자로 보고 대해 달라고 했는데 말이야. 이제부터라도 재원 군에게 존대를 할 터이니, 어색해 하지 말게."

“괜찮습니다.”

"아닐세. 내가 불편하네. 게다가 사업하는 데 있어 재원 군의 나이가 문제라 하지 않던가. 박 사장님 말이 맞는 걸세. 나라도 이렇게 하면 상대도 보다 진지하게 대해 줄 걸세."

“알겠습니다. 아, 백화점에 가는 건 우리 옷차림을 좀 바꿔 보려고 그러는 것입니다."

"응? 우리?"

"네, 번듯한 옷차림은 협상의 기본 전략이기도 합니다. 촌에서 올라왔다고 우습게 볼 사람이 있거든요. 덤으로 최 변호사 님도 신상 한 벌 하시고요."

"아닐세. 자네만 해도 충분할 거야."

"출장비 대신이라고 생각해 주세요. 게다가 저 혼자만 새옷이면 그림이 좀 이상하지 않겠습니까? 정 부담이 된다면, 앞으로도 우리 회사 일 좀 많이 도와주시면 됩니다.”

“아이고, 이거 어쩌나. 이런 자리인 줄 알았으면 좀 좋은 옷을 차려입고 나올 걸 그랬습니다. 저 때문에 협상이 망치면 안 되니, 일단 알겠습니다. 대신 어려운 일 팍팍 시키십시오.”

최강욱 변호사는 공적인 일 때문이라니 더는 사양하진 못했다.

그러면서도 유재원의 얼굴을 몇 번이고 다시 봤다.

개인 변호사 계약을 맺고 있는 현미유 공장 사장님 당부를 받긴 했는데, 긴가민가 했었다.

그런데 아침에 만난 직후부터 확실히 유재원은 보통이 아니었다.

진짜 몇백 년 만에 한 명 나온다는 신동인지는 모르겠지만, 말이나 행동은 확실히 국민학생의 범주를 뛰어넘었다.

뭐, 키보드 워리어 1.0이란 프로그램을 만들어 삼보 컴퓨터에 납품하려고 한다는데, 처음엔 그게 말이 되나 싶었다.

지금은?

성공률은 최소 50% 이상은 될 것 같았다.

“회장님, 안녕하신지요? 만나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ID 테크놀로지 유재원입니다.”

“안녕하십니까? ID 테크놀로지 고문 변호사 최강욱입니다.”

나란히 선 둘이 50대 중반의 남자에게 공손히 인사했다.

“어서 와요. 동생에게 이야기 많이 들었습니다.”

커다란 뿔테 안경에 짙은 남색 색 정장을 한 이가 인사를 받았다. 삼보 컴퓨터의 이용태 회장이다.

이용태 회장의 모습은 상상했던 것과 많이 달랐다.

마음속에선 후덕한 인상의 반백발 할아버지를 그렸는데, 유재원을 기다리고 있던 건 메마른 체형에 키가 컸고, 머리숱도 검은 모습이었다.

이 밖에도 전에 봤던 이용권 부사장도 함께 자리하고 있었고, 실무진으로 보이는 날카로운 인상의 젊은 사람 하나도 있었다.

“자, 편하게 앉게.”

“예, 감사합니다.”

인사를 마치자 이용태 회장이 자리로 안내했다.

여의도에 있는 삼보컴퓨터 본사, 그것도 회장실이었으니 뭔가 화려한 모습일 거로 생각했지만, 아쉽게도 그건 아니었다.

책상이 좀 크다고 할 뿐이지, 분위기는 여느 사무실 분위기 그대로였다. 익숙한 철제 서류캐비닛이나 책장도 사무용품점이나 가구점에 가면 쉽게 볼 수 있는 것들이다. 그나마 책상 위에 있는 최신형 컴퓨터와 수두룩한 상장 진열장, 그리고 개인용 책상 앞에 놓인 회의용 책상과 의자가 회장실의 구색을 갖추었다.

‘에휴.’

이용권 부사장은 함께 자리에 앉으며 한숨을 쉬었다.

저 둘과 이야기는 회장실에 오기 전에 잠깐 나눠 봤던 탓이다.

유재원이 오면 사업이라는 게 쉽지 않다는 걸 보여주려고 했다. 그런데 유재원의 ID 테크놀로지라는 회사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본격적이었다.

무슨 일인 기업 자본금이 거의 5천만 원에 이르고, 고문 변호사까지 있단 말인가. 1980년 그가 회장 형님, 그리고 다른 동업자 다섯이 삼보 컴퓨터를 만들 때 시작한 돈이 1천만 원이었다.

ID 테크놀로지는 겨우 1인 기업인데도, 거의 다섯 배나 되는 돈으로 시작했다. 게다가 형태도 단순한 동업이나 사업자금을 빌려서 하는 게 아니라, 주식발행까지 했다. 변호사는 또 뭔가. 삼보컴퓨터도 매출액이 안정적으로 나올 때나 돼서야 변호사를 고용했다. 이쯤 되면 사업은 애들 장난이라는 조언은 의미가 없어졌다.

이용권 부사장의 눈빛이 서늘해졌다.

이러면 이야기가 달라진다. 이들이 가져온 물건이 제대로 된 것인지 냉정히 살펴보고 그에 합당한 대우를 해주는 거다. 물건이 어설프다면 철저하게 평가해줄 거다.

“응?”

순간 이용권은 처음의 마음가짐과 확 달라진 자신의 모습에 이질감을 느꼈다.

본래 자신은 이런 성격이 아니었다. 도와주기로 마음먹었으면 끝까지 돕는 게 본래의 성격인데, 지금의 이 감정은 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우리 삼보 컴퓨터에 보여주고 싶은 게 있다면서요?”

그러는 사이 형님의 말을 시작으로 미팅은 본론으로 들어가버렸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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