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 ID 테크놀러지 ==============================
#17
○ ID 테크놀러지
그날 밤.
“뭐라고? 다시 말해 줄래?”
역시나 부모님은 깜짝 놀라셨다.
오늘 삼보 컴퓨터에서 사람이 학교까지 찾아와 비싼 정통 중국음식점에 접대까지 하며 자기가 만든 프로그램을 사겠다고 했던 사실을 알리자 나온 반응이었다.
“제가 만든 타자 연습기 저작권을 삼보 컴퓨터에 주면, 장학금으로 200만 원을 주겠대요.”
다시 한 번 반복된 유재원의 말에 실감이 나는 부모님이시다.
“장학금을 200만 원이나? 진짜냐?”
이번엔 아버지다.
100만 원도 큰돈인데 그 두 배인 200만 원이란다. 아버지의 입이 떡 벌어지셨다.
요즘 들어서 돈에 대한 감각이 많이 흐트러졌다. 돈이 돈 같지 않았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게, 올림픽이 열린 동안 유봉만은 엄청난 가외 소득을 올렸다. 열심히 일해서 번 돈이 아니라, 한 번의 선택으로 큰돈이 들어왔다.
바로 현미유 회사 사장님이 주최하는 금은동 메달 맞추기 내기에서 싹쓸이를 해간 것이다. 처음 500원으로 시작했던 유봉만의 판돈은 패막식 직전에 이르자 5만 원으로 올랐다. 게다가 요령이 생겨서 무조건 큰 돈을 걸고, 모조리 적중시키는 짓은 하지 않았다.
혼자 독식하면 다른 직원들은 돈을 걸지 않아서 오히려 가져가는 돈이 적어지고, 의심을 살 수도 있다는 전술적인 판단 때문이다.
유재원의 비상한 잔머리는 아마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게 틀림없다.
어느 날은 크게 잃고, 작게 따기도 하면서 자신도 틀릴 때가 있다는 걸 보여준 다음, 막판에 우리나라의 최종 금은동 숫자를 맞추는 큰 판은 친구와 함께 나눠 먹었다.
혼자 먹으면 돋보이게 될 테니, 같은 라인에서 일하는 친구를 끌어들였다. 그렇다고 돈을 사이좋게 반으로 먹은 건 아니다. 친구는 유봉만의 말을 곧이곧대로 믿지 못해서 딱 5천 원만 걸었고, 유봉만은 5만 원을 걸었으니 말이다.
그렇게 해서 받은 돈이 91만 5천 원이었다.
석 달 치 월급에 달하는 돈이다. 그런데 이제껏 누적된 당첨금을 다 합치면 130만 원이 넘었다.
이상한 점은 유봉만에게 철저히 털린 사장님의 반응이 나쁘지 않았다는 거다. 오히려 유봉만의 어깨를 두드려 주며 친분을 과시하더니 언제 술이나 한번 하자고 했다.
보통 남자들이 하는 언제 술 한 번 하자는 말은 대부분 빈말이다. 유봉만도 그렇게 받아들였는데, 현미유 사장님은 아니었다.
올림픽이 끝나고 10월 초쯤에 진짜로 유봉만을 자기 집으로 초대했다.
사장님의 집에서 한판 벌어진 술자리. 술을 먹으니 한층 가까워지게 되었다. 그리고 알게 된 사실은, 유봉만의 적중률이 뛰어나다는 걸 안 사장님은 유봉만이 찍은 걸 가지고 훨씬 더 큰 판에서 노셨다는 거다.
유봉만의 작은 잔머리로 인해 일부러 틀리 게 했을 땐, 크게 잃었던 적도 있지만, 마지막 판에서 금은동 숫자를 모두 맞추자 회사 안에서 잃었던 것보다 몇십 배는 큰돈을 땄다고 한다. 그러면서 개평이라고 따로 챙겨주시는데, 그게 또 100만 원이다.
이젠 아들이 또 200만 원을 들고 왔다.
한 달 내내, 무거운 콩 자루, 현미 자루 나르며 힘들 게 번 돈이 30만 원 정도였는데, 이젠 배꼽이 배보다 더 커지게 되었다.
그런데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공부 열심히 시키고, 컴퓨터와 같은 신문물도 사주었던 건, 재원이가 다 자라서 자기처럼 힘든 일 하는 건 보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다.
국민학교만 나온 유봉만은 배운 게 없어서 몸 쓰는 일을 했다. 하지만 재원이 만큼은 여름엔 땡볕 피하고, 겨울엔 찬바람 피하는 직업을 갖게 하고 싶었다.
지금 보니 그 바람은 이루고도 남을 것 같다.
“장하다. 장해.”
삼보 컴퓨터라는 유봉만도 알고 있는 유명한 회사에서 프로그램을 사겠다고 부사장이 내려왔다니, 훨씬 큰 사람이 될 것 같았다.
“와, 그럼 우리 재원이 대학 등록금은 문제없겠구나.”
어머니 김말숙은 아버지보다 구체적이었다.
무슨 대학에 갈지도 모르는 상태에서 장학금을 받으면 알뜰하게 모았다가, 등록금으로 쓰신다니. 너무 멀리 보시는 거 아닌가.
아버지도 고개를 끄덕거리는 걸 보니 부모님의 학벌에 대한 강렬한 열망도 느껴졌다. 역시나 개천에서 용이 되는 길은 학벌 이상의 정석은 없다.
하여튼, 학교는 나중의 일이고 지금은 사업할 때다. 형사미성년자인 유재원은 최소한 부모님은 설득해야 원하는 길로 나갈 수 있다.
21세기 초엔 발랑 까진 애들이 형사미성년자를 면죄부처럼 쓰면서 온갖 사고를 다 저지르고 다녀서 문제가 된 때도 있었다. 그런데 유재원에겐 면죄부가 아닌 족쇄였으니, 지금부터 잘 풀어야 한다.
“네, 삼보 컴퓨터의 제안을 받아들이면 그렇겠지요.”
다행히 눈치 빠른 부모님은 유재원이 다른 생각을 하고 있다는 걸 느끼셨다.
“무슨 다른 생각이 있는 거야?”
부모님의 물음에 유재원은 학교에서 열심히 준비한 계획을 풀기 시작했다.
“엄마, 아빠. 저는 제가 만든 타자 연습기가 우리나라 모든 학교 컴퓨터실에 깔리는 걸 보고 싶어요.”
유재원의 말에 부모님도 고개를 끄덕이며 동의했다.
아들이 만든 프로그램이 전국 학교에 깔린다면, 부모님만의 자랑이 아닌, 가문의 영광이었다.
“응? 삼보 컴퓨터랑 계약하면 그렇게 해준다는 거 아니었어?”
그런데 아들이 하는 말은 그렇지 않다는 느낌이다.
“삼보 컴퓨터가 저작권만 달라는 건, 제 아이디어만 가져가서 자기들이 새로 만들겠다는 이야기에요.”
“그게 그거 아니야?”
“당연히 아니죠. 단적으로 만든 사람 이름을 보면 제 이름 대신 삼보 컴퓨터 회사 사람들이 나오니까요.”
등록금 벌었다고 좋아하시던 부모님의 분위기가 바뀌었다.
그만큼 이름이라는 건 중요했다. 자신의 이력을 증명해줄 가장 강력한 요소이지 않은가. 그러니 유재원이 처음 선보인 타자 연습기에서 이름이 빠진다는 건 부모님에게 큰 감점요소였다. 물론 삼보컴퓨터와 잘 이야기하면 유재원의 이름이 맨 위에 수록될 수도 있지만, 지금 분위기에 일부러 언급할 필요는 없다.
“그래서 저는 제가 직접 타자 연습기를 유통해보고 싶어요.”
살짝 분개했던 부모님이지만, 직접 유통해보겠다는 아들의 말에 당황스러웠다.
재원이가 유통이라고 했지만 엄격히 따지면 사업이 아닌가. 재원이가 어리니 자신들이 도와줘야 하는데 아는 게 없었다.
쌀을 파는 것도 아니고, 무려 컴퓨터 프로그램이다. 이걸 어디로 어떻게 파는 지 도통 감을 잡을 수 없었다.
“어려울 거 하나도 없어요. 삼보 컴퓨터가 있잖아요. 삼보 컴퓨터가 가진 유통망을 통해 퍼트릴 수도 있고, 체신부의 컴퓨터 보급 사업에 한 발 올려서 교육용 교제로 타자 연습기를 포함하면 되요.”
점점 일이 커진다.
삼보 컴퓨터도 서울에 있는 큰 회사인데, 체신부는 아예 정부 조직이 아닌가. 거기랑 어떻게 협상을 해서 유통이 되게 하는지 하나도 모르겠다. 오히려 정부라는 단어에 덜컥 겁이날 정도다.
이번 대통령은 국민투표로 뽑았다지만, 군부 정권의 연장선이 아니겠는가. 텔레비전에 나오는 대통령이 보통 사람 믿어달라고 해도, 그의 전직은 장군이라는 건 누구나 아는 이야기였다.
“헤헤, 진짜로 어렵게 생각하실 거 하나도 없어요. 프로그램 유통하는 것도 일반 제품 파는 거랑 똑같아요.”
유재원은 타자 연습기가 담긴 5.25인치 디스켓을 들어 보이며 프로그램 유통에 대한 간단한 설명을 이었다.
“이 디스켓이 원본이잖아요. 이걸 들고 세운 상가에 가서 수백 장으로 복사해달라고 하면 해줘요. 물론 디스켓값과 수고비를 드려야겠지만요. 그렇게 복사된 디스켓에 적당한 설명서를 동봉해서 포장하는 거예요. 포장용 상자도 세운상가 근처 인쇄소에서 찍어주고요. 그렇게 받아온 상자에 일품 할 사람 몇 분 구하면 끝이죠. 이걸 삼보 컴퓨터와 체신부에 공급하는 거예요.”
“으응? 그렇게 간단해?”
아들 말을 들어보니 상당히 간단해 보였다. 다만, 디스켓을 복사한다는 대목이나 인쇄소에서 설명서와 포장상자를 찍어내야 한다는 대목에서 돈이 좀 들어갈 것 같긴 했다. 그래도 추수 때, 거둬들인 농작물을 잘 포장해서 팔 때랑 비슷하게 들렸다.
물론 이러한 부모님의 인식은 가장 큰 난관인 삼보 컴퓨터나 체신부에 납품 컨펌을 받는 대목을 생략했기에 일어난 것이기도 했다. 그래도 유재원은 삼보 컴퓨터나 체신부의 컨펌을 받는 것에 큰 부담이 없었다.
타자 연습기는 이미 완성된 상태였다.
경진 대회에서 보여준 건 핵심 기능의 맛보기였다. 회귀 했던 직후부터 며칠 전까지 거의 두 달을 투자해서 만든 타자 연습기는 1.0 버전을 부여해도 될 만큼 완벽했다.
대기업들이 짝퉁을 준비하고 있다지만, 타자 연습기 1.0은 공룡처럼 무참히 밟아줄 거다.
“그리고 교장 선생님이 도와주시기로 했어요.”
교장 선생님 카드로 방점을 찍었다.
유재원이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덕진리에서 교장 선생님은 가장 큰 존재감을 가지고 있었다. 교권이 반듯하게 살아 있는 시대였고, 선생님 중에서 가장 경력이 높은 분이었으니 당연했다. 공단 사장님들도 교장 선생님의 끗발엔 미치지 못했다.
그런 교장 선생님이 도와주신다니, 유재원의 부모님은 밀려오던 불안감이 말끔히 사라졌다. 오히려 어떻게 도와주면 되느냐고 바로 물어보실 정도였다.
“납품할 물건을 만들려면 돈이 좀 들어갈 것 같아요. 공디스켓도 사야 하고, 포장 작업할 분들 일품값도 드려야 하니까요. 정확한 건 계산을 해보고 알려드릴게요.”
부모님은 고개를 끄덕이셧다. 그러더니 갑자기 질문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그렇구나. 그런데 우리 재원이는 엄마아빠도 모르는 걸 어디서 이런 걸 다 배웠어? 학교에서 가르쳐주지도 않을 거잖아.”
방심하고 있다가 날카롭게 들어왔다.
당황한 유재원은 필사적으로 기억의 궁전을 더듬었다. 곧, 적당한 대답을 찾았다.
“음? 어, 그러니까 도서실에 들어오는 신문에서 봤어요! 미국에 빌 게이츠 아시죠?”
유재원의 물음에 두 분 부모님은 고개를 끄덕이셨다.
세계 컴퓨터 운영체제를 통일한 윈도우는 아직 나오진 않았지만, 이미 빌 게이츠는 유명 인사였다.
개인용 컴퓨터는 이미 MS-DOS로 쫙 깔린 상태였고, 도스에 포함된 GW베이직은 프로그래밍 입문용으로 널리 쓰이고 있었다.
“빌 게이츠가 사업을 시작했을 때, IBM이랑 계약을 체결하던 대목이 있었는데, 그게 지금 제 상황이랑 비슷하더라고요. 그걸 보고 저도 따라 해볼 수 있을 거 같아요.”
다행히 유재원의 임기응변에 부모님은 납득을 하신 모양이다. 더는 캐묻지 않으셨다. 대신 이런 말씀을 하셨다.
“그래. 알겠다. 그런데 우리는 그 빌 게이츠 양반처럼 네가 큰 성공을 하길 기대하는 건 아니다. 그저 해보고 싶은 거 해보려무나.”
그러면서도 부모님은 어떻게 해서든 목돈을 만들어줄 기세였다.
부모님의 믿음에 감사하며 유재원은 고개를 저었다. 없는 집에서 목돈이라 봐야 언젠가 아파트로 가겠지 하며 넣어두고 있는 주택청약 적금밖에 더 있겠는가.
타자 연습기 유통에는 그렇게 큰돈이 필요 없다. 게다가 돈을 모을 방도가 없는 것도 아니었다.
대신 유재원은 각오를 새롭게 다졌다.
지금은 빌 게이츠가 한참 앞에 있지만, 기필코 능가해서 부모님을 기쁘게 해주겠다는 마음이다.
빌 게이츠가 PC의 황제라면, 자신은 PC를 포함한 범 IT업계의 신이 될 거다!
다음날.
부모님 공략에 성공한 유재원은 다음 날 학교를 마치고 교장 선생님과 면담을 시작했다.
부모님을 설득했던 것과 달리 교장 선생님께는 무척이나 구체적인 계획을 말씀드렸다. 어떻게 보면 사업 계획을 설명하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무슨 말이든 다 믿어 주실 부모님과 달리, 교장 선생님은 완전히 남이었다.
장관상의 버프 효과가 지속하는 동안엔 조력자가 되어주실 테지만, 언제 버프가 바닥날지 모르니, 그 전에 마음을 확실히 다져 놓아야 한다.
더욱이 이번 자리에 대한 목적은 또 있다.
마음을 확실하게 얻어야 조력자로 삼는 것도 중요하지만, 사업 자금을 받아내느냐 마느냐가 걸린 자리였다. 사업 자금도 단순히 돈을 빌린다는 성격이 아닌 투자금으로 받아낼 심산이다.
어려운 자리였지만, 떨리진 않았다.
본인의 사업 아이템은 진짜배기였기 때문이다.
타자 연습기 1.0은 베이직으로 짜낼 수 있는 극한의 퍼포먼스로 뽑아냈다. 구연한 기능도 풍성했다. 서울의 재벌이 거느린 컴퓨터 회사들이 열심히 만들고 있는 타자 연습기와는 비교하는 게 미안할 정도다.
백 마디 말보다 직접 한 번 보고 다뤄 봐야 그 가치가 보인다. 그래서 사업 설명회(?) 장소는 컴퓨터 실이다.
교장 선생님과 교감 선생님이 컴퓨터 바로 옆에 섰고 유재원은 컴퓨터 앞에 앉았다. 그나마 전문 지식이 있는 컴퓨터 활동부 담당인 정현웅 선생도 있었고, 깍두기로 껴든 유재원의 담임도 함께 자리했다.
“그럼 타자 연습기 1.0을 실행하겠습니다.”
유재원은 준비한 대사를 끝나자마자 키보드를 조작했다. ‘KW10’라는 실행파일 이름을 입력했다.
타자 연습기의 출시명으로 밤새 고민하다 선택한 키보드 워리어(Keyboard Warrior 1.0)의 앞글자다.
인터넷은커녕 모뎀을 이용한 BBS도 매니악한 지금이지만, 컴퓨터가 어렵다 못해 무서운 왕초보들을 키보드 하나면 무서울 것 없는 전사로 만들어주겠다는 드높은 포부를 담은 이름이다.
엔터키를 치는 소리가 경쾌했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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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원 쿠폰도 감사합니다~~!!
즐거운 주말이네요!! 잘 보내시고, 월요일 자정에 다시 봐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