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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15화 (15/1,007)

[15] 도깨비 컴퓨터 ==============================

#14

분위기가 거짓말이나 허세 따위로부터 나오는 것이 아니었기에, 어리긴 해도 너무나 자연스러웠다.

실제로 대한민국을 넘어서 전 세계로 확대해도 유재원보다 나은 프로그래머는 없다고 확신할 수 있다.

그도 그럴 것이 프로그래밍 경력에서 유재원을 능가하는 사람은 하나도 없다.

무슨 말인고 하니, 현대적 컴퓨터라 할 수 있는 애플 2는 1977년 6월 10일이 출시일이고, IBM PC XT는 1983년 3월 8일이다.

이 컴퓨터를 가지고 프로그래밍을 배운 사람들, 혹은 그 컴퓨터를 만든 사람들까지도 포함해도 겨우 10여년 남짓에 불과했다.

반면 유재원은 반 백년의 경력이 있다. 2000년대부터 설렁설렁 시작해서, 2040년쯤 죽을 때까지도 키보드는 놓지 않았다.

더구나 단순한 코딩만 한 게 아니었다.

전생에 유재원이 처음 시작했던 사업은 게임개발이었다.

모든 사업이 그렇듯 시작은 초라했다. 한 손에 꼽을 만큼 적은 사람들이 2인분, 3인분을 하며 열정을 불태웠다. 그중에서 유재원은 당연히 프로그래밍을 맡았다.

처음엔 호쾌한 타격감을 뽑아내기 위해 컴퓨터의 성능을 극한까지 내는 로우 레벨 프로그래밍에 집중했고, 나중에 하드웨어 성능이 넉넉해질 때는 게임속 NPC들이 자연스럽게 움직이는 높은 수준의 인공지능 알고리즘까지 손을 댔다.

나중엔 아예 어느 게임에도 적용될 수 있는 범용 NPC 인공지능을 만든다고 나대다가 큰 사고를 치기도 했다.

이와 같은 역사적 지식이 한 글자의 소실없이 방대하기 그지없는 유재원의 머릿속 기억의 궁전 안에 그대로 잠들어 있다.

유재원에게 베이직을 다루는 것은 식은 죽 먹는 것이나 다름이 없다.

“허, 대단하군.”

그래픽적인 요소는 하나 없이 모두 글자로만 이뤄진 화면이었다. 그런데도, 화면이 꽉 차 보이는 건 위, 아래 키를 이용해 커서를 움직이면 각 메뉴에 대한 설명이 촤르륵 나타나기 때문이었다.

이 시대의 프로그램들은 엔터키를 눌러야 새로운 반응이 나오는 게 보통인데, 유재원은 커서의 움직임에 촛점을 맞췄다.

위아래로 커서를 움직이는 것이나, 그에 따라 설명문이 촤르륵 나오는 모습이 무척이나 자연스러웠다.

베이직은 사람이 쉽게 다루는 것에 초점이 맞춰진 프로그래밍 언어였다. 그래서 컴퓨터의 제 성능을 100% 끌어내기가 어렵지만, 유재원에겐 아니었다.

실시간으로 인터렉티브한 반응을 나타내는 건 아무것도 아니었다.

“그냥 차례대로 한 번 보여주게.”

“알겠습니다.”

타자 연습기의 각 메뉴도 훌륭히 동작했다.

자소 연습부터, 장문 연습까지 컴퓨터가 제시한 글자를 열심히 따라서 해 보면 자연스럽게 두벌식 자판에 숙달된다.

각 메뉴가 어떤지 한 번씩 보여준 다음 본격적으로 시범을 보이는 유재원이다.

“시범으로 단문 연습을 해보겠습니다.”

커서를 단문 연습에 맞춰 놓고 엔터를 누르자 화면이 지워지고, 새로운 인터페이스가 나타났다.

화면 상단 중앙에 두꺼운 글자 상자가 나타났고, 하단에는 밑줄과 함께 커서가 깜박였다. 글자 상자 안에는 ‘구슬이 서 말이라도 꿰어야 보배’라는 속담이 들어 있다.

유재원이 자판에 손가락이 날리도록 열심히 달려야 했던 이유가 여기에 있다. 타자연습기였으니, 사용자가 보고 따라 칠 단어와 문장, 그리고 장문을 입력해 놓기 위해서 열심히 자판을 두드려야 했다.

시간의 제약으로 예제를 많이 넣진 못했다. 단문 연습용 속담 10개 표어 3개 정도였고, 장문 연습으로는 애국가가 다였다.

유재원은 글자 박스 안에 뜬 문장을 열심히 입력했다.

“이 숫자 2개는 무엇인가?”

그러자 화면 상단 귀퉁이에 보이지 않던 숫자 두 개가 떴다. 524타와 100%라는 숫자였다.

“첫 번째 숫자는 1분당 자소 몇 개를 입력했는지 보여주는 타수입니다. 자동차의 속도계라고 할 수 있지요. 두 번째는 오타가 없이 정확하게 입력했는지 보여주는 정확도입니다.”

“그럼 유재원 응시생의 524타라는 건 얼마나 빠른 거지?”

“보통 200타 정도 나오면 빠르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런가? 내가 한 본 해봄세.”

자기는 500을 가뿐하게 넘겨 놓고 200만 나와도 빠르다고 하니, 김원중 부장이 나섰다.

이미 화면에는 새로운 속담이 뜬 상태였다. ‘말 한마디에 천 냥 빚 갚는다’라는 무척이나 간단한 문장이다.

타다닥 소리를 내며 나름 빠른 속도였지만, 살짝 긴장했던 모양인지 오타가 많았다. 165타에 85%의 정확도가 나왔다.

“음!”

생각보다 미미한 숫자에 오기가 났다. 다시 한 번 문장을 쳐 보는 김원중 부장이다. 그러자 203타에 100%로 숫자가 올랐다.

결과를 확인한 김원중 부장은 그래야지 하며 찾아온 만족감을 느꼈다. 동시에 이건 엄청나다 싶었다. 화면은 투박하기 그지없지만, 구현된 기능은 모두 완벽했다. 국민학교 5학년이 만들었다고는 생각하지 못할 정도였다.

특히 타수를 계산하는 방식이나, 정확도를 ‘%’로 계산하는 알고리즘과 그걸 베이직언어로 입력해 응용프로그램에 적용한 것은 학생의 수준이 아니다.

마지막으로 화룡점정은 외계인 침공에서 찍었다.

외계인의 지구 침공을 한글로 방어한다는 게임이었다.

배경 설명은 간단한 문장 몇 개로 끝이고, 게임의 형태도 모니터 상단에서부터 내려오는 단어를 열심히 타자로 쳐서 제거하는 것이었다. 목숨을 의미하는 하트가 화면 하단에 10개가 있었고, 오른쪽 위에는 점수를 표시했다. 정확도와 타수도 그 밑에 나란히 있었다.

구동하는 컴퓨터에 따라 난이도가 크게 달라지는 게임이다.

학교에서 XT 컴퓨터로 돌려 봤더니 외계인이 떨어뜨리는 단어들이 너무 느리게 내려왔다. 그나마 AT 컴퓨터에선 속도감이 있었다.

C와 같은 고급 언어를 사용했다면 XT에서도 부드럽게 움직일 텐데, 베이직으로 짠 탓에 생긴 일이었다.

유재원에게 주어진 8번 자리는 AT 컴퓨터 중에서도 터보가 달린 고급이라서 제법 속도감 있게 작동했다.

“놀랍습니다.”

“네, 정말 엄청납니다.”

유재원의 타자연습기를 확인한 심사위원들에게 다른 응시생의 프로그램은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흑백이긴 해도 나름 정교하게 태극기를 그리면서 애국가가 연주되는 데모 프로그램이라던가, 각 학년의 전체 성적을 계산해 주는 성적관리 프로그램도 나오기도 했다. 작년이었다면 대상을 다툴만한 수준이다.

하지만 그 무엇도 타자연습기를 능가하진 못했다. 심지어 그걸 만든 아이는 무려 국민학교 5학년에 불과했다.

경진대회 최종 순위를 정하는 심사위원들은 아주 손쉽게 합의를 볼 수 있었다.

“제3회 컴퓨터 경진대회 대상. 덕진 국민학교 유재원.”

호명에 정현웅 선생과 유재원은 모두의 박수를 받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단상에 올라 김원중 부장으로부터 상장과 상품을 받는 모습을 대기하고 있던 사진 기자가 플래시를 터트리며 찍었다.

-경! 덕진국민학교 유재원 체신부 장관상 축!

“헐?”

타박타박 학교로 걸어오던 유재원은 교문에 걸린 거대한 배너를 보고 입이 떡 벌어졌다.

집이나 친척분들의 반응에서 혹시나 하고 마음의 준비는 하긴 했다. 그런데 실제로 학교 입구에 걸린 배너를 보니 상상과 현실의 체감은 확실히 달랐다.

등교길은 혼자가 아니었다. 비슷한 시간에 함께 등교하던 아이들은 유재원을 보고 수근거리는 소리가 컸다.

그런데도 유재원은 잠시 그렇게 서 있었다.

단순한 글귀이긴 했지만, 해냈다 하는 감동이 있었다.

회귀 전의 경우, 자신의 모든 것이나 다름없는 소스코드를 노린 놈들과 한판 싸움을 시작하기 전까지 전면에 나선 일은 없었다.

이렇게 어렸을 때, 주목을 받은 건 처음이었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부모님은 다시 한 번 난리가 나셨다.

단순히 경진대회 출전만으로 그렇게나 좋아하셨던 부모님이었다. 그날 저녁 대회에서 돌아오는 아들내미의 손에 상장과 상패까지 들려 있었으니 어떻겠는가.

소년등과를 한 것처럼 난리가 났다.

심지어 꿈이 아닌가 하고 볼을 꼬집어 보기도 하셨다. 부모님은 볼이 아파도 웃음이 나셨다.

단순한 입상도 아니고, 무려 장관상이었다. 체신부 장관 '오명'이란 이름이 선명한 상패도 있었다.

유씨 가문 역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떡을 해서 돌려야 하는 것 아니냐는 말이 아버지 유봉만으로부터 나올 정도로 큰일이었다.

겨우 이 정도 일로 떡을 돌린다니 유재원은 부끄러웠다. 하지만 만류하진 않았다. 부모님께 즐거움을 드리는 건 아무리 해도 부족한 것이다.

특히 전생의 불효를 현생의 효도로 상쇄하려면 한참 모자랐다.

그렇게 한참을 구경한 유재원은 다시 발을 놀려 교실로 향했다.

-오늘은 아침조회가 있겠습니다. 전교생은 지금 즉시 운동장으로 모여주세요.

책상에 가방을 걸고 자습을 준비하려는데, 방송이 나왔다.

“다들 방송 들었지. 나가자.”

반장 류수경이 나를 따르라 외치는 장군처럼 말하곤 교실 문 앞에 섰다.

아이들도 툴툴거리면서 자리에서 일어나서 우르르 이동했다.

불만이 터질수밖에 없는 게 교장 선생님의 훈화는 너무도 지루했다. 결정적으로 아침 조회는 매달 첫 주 월요일에 하는 행사였다.

이미 10월의 아침조회는 진작 치렀는데, 갑자기 불러내니 좋아할 아이들은 없었다.

유재원도 교실 밖으로 나가는데 뒤통수가 따가웠다.

고개를 돌려보니 반장 류수경이 자신을 뚫어지게 보고 있었다. 마치 너 때문이지 하고 물어보는 것 같았다.

결과적으로 류수경의 짐작이 맞았다.

어머니인 김말숙 여사처럼 자랑하기 좋아하는 사람이 바로 덕진국민학교의 교장 선생님이었다.

컴퓨터실 개방에는 그렇게도 인색하더니, 유재원이 체신부 주최의 경진대회에 나가 장관상을 따오자 그렇게나 생색을 냈다.

원인 제공자인 유재원도 단상으로 불려 나가 표창장을 받았다.

교장 선생님의 기분이 무척이나 좋으셨던 모양인지, 종이 한 장으로 끝내지 않고 장학금까지 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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