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4화 (14/1,007)

[14] 도깨비 컴퓨터 ==============================

#13

“흐음, 신상 냄새!”

새 제품에는 특이한 냄새가 난다. 제품의 종류마다 나는 냄새는 독특한데, 유재원은 막 개봉한 전자제품에서 나는 특유의 냄새를 좋아했다. 어머니가 사주신 컴퓨터 덕에 이미 익숙한 냄새였다.

“좋다.”

아무리 시간을 거꾸로 돌려 회귀한 유재원이었지만, 실전인지라 살짝 올라 긴장감이 살짝 올라올 것 같았다. 그러다 익숙한 신상 냄새 덕에 안정되었다.

“어디 한 번 확인해 볼까?”

주최 측에서 20분이라는 준비 시간을 주는 건, 긴장감도 떨치고 컴퓨터 상태도 확인해서 최적의 상태로 시험에 임하라는 뜻이다.

유재원에게 주어진 8번 자리 컴퓨터는 적당했다.

자신의 컴퓨터보다 나은 것도 있고, 모자란 것도 있는 그런 컴퓨터다. CPU는 286 AT였는데, 평소에는 12Mhz로 작동하다가 터보 버튼을 누르면 16Mhz로 속도가 올라간다. 대신 하드디스크는 장착되지 않아서, 플로피 디스크로 작동시켜야 했다.

그래픽 카드는 CGA로 유재원의 컴퓨터보다는 아래였지만, 모노크롬 그래픽보다는 훨씬 나았다.

부팅도 해보고, 베이직을 실행해서 버전도 확인해보고 하는 유재원이다. 한글 도스에 한글 베이직이라서 준비해온 소스코드도 문제 없이 실행될 거다.

주변 중, 고등학생은 그런 유재원을 신기하게 보았다.

밤톨처럼 조그만 녀석이 자신들도 어려워하는 컴퓨터를 자연스럽게 다루는 건 낯선 모습이었다.

시간이 지나자 유재원에 대한 관심은 사그라졌다. 본인들 역시 대회에 빈틈없이 하려면 컴퓨터를 확인해야 했기 때문이다.

“휴.”

땅이 꺼질 듯 한숨을 쉬는 사람은 김원중 부장이었다. 체신부 컴퓨터 보급사업단에서 실무를 맡고 있다. 경진대회 주최 측에서 가장 높은 직급이기도 했다.

지금 보는 건 조금 전 끝난 기본 경진대회 참여자들의 채점표였는데, 작년보다 성적이 나빠졌다.

그럴 수밖에 없는 이유는 있다. 체신부는 컴퓨터를 보급하는 것만 신경쓰고 있지, 컴퓨터를 받은 학교에서 학생들을 어떻게 교육하는지 관심이 없었다.

아마 일선의 학교에는 컴퓨터 활용법에 대해 잘 가르쳐줄 선생님이 있는 곳은 얼마 없을 거다.

체신부도 알고 있는 문제점이지만, 거기까지 신경을 쓰진 못했다. 매년 수 만대의 컴퓨터를 보급하는 것만으로도 신경을 써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었다.

이권이 걸린 사업이다 보니 여기저기 숟가락을 들이미는 곳도 많았고, 실제로 여러 가지 방식으로 줄줄 세고 있었다. 대신 컴퓨터를 빨리 받기 위해 들어오는 사학재단의 청탁이라던가, 보급 컴퓨터 모델 선정에서 떨어지는 콩고물도 많아서 분명 남는 사업이라는 건 틀림없다.

다만 국민학교와 중, 고등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는 사업은 분명 교육부에 넘겨야 할 일이라는 건 체신부도 인식하고 있었다.

교육분야를 떼어 내고도 행정부와 지방 행정부에 컴퓨터를 보급하고 행정 전용선을 설치하는 것도 상당히 큰 사업이었다. 학교 파트를 떼어 주더라도 체신부의 규모가 크게 주는 건 아니다.

대신 학교 파트를 교육부에 넘겨주더라도 부처의 이익을 위해서는 미룰 수 있는 만큼 그 날짜를 최대한 뒤로 보내겠다는 방침이다.

상부의 방침은 학교 파트를 맡은 김원중에겐 발등의 불로 다가왔다. 학교 파트를 교육부에 인계하면, 자신의 자리는 사라지는 거 아니겠는가.

문제는 지금 보여주는 아이들 성과가 미미하니 그 시기가 빨라질 것 같았다.

물론, 그렇다고 공무원이니 잘리진 않겠지만, 지금 하는 일에 비하면 별 볼 일 없는 업무를 맡을 게 분명했다. 더욱이 김원중 본인의 업무 평가는 폭락하는 것이고, 이는 공무원의 최대 관심 사안인 승진에서 지극히 나쁜 영향을 미칠 거다.

그렇다고 결과를 조작할 수도 없으니 한숨만 절로 나오는 김원중이다.

“부장님. 저길 보십시오.”

옆에서 말을 걸어왔다.

부장의 밑에서 일하는 안재만 과장이다. 부장의 눈치를 살피며 안절부절못하던 그는 놀라운 걸 발견한 것처럼 손가락으로 시험장을 가리켰다.

손가락의 끝에 걸린 건 맨 앞줄에서 가운데 부분, 8번 유재원이었다.

군계일학(群鷄一鶴).

어느 순간부터 닭무리 속에 오롯이 서 있는 한 마리 학과 같은 상황이 대회장 안에 연출 중이었다.

주변 중고등학생의 컴퓨터 타자 소리는 타닥타닥 정도였다면, 유재원은 타다다다다닥이었다. 엄청나게 빠른 속도로 모니터 화면 가득히 소스코드를 때려 넣고 있다.

정확하고 빠르게 문장을 입력하는 게 관건이었던 기본 경진 대회였다면, 1등은 당연히 유재원이었을 것이다.

다만 지금 치러지는 시험은 기본 경진 대회가 아니다. 단순히 타자를 잘 치는 것에서 끝나는 것이 아니라, 제대로 작동되는 프로그램을 만들어 내는 게 중요했다.

“흠? 뭐지? 고등 경진 대회를 기본 경진대회로 착각하는 건가?”

코볼나 베이직, 혹시나 원한다면 C와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를 가지고 개성적인 결과물을 만들어내야 하는 게 고등 경진 대회의 과제였다.

주최 측에서 보고 싶은 건, 프로그래밍 언어를 얼마나 익숙하게 다루는 지, 짧은 시간 안에 제대로 작동하는 독창적인 프로그램을 만드는 능력을 보여주는 게 채점의 가장 중요한 요소였다.

다른 사람들에게도 신기한 광경이었던 모양인지, 취재를 나온 기자단에서 일부 사진 기자들이 그 모습을 카메라에 담았다.

과연 저 어린 녀석이 제대로 된 걸 보여준다면, 기본 경진대회가 죽 쑨 걸 만회할 수 있을 텐데 하는 작은 기대가 서렸다.

2시간이란 체감은 상대적이었다.

경진대회 참가자들에겐 총알처럼 지나갔을 시간이었지만, 심사위원들에겐 지루하기 짝이 없는 시간이었다.

-시험 시간이 끝났습니다. 응시자들은 자판에서 손을 내려 주세요. 계속 작업할 시 부정행위로 간주, 탈락시키겠습니다.

알람 소리가 나는 중에도 사방에선 타다닥 거리는 소리가 계속 났었다. 그러다가 탈락시키겠다는 추가 방송이 나오자 뚝 끊겼다.

일찌감치 작업을 마무리했고, 디버깅까지 완벽하게 했던 유재원은 이미 준비 상태였다.

“자, 이제 가서 봅시다.”

김원중은 여타 다른 공직자들과 달리 점잔 빼는 성격은 아니었다. 궁금한 것이 있으면 바로 확인해서 풀어야 하는 성격이었다. 그런데 호기심이 폭발했음에도 무려 2시간이나 기다려야 했다.

관례대로라면 1번 응시자부터 차례대로 검사했을 거다. 응시자가 만든 프로그램을 실행해서 잘 작동하는지 보고, 응시자의 설명도 들어보는 거다. 물론 제대로 작동하는 것만으로도 점수는 잘 나온다.

작년만 하더라도 에러로 인해 프로그램이 실행되지 않아서 소스코드만 보고 점수를 매겼던 경우가 10건은 넘었다. 당시 고등 대회 응시자 숫자가 40명 겨우 넘었으니 1/4나 되었다.

그만큼 학생의 수준이 처참했던 거다.

덕분에 8번 꼬맹이 응시자에 대한 기대는 크지 않았다. 그래도 거의 두 시간 동안 쉬지 않고 빠르게 컴퓨터 자판을 놀렸던 이유가 궁금했기에, 1번부터 보는 걸 건너뛰고 8번으로 직행했다.

그렇게 김원중이 일어서자 다른 심사위원들이라고 가만히 있을 수 없었다. 심시위원들은 우르르 몰려나왔다.

“덕진 국민학교 5학년 5반 유재원입니다!”

높으신 양반들이 날카로운 눈으로 내려봤지만, 유재원은 딱 부러지게 자기소개부터 했다. 정신적인 나이까지 포함하면 병풍처럼 자신을 두르고 있는 양반들보다 어른이었다. 더욱이 자신의 결과물 역시 완벽하니 떨 이유는 하나도 없다.

“음, 국민학생이 고등 경진대회 응시한다는 겐 파격적인데 놀랍군.”

“유재원 응시생. 타자를 쉬지 않고 치던데, 무엇을 그리 열심히 만들었는지 설명해 보게.”

병풍처럼 유재원을 두르고 있는 심사위원들이 국민학교라는 소리에 반응했다.

어려운 시험에 어린 학생이 응시한 건 분명 긍정적인 요소였다. 그러나 이보다 더 중요한 건 알찬 내용이다.

유재원은 충분히 준비했다.

“제가 준비한 프로그램은 ‘타자연습기’입니다.”

21세기 초 컴퓨터를 배울 때 상식처럼 사용되는 프로그램이었기에, 설명이 줄줄 나왔다. 나중에 중반부에 가면 컴퓨터 키보드보다는 스마트폰 자판에 더 익숙해져서, 키보드가 낯선 아이들에게 좋은 프로그램이라고 새롭게 조명을 받기까지 했다.

“한글 두벌식, 조합형을 기준으로 자소 자리를 익히는 것부터, 단어 연습과 단문 그리고 장문 연습까지 할 수 있습니다. 여기에 게임 기능을 넣어서 흥미를 잃지 않도록 해봤습니다.”

유재원의 물 흐르는 듯한 설명에 심사위원들의 입이 떡 벌어졌다.

본인들에겐 유재원이 말한 것 중에 하나만 구현하라고 했다면, 온종일 컴퓨터 앞에 앉아 있어야 하는 일이었다.

심지어 타자 연습기라는 개념은 낯선 것이었다. 이제까지 키보드 자판에 익숙해지기 위한 연습은 그냥 문서를 여러 번 작성하면서 알아서 익히는 방식뿐이었다. 교육용 컴퓨터에 번들로 들어 있는 학습 프로그램도 모니터에 선으로만 그려진 어설픈 키보드를 띄워놓고 자리를 알려주는 정도에 불과했다.

여기 ‘a’키가 있으니 눌러봐라. 잘못 누르면 띠 하는 소리가 난다. 정확히 입력하면 ‘b’를 입력하라고 나온다. 그런 식으로 쿼티 자판과 두벌식 한글 자판의 자리를 익히는 거다. 타자 속도와 정확성을 올리는 학습은 할 수 없다.

반면 유재원이 들고나온 건 투박하긴 해도, 완성도는 기존의 것을 능가했다.

“그럼, 실행해서 직접 시범을 보여드리겠습니다.”

유재원이 컴퓨터에 RUN을 입력하고 엔터를 쳤다.

베이직의 인터프리터가 소스 코드를 해석해서 프로그램을 구현했다.

화면이 까맣게 바뀌더니 모니터 위에 타자연습기라는 글자가 크게 떠올랐다. 곧 화면이 바뀌어서 메뉴를 선택하는 항목이 나타났다.

자소, 단어, 단문, 장문. 그리고 외계인 침공.

“어느 것부터 시범을 보여드릴까요?”

키보드의 방향키로 커서를 옮기면서 물어보는 유재원은 절대 국민학생으로 보이지 않았다.

하나의 컴퓨터 전문가, 그 자체였다.

========== 작품 후기 ==========

추천과 리플, 선작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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