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도깨비 컴퓨터 ==============================
#11
덕진 국민학교도 올림픽의 열기가 그대로 전해졌다.
유도를 배워 본 적도 없는 녀석들은 쉬는 시간마다 교실 뒤나 복도로 나와서 엎어치기, 메치기를 한다고 난리였다.
유재원은 당연히 그런 무리에 끼지 않았다.
주민이 말고 친한 친구도 없었고, 정신 연령이 맞지도 않았다.
교과서나 한 번 더 본다거나 아이들은 알아보기 힘든 글자로 이런저런 낙서를 하는 게 유재원의 소일거리였다.
“재원아!”
하품을 크게 하는 데, 누가 자신을 불렀다. 고개를 들어 보니 반장 류수경이었다.
공부도 잘하고, 선생님에게도 잘하고 해서 언제부턴가 줄곧 반장만 하는 아이였다.
반면 유재원과 딱히 친하진 않았고, 회귀 후에도 그대로였다.
시골의 학교가 대부분 그렇듯, 같은 반이라도 남자와 여자는 딱 편을 가른 듯 나눠서 노는 게 일상이었다. 어쩌다 말이라도 섞으면 얼레리꼴레리 놀리는 게 흔한 일이었다.
하고자 한다면 남자 녀석들 반응은 딱 무시하고 여자아이들과 어울릴 수도 있었지만, 수경이를 포함해서 관심을 끄는 아이는 없었다. 그도 그럴 것이 유재원의 정신적 나이를 생각하면 12살 꼬마에게 끌리는 건 범죄였다.
“응? 나? 왜?”
평소 말을 나눈 적도 없었기에, 어색하게 물어보는 유재원이다. 반면 수경이는 반장이라 그런가 친근하게 재원이의 이름을 부르며 말을 이어나갔다.
“재원이 너 정현웅 선생님이 교무실로 오래.”
“나를? 왜?”
“몰라. 선생님이 빨리 불러오래. 얼른 가봐.”
하여간 이 시대의 선생들은 다 이런 식이다. 인격적인 대우는 전혀 기대할 수 없다. 그래도 자신을 부른 사람이 정현웅 선생이라니까 대충 감이 잡힌다.
“알았어. 오라는 데 가야지. 암튼, 전해줘서 고마워.”
유재원은 류수경에게 고개를 끄덕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런데 류수경의 반응이 특이했다. 살짝 놀란 것 같았다.
“왜 그래?”
“아, 아냐. 얼른 가봐.”
류수경의 반응은 낯섦에서 기인했다.
같은 반 남자애랑 이렇게 정상적(?)인 대화는 처음이었다.
남자, 여자 편 가르는 것도 그렇고, 5반 여자들의 대장 격이었던 류수경은 덩치도 남자아이들보다 컸다.
국민학교 다닐 나이의 여자아이는 남자아이보다 성장이 빨라서 생기는 현상이다. 더욱이 유재원의 키는 아직 또래보다 작으니 차이가 확연했다.
여기에 태권도를 충실하게 배워 벌써 단증을 받았을 정도다.
피지컬과 기술의 차이 덕분에 류수경은 반장 역할은 물론, 장난꾸러기 남자 아이들로부터 여자아이들을 막아주는 방패 역할을 충실히 수행할 수 있었다.
남자아이들은 류수경을 어려워했다. 그런데 유재원은 류수경을 어려워하지 않았다.
대화도 자연스러웠다.
특히 다른 남자애처럼 이유 없는 저질 욕설도 섞지 않은 게 좋았다. 여름방학이 끝나고 나서 좀 달라진 것 같았는데, 지금 보니 완전히 달라진 것 같았다.
교실을 나가는 유재원을 바라보는 류수경의 눈빛이 달라졌다.
“선생님 부르셨습니까?”
교무실로 간 유재원은 정현웅 선생의 자리를 쉽게 찾았다. 권위주의가 그대로 적용된 교무실은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줄을 세운 형태로 자리 배치가 이뤄져 있었다. 정현웅 선생은 6학년 1반이었으니 뒤에서 첫 번째였다.
“어. 재원이 왔느냐?”
서류를 보고 있던 정현웅이 유재원을 맞았다. 학년이 달랐지만, 연결점은 있었다. 같은 특별활동부라는 거다.
특별활동부의 이름은 컴퓨터 활동부. 유재원도 속해 있는 부서 이름이다. 이름 그대로 컴퓨터 활용 능력을 배양하는 부서인데, 실상은 그렇진 못했다.
한 대에 수백만 원씩 하는 비싼 장비를 아이들이 막 만지는 걸 겁내 하는 교장 때문이었다. 일주일에 한 번 있는 부서 활동이었지만, 컴퓨터를 켜보는 건 한 달에 한 번이었다.
원래는 이렇지 않았다고 한다. 5학년도 일주일에 한 번은 실습 시간이 있었단다. 그런데 몇 년 전에 학생 하나가 컴퓨터를 크게 고장 내서 학교가 수십만 원의 수리비를 대야 했다. 학생에게 청구하면 되는데, 그 학생의 집이 가난하다 보니 돈을 받아낼 수도 없었단다. 그래서 컴퓨터부 선생님과 교장 선생님이 반반씩 내서 고쳤다고 한다.
그날 이후로 컴퓨터 부 학생들은 선생님이 컴퓨터를 다루는 걸 지켜보고, 실습하는 건 어쩌다 한 번씩 하는 희귀한 이벤트가 되었다.
아무튼, 아이들 앞에서 컴퓨터를 다루는 선생님이 바로 정현웅 선생이다.
서울 소재 교육대학교 출신이라고 부임할 때부터 학부모의 기대를 모았던 정현웅 선생은 실제로 능력도 있었다. 다른 선생들과 달리 컴퓨터도 잘 다뤘기에, 컴퓨터 활동부 담당이 되는 것도 당연했다. 더불어 이제 막 임용된 선생님답게 아이들을 잘 가르쳐 보겠다는 의욕도 출중했다.
“이거 봐라.”
선생님이 내민 건 공문이었다.
발신 항목에 경기도 교육청과 체신부의 이름이 나란히 들어간 것으로, 가장 크게 보이는 것은 ‘전국 컴퓨터 활용 능력 경진대회 개최를 위한 참가자 모집’이라는 문장이었다.
공문은 몇 줄 되지 않을 만큼 간단했다.
컴퓨터 활용 능력 배양을 위해 국민학교, 중, 고등학교를 아우르는 커다란 경진 대회를 열겠다는 것이고, 관심 있는 학교는 학생을 뽑아 추천하라는 내용이다.
컴퓨터 경진대회에 뜬금없이 체신부가 들어있는 이유는 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는 사업의 주체가 바로 체신부였던 탓이다. 아직 정보통신이란 단어도 낯선 시대였다. 정통부가 생기려면 10년은 더 지나야 한다.
대신 전산과 관련된 사업은 체신부가 맡고 있었는데, 학교에 컴퓨터를 보급하는 사업 역시 체신부의 입김이 교육부보다 컸다.
작년부터 시작된 경진대회는 이러한 알력 다툼의 부산물로, 결과에 따라 체신부의 보급 사업에 대해 대대적인 검증이 시작될 수도 있었다.
타자기로 작성한 후, 복사해서 각 학교로 돌려진 듯한 공문을 꼼꼼하게 읽는 유재원은 감회가 새로웠다.
회귀 전, 국민학교 시절을 떠올리면 수없이 몰려오는 후회 중에 한 손에 꼽을 만큼 큰 이벤트가 바로 이번 경진대회였다.
“선생님은 재원이를 추천하려고 하는데 어떠냐?”
회귀 전 12살 유재원은 많은 사람 앞에 나서는 걸 죽기보다 무서워했다. 컴퓨터를 잘 하는 것도 아니었다. 방학 내내 게임만 했다. 키보드 배열을 다 외운 것도 아니었다. 설치기사 형님이 적어준 쪽지를 보고 같은 그림 찾기를 하는 것처럼 치는 게 전부다.
나가서 망신을 당할까, 기대하신 부모님과 선생님이 실망할까 걱정이 컸다. 차라리 나가지 않는 게 좋다며 멋대로 결론을 내버렸다.
스펙을 하나라도 쌓으려고 초등학교 때부터 노력하는 21세기 아이들이 봤을 땐, 바보라고 놀렸을 거다. 반면, 12살 좁디좁은 시선을 가진 유재원은 그게 편안했다.
“재원이는 집에 컴퓨터도 있잖니. 집에서 매일 다룰 테니 6학년 형들보다 컴퓨터를 잘할 거 아니야?”
게다가 정현웅 선생이 유재원에게 경진대회를 권한 이유도 집에 컴퓨터가 있다는 것 하나뿐이다.
물론 컴퓨터 보유 여부가 엄청난 요인이긴 했다.
5학년은 한 달에 한 번, 6학년은 2주에 한 번 사용할 수 있는 컴퓨터를 매일 다룬다는 건 절대적 경험의 양이 차원이 다르다. 그래서 유재원이 제안을 거절하며 컴퓨터로 게임만 했다고 하니, 정현웅 선생은 쉽게 포기했다.
대신, 집에 전화를 직접 걸어서 부모님께 재원이보고 게임을 적당히 하도록 해야 한다고 전했다.
‘그때였지? 집안의 분위기가 파탄이 나는 게?’
이때 선생님의 위상이란 21세기와는 차원이 달랐다.
매달 막중한 할부금에 집안 살림이 쪼들리는데, 비싼 컴퓨터 가지고 게임만 한다니, 부모님의 속이 터지는 건 당연했다.
급기야 부부 싸움이 잦기 시작했다. 그럴수록 유재원은 더욱 엇나가서 집안 꼴이 말이 아니었다.
그러니 불행의 시작은 오지랖 넓은 정현웅 선생이다. 그렇지만 근본적인 원인은 본인의 잘못이라는 건 유재원도 잘 인식하고 있다. 게임을 딱 끊어버린 지금은 해당 사항이 없는 이야기이기도 하다.
“경진대회라지만, 모두 어려운 시험을 보는 건 아니야. 내가 나가보라는 분야는 기본등급이니까. 아마 나눠주는 지문을 컴퓨터에 누가 빨리 입력하는지 보는 정도일 거야. 어때? 할 수 있겠어?”
정현웅 선생의 물음에 유재원은 더 생각해볼 것도 없었다.
“네! 나갈게요. 열심히 준비하겠습니다.”
유재원의 번듯한 대답이 정현웅 선생도 마음에 들었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대회는 10월 8일이니까, 준비 잘하거라.”
당부까지 받았으니, 인사를 하고 물러가야 한다. 유재원은 그러지 않았다.
“응? 할 말이 남았니?”
“여기 보니까 기본대회 말고도 여러 가지가 더 있네요? 그런데 기본등급은 너무 쉬운 것 같습니다. 선생님만 허락해주시면 고등 경진대회에 도전해보고 싶습니다.”
국민 학생을 대상으로 한 기본 경진대회는 말 그대로 애들 장난이다.
다루는 프로그램은 정현웅 선생의 말대로 워드 프로세서 정도였고, 누가 빨리 지문을 입력하는지 보는 게 다다.
반면 고등 경진대회는 중고생을 대상으로 프로그래밍이나 전산 처리 같은 분야를 다룬다. 물론 말은 거창했고, 베이직이나 코볼과 같은 프로그래밍 언어나 로터스 1-2-3을 누가 잘 다루는지 겨루는 것이다.
“호오? 고등 경진대회?”
정현웅 선생의 눈빛이 달라졌다.
이놈 봐라, 재미있네 하는 것처럼 눈빛이 반짝이며 호기심을 숨기지 않았다. 이런 반응은 당연하였다.
명색이 본인이 6학년 담임을 맡고 있었고, 컴퓨터 활동부까지 담당하고 있다. 학생들의 컴퓨터 활용 능력 정도는 잘 파악하고 있다고 자부한다. 덕진 국민학교에서 컴퓨터를 제일 잘 다루는 녀석이라고 해봐야 6학년 이호진 하나뿐이다. 이것도 타자기를 치던 가락이 있어서 워드 프로그램을 잘 다루는 정도에 불과했다.
그럼에도 유재원을 부른 건 이호진은 중학교 입학시험을 준비하기 위해 다른 걸 할 여유가 없었던 탓이다.
그런데 고등 경진대회라니.
“응? 프로그래밍도 할 줄 아는 거야?”
“네! 베이직도 자신 있습니다. 그리고 이걸로 쓸만한 응용 프로그램을 만들던 중이었어요!”
“그래?”
정현웅은 공문을 살펴봤다. 확실히 고등 경진대회라고 해서 나이 제한은 없다.
애초에 입상 같은 건 기대하지 않았다. 아니, 교장의 압력이 아니라면 아이들을 대회에 내보낼 생각도 없었다. 컴퓨터실 문은 잠가놓고 경진대회 나가서 상을 타오길 바라는 건 교장이나 할 법한 생각이다.
“뭘 만들고 있는데?”
“자판 연습용 프로그램인데, 컴퓨터실에 있는 거랑은 차원이 다른 겁니다.”
기껏해야 구구단이나 띄우려나 싶었던 정현웅 선생은 난데없는 자판 연습용 프로그램이라는 소리를 믿을 수가 없었다.
“그래? 그럼 내일 가져와 봐라. 일단 한 번 보자.”
다만 프로그래밍의 완성도가 떨어진다더라도 정현웅은 애초에 허락할 마음이다. 교장과 달리 현실을 잘 파악하고 있는 그는 기본 등급 대회이든 고등 대회든 나가서 무슨 결과를 받든 기대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저 교장이 출장비를 지원해 주었고, 덤으로 유재원에게 좋은 경험으로 삼으면 그만이다.
“예! 알겠습니다.”
반면 유재원은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크게 대답했다.
도깨비 컴퓨터 작전 제2탄 시작이다.
========== 작품 후기 ==========
선작과 추천, 리플 모두모두 고맙습니다~~!!
어휴, 요즘 일교차가 극심하지요? 감기 조심하시길. 저는 이미 걸려서 콧물이 줄줄 나오고 있어요. 컨디션이 무척 떨어졌지만, 비축분이 남아서 다행이지요.
암튼, 이번 한 주도 파이팅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