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로 압도한다-11화 (11/1,007)

[11] 도깨비 컴퓨터 ==============================

#10

“곡은 마음에 드세요?”

-그럼요! 들고 말고요. 어쩜, 그렇게 제 마음을 읽은 것 같은 가사에, 멜로디도 아주 마음에 들어요. 그런데 진짜 유재원 님이 만드신 곡이 맞나요? 목소리를 들어보면 너무 어리신 거 같은데, 가사만 보면 그렇지 않거든요.

유재원은 살짝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하지만 이실직고하기엔 유재원의 사연을 믿어 줄 사람도 없었다. 더욱이 앞으로 연달아 있을 큰일들을 생각하면 망설일 이유가 조금도 없다.

“나이가 무슨 상관인가요? 선생님이 노래에 만족하시면 괜찮은 거지요.”

-그, 그렇지요. 나중에 꼭 뵙고 노래에 관해 이야기 나누고 싶어요.

유재원의 정론에 이성희가 뒤로 물러났다.

나중에라는 단서를 단 건 본인은 번잡한 건 싫어하니까 찾아와도 만나주지 않을 거라고 쪽지에 추가해 놨기 때문이다.

“아무튼, 곡이 마음에 드신다면 제 제안도 받아들이신다는 건가요?”

이성희는 유재원의 물음에 잠시 말이 없었다.

-아니요.

“엑?”

뭐야!

아니라니. 그럼 왜 직접 전화까지 하면서 기대감을 높인 건데?

-아, 그게 아니라, 150만 원은 노래의 가치에 비해 너무 헐값인 것 같습니다.

아이고 사람아!

간 떨어질 뻔했잖아.

놀랍게도 이성희는 유재원의 곡을 헐값으로 살 수 없다고 했다. 역으로 제시한 제안도 놀라웠다.

곡 값으로 500만 원! 작사, 작곡에 유재원의 이름을 명시해서 앞으로 발생할 저작권료도 죽 받게 하겠다고 했다.

마음 씀씀이가 대가의 풍모다웠다.

물가를 21세기 기준으로 맞춘다면 노래 하나를 4천만 원에 산다는 것과 같았다. 그렇다고 이 돈은 이성희에겐 큰 부담은 아닐 거다. 기업 행사 같은 걸 몇 번 뛰면 500만 원은 벌고도 남았다.

덕분에 이성희의 의도는 선명하게 읽힌다.

이성희의 제안에는 곡을 받는 게 단발성이 아니라, 지속해서 받고 싶다는 생각이 고스란히 깔렸다.

“우와! 고맙습니다. 그런데 저작권자로 이름을 올리는 건 어렵겠어요.”

-네?

거부하지 못할 제안이라고 자신만만했던 이성희는 반 거절에 의문이 들었다.

“집에서는 제가 음악 하는 걸 몰라요. 만약에 아신다면 큰일이 날 거예요.”

부모님은 피아노만 친다는 걸 알았지, 노래까지 잘 부른다는 건 모르신다. 만약 알게 되면 깜짝 놀라실 테지만, 기쁨의 감정일 거다. 하지만 유재원의 말은 듣는 사람에 따라 완전 반대로 들릴 수도 있다.

-무슨 말인지 알겠어요.

왜냐하면, 이성희의 경우가 바로 그랬으니 말이다. 집에서 음악을 못하게 해서 부모님과 거의 남남으로 지낸다는 건 나중에 알려지는 그녀의 내력이었다.

“네, 이번 곡은 오직 이성희 님만 보고 만들었어요. 작사, 작곡 권리 모두 넘길게요. 자작곡이라고 발표해도 괜찮아요.

-아, 어떻게 그래요? 그럴 순 없죠. 아무튼, 유재원 님의 말씀은 잘 들었습니다. 그러면 바로 우체국 계좌로 입금해드리죠.

“헤헤, 고맙습니다. 확인되면 바로 완곡이 담긴 테이프 보내드릴게요. 며칠 걸릴 거예요. 뭐, 전화로 먼저 불러드릴 수도 있고요.”

88년도에도 있을 건 다 있다.

대신 21세기에 뭐든 살짝 모자랐다. 은행 업무도 마찬가지라서 전산처리가 되어 먼 곳에 있는 사람끼리 돈을 주고받을 수 있다. 대신 확인하는 데 하루가 지나야 한다.

이는 메인프레임의 신뢰도와 처리 능력의 부족 때문에 실시간 처리를 할 수 없었다. 하루 동안 일어난 거래를 밤새 정리하고, 다음날 확인하는 방식이었다.

첫 거래는 성공적이었다.

시작이 반이다.

옛 속담을 이제야 실감하는 유재원이다. 이성희가 물꼬를 터 주자 며칠 사이에 답신이 3개나 더 왔다.

거래를 거부하는 사람은 단 한 명도 없었다.

유재원의 나이를 물어본다거나, 개인 정보를 꼬치꼬치 깨물어보려는 사람도 하나 있었고, 그 사람과는 거래하지 않았다.

총 3개의 거래 완료가 있었는데 유재원의 우체국 통장 잔액은 1,000만 원이 늘었다. 이성희가 500만 원, 변진석과 남희가 300만 원과 200만 원을 보내왔다.

나머지 셋은 꽝이다.

일부는 협상 결렬이다. 상대는 돈을 보내기 전에 원곡을 다 들어보길 원했고, 유재원은 돈을 보내주기 전엔 들려줄 수 없다고 했다. 분위기는 그다지 험악하진 않았다. 아마도 밀고 당기기로 곡 가격을 깎아볼 심산인 것 같았다.

이런 사람이 둘이었고, 아예 연락도 오지 않은 쪽도 있는데, 도진하였다. 이 사람은 아직도 테이프를 못 들었던 것인지, 아니면 무시하는 건지 모르겠다.

“그래도 88년에 천만 원이면 훌륭한 시작이지.”

보통 예금 계좌의 연 이자가 10%가 넘는 시절이었다.

원금 손실 위험이 조금 있는 금융 상품의 경우엔 20%를 가뿐히 넘는 것도 수두룩하다. 그만큼 물가가 자고 일어날 때마다 치솟아 오르는 시절이었다.

심지어 이율이 이렇게나 높은데도 은행에 돈을 맡기는 건 하책 중 하책이었다.

땅 놀이, 주식 놀이 등등. 하루아침에 몇 배는 불어나는 상품들이 곳곳에 널려 있는 게 88년도부터 90년대 초까지의 일이었다.

이른바 대한민국 역사에 다시 오지 않을 초 호황기의 시작이다.

그러나 곳곳에 널려 있는 금맥은 정보를 선점한 사람들의 몫이었지, 웬만해서 평범한 사람에겐 잘 돌아가지 않았다. 이미 윗선과 연결된 이들은 먼저 소식을 접하고 선점한다고 난리를 치는 중 아니겠는가.

유재원도 주식이나 땅장사를 얼른 시작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단계에서는 현실적으로 어려웠다.

“그래도 조바심내지 말자.”

어설픈 조바심은 화를 키운다는 걸 전생에서 얻은 뼈저린 교훈이었다.

눈먼 땅과 눈먼 주식을 사면 몇 달 후에 몇 배로 오를 것이 확실하다. 하지만 수천만 원, 어쩌면 억 단위 돈을 쏟아 부어야 하는 부모님이나 집안 어르신들은 불안에 선뜻 나서지 못할 것이다.

12살 꼬맹이가 큰집, 작은집 기둥 뽑아서 생전 해보지도 않은 주식을 사야 한다고 하면 무슨 반응을 보일지는 안 봐도 견적이 딱 나온다.

그렇기에 12살의 나이가 아무런 문제가 되지 않을 만큼의 특별함을 획득해야 한다.

다행히도 그 특별함을 획득하기 위한 작업은 순조롭게 진행 중이었다.

88 서울 올림픽의 11일째에 이른 9월 27일.

올림픽의 열기는 뜨거웠다. 어제는 유도 65kg급에 출전했던 이경근이 대한민국에 3번째 금메달을 안기면서 한층 더 달궈졌다.

깜짝 놀랄 스캔들도 터졌는데, 육상 선수 벤 존슨에게서 약물이 검출된 것이다. 이로 인해서 벤 존슨이 땄던 100m 금메달은 루이스에게 승계되었고, 약물은 놀림거리가 되었다.

당연히 88 서울 올림픽 메달리스트 예측 프로그램의 적중률은 날이 지날수록 높아졌다.

혹시나 부모님의 자랑을 들은 누가 검증하자고 나올까봐 유출될까 고정된 값 없이 여러 가지 변수를 더하고 빼는 방식으로 숫자를 산출하지만, 특정 값이 나오도록 설계했다. 물론 그 특정 값은 전생의 결과였으니 빗나갈 일이 없었다.

재미있는 건 부모님의 반응이다.

특히 아버지 유봉만은 한국 선수의 경기가 있는 날이면 결과를 유재원에게 은근히 물어보는 경우가 많았다.

유재원은 애매한 선수의 경우 잘 모르겠다고 했지만, 최소 동메달이 확실한 경우엔 결과를 말해주었다.

그럴 때면 아버지 유봉만은 환한 얼굴로 유재원의 머릴 쓰다듬어 주었다. 여기엔 유봉만의 작은 비밀이 있으니, 바로 승부예측 내기였다.

유봉만은 덕진리 공단에 있는 작은 현미유 공장에 다닌다. 현미나 옥수수를 들여와서 식용유를 짜내고, 남은 부산물은 덕진리 인근의 양계장이나 소, 돼지 농장에 사료로 파는 회사였다.

사장부터, 말단 직권까지 모두 덕진리 사는 사람들이라서 회사 분위기는 무척이나 가족적이라고 한다.

그런데 사장님의 취미가 바로 내기였다. 예전부터 국가적 경기가 있으면 직원들 모아놓고 내기를 했다.

당연히 이번 88 올림픽 역시 내기에 올렸다. 참여에 강요는 하지 않았으니, 내키지 않으면 하지 않아도 그만이었다. 유봉만 역시 저번 86 아시안 게임 때에는 한 번도 하지 않았다. 그건 유봉만의 자산운영 성격이 극단적인 위험 회피형이었기 때문이다.

이는 할아버지 때문에 생긴 성격인데, 구한말부터 일본강점기 때까지 대지주였던 할아버지는 도박에 빠져 논이며 산을 다 날려 먹어버렸다. 그로 인해 배를 굶는 일까지 생겼으니 노름에는 기겁하게 되었다.

그러다 생각이 바뀐 건 전적으로 유재원 때문이었다.

말하는 족족 적중률이 100%였다. 게다가 예측의 배경이 그저 아무런 논리적 근거도 없는 감이 아니라, 최신의 컴퓨터 분석으로 나온 것이었기에 신빙성이 컸다.

그래서 혹시나 하고 500원을 걸어 봤는데, 1만 원이 되어 돌아온 것이다. 20배 대박이었다. 동시에 당첨한 사람이 셋이나 있었지만, 저번 경기에서 적중자가 한 명도 나오지 않아 당첨금이 누적된 것이다.

재원이에게 확실한 예측을 받은 유봉만은 이번엔 1만 원을 걸어 볼 생각이다. 내기를 해서 딴 돈이었으니 잃어도 상관없다.

그날 저녁.

회사에서 돌아온 유봉만은 잔뜩 상기된 표정이었다. 무슨 좋은 일이 있었느냐고 물어보는 아내의 물음에 제대로 대답도 못 하고 얼버무렸다. 그러다가 저녁밥을 다 먹은 후 김말숙이 설거지하러 갈 때 유재원을 살짝 불러 무려 1만 원을 용돈으로 쥐여줬다.

엄마에겐 비밀이고, 혹시 알게 되면 할아버지한테 받았다고 해야 한다며 준 용돈이었다.

그렇게 유봉만의 비상금은 착실하게 불어나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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