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도깨비 컴퓨터 ==============================
#5
○ 도깨비 컴퓨터
유재원의 어머니이자 유봉만의 아내 김말숙은 요즘처럼 기대감이 커진 적이 없었다.
물론 두말하면 입이 아플 만큼 풍선처럼 부풀어진 기대감의 근원은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외동아들 유재원이었다.
아들이 달라졌다.
“콤퓨타를 사준 게 계기일까?”
없는 살림에 컴퓨터와 같이 비싼 전자기기를 사는 건 정말 무리해야 하는 일이었다. 남편의 한 달 월급은 겨우 30만 원 정도. 김말숙 본인의 월급은 많아 봐야 20만 원이고 적을 땐 10만 원 초반. 운이 나쁘면 5만 원도 못 받을 때도 있었다.
그도 그럴 것이 김말숙 여사의 직업은 대호 전자 대리점의 주부 판매사원이었다.
기본급은 있으나 마나 한 땡전 수준이었고, 실제 월급은 판매 수당에서 나온다. 판매량이 많으면 대리점장보다 더 많은 월급도 받을 수 있다. 딸이 결혼해서 살림을 마련하는 집을 잡았을 때 실제로 두둑한 월급이 나왔다. 실적이 없으면 주머니가 가벼워진다.
반면 36개월 무이자 할부로 산 컴퓨터의 월 납부금은 10만 원이다. 한 달 수입 중에 1/4을 할부금을 내는 데 써야 한다.
그런데도 큰 무리를 한 건 이를 계기로 유재원이 신문물인 컴퓨터를 잘 다루는 영재로 자라나길 바랐기 때문이다. 동시에 성적이 오르면 큰 보상이 있다는 걸 직접 체감해서 공부에 대한 욕구도 생기기 바랐다.
며칠 전까지만 해도 극적인 효과는 없었다.
여름방학 내내 게임만 하고, 방학 숙제나 2학기 공부는 완전히 손을 놓고 있다는 건 알고 있었다. 그래도 게임이라도 해서 컴퓨터에 익숙해지면 그것도 괜찮다고 생각했다.
시내를 나가봐도 컴퓨터와 같이 최첨단 기기를 제대로 다를 줄 아는 사람을 찾기는 어려웠다. 그런 기기를 먼저 익숙하게 다를 줄 아는 것은 남들보다 몇 단계 앞서 나간다는 것이었으니까.
그런 아들이었는데, 갑자기 개학 며칠을 앞두고 크게 달라졌다.
이제껏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방학숙제를 며칠 만에 끝내버리더니, 컴퓨터를 더욱 능숙하게 다루는 모습을 보여줬다.
놀라운 수준이었다. 자판을 눈으로 보지 않고 치는데도 그 속도가 말도 못하게 빨랐다. 이뿐만이 아니다. 컴퓨터에 나오는 온갖 영어도 능숙하게 읽고 뜻을 풀었다. 심지어 발음도 그럴듯했다.
“편식하는 것도 없어졌지?”
밥도 잘 먹는다. 예전엔 손도 대지 않았던 멸치 볶음까지 푹푹 떠먹었다. 잔소리를 잔뜩 하고서야 한두 개 먹는 게 아니라, 숟가락으로 가득 담아 먹었다.
수많은 변화가 한 번에 일어났다.
모두 긍정적인 변화인지라 걱정은 없었다. 걱정은 이러한 긍정적인 변화가 일장춘몽으로 끝나는 것이었다.
김말숙이 알기로 재원이에게 끈기는 부족하다 못해 결핍되는 수준이었으니까.
그래서일까?
일요일 아침 외출을 준비하던 김말숙에게 유재원이 다가와 어디 가시느냐고 물어보더니 같이 가겠다고 했을 때 굳이 말리지 않았다. 바람직한 변화의 연속이었으니 말이다.
일요일 아침, 단정한 옷을 차려입고 나설 곳은 그리 많지 않다. 십중팔구는 교회에 가는 것이고, 유재원도 거기에 속했다.
덕진 교회.
이웃 마을에 있는 작은 교회다.
유재원과 유 씨 일가친척들이 모여 사는 내오 마을은 불과 50가구도 되지 않을 만큼 작은 동네다. 교회마저도 하나 없어서 걸어서 20분 거리의 옆 동네로 가야 한다.
저번 주만 하더라도 절대 따라나서지 않았을 거다.
일요일 아침에는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만화가 텔레비전에서 나왔고, 최근엔 컴퓨터까지 있었으니 말이다. 더구나 교회에 가보았자 지루한 설교뿐이었고, 어울릴 친구도 없었다.
나잇대가 비슷한 또래가 몇 명 보이긴 했는데, 말도 나누지 못한 사이였다.
김말숙 여사가 오래전부터 교회에 다녔다면 친구가 있었겠지만, 그녀도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지는 몇 달 되진 않았다.
교회에 나가기 시작한 것도 믿음이 갑자기 샘솟듯 솟아올라서가 아니라, 제품 판매 건수를 하나라도 올리기 위해서라는 약간은 불순한 의도였던 탓이다.
“엄마, 가요!”
신발을 신고 나서는 유재원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어머니의 사정이나, 교회에 가면 재미는 없을 것을 알고 있는 유재원이었지만, 기꺼이 나서는 이유는 단순했다.
교회에는 피아노가 있다.
피아노는 도깨비 컴퓨터 프로젝트를 시작하는데 필수적인 아이템이었다.
**
“--성부와 성자, 성령의 이름으로 우리 덕진교회 성도를 축복합니다. 아멘.”
강단 위의 목사님의 아멘 소리에 30여 명의 신도가 아멘으로 합창했다. 거기엔 지루해 주겠다는 표정이었던 유재원도 있었다. 멍하니 있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드디어 예배가 끝났다.
목사님은 강단에서 내려와서 교회 출입구 쪽으로 먼저 이동했고, 띄엄띄엄 앉아 있던 신도들도 자리에서 일어나 돌아갈 채비를 했다.
거의 모든 교회가 그렇듯, 출입구는 강단과 마주 보는 반대편에 있었다.
모자(母子)는 가장 앞자리에 앉아 있어서 뒷사람들이 빠져나갈 때까지 기다려야 했다. 하지만 오랜만에 교회를 찾은 유재원의 속셈은 따로 있었다.
이를 위해 움직여야 할 타이밍이다.
“엄마.”
“응? 우리 아들 왜?”
막 자리에서 일어나려던 김말숙이 일어나다 말고 다시 앉아 아들과 눈을 맞췄다. 사랑스러움이 가득한 눈빛이었다.
유재원은 손가락으로 강단 아래에 오른쪽을 가리켰다. 거기엔 피아노가 있었다.
“엄마, 나 피아노 연주해보고 싶어요.”
뭐든 다 들어줄 것 같았던 김말숙은 아들의 요청에 순간 당황했다.
피아노라니. 가르쳐 본 적도 없는 악기였다. 게다가 지금 피아노는 빈 게 아니었다. 예배를 마치고 교회를 나서는 성도들을 배웅하는 의미로 잔잔하게 찬송가를 연주 중이었다.
연주자는 목사님의 사모님.
피아노를 칠 줄 아는 사람이 사모님뿐이어서, 교회를 시작할 때부터 줄곧 그랬다. 사모님이라고는 해도 김말숙 여사와 나이는 같았다. 여기에 공통점이 하나 더 있는데, 목사 부부에게도 영준이라는 아들이 있다는 거다. 심지어 유재원과 나이도 같았다.
여러모로 비교되기 딱 좋은 상황이었고, 실제로도 그랬다.
영준이는 공부도 잘했고, 다루는 악기도 바이올린과 피아노, 두 가지나 된다. 엄마 친구 아들이 되기에 딱 좋은 포지션이지 않은가.
“으응? 피아노를?”
피아노라는 소리에 김말숙은 당황했다.
지금 피아노를 말하기 전까진 아들이 피아노에 관해 관심을 보인 적은 한 번도 없었던 탓이다. 그래도 이번 역시 긍정적인 호기심이었기에 일단 말은 해보기로 했다.
“저기, 사모님?”
반주가 끝나자 김말숙은 아들 손을 잡고 사모님 앞으로 갔다.
“아, 재원이 어머니? 재원이도 오랜만이네.”
그러자 반주를 마치고 일어서던 사모님도 김말숙과 유재원을 반겼다. 쓱쓱 머리를 쓰다듬어 주기까지 했다.
사람 좋은 사모님의 모습이었다. 그렇지만 태도와 말투를 보면 묘한 높이의 차이가 있었다. 10살은 더 먹은 어른이 아랫사람을 맞이하는 모습이랄까. 엄마인 김말숙도 그런 자세를 인지하고 있는 것 같긴 했지만, 어쩔 수 없는 상황이다.
유재원이 팍 기분이 상했다.
같은 나이에 누구는 사모님이고, 누구는 재원이 엄마라니. 그래도 몇 년만 지나면 확 달라져 있을 것이다.
“저기, 재원이가 피아노를 쳐보고 싶다고 해서요. 괜찮을까요?”
“피아노를? 그럼요. 우리 교회 신자이신데 물론 되죠.”
조심스럽게 말하는 김말숙을 보며 사모님은 얼마든지 쳐봐도 괜찮다는 듯 자리를 내주었다. 자기 아들 영준이도 피아노를 배우고 있으니 실력 비교를 해볼 모양이다.
“고맙습니다!”
자리에 간 유재원은 특이한 자세로 앉았다. 피아노 의자엔 엉덩이의 끝만 걸치고 한껏 발을 뻗은 상태로, 건반 위에 손을 올렸다.
삼익악기의 중고 업라이트 피아노, 조율이 살짝 풀려 있긴 해도 음에 민감한 사람이 아니면 느끼지 못할 정도. 앉은 자세는 좀 불안했지만, 페달 조작에는 문제가 없다.
피아노의 상태를 확인하고 잡은 유재원은 잠시 눈을 감았다.
원래 계획은 피아노에 대한 재능이 생겨났음을 어머니에게 보여 주는 것이었다. 그래서 선택한 곡도 무난하기 그지없는 젓가락 행진곡이었다. 그런데 사모님이 풍기는 분위기를 보아하니 그 정도로는 안 될 것 같았다.
‘그러면, 이것이다!’
마음을 정한 유재원의 손가락이 피아노 건반 위를 누비기 시작했다.
청아한 피아노 소리가 교회당을 울렸다. 얼마나 잘하려나 팔짱을 끼고 지켜보던 목사 사모님의 표정이 변한 것도 그때였다.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은 제대로 교육을 받은 것이었다. 심지어 입문자는 쉽게 따라 할 수 없는 페달까지 완벽하게 사용했다.
“파헬벨 카논?”
유재원이 고른 곡은 대중적인 파헬벨의 카논 피아노 변주곡이다.
피아노나 바이올린을 연주하는 이들 누구나 알고 있는 곡이었고, 음악에 관심이 없는 사람들이라도 한 번은 들어 본 적이 있을 스테디셀러였다.
연주가들의 사랑을 받는 곡이었고, 수많은 이들을 통해 변주곡도 만들어졌다. 작고 가는 유재원의 손가락으로 연주되는 카논도 파헬벨의 오리지널이 아닌 조지 윈스턴의 변주곡이었다.
잔잔한 초반부를 넘어, 귀에 착 감기는 멜로디가 나오는 중반부와 후반부의 빠르게 질주하는 부분까지.
단 하나의 실수도 없이 완벽했다. 작은 손가락들이 하얗고 검은 건반 위를 화려하게 누비면서도 실수는 하나도 없었다. 더군다나 악보를 기계적으로 따라 가는 것이 아니라, 나름의 감성이 제대로 담겨 있었다.
“와!”
연주가 끝나자 박수 소리와 함께 작은 탄성도 터졌다. 유재원은 자리에서 일어나 피아니스트처럼 과장된 모습으로 인사했다.
청중 중에는 목사님도 있었고, 집으로 가려다가 피아노 소리에 다시 돌아온 신도 몇몇이 재원이의 재롱에 더 큰 박수를 쳤다. 물론 가장 놀란 분은 경악 그 자체인 사모님이었다.
전생의 유재원은 여러 가지 악기를 다뤘다.
그중에서도 피아노는 20년이 넘게 쳤다. 20년의 내공 중 일부만 보여줬음에도 주변 반응이 예상했던 수준 그 이상이었다.
'어? 너무 과했나?'
살짝 자책이 올라왔지만, 이내 상관 없다는 유재원이다.
묘기는 이미 부렸다. 물릴 수도 없다. 그러니 구경값을 비싸게 받아내는 거다.
========== 작품 후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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