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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로 압도한다-4화 (4/1,007)

[4] 준비된 회귀자 ==============================

#3

평화로운 시골 내오마을에 어둑한 땅거미가 내릴 무렵.

유재원의 아버지인 유봉만은 공장 일을 마친 후, 자가용이나 다름없는 낡은 자전거를 끌고 집으로 돌아오는 중이다.

타지 않고 끌고 가는 이유는 기어가 없는 쌀집 자전거였던 탓이다. 더구나 집이 마을에서 제일 높은 오르막에 있어서 내려갈 땐 좋은데, 올라갈 때는 걷는 것보다 힘들었다.

“재원이 녀석, 또 콤퓨타 께임만 하고 있으려나?”

유봉만에게 무거운 자전거를 끌고 언덕길을 오르는 것보다 걱정인 건 하나뿐인 아들 유재원이었다.

아들 녀석 성격을 잘 아는 유봉만은 온종일 게임만 하고 있을 게 뻔한 모습이 그려졌다.

동시에 컴퓨터를 생각하니 마음이 답답해진다. 한두 푼도 아니고 무려 350만 원이나 하는 장비였다.

지금 살고 있는 언덕 집을 살 때, 준 돈이 100만 원이다.

신문에 난 서울 현대 아파트가 2,900만 원이고, 중형 자동차 스텔라가 530만 원이었으니 엄청나게 비싼 물건이다.

마누라의 성화나, 대호전자가 공격적으로 내놓은 무이자 36개월 할부행사가 아니었다면 절대 아니었다면 비싼 컴퓨터를 절대 사주진 않았을 거다.

그런 비싼 물건으로 공부는 안 하고 게임만 하니 화가 나지 않을 수가 없다. 이번에도 그러면 톡톡히 혼을 내줄 생각이었다.

“아부지!”

유봉만은 자전거를 마당에 세우는 순간 안방 문을 벌컥 열고 나오는 아들 녀석의 모습에, 당황했다.

이게 아닌데 싶었다.

평소대로라면 자신이 퇴근한 줄도 모르고 게임 삼매경에 빠졌을 아들이었다. 저녁밥을 먹으라고 해도 게임에 빠져 듣지도 않았다. 그런 아들 녀석이 예전처럼 자전거 소리에 바로 나와 반기는 거다.

단지 인사만 하고 마는 게 아니라 덥석 안기기까지 했다. 아들 녀석이 머리가 차고부터 스킨쉽이 메말라버렸는데 오늘은 이상했다.

“네 엄마는?”

내심 반가웠지만, 무뚝뚝한 성격의 유봉만은 딴소리를 했다.

“엄마는 아직이요.”

회귀 전 마지막으로 봤던 모습에서 반백 년은 젊어진 아버지의 모습, 함께 풍겨오는 후끈한 땀 냄새에 찔끔 눈물이 날 것 같은 유재원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해 참았다. 지금 울음을 터트리면 분위기가 100% 이상해진다. 다행히 눈물이 터지진 않았다.

전생에 수없이 해봤던 시뮬레이션을 통해 마음을 잡을 수 있었다.

“방학숙제는 했나?”

“예!”

이어진 아버지의 물음에 유재원은 힘차게 고개를 끄덕이며 방바닥에 널려 있던 탐구생활과 공책 따위를 들어 보였다.

1988년이다.

초등학교도 아니고, 국민학교였다. 보충수업도 없었고, 학원에 다니는 아이들도 없었다. 그렇기에 긴 방학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지만, 단 하나의 태클이 있다면, 방학숙제였다.

탐구생활, 일기, 문제집 풀기, 채집 등등.

어린 유재원에겐 귀찮고 짜증 나는 일이었다. 차일피일 미루다가 개학 3일 전쯤에 날림으로 해치우던 게 일상이었다. 그러니 학교에 가서 방학 숙제로 칭찬을 들어본 적은 없다. 숙제를 안 해왔다고 회초리를 맞지만 않으면 다행이다.

무슨 회초리냐 싶겠지만, 지금은 쌍팔년도였고, 체벌은 당연히 존재했다. 비단 체벌뿐만이 아니라 선생님들께 촌지를 주는 것도 공공연하게 이뤄지고 있었다.

어쨌든, 사칙연산과 사지선다 문제로 채워진 5학년 문제집을 푸는 건 회귀로 돌아온 유재원에겐 간단한 일이었다.

탐구생활도 마찬가지다. 원래는 라디오 교육방송을 듣고 풀어야 하는 것들이지만, 몇 시간 투자 하면 다 풀 수 있었다.

“잘했다.”

문제집과 탐구생활 등을 대충 넘겨 본 유봉만은 짧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동시에 갑자기 무슨 바람이 들었는지 몰라도, 확 달라진 유재원의 모습이 낯설기도 했다. 그래도 바람직한 방향의 변화였기에 담담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이구, 우리 아들 철들었구나. 정말 장하네.”

저녁 즈음에 퇴근한 어머니인 김말숙의 반응은 유봉만보다 훨씬 격했다.

그녀 역시 아들이 방학 숙제는 않고 컴퓨터에 빠져 있다는 것을 인지하곤 있었다. 그래도 신문물인 컴퓨터에 익숙해지고, 능숙하게 다루는 기술을 익히는 게 더 좋을 것 같아서 놔두고 있었다.

그런데 아들이 웬일로 방학 숙제를 말끔히 끝낸 것이다. 게다가 분위기도 묘하게 달라졌다. 배 아파 낳은 아들이었기에 그 변화를 확실하게 알 수 있었다.

집중력이 부족해 산만했고, 어른에게 말할 때는 자신감이 부족해 힘이 없었다. 그런데 오늘 유재원은 뭔가 더 차분해졌고, 목소리도 힘이 있었다. 심지어 저녁밥도 끝까지 함께 먹었다. 평소라면 대충 깨작깨작 먹다가 바로 컴퓨터 앞에 달려갔을 텐데.

이러한 변화들을 모아보면 한 마디로 어른스러워졌다.

아무리 생각해봐도 달라진 계기는 찾을 수가 없었다. 그러니 어쩌면 이런 모습도 하루 이틀 보여주다 말 수도 있다.

그렇지만, 그런 우려는 기우에 불과했다.

다음날.

유재원은 일찍 일어나 부모님이 출근하는 걸 배웅했다. 졸린 눈을 억지로 뜬 게 아니라, 일찍 일어나서 맑은 정신 상태로 함께 아침을 먹고, 출근길에 배웅한 것이다.

두 부모님의 눈이 휘둥그레지는 게 당연했다.

이런 유재원의 모습은 처음이었기 때문이다. 어제부터 아들 녀석이 좀 달라진 것 같긴 한데, 원인은 도통 찾을 수 없는 부모님이다. 그래도 나쁜 변화는 아니었다. 그러니 발걸음이 무거워지는 출근길이 가벼울 수 있었다.

“아, 상상했던 것보다 너무 좋다.”

부모님의 출근으로 혼자가 된 유재원은 방바닥을 뒹굴며 중얼거렸다.

이른 아침에 깨어나야 했지만, 부모님과 함께 먹은 아침밥은 맛있었다.

고기는커녕 두부도 안 들어간 단출한 된장국에 콩자반과 김치 같은 간소한 밑반찬만 있는 아침상이었다.

객관적으로 맛은 거칠었다. 그렇지만 작은 아침상에 머리를 맞대고 도란도란 먹는 분위기는 맛있었다.

상상만 했던 것이었는데, 실제가 되니 기대했던 것 이상으로 좋았다.

오죽했으면 어제 잠을 잘 때, 유재원은 이 순간이 일장춘몽의 상상이 아니길 빌었다. 그래서 아침 일찍 눈을 떴을 때, 보이는 천정이 현대식 아파트가 아닌 낡은 시골집의 그것이었을 때 얼마나 안도했는지 모른다.

더욱 유재원의 기분을 좋게 만들어 준 건 간밤에 꾼 꿈이었다.

-계약은 이루어졌다.

의문의 존재가 오랜만에 다시금 꿈에 나타나 준 것이다. 친절하게도 거래가 완료되었다는 것을 말해주는 짧은 꿈이었다.

동시에 마음 한구석에 박혀 있던 불안감이 사르르 녹아 없어졌다. 말로는 내뱉지 못했지만, 다시 만난 부모님이나 시골집 모두가 죽어가는 중에 보이는 주마등이 아닌가 하는 마음도 있었던 탓이다.

“신님, 고맙습니다!”

의문의 존재는 유재원에게 신이나 다름이 없었다.

그런 존재가 유재원과 접촉해온 건 전생에서 막 30살이 되었던 때였다. 물론 현실에 떡하니 강림하신 것은 아니었다.

유재원의 꿈속에 나타나 거래를 제시했다.

-그대의 꿈을 사겠다. 원하는 대가를 말하라.

그렇다. 유재원은 회귀의 대가로 영혼 같은 걸 저당 잡히지 않았다.

대신 꿈을 팔았다.

꿈을 사고파는 건 조상님들도 오래전부터 하던 일이었다. 신라 김춘추의 부인은 동생으로부터 해괴한 꿈을 주고 사서 왕후에 올랐다.

유재원도 같았다.

물론 신에게 판 꿈이란 돼지꿈이나 용꿈 같은 건 아니었다.

“15년 애지중지 가꿔왔던 꿈을 팔 땐, 긴가민가했는데.”

유재원의 말에는 어폐가 있다.

꿈이란 망각의 파도가 밀려오는 해안가 모래사장에 그린 그림이었다.

보통은 그날 꾼 꿈도 기억이 가물가물하다. 15년이나 가꾸고 말고 할 것이 없었다. 하지만 유재원은 다르다.

남들에게 말해도 믿지 못할 능력이다. 그렇기에 전생에서 굳게 입을 다물었지만, 유재원에겐 특별한 능력이 있었다.

꿈을 이어서 꾸는 것이었다.

처음엔 다들 본인과 같이 꿈을 꾸는 줄 알았다. 나이가 찼을 때, 친구들이나 책을 통해 자신이 좀 별나다는 걸 알게 되었다.

그만큼 별거 아닌 능력이었다. 특이점을 만나기 전까진 분명 그랬다. 그러다가 꿈속 ‘자각’에 대해 알게 된 다음 어마어마한 시너지 효과가 터졌다.

원하는 모습, 원하는 환경으로 꾸밀 수 있고, 그 안에서 뭐든 할 수 있다. 심지어 NPC도 만들어서 여러 역할을 지정해줄 수도 있었다.

꿈이 실사 버전의 마인 크래프트로 변해 버렸다.

하루 8시간 접속할 수 있는 나만의 세계였다. 광활한 그 공간을 15년 동안 꾸미고 가꾸었다. 얼마나 애지중지했으면 인피니티 드림이라는 거창한 이름까지 지어주었을 정도다.

그렇게 만들어진 세계 속에서 유재원은 모험도 했고, 전쟁도 했고, 사랑도 했다. 그러나 꿈은 꿈일 뿐이었다.

인피니티 드림이 찬란해질수록, 현실과의 괴리감이 커졌다.

그런 회의감이 정점에 달했을 때. 미지의 존재가 나타났다.

지금 돌아보면 신으로 생각되는 존재였고, 그가 꿈에 나타나 거래를 제시한 것이다.

“시간을 되돌리는 것도 돼? 이를테면, 지금의 기억을 가지고 내가 어렸을 때로 가는 거지.”

-단 하나의 존재일 지라도, 시간의 커다란 굴레를 거꾸로 돌린다는 것은 어려운 일. 하지만 그대의 합당한 대가로 인과율은 성립되었다. 그대의 삶과 죽음이 교차 되어 차원의 경계가 약해지는 순간, 맹약은 발동될 것이다.

“진짜? 그럼 좋아!”

-우리는 그대의 꿈, 인피니티 드림을 사고, 우리는 그대를 이제까지의 기억을 보존한 상태로, 원하는 과거의 시점으로, 시간의 바퀴를 역으로 돌릴 것이다. 맞는가?

“그래!”

-거래는 이루어지리라.

“콜! 절대 무르기 없기!”

수십 년 전의 일이었지만, 아직도 고민 없이 콜을 외쳤던 그날의 기억이 선명하다.

처음엔 개꿈인 줄 알았다.

그런데 설마 하는 생각이 들었던 건, 다음 날이었다. 항상 꿈을 꿔왔던 유재원은 처음으로 꿈을 꾸지 못했다.

늦은 밤에 눈을 감았고, 다시금 눈을 뜨자 아침이었다. 그 사이의 기억은 전무. 말 그대로 아무것도 없었다.

진짜로 의문의 존재, 아니 신적인 존재가 자신의 꿈, 정확히는 인피니티 드림을 가져가 버린 것이다. 대신 진짜 깊은 잠을 잔 것처럼 너무도 상쾌했다.

그렇게 거래가 성사된 후, 며칠이 지난 뒤에 유재원은 몇 가지 중대한 사실을 인지했다.

하나는 인피니티 드림은 확실히 사라졌고, 머릿속에 광활한 여분의 공간이 생겨났다는 것이다.

컴퓨터를 예로 들면, 하드 디스크를 거의 다 사용할 정도로 용량이 크고, 실행하면 멀티 테스크가 불가능할 정도로 무거운 프로그램을 삭제한 것이다.

광활한 저장공간이 생겨났고, 사고의 속도는 몇 배로 빨라졌다. 마치 서번트 증후군이 있는 사람처럼 생전 처음 보는 그림이나 책을 스윽 보면 바로 외워졌다.

혹시나 해서 두꺼운 민법 법전을 읽어 보았는데, 놀랍게도 며칠이 지난 다음 날에도 토씨 하나 틀리지 않고 기억해 낼 수 있었다.

새로 생긴 기억력의 용량이 얼마나 큰지는 가늠할 수 없었다. 죽을 때까지도 머릿속이 가득 찼다는 느낌은 없었을 정도였다.

두 번째는 생각지도 못했던 이점이었다.

바로 신과의 거래에서 나온 허점이다. 회귀의 권능이 발동되는 방아쇠는 바로 자신이 죽는 순간이다.

그런데 언제, 어떻게 죽어야 한다는 조건이 따로 없었다. 죽는 시점은 마음대로 고를 수가 있게 된 거다.

결국, 며칠 고민한 끝에, 새롭게 생겨난 방대한 기억 능력을 바탕으로 철저한 회귀 준비를 하여 다음 생을 만끽하자는 계획이 생겨난 것이다.

인제 와서 보니 괜한 의심이었지만, 죽던 순간은 정말 조마조마했다. 특히 잠깐 한눈을 팔다가 처참하게 바닥으로 떨어진 이후로, 신경쇠약에 걸릴 만큼 전전긍긍했었다.

“후, 이젠 진짜로 잘해야지.”

이젠 다 지난 이야기다.

앞으로 새롭게 쓸 유재원의 비밀 일기장에는 완전히 다른 이야기들이 들어갈 것이다.

========== 작품 후기 ==========

새로운 글, ‘회귀로 압도한다’를 시작합니다.

사실 전작을 조기 종결하고부터 준비하기 시작했는데, 중간에 몇 번을 엎으면서 공개하기까지 시간이 많이 걸렸네요.

처음 계획은 신과 거래를 통해 회귀를 약속받은 직후부터 이야기를 이어가는 것이었습니다. 그런데 장르소설에 어울리지 않는 진행인지라, 뚝 잘라서 회귀 직후부터 이야기가 시작되는 것으로 바꾸었습니다.

주인공 재원이에게 주어진 특별한 기억 능력 말고는 최대한 사실적으로 이야기를 그려나가려고 합니다.

추천과 리플, 그리고 많은 기대 부탁드립니다!!!

아참, 연재 방식은 항상 똑같습니다.

주5일, 월~금 연재, 매일 밤 12시 올릴 작정이고,, 연재가 불가피할 경우 꼭 공지로 알려드리겠습니다.

그럼~~ 내일 봐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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