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7화
카르위먼에서 대대적으로 준비한, 밸리드 토벌 1주년 기념식은 분명 엄청난 실패였다.
경비에 심혈을 기울인 드래곤의 사체는 피로스에 의해 언데드로 부활, 카르위먼의 상층부와 대신전 유라스를 비롯, 도시 자체를 위협했고 몰래 스며든 밸리드의 잔당들과 그들이 부리는 언데드 몬스터들은 시민들을 공격했다.
숙적인 밸리드 토벌을 기념하는 자리가 카르위먼 역사상 최악의 참사로 남을 뻔했던 아찔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사태의 심각성에 비해 피해는 없다시피 했다. 기껏해야 재산적 피해가 대부분이었고 인적 피해는 미프틸 왕국의 기사들이 전부였다.
그 미프틸 왕국도 대표로 축제에 참가한 귀족 웨즈컬 그라셰인과 페이자디루 브라우닝이 밸리드와 협력한 배신자들일 가능성이 농후한바, 사상자는 없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기적과도 같은 결과. 마치 카르위먼을 수호하기 위해 카르나가 직접 힘을 행한 것처럼까지도 보인다.
그러나 그건 결코 신의 기적 같은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단 한 명의 사람의 손에서 나온 결과였다. 물론 일반적인 사람과 결코 비교할 수 없는 인간이긴 했지만.
높게는 카르위먼의 교황부터 낮게는 단순히 축제를 구경 나온 서민에 이르기까지 그 과정을 똑똑히 지켜보았다.
피로스가 완전히 제압되고 살아남은 밸리드인들도 맥없이 포박되었지만 그렇다고 기념식을 계속할 순 없는 노릇이라, 카르위먼은 군중을 해산시켰다.
사람들은 일단 얌전히 해산하여 자신의 집으로 돌아갔다. 하지만 그걸로 끝날 리 없었다.
자칫 잘못했으면 생명을 잃을 뻔했지만 지금 그들의 머릿속에 가장 강렬히 남은 감정은 공포가 아니었다.
경의.
자신들이 미래에 두고두고 구전될 전설을 목격한 걸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시간이 어느 정도 지나 놀란 가슴이 어느 정도 진정되자 사람들은 끓어오르는 혈기를 이기지 못하고 밖으로 나왔다.
축제는 아직 진행 중이었고 그런 사건이 있었더라도 많은 상인들은 장사를 계속하고 있었다. 사람들은 하나둘 가게에 들어가 술잔을 기울이며 아까 겪었던 일에 관해 이야기를 나눴다.
“캬아! 그거 봤어? 마지막에 응? 드래곤이 추락하는 것 말이야!”
“봤고말고! 나는 용사님이 검을 휘두른 것까지 봤다네. 내 눈에 보일 정도로 느릿하게 휘두르는데, 그 한 번에 드래곤의 날개가 잘려 나가더군!”
“뭐? 젠장, 나는 그 밸리드 놈이 꽁지가 빠져라 도망가는 꼴을 보느라 그건 보지 못했는데.”
건장한 남성 두 명이 술잔을 들고 입에서 침을 튀기며 이야기한다. 그 옆 테이블에 있는 이들도 마찬가지였다.
“그게 브레스라는 거지? 설마 내가 전설에서나 나오는 걸 보게 될 줄이야. 그게 막 산도 날리고 도시도 없애고 그런 거라며?”
“당연하지! 너도 봤잖아! 그 무시무시한 빛이며 소리며. 아마 용사님이 막지 않으셨다면 유라스가 통째로 날아갔을 거야.”
“그런 엄청난 힘을 그렇게 쉽게 막아 내다니. 정말로 대단하시지 않아?”
“그러니까 그 바퀴벌레 같은 밸리드 놈들의 대가리를 끝장낼 수 있으셨던 거겠지!”
어느 쪽을 살펴도 지크에 대한 찬양밖에 들려오지 않는다.
그럴 수밖에 없다. 그들이 언제 그런 엄청난 전투를 봤겠는가. 게다가 그 대상이 하늘을 찌를 듯한 명성을 갖고 있는 지크임에야.
“오늘 기념식에 가길 정말 잘했어! 몇십 년 뒤에 손주를 무릎에 올려놓고 매일 들려줄 이야깃거리를 얻었지 않나!”
“너는 일단 결혼부터 하고 말해.”
시간이 흘러도 사람들의 지크에 대한 찬양은 그치지 않았다. 아니, 열기를 본다면 아마 한동안 지크의 화제는 계속해서 사람들의 입에서 오르내릴 게 확실했다.
도시 곳곳이 오늘 있었던 사건으로 떠들썩했지만 정작 사건이 일어난 장소는 차분한 분위기가 이어지고 있었다.
사태의 수습을 위해 사람들의 출입이 금지된 가운데, 성기사와 신관들이 현장을 통제했다.
“이거 봐봐.”
한 성기사가 죽어 나자빠진 밸리드인의 몸을 발로 뒤집으며 동료에게 말했다.
“정말로 외상 하나 없어.”
그들은 시체를 이리저리 뒤적였다. 거기에 망자에 대한 예우는 없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뭐라 하지 않았다. 밸르를 신앙하는 멍청한 놈들에게 무슨 놈의 예우란 말인가.
“이거 봐봐.”
거친 손길이 밸리드인의 피부를 갈랐다. 그 순간, 고여 있던 피가 주르륵 흘러내렸다.
“피부는 손상시키지 않고 내부를 완전히 갈아버렸어.”
“이러면 겉으로는 멀쩡해도 당연히 즉사하지.”
“이걸 그 먼 거리에서 아무런 낌새도 없이 행했다고?”
성기사들은 서로를 마주 봤다. 마치 너는 가능하냐는 눈빛이다. 물론 그 눈빛에 긍정하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시체나 치우자.”
“…그래.”
이미 지크는 그들의 이해를 초월한 어떤 존재나 다름없었다. 솔직히 지크가 그들의 앞에서 자신을 카르나의 화신이라고 주장해도 믿을 것 같았다.
그렇게 차분하게 진행되는 곳이 있는가 하면, 꽤 큰 소란이 일어나는 곳도 있었다.
“이건 오해요! 설마 밸리드 놈의 말을 믿으려는 거요!”
성기사 두 명에게 팔을 단단히 결박된 채 페이자디루가 외쳤다. 하지만 그의 말을 귀담아듣는 자는 없었다. 일단 그들의 신분이 신분이기에 체포를 지휘하고 있던 추기경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건 조사를 하면 밝혀질 일이오. 그러니 가만히 계시오. 그 전까지는 귀족으로서 부족하지 않게 대접해 드리리다.”
반대로 말하자면 밸리드와의 연관점이 밝혀진다면 귀족이든 나발이든 목을 쳐버린다는 뜻이었다.
“이럴 순 없어! 나는 미프틸 왕국 브라우닝 후작가의 자제다! 그런 나를 이리 박대한단 말이냐!”
“지금이야 그렇겠지. 만약 당신이 정말로 밸리드와 연관이 있다면 당신 선에서만 끝나는 게 좋을 거요. 만약 브라우닝 후작가, 나아가서 미프틸 왕국까지 밸리드와 선이 닿아 있는 게 밝혀진다면 일단 파문장부터 날릴 계획이니까.”
물론 그걸로 끝나지 않을 것이다. 교황을 비롯해 카르위먼 상층부가 교단의 심장 유라스와 함께 통째로 날아갈 수도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아무리 지크가 멋지게 격퇴를 했다고 하더라도 기념식에 밸리드의 대대적인 습격을 막지 못해 위신이 실추된 것도 사실. 그걸 만회하려면 이 안건에 대해서는 더더욱 강력하게 나가야 했다.
페이자디루의 안색이 새하얘졌다.
“나, 나는 당연하고 가문과 나라도 그놈들과는 아무런 관련이 없소! 아무래도 카르위먼이 오해를 좀 심하게….”
“그건 나중에 심문장에서 주장하시구려. 끌고 가!”
“오해요! 우리는 절대 밸리드 놈들과 협력 따위…!”
듣기 싫은 소리로 꽥꽥대던 그가 지나가던 라라를 발견했다.
“라, 라라!”
그녀가 고개를 돌린다.
“이 사람들 오해를 좀 풀어다오! 너는 그 지크 님의 동료가 아니더냐! 네 말이라면 이 사람들도 알아들을 거다! 이 오빠를 위해서 변호를…!”
하지만 라라는 무심하게 고개를 돌렸다. 그녀의 이름을 부르는 페이자디루의 외침이 들렸지만 그녀가 다시 고개를 돌리는 일은 없었다.
“뻔뻔하기 짝이 없는 자네요.”
한스가 혀를 내둘렀다.
“원래 저런 사람이었어요. 놀랄 일도 아니죠. 웨즈컬 그라셰인은 조용히 끌려갔는데, 제가 모시는 인간의 반만 닮았으면….”
물론 웨즈컬도 순순히 죄를 인정하리라곤 생각하지 않았다. 다만, 그들이 다시 자유의 몸이 되는 일은 없을 것이 분명했다.
물론 이미 가문과의 모든 인연을 끊어버린 라라에게는 전부 어찌 돼도 상관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말로만 항의하다 끌려간 건 의외예요. 어느 정도 실력 행사는 할 줄 알았는데.”
“여기서 실력 행사를요? 아까 그걸 보고요?”
“그것도 그렇네요.”
두 사람은 미프틸 왕국의 사람들이 고분고분 카르위먼의 말을 들을 수밖에 없던 원인을 쳐다봤다.
지크가 지인들과 어울려 즐겁게 떠들고 있었다. 만약 카르위먼이 뒷수습을 명목으로 관계자 외 사람들을 일단 돌려보내지 않았다면 사람들에게 하루 종일 둘러싸이지 않았을까.
그 정도로 지크가 보여준 모습은 독보적이었다.
어느 정도 시간이 지나자 지인들도 하나둘 지크의 곁을 떠났다. 남은 건 그의 파트너인 라일라뿐.
“왜 그래?”
지크가 물었다.
아까부터 뭔가 우물쭈물하는 것 같은 라일라다. 지크와 이야기를 나누던 지인들을 못내 노려보기도 했었다. 지인들이 조금 빨리 흩어진 것도 그런 라일라의 기세 탓도 있을 정도였다.
“아니, 그게….”
그녀는 쉽사리 말을 하지 못했다.
“화장실이라도 가고 싶냐? 가려면 얼른 갔다….”
정강이를 걷어차는 게, 정답은 아닌 모양이다.
“음, 너 뭔가 할 말 없어?”
“있지. 그것도 꽤 많이. 하지만 어느 것이든 입 밖으로 내뱉었다가는 또다시 정강이를 걷어차일 거 같은데. 해 줘?”
“하기만 해 봐!”
그녀의 도끼눈에 지크는 순순히 그녀의 말을 따랐다.
‘정말로 할 말이 없는 것 같은데….’
지크와 시간을 같이 보낸 지도 꽤 된 지라 라일라는 지크의 행동을 보고 어느 정도 생각을 파악할 수 있었다.
결국 라일라는 직접 말을 꺼내고 말았다.
“너 예전에 그… 있잖아. 나한테 프러포즈를 하기 위한 계획을 짜고 있다고.”
“말했지. 요하임이랑 이블린과 같이 있을 때….”
눈치 빠른 지크는 바로 라일라의 행동 원인을 파악했다.
“설마 그거 때문에 기대하고 있던 거야?”
“…역시 생각이 없었네.”
“아니, 그야 그건 당시에 반쯤 농담으로 한 말이고. 게다가 내가 말했잖아. 위기 상황에 빠졌을 때 나오는 극도의 흥분 상태에서 할 거라고. 오늘 어디에 위기가 있고 흥분 상태가 있어?”
일방적으로 쥐어팼을 뿐이다.
“…그거 알아? 그런 논리대로라면 난 평생 프러포즈를 받을 수 없다는 거? 네가 위기에 빠질 일이 어디에 있어?”
“그것도 그렇네.”
지크의 시원시원한 반응에 절로 주먹이 쥐어진다. 이 화상을 어떻게 쥐어패야 속이 시원할까.
“그럼 할까, 결혼?”
“응?”
주먹에 힘이 절로 풀렸다.
“기대하고 있었잖아? 네 말대로 내가 내건 조건 따위로는 평생 프러포즈 못 할 것 같고. 그럼 이참에 하지, 뭐.”
“무슨 이런 낭만도 뭣도 없는….”
“그런 게 나한테 가능하다고 생각해?”
“어림없지.”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상황이다. 그러나 그럼에도 라일라는 자신의 심장이 빠르게 뛰는 것을 느꼈다. 이러면 너무 쉬운 여자가 아닌가 생각이 들었지만, 그래도 좋은 건 좋은 거였다.
하지만 여기서 너무 좋은 티를 내는 것도 뭔가 지는 것 같았다.
“내 팔자가 그럼 그렇지. 알았어. 그런 걸로 해 줄게. 그래서 결혼은 언제 할 거야?”
“일주일 안.”
“뭐?”
“걱정 마. 프러포즈는 좀 그랬어도, 결혼만큼은 세기의 결혼식으로 해줄 테니까.”
라일라가 눈을 깜박였다. 지크의 장난스러운 미소가 인상 깊었다.
* * *
지크가 약속을 한 지 정확히 일주일 뒤, 유라스 앞엔 거대한 무대가 차려졌다. 화려한 꽃과 장식으로 치장된 순백의 무대는 앞으로 함께 길을 걸어갈 커플을 축하하기에 이보다 더 어울릴 수 없었다.
주변에는 무수한 사람들이 모여 있었다. 하나같이 신랑과 신부를 진심으로 축하하며 웃고 떠들며 박수를 보낸다.
그 무대 위에서, 아름다운 드레스를 입고 손에 부케를 든 라일라가 반쯤 얼이 빠져 중얼거렸다.
“…진짜 하네.”
일주일 안에 세기의 결혼식을 올리겠다는 지크의 말을 기대 반, 의심 반으로 바라보길 얼마. 라일라는 진짜 지크가 머리는 엄청나게 잘 돌아간다는 것을 인정해야 했다.
라일라에게 프러포즈-일단 라일라도 그게 프러포즈라고 인정하긴 했다- 와 결혼 약속을 한 지크는 바로 교황에게 결혼식 준비를 요청했다. 그것도 일주일 안으로.
아무리 지크와 라일라를 좋게 보고 있는 카르위먼이라도 이런 요구는 너무 갑작스럽고 무례한 것이 아닐까 생각했지만, 잠시 고민하던 교황은 곧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안 그래도 카르위먼의 체면에 손상이 간 상황. 그걸 만회하기 위해서라도 카르위먼은 이번 축제를 계속 진행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거기에 지크와 라일라의 결혼식을 첨가한다?
안 그래도 지크의 명성은 하늘을 찌르고 있기에 그것만으로도 사람들의 관심이 폭증할 것이다.
그리고 그건 곧 고스란히 축제의 성공으로 이어진다. 거기에 카르위먼의 건재함도 알릴 수 있고, 지크와 카르위먼의 친분도 자랑할 수 있다.
카르위먼에게는 이득밖에 없다.
그때부터 카르위먼은 지크의 결혼식에 가용할 수 있는 모든 여력을 쏟아부었다.
과연 세계적인 종교의 위력이 어디 가지 않는지 그들은 정말로 일주일 만에 거대한 결혼식을 완벽하게 만들어냈다.
“만족스러워?”
옆에 서 있던 지크가 물었다. 그도 멋들어진 연미복을 입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꾸미자 안 그래도 귀공자 같은 풍모가 몇 배는 더 깊어졌다.
“응.”
이 정도의 결혼식에 불만이 있을 수 있을까.
“다행이네. 역시 지금 하길 잘했어. 지인들도 모여 있으니 바로 참석할 수 있었고.”
한스를 비롯해서 그들의 지인들은 특별하게 마련된 자리에서 식을 보고 있었다.
본격적으로 결혼식이 시작됐다. 음악대가 연주를 하고 주례를 선 교황이 둘을 불렀다.
귀빈석에서 아낌없이 축하를 보내며, 간간이 교황을 째려보는 루벨라의 모습이 보인다.
‘누가 주례를 설지 다투다 권력으로 찍어 눌렀댔나?’
성녀는 아직 멀었다며 껄껄 웃던 교황의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자, 그럼 가실까요, 라일라 세르빌?”
지크가 라일라에게 손을 내민다. 그 손을 잠시 바라보던 라일라는 지크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올렸다.
“네, 지크 세르빌.”
클로원의 언어로 ‘새로운 인생’이라는, 그들의 정체성을 확연히 보여주는 성을 이름과 함께 부르며 그들은 천천히 무대를 걸었다.
<외전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