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6화
대부분의 생각은 부하였던 마릴린에게 떠맡겨 버리고 눈앞에 닥친 모든 상황을 힘으로 찍어 눌렀기에 붙은 이명.
객사하기 딱 좋은 방식이었지만 마릴린의 유능함과 더불어 그의 무지막지한 힘은 그 무식한 방식을 만능 해결책으로 바꿔 놓았다.
물론 당시엔 시민들의 피해 하나하나까지 고려하지 않았기에 지금보다는 난이도가 훨씬 쉬웠다.
그러나 지금 지크에겐 윈두르와 세계수의 마력이 있다. 요 1년의 시간을 통해 그 힘마저 완벽하게 통제할 수 있게 된 지크의 힘은, 회귀 전 힘의 마왕이라 불렸던 지크 자신조차 상대가 되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 지크가 있는데 습격을 해?’
자살 방법은 여러 가지가 있으니 제발 남에게 폐 안 끼치는 방법을 선택하라고 권하고 싶었다.
라일라는 팔짱을 꼈다. 어차피 지크가 나섰으니 눈앞의 상황은 얼마 안 가 정리될 것이다. 아무런 위협도 되지 않은 상황에 감흥이 일어날 리 없다. 어느새 라일라는 다른 생각을 하고 있었다.
‘이 정도 습격이면 기대해 봐도 되려나?’
얼마 전 지크가 한 말이 떠올랐다. 그때는 언제나 하는 헛소리라고 여겼지만 만약 이 사태를 어렴풋이라도 예견하고 한 말이라면.
라일라의 심장 박동이 빨라졌다.
그렇게 라일라가 전장과 한참을 동떨어진 소녀 같은 생각에 빠져 있을 때, 첼시는 주먹을 힘껏 움켜쥐었다.
‘좋았어!’
지크가 드래곤의 브레스를 말 그대로 으깨버리는 것을 본 그녀는 저도 모르게 두 손을 번쩍 들고 소리를 지를 뻔했다.
‘아니, 그냥 그대로 내지를 걸 그랬어!’
이미 시민들 사이에서 격한 환호성이 간간이 튀어나오고 있었다. 손을 들어 마구 흔드는 사람도 있다. 그리고 분명 그 분위기는 주변으로 빠르게 퍼지는 중이었다.
이미 시민들의 피난은 멈춰 있었다. 물론 현장을 벗어나는 사람이 없는 건 아니었지만 전체 군중에 비하면 그저 한 줌에 불과했다. 시민들도 깨달은 것이다.
저 무서운 밸리드와 언데드들은 더 이상 위협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자신이 안전하다는 생각이 들자 사람들은 자연스레 눈앞의 전투에 집중했다.
언데드로 부활한 드래곤과 전설의 드래곤 슬레이어의 싸움. 음유시인이 부르는 노래에서나 있을 법한 장면이 바로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아직 거대한 언데드 드래곤이 건재하고 시민을 인질로 삼으려던 밸리드인도 군중 속에 남아 있는 만큼 그건 분명 정상적인 반응은 아니었다.
그러나 지크의 인상적이기까지 한 무력은 그 비정상적인 광경을 현실로 만들어 버렸다.
‘정말로 줄을 잘 섰어!’
피나와 심각하게 상의한 끝에 지크를 선택하기로 한 과거의 자신을 첼시는 너무도 칭찬해주고 싶었다.
‘앞으로 저 줄은 절대 놓지 말아야지!’
안 그래도 괴물 같던 인간이 더한 괴물로 변해 돌아왔다. 저런 광경을 보고도 다른 생각을 할 수 있다면, 그건 그것대로 존경스러운 인간일 것이다.
문득 피나와 눈이 마주쳤다. 첼시가 은근슬쩍 엄지를 치켜세우자 그녀도 똑같이 엄지를 내밀었다. 평소 머리 좋은 척하는 재수 없는 녀석이라 생각했지만 지금만큼은 친근하기 그지없었다.
끼이이이이이이!
언데드 드래곤이 포효를 내지른다. 녀석이 지크를 향해 무식하게 달려들었다. 브레스가 통하지 않으니 육중한 몸으로 찍어누르려는 모양이었다.
콰앙!
땅바닥에 커다란 발자국이 생겼다. 하지만 지크는 이미 옆으로 피한 상태였다. 드래곤은 계속해서 지크를 향해 발을 뻗었다.
쾅! 쾅! 쾅! 쾅!
“죽어! 죽어! 죽어! 죽어어어어!”
드래곤이 발을 구를 때마다 피로스가 내뱉는 저주가 겹친다. 하지만 드래곤의 난폭함도 피로스의 분노도 지크를 상처 입힐 수는 없었다.
“좀 가만히 있어 봐!”
쾅!
지크가 마력을 휘감은 주먹을 드래곤의 배에 휘둘렀다. 드래곤이 주춤주춤 물러섰다. 하지만 그뿐, 드래곤의 비늘에 상처는 없었다.
“하, 하하하!”
피로스에게 희망이 생겼다.
‘저 녀석의 공격도 이 언데드 드래곤에게 통하진…!’
그러나 지크가 한 손을 드래곤에게 향한 채 묘한 움직임을 보이는 걸 보고 생각을 멈췄다. 마치 드래곤의 각 부분을 재단하는 것 같은 움직임. 지금껏 지크에게 완전히 놀아난 만큼 피로스는 당연히 위기감이 들었다.
“좋아.”
지크가 고개를 주억이며 손을 내렸다. 대체 또 무슨 꿍꿍이일까.
‘생각하지 마!’
지크의 공격을 튕겨낸 언데드 드래곤의 비늘을 믿고 다시 한번 육탄 돌격을 시도했다. 그에 맞서 드래곤을 향해 지크가 윈두르를 휘둘렀다.
서걱!
불길한 절삭음. 충격이 없어서 더 섬뜩하다. 피로스는 급히 소리가 들린 곳을 쳐다봤다.
쿠웅!
드래곤의 오른팔이 큰 소리를 내며 지면에 떨어졌다. 팔이 달려 있던 부위는 텅 비어 있다. 그저 어깻죽지만이 의미 없는 움직임을 보이고 있을 뿐이었다.
피로스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그러나 지크의 공격은 그의 사정을 전혀 봐주지 않았다.
온갖 공격이 드래곤을 강타하기 시작한다. 드래곤의 비늘이 지크의 공격에 어느 정도 저항을 할 수 있다 믿은 피로스의 생각과는 달리 지크의 공격은 너무도 쉽게 드래곤을 꿰뚫었다.
드래곤이 하나 남은 팔을 허우적댔지만 그 팔마저 순식간에 너덜너덜해졌을 뿐, 별다른 효과는 없었다.
“으, 으아아아아아!”
끼에에에에에에!
피로스도 언데드 드래곤도 괴성을 질러댔다. 드래곤이 마구잡이로 몸부림친다.
“야! 움직이지 마!”
지크가 소리쳤다.
“남의 부위까지 훼손된단 말이야!”
‘남의, 뭐…?’
무슨 말일까. 하지만 지크가 마음에 들지 않아 하는 무언가가 있는 건 분명했다. 혹시 녀석의 약점과 관련된 것일까. 피로스는 머리를 굴렸다.
그러나 지크의 사고방식은 피로스의 것을 아득히 초월했다.
“지크 님! 굳이 그런 건 생각 안 하셔도 됩니다!”
한스는 무언가를 알고 있는 모양인지 지크에게 소리쳤다. 그러나 지크의 고집을 꺾을 순 없었다.
“그럼 안 되지! 그래도 스승으로서 제자의 걸 훼손할 순 없잖아!”
지크가 윈두르로 드래곤, 정확히는 드래곤의 오른쪽 다리를 가리켰다.
“네게 배정된 부위는 오른쪽 다리였지? 걱정 마라! 네 것도 다른 사람들 것도 원상태로 돌려받을 수 있게 해줄 테니까!”
그제야 피로스는 지크가 무슨 말을 하는지 알 수 있었다.
경악한 눈초리로 언데드 드래곤을 뜯어본다. 지크의 공격에 드래곤의 몸체 여기저기에는 흉물스러운 상처가 나 있었다.
하지만 상처들이 나 있는 곳은 상체 부위뿐, 다른 부위엔 그 흔한 긁힌 상처 하나 없다.
그리고 지크가 드래곤 슬레이어로서 배정받은 부위 또한 드래곤의 상체였다.
그걸 깨달은 피로스는 절망했다.
즉, 지크는 다른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소유권을 가진 부위는 내버려 두고 자기가 소유한 부위만 공격하고 있단 뜻이었다.
‘언데드 드래곤을 상대로 그런 걸 할 수 있다고?’
행동에서 느껴지는 절대적인 여유.
‘안 돼!’
그가 어떤 음모를 짜고 어떤 존재를 데려오든 간에, 그는 지크를 이길 수 없다. 그 사실이 절절하게 느껴졌다.
‘처음부터 잘못됐었어!’
적의 전력을 완전히 오판했다. 승리는커녕 목숨을 부지할 수 있을지도 의심스러운 상황.
‘도망, 도망쳐야 해!’
그의 의지를 받아들인 언데드 드래곤이 날개를 활짝 폈다. 날개를 세차게 펄럭이자 드래곤의 몸이 둥실 떠올랐다.
“어, 어?”
“도망간다! 저놈이 도망간다!”
지크가 없으면 자신과 제대로 눈도 마주치지 못할 무지렁이들이 제멋대로 입을 놀린다. 하지만 지금은 그걸 단죄할 시간이 없다.
그는 시선을 하늘로 향했다.
따사로운 햇살과 푸른 하늘, 새하얀 뭉게구름.
사람들의 심신을 절로 안정시켜주는 모습이지만, 밸리드 신도인 그는 하늘을 그다지 쳐다본 적이 없다. 그의 신앙은 언제나 대지를 흐르는 물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 그는 필사적으로 하늘을 바라봤다. 조금이라도 더 빨리 하늘에 가까워지기를 기원했다. 지면에 존재하는 괴물의 손아귀에서 멀어질 수 있도록.
서걱!
하지만 다시 한번 귀를 울리는 불길한 절삭음이 그의 소망을 참혹하게 도려냈다.
‘안 돼!’
언데드 드래곤의 상승이 멈췄다. 몸이 기우뚱거린다. 흔들리는 드래곤의 거체를 부여잡고 피로스는 원인을 확인했다.
드래곤의 날개 한 짝이 보이지 않는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그제야 하염없이 추락 중인 날개가 보였다.
분명 날개도 지크에게 배정된 부분이었을 것이다. 아무래도 좋은 생각이 피로스의 머리에 떠올랐다.
아무리 강화되었다고 해도 날개가 없다면 언데드 드래곤도 날지 못한다.
드래곤의 몸체도 날개를 따라 아래로 하강하기 시작했다. 그 목적지는 끝을 알 수 없는 괴물이 기다리는 지면이다.
피로스는 드래곤을 포기했다. 혼자서라도 날아올라 도시를 벗어나려 했다.
쿠웅!
“커허억!”
막대한 압박감이 몸을 짓눌렀다. 마치 거인의 손에 이리저리 희롱당하는 벌레가 된 기분이다. 무형의 압력은 그대로 그를 원래 있던 드래곤의 머리에 처박았다. 단단한 비늘과 강력한 힘이 위아래를 그를 찍어 눌렀다.
점점 지면이 다가온다.
펑! 펑!
아래에서 날아 온 마력의 충격파에 드래곤의 거체가 마치 가랑잎처럼 팔랑거렸다. 대미지는 없다. 그러나 지크가 어째서 이런 짓을 하는지 깨달은 피로스는 허탈할 뿐이었다.
드래곤이 군중 속으로 떨어지지 않도록 조절하는 것이다.
가까워지는 대지에서 눈을 떼고 피로스는 하늘을 바라봤다.
새파란 하늘이 너무 멀었다.
콰아아앙!
“커헉!”
드래곤이 지면과 충돌하자 그 충격이 고스란히 피로스에게로 전달됐다. 육체를 단련하는 성기사들과는 달리 신관인 그의 몸은 일반인과 그리 다르지 않다.
전신에 통증이 느껴졌다.
피부, 근육, 내장, 뼈, 모든 것이 극도의 고통을 호소했다. 어디가 어떻게 아픈지조차 알 수 없었다. 그냥 아팠다.
몸을 내리누르는 압력이 사라졌다. 그의 몸이 드래곤의 얼굴에서 굴러떨어졌다.
“크악!”
안 그래도 부상당한 몸에 또 다른 충격이 가해지니 정말로 영혼이 튀어나올 것만 같은 고통이 느껴졌다. 그러나 비명조차 만족스럽게 지를 수 없었다. 짧은 비명을 터뜨린 것뿐인데도 온몸이 삐거덕거렸다.
뚜벅! 뚜벅!
발걸음 소리가 들려 온다. 그게 누구의 발소리인지는 모를 수가 없었다.
피로스는 벌벌 떨었다. 그게 고통 때문인지, 아니면 공포 때문인지는 당사자인 피로스 또한 알지 못했다.
한 가지 확실한 것은, 발소리의 주인을 직접 확인하는 것이 무척이나 무섭다는 것이었다.
발소리가 멎었다. 그림자가 그의 위로 드리워졌다.
더 이상 모른 체할 수 없다. 피로스는 고개를 들어 올렸다.
푸른 하늘을 배경으로 그가 보였다.
지크. 드래곤 슬레이어와 밸리드 토벌자의 대표. 그리고 자신을 개미 새끼처럼 짓밟은 자.
“쿨럭!”
피로스가 목구멍 너머에서 역류한 피를 토해냈다. 지크는 혀를 끌끌 찼다.
“주제도 모르고 제 잘난 듯 날뛰는 놈들의 최후는 보통 너 같은 법이지. 알량한 음모 하나로 세상을 자기 멋대로 휘두를 수 있다고 여기는 멍청한 놈들.”
심장에 꽂히는 칼 같은 날카로운 조롱. 하지만 피로스는 심적으로도 육체적으로도 그에 답변할 여력이 없었다.
그리고 지크도 딱히 답변을 원하지 않았다.
“그래도 조금 전까지는 좋았잖아? 언데드라지만 드래곤도 조종해 보고. 카르위먼의 명성을 깎아내리면서 잘만 풀리면 교황이나 성녀, 추기경들도 유라스와 함께 날려버릴 수 있다고 생각했을 테니.”
피로스는 오늘을 그의 평생 가장 즐거운 날이라고 생각했던 걸 떠올렸다.
터무니없는 착각이었다.
오늘은 그의 인생 최악의 날이었다.
지크는 윈두르를 들어 올렸다. 나뭇가지처럼 생긴 기괴한 검이 자신을 향하는 걸, 피로스는 무력하게 지켜봐야 했다.
“잠깐의 희망은 달콤했어?”
그 조롱 어린 말이, 피로스가 살아서 들은 마지막 말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