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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626화 (626/628)

외전 25화

그건 피로스가 한 협박과 같았다. 그저 아까와 입장이 뒤바뀌어 있을 뿐.

상황만 보면 우습기 짝이 없는 협박이다.

밸리드인들은 시민들의 곁에 바짝 붙어 칼을 들이대고 있었지만, 지크와 밸리드인들의 거리는 꽤 멀다. 지크가 밸리드인을 죽이는 것보다 밸리드인들이 시민을 죽이는 게 훨씬 더 빠르다.

하지만 방금 전의 상황을 보고 함부로 움직이는 밸리드인들은 없었다.

그들이 방금 쓰러진 동료가 있는 쪽을 힐끔 쳐다본다. 동료는 여전히 미동도 없었다. 높은 신체 능력을 가진 이들은 그의 숨소리가 더 이상 들리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죽었다.

놀랄 일은 아니다. 지금 여기서 무기를 잡고 있는 사람들 전부가 죽음이란 개념과 밀접한 곳에서 살아왔으니, 그게 동료든 적이든 제삼자든 죽음이란 건 무척이나 익숙하다.

문제는 대체 어떻게 죽었느냐는 것이다.

아무런 낌새도 없었다.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저 피로스의 명령을 받고 검을 움직이려다 쓰러져 죽었다.

그러나 몇몇, 이곳에서도 정도 이상의 실력을 가지고 있는 이들은 느낄 수 있었다. 찰나라고 칭할 수밖에 없는 짧은 순간, 거대한 마력이 움직였다는 것을.

그리고 그 마력이 시작된 곳은 바로 지크가 있는 곳이었다.

어느새 뽑아 들었는지 지크는 윈두르를 어깨에 걸치고 있었다. 그의, 지금 상황과 전혀 어울리지 않은 권태로운 눈빛이 좌중을 훑는다.

“한스.”

“네!”

“시민들을 계속 피난….”

지크가 밸리드인들과 언데드 몬스터를 한 번씩 본 후 언데드 드래곤과 피로스까지 싹 훑었다. 그리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별로 필요는 없겠지만, 집에 가고 싶은 사람들은 보내.”

“알겠습니다!”

질문도 의문도 없다. 한스는 바로 지크의 명령을 따라 주변의 아군들에게 협력을 요청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흔쾌히 움직이는 건 스녹을 포함해 무척이나 소수뿐. 다른 이들은 눈만 굴려댔다. 아직 군중 속에 있는 밸리드인들이 신경 쓰였고 무엇보다 지금 돌아가는 상황을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그건 피로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나 한 가지. 기류가 자신에게 안 좋은 쪽으로 바뀌었다는 건 확실했다.

분위기를 바꿔야 했다. 동시에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도 확인해야 했다.

“내가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피로스는 부하 셋에게 동시에 명령을 내렸다. 그들은 방금 전 죽어 나자빠진 동료의 모습에도 일절 망설임 없이 주변 시민들을 죽이려 들었다.

덜컥!

그러나 이번에도 똑같은 일이 일어났다. 아무런 징후도 낌새도 없이 그들은 땅바닥에 나뒹굴었다.

죽었다. 아무런 외상도 없이. 눈에 보이지 않는 사신이 내려와 목숨을 앗아간 것 같다.

“뭐…어…?”

피로스의 입에서 괴상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이해를 할 수 없는 상황에 일순 머리가 하얗게 물들었다.

그의 귀로 지크의 목소리가 들렸다.

“내가 움직이는 밸리드 새끼들은 죽인다고 했지?”

그것이 지금 이곳을 지배하는 유일한 법도라는 듯한 어조다.

눈치를 보던 시민들 중, 배짱 있는 사람들이 먼저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당연히 밸리드인들은 그걸 막으려 했다.

“움직이지…!”

덜컥!

칼을 휘두르며 위협을 가하던 밸리드인이 똑같이 움직임을 멈췄다.

퍽!

고개를 바닥에 처박고 움직임을 멈춘다. 벌써 세 번이나 똑같은 현상이 일어났다. 이제는 다른 시민들마저 슬금슬금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밸리드인들은 감히 움직일 수 없었다.

목에 검이 드리워진 시민들도 주춤주춤 물러섰다. 당장이라도 목 안 깊숙이 파고들 것 같던 섬뜩한 칼날.

하지만 그 칼날은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지 않은 채 그저 의미 없이 허공에 멈춰 있었다.

포기하지 못한 밸리드인들도 있었다. 그들은 시민들을 통제하려 들었다.

그러나 협박을 하려 했든 일단 칼질부터 하려 했든 그들의 운명은 먼저 쓰러진 동료들과 똑같았다. 그에 비해 시민들은 단 한 사람도 죽거나 다치지 않았다.

“네, 네가… 한 짓이냐…?”

피로스도 자신의 목소리가 무척이나 꼴사납다고 느꼈다. 하지만 지금 그딴 것에 신경을 쓸 겨를이 없었다.

“그럼 뭐겠냐?”

‘이 자식, 설마 준비해놓은 특별한 수작이 있던 건가!’

돌아가는 상황을 보면 그것밖에 없다.

피로스는 첼시와 피나를 희번덕거리는 눈으로 노려봤다.

“이 멍청한 것들! 뭐가 특별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거냐!”

어떤 수작인지는 모르겠지만 누가 봐도 상당히 공을 들인 수작이 분명하다. 지크 곁에서 상당한 기간을 머물면서 정보를 빼냈다더니.

그러나 대답은 그녀들에게서 나오지 않았다.

“멍청이는 너다. 도대체 왜 저 녀석들이 네 편을 들 거라고 생각하는 거냐?”

“뭐?”

그녀들을 배신자라고 생각한다면 절대 나올 수 없는 발언이 지크에게서 나왔다. 피로스는 다시 그녀들을 살폈다.

방금 전과 달리, 그녀들의 가슴은 쭉 펴져 있었고 눈빛엔 조소가 가득했다. 피로스는 바로 깨달을 수 있었다.

“이중 첩자.”

피로스는 급히 시선을 돌려 웨즈컬과 페이자디루를 쳐다봤다.

두 사람의 멍청한 표정이, 그들도 속았음을 증명했다. 피로스의 볼이 푸들푸들 떨렸다.

“깨닫는 게 느려. 서부 총지부의 책임자라는 새끼가 그 모양이니 밸리드가 그 모양 그 꼴인 게 아니냐. 아니, 애초에 밸리드 교황이라는 놈부터가 등신 같은 놈이었으니 네놈만의 탓으로 두기엔 좀 그러나? 그렇게 따지면 생선 대가리를 신으로 모시는 것부터가 지능에 문제가 있는 거니, 그냥 밸리드 놈들 전체의 문제라고 봐야겠군.”

지크의 말이 마지막에는 혼자서 하는 중얼거림으로 변했다. 하지만 목소리는 여전히 쩌렁쩌렁 울리는 것이, 피로스를 조롱하려는 의도인 것은 여전했다.

그리고 그의 의도는 완벽하게 통했다.

“저, 저 기회주의자 놈들이…!”

“왜 그렇게 화를 내? 네가 말했잖아. 기회주의자들은 쉽사리 믿는 게 아니라고. 네가 그렇게 말해놓고 이제 와 화를 내면 어떡해? 녀석들이 남을 잘 속이는 걸 알고도 속은 거라면, 그건 속은 놈이 병신인 거야. 아마 조금 전까지의 너도 열렬히 동의했을 텐데. 설마 속은 당사자가 되니까 이제 와 말을 바꾸려는 거야? 밸리드 놈들이 좁아터진 속을 가진 놈들인 건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건 너무 심하잖아?”

지크의 말은 계속 이어졌다.

“네 녀석 말대로 저 녀석들은 기회주의자가 맞아. 하지만 기회주의자도 기회주의자 나름이지. 예전 그렌 제너드에게 한 번 크게 당하고 저 녀석들도 나름 수준이 높아졌거든. 어느 쪽이 이길지, 어느 쪽에 줄을 대야 할지 판단하는 눈이 생겼단 말이야. 당연히 녀석들은 나를 선택했지. 압도적인 실력 차를 갖고 있다면, 보는 눈이 있는 기회주의자만큼 든든한 존재도 없어. 즉, 어느 쪽으로 생각하든 그냥 저 녀석들을 대책 없이 믿은 네놈이 등신이라는 거야.”

“이, 이…!”

“그리고 이제 와 하기엔 좀 어이없는 말일지도 모르지만, 저 녀석들은 널 속인 적이 없어.”

“어디까지 날 조롱하려고…!”

“아니, 이건 정말이야. 내가 저 녀석들에게 내린 명령은 이거였거든. 아무런 여과도 거치지 않고 너희들이 본 그대로를 너, 정확히 말해서 그라셰인과 브라우닝에게 알려주라고.”

“뭐?”

“네가 받은 정보는 확실한 정보였다는 거다.”

지크는 두 팔을 활짝 펼쳤다. 마치 자신은 아무것도 숨기는 것이 없다는 듯.

“나는 아무런 대책도 계획도 음모도 꾸미지 않았어. 네가 저 둘을 의심하지 않은 것도 당연하지. 저 녀석들이 내준 정보는 정확했고 돌아가는 정황도 둘의 정보를 뒷받침했으니까.”

“내 부하들이 죽는 걸 봤는데도 헛소리를…!”

“그러니까. 내가 녀석들을 죽이는 데 특별한 수작은 없었다고.”

지크는 여봐란듯이 윈두르를 들어 올렸다.

“그냥 검을 휘둘러서 마력을 날려 벤 것뿐이지.”

윈두르를 무성의하게 허공에 휘두른다. 밸리드인들을 공격한 방법을 재현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피로스는 받아들일 수 없었다. 아니, 피로스만이 아니었다. 여기 있는 대다수가, 적군 아군 상관없이 지금만큼은 공통적인 인식을 공유했다.

“웃기는 소리!”

피로스가 대표로 외쳤다.

“네 놈이 검을 휘두르는 장면 따위 보지 못했다!”

“내가 너무 빨리 휘둘렀으니까.”

“마력의 감지도 거의 느껴지지 않았어!”

“내가 마력의 조절을 기가 막히게 했으니까.”

“외상도 없는 저 녀석들이 뭐가 베였다는 거냐!”

“주변의 일반인들이 피를 보면 충격을 받을까 봐 내가 배려를 좀 했지.”

“그런 것들을 내가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고!”

“그치만, 네 실력은 내 실력에 비하면 하찮다 못해 밑바닥 수준인걸.”

지크는 너무도 얄밉고 천연덕스럽게 대꾸했다.

“뭐? 내 무력을 경시할 생각이 없어? 고작 드래곤 좀 부활시켰다고, 고작 몬스터 언데드 좀 끌고 왔다고, 고작 인질 좀 얻었다고 내 앞에 쫄래쫄래 기어 나온 것부터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날 경시하고 있었던 거다. 그깟 걸로 내게 조금이라도 우위를 잡을 수 있다고 생각하다니. 한심한 것도 정도가 있지.”

자존심이 살짝 상할 정도였다.

“내가 다른 대책을 세우지 않은 이유? 필요 없으니까.”

지크에게서 마력이 폭발적으로 발산됐다.

“네가 뭔 짓을 저지르건 내가 있는 한 통하지 않아. 이 도시 전체가 내 감지 범위 내에 있고, 이 도시 어디든 내 힘이 닿지 않는 곳은 없어.”

지크가 슬쩍 손을 휘저었다.

콰아아앙!

시민들의 피난길을 막고 있던 언데드 몬스터들이 산산이 부서져 내렸다. 녀석들의 충격적인 등장과 활약을 생각하면 너무도 허무한 최후였다.

“네놈의 같잖은 세력 따위 언제든 짓밟을 수 있고, 단 한 명의 희생자도 내지 않을 수 있지. 그럼 남은 건 바퀴벌레 같은 네놈들 세력이 모두 수면 위로 올라오길 기다리는 것뿐.”

그리고 무대는 갖춰졌다.

“필사적으로 저항해 봐, 피로스 블링턴. 그래도 마지막은 하고 싶은 것 다 하고 가야지. 네가 부활시킨 그 애완동물, 원 없이 사용해 보도록 해.”

“이, 이, 이 개자식이이이이!”

처음부터 끝까지 지크에게 놀아났다는 데에 대한 분노. 거기에 뚜렷하게 느껴지는 위기감까지.

피로스는 언데드 드래곤에게 명령을 내렸다.

쩌억!

드래곤이 지크를 향해 입을 벌렸다. 그 안에서 검은 불길이 이글거렸다.

“죽어어어어!”

퍼어어엉!

언데드 드래곤의 브레스가 쏘아졌다. 지크는 물론 뒤편에 있는 교황 일행과 유라스조차 한꺼번에 날려 버릴 수 있을 것 같은 막대한 힘.

그에 맞서, 지크가 윈두르를 고쳐 쥐었다.

“‘죽어’는 지랄.”

윈두르가 휘둘러졌다.

강맹한 브레스에 비하면 너무도 보잘것없어 보이는 움직임.

그러나 그걸로 충분했다.

콰드득!

부정형인 마력의 덩어리가 으깨지는 걸 보는 건, 경험 많은 기사나 마법사라고 해도 결코 보지 못한 광경이었다.

퍼엉!

모든 걸 쓸어버릴 것 같던 브레스가 흔적도 없이 사라졌다. 남은 건 그 여파로 생겨나 주변을 휩쓴 조금 강한 바람뿐.

피로스가 입을 뻐끔거린다. 제대로 목소리조차 나오지 않았다. 격하게 흔들리는 눈동자가 그의 심정을 대변할 뿐이었다.

“…어마어마하군.”

윌위스의 어조가 묘하게 현실감이 없었다.

예전 그렌 제너드와의 싸움을 보고 지크가 얼마나 괴물 같은 힘을 가지고 있는지는 알고 있었다. 알고 있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눈앞의 광경은, 아무래도 자신의 생각이 조금 아니, 좀 많이 물렀다는 걸 깨닫게 했다.

“자네는 이미 알고 있었던 모양이야.”

다른 이들과는 달리 처음부터 묘하게 침착하다고 여겼던 라일라다. 지금 생각해보면 그녀는 이미 일이 어떻게 진행될지 알고 있었다.

그녀가 윌위스를 보고 웃었다.

“그리 어렵게 생각하실 필요 없어요. 그냥 지크의 이명을 생각해 보세요.”

“그렇군. 지금 이걸 보고 누가 그 이명에 토를 달겠어.”

지크의 이명은 힘의 용사.

‘회귀 전의 지크 모어가 딱 저런 식이었지.’

그리고 회귀 전의 이명은 힘의 마왕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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