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4화
지크가 높게 평가할 만큼의 독설이다. 피로스의 분노를 자아내기엔 충분했다.
“지금 눈앞의 상황이 보이지 않는 거냐? 이 꼴이 됐는데도 그 혓바닥은 잘 돌아가는구나! 카르나는 혓바닥의 신이었더냐!”
“아주 잘 보인다. 네놈의 신은 이제 혓바닥조차 놀릴 수 없을 텐데? 애초에 생선 대가리가 말이나 할 수 있더냐. 물속에서 아가미나 뻐끔거리다가 미끼에 속아 낚싯바늘에 입술이나 꿰뚫리겠지. 멍청하게 위장까지 삼키든가.”
교황의 화려한 언변이 피로스를 두들긴다.
“솔직히 드래곤의 사체를 언데드로 만든 노림수는 꽤 놀랐지만, 그렇다고 그게 네 승리를 확정해 준다고 생각하느냐! 여기엔 그 드래곤을 쓰러뜨린 자들이 모두 모였다! 여기 지크 님부터!”
교황이 마치 지금의 소란과는 동떨어진 것처럼 자리에 앉아 있는 지크를 가리켰다.
지크를 보는 순간, 피로스의 눈이 차게 식었다.
“그래, 지크.”
“응? 내게 할 말이라도 있나 보지?”
마치 인심 써서 들어준다는 듯 지크가 턱을 까딱였다. 건방진 태도에 피로스의 기분이 팍 나빠졌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그는 비릿하게 웃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의 대표. 그리고 밸리드 토벌자라는 빌어먹을 이명을 가지고 있는 개자식.”
“거 생선 대가리가 싸지른 똥 같은 놈의 욕을 들어먹고 있자니 기분이 묘하네.”
조사대로 입 하나는 걸걸한 놈이다. 하지만 피로스는 들어찬 승리감에 개의치 않았다.
“네놈의 눈치와 머리가 그토록 뛰어나다는 사실을 듣고 상당히 경계하며 움직였다만, 아무래도 괜한 걱정이었던 것 같군. 너는 내 움직임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그래? 축하해. 몇백 번을 다시 죽어도 자랑할 만한 위업을 달성했네. 정신이 남아 있는 한 계속 자랑하도록 해. 내가 허락할 테니.”
지크가 가볍게 박수를 쳤다. 피로스는 다른 이들과는 달리 여전히 여유로운 지크의 태도가 거슬렸다. 경쟁이라도 하듯 피로스는 더욱 여유를 부리며 말했다.
“허세가 안쓰럽군. 네놈이 상대가 유리한 상황에서 준비해둔 협잡질로 판을 뒤집는 걸 즐겨 쓴다는 건 이미 알고 있다. 하지만 지금 네가 따로 준비해둔 협잡질은 없지.”
“네 말이 맞아. 이번만큼은 나도 따로 준비해둔 건 없어.”
지크가 빈손을 들어 보이며 흔들어댔다.
“크흐흐! 평화에 찌들어 감이 떨어진 게 사실이었나. 그 대단한 드래곤 슬레이어의 대표 지크가 단 1년 만에 망가지다니! 평화란 참으로 무서운 거야!”
다른 인간들이 들으라는 듯 피로스가 쩌렁쩌렁 목소리를 키웠다.
그게 진실이든 아니든 피로스에겐 상관없었다.
감히 밸리드 토벌자의 대표라는 놈의 명성을 그대로 둘 수는 없다. 기회가 있을 때 깎아내려야 했다. 가능한 한 아주 철저하게.
사람들의 시선이 지크를 스쳤다. 불신의 감정이 깃든 것이, 적어도 당장은 피로스의 의도가 맞아 떨어진 것 같았다.
하지만 여전히 지크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고 다시금 미약한 기대감을 품는 자도 있었다. 뭔가 믿는 구석이 있는 것 같이 보인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도 여유를 가장하는가. 그것만큼은 대단하군. 하지만 아무 의미 없는 일이다. 너 같은 놈들의 생각쯤이야 간단해. 뒷배가 있는 것처럼 굴며 내가 빈틈을 보이길 기대하고 있겠지. 물론 난 적어도 네 놈의 무력을 경시할 생각은 없다.”
딱!
피로스가 손가락을 튕기자 계속해서 군중들에게로 돌격하려던 언데드 몬스터들이 공격을 멈췄다. 그에 따라 언데드 몬스터들과 전투를 벌이던 병력도 일단 전열을 수습했다.
그들의 뛰어난 실력과 많은 신관들 덕분에 사망자는커녕 부상자도 없었다.
누가 봐도 카르위먼 쪽이 우세한 상황.
그러나 피로스의 자신감은 사라지지 않았다.
“네놈들이 지금 제대로 우리를 공격하지 못하는 이유는 하나뿐이지. 저 밀집된 군중.”
피로스가 사람들을 가리켰다. 사람들이 움찔했다.
“이상하지 않더냐? 나는 밸리드 서부 총지부의 책임자로서 많은 신도들을 거느리던 몸이다. 한데, 아무리 우리 밸리드가 조금 기울었다고 해도 나 혼자 달랑 유라스로 쳐들어 왔을까?”
“…설마!”
루벨라가 흠칫 놀라 군중 쪽을 쳐다봤다.
딱!
피로스가 다시 한번 손가락을 튕겼다.
군중 속에서 움직임이 일었다.
스르릉!
섬뜩한 칼 뽑히는 소리가 여기저기서 울렸다. 하늘에서 내리는 태양빛이 무정한 검을 찬란하게 비춘다.
“꺄아아악!”
“뭐, 뭐, 뭐야!”
“악!”
갑자기 목에 드리워진 검에 사람들이 비명을 지른다. 검을 뽑아 든 자들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화들짝 놀라 거리를 두려 했다.
“닥쳐라, 버러지들아!”
피로스가 일갈하자 정체를 드러낸 밸리드인들이 손을 위쪽으로 뻗었다.
콰아앙!
누가 봐도 인체에 맞으면 끔찍한 일이 일어날 맹렬하고도 불순한 기운이 하늘을 향해서 터졌다. 곳곳에서 일어난 그 광경은 도망치려던 사람들의 발을 대지에 꽉 붙들어 맸다.
“조금이라도 움직이면 그들이 네놈들의 육신을 산산이 부술 것이다!”
피로스의 엄포에 사람들은 모두 얼어붙은 듯 몸을 멈췄다. 간간이 흐느끼는 소리가 들릴 뿐, 사람들은 숨조차 쉽게 쉬지 못했다.
그 모습을 만족스럽게 훑던 피로스가 다시 교황에게 시선을 돌렸다. 교황의 얼굴은 아까와는 비교도 안 될 정도로 굳어 있었다.
“보다시피 군중 안에는 우리 성기사들을 섞어 놓았다. 저런 아무런 힘도 없는 무지렁이들의 육체를 찢어버리는 데 사용하기에는 너무도 고귀한 인물들이지만, 어쩌겠나, 써먹을 수 있는 게 없으니 아쉬운 대로 우리 고귀한 형제들의 협력을 받을 수밖에.”
“원하는 게 뭐냐.”
“드디어 내가 원하는 표정이 되었구나, 카르위먼의 교황이여.”
피로스는 크게 웃었다. 밸리드 신자로서 가장 증오스럽고 경멸하는 자가 아무것도 하지 못하고 자신의 처분만을 기다리고 있다.
피로스는 맹세코 그의 평생 가장 즐거운 날은 오늘이라고 확신했다.
“그다지 대단한 건 아니다. 그저 너를 포함한 카르위먼의 괴멸이면 충분해.”
“그걸 우리가 용납하리라 생각하나!”
한 추기경이 목에 핏대를 세웠다. 그러나 피로스는 손가락 하나를 흔들며 혀를 찼다.
“용납하지 못하겠지. 특히 교황의 목숨은 너희가 목숨을 바쳐서라도 지킬 터. 그 용기도 각오도 나는 의심하지 않는다. 하지만 이번에 바쳐야 할 건 잘난 너희 목숨만이 아니거든.”
피로스가 대놓고 뒤에 있는 군중을 쳐다봤다. 새하얗게 질린 채 벌벌 떨고 있는 이들의 모습이 장관이었다.
한스를 비롯한 드래곤 슬레이어도, 귀족들을 따라온 기사들도, 카르위먼의 성기사들과 신관들까지. 그 누구 하나 제대로 움직이지 못하고 있었다.
“우리의 정의롭고 정의로운 카르나의 개들. 이 상황에서도 전력만큼은 너희가 위지. 하지만 너희 같은 놈들은 절대로 저 무지렁이들의 목숨을 함부로 다루지 못해.”
정말로 어리석은 놈들이다. 백성들 따위 밸르께서 고귀한 밸리드인들이 부리라고 만들어낸 노예들이거늘. 저 멍청한 카르나의 개들은 그들을 지켜야 할 대상으로 보고 있었다.
물론 저들도 최후의 순간에는 선택을 할 것이다. 아무리 힘없는 사람들을 지킨다 뭐다 할지라도 제들 교황과 유라스보다 소중하지는 않을 터.
‘상관없다.’
그렇다면 말한 대로 무지렁이들을 학살하면 그만이었다.
카르위먼의 위선적인 가면이 벗겨지며 그들의 명성은 말 그대로 지면에 처박힐 터.
만약 위선적인 태도를 끝까지 끌고 간다면 오히려 좋았다. 선언대로 교황을 포함해 카르위먼을 괴멸시키면 그만이니까.
“누구든 반항을 한다면 저놈들의 목숨은 없다고 생각해라.”
쿠웅!
드래곤이 한 발 내디뎠다. 하지만 그 누구도 섣불리 움직이지 않았다.
쿠웅!
또다시 한 발. 드래곤의 커다란 보폭을 생각하면 몇 걸음 가지 않아 그것은 교황의 앞까지 도달할 터였다.
추기경들이 눈빛을 주고받는다. 여기서 피로스의 협박에 굴복해 고스란히 교황과 유라스를 내어줄 수는 없다.
누군가는 결단을 내려야 한다.
추기경들이 굳게 마음을 다지는 순간이었다.
누군가 앞으로 나섰다.
“…지크 님?”
루벨라가 천천히 드래곤 쪽으로 걸어가는 지크의 등을 쳐다봤다.
지금까지와 전혀 다르지 않은 태평함이 느껴진다.
지금껏 자신의 자리에 앉아 꿈쩍을 않던 그다. 정말로 대책 같은 것이 없는 것일까. 지크를 계속해서 믿어 온 루벨라도 살짝 의심이 들 정도였다.
그런 지크가 움직였다.
그것만으로도 희망을 품기에는 충분했다.
오직 드래곤만이 움직이던 장내에 나타난 또 다른 움직임은 당연히 사람들의 관심을 끌었다. 게다가 그 당사자가 지크임에야.
“…뭔가 대비책이 있으신 거겠죠?”
“지크 님이니까 당연하지.”
스녹과 한스는 벌써부터 긴장감을 풀었다. 그들 주변에 있는 사람들이 그들을 어이없게 바라봤지만 굳이 설명할 생각은 없었다.
이런 건 직접 경험을 해봐야 했다.
당연히 피로스도 지크를 눈치챘다.
“내가 움직이지 말라고 하지 않았나?”
“내가 그 말을 따라야 할 이유라도 있나?”
“인질들의 목숨이 어찌 돼도 좋단 말이냐?”
“할 테면 해 봐.”
사람들이 새된 비명을 질렀다. 지크를 향한 욕지거리도 튀어나왔다.
하지만 지크의 시선은 여전히 피로스에게만 머물렀다.
“벌써 인질들의 목숨을 포기한 거냐. 너를 찬양하던 자들이 울겠군.”
“남의 의도를 곡해하는 것도 정도껏 하라고. 내가 언제 인질들의 목숨을 포기한다고 했나?”
“또 되도 않은 허세인가. 누누이 말하지만 네놈이 특별한 준비를 하지 않았다는 건 알고 있다. 웨즈컬 그라셰인이 유라스의 끄나풀을 하나 만들었거든.”
피로스가 첼시를 쳐다봤다. 카르위먼 사람들과 같이 있던 첼시가 움찔했다. 그의 시선이 이번엔 마법사들과 같이 있는 피나에게로 옮겨 갔다. 피나는 무표정으로 그 시선을 받아냈다.
“첼시 윈드네와 어느 정도 친분이 있지? 피나 어쿠스도 말이야. 내 충고를 하건대, 저런 기회주의자들은 쉽사리 믿는 게 아니야. 너보다 오래 세상을 산 사람의 충고라고 생각하거라.”
험악한 시선이 일제히 첼시와 피나에게 쏠린다. 하지만 당장에 그녀들을 어떻게 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괜히 지금 움직였다가 피로스가 어떤 반응을 보일지 모르는 것이다.
다만 그녀들과 거리를 벌리려고 했다.
“내가 움직이지 말라고 했을 텐데?”
피로스가 차갑게 말했다. 첼시, 피나와 거리를 두려는 사람들의 움직임이 멎었다.
“크흐흐, 재수 없는 놈들이 내 말 한 마디에 놀아나는 꼴은 정말로 볼 맛이 나는군.”
음습하게 웃는 피로스. 하지만 그의 얼굴은 곧 불쾌감에 휩싸였다.
“한데, 네놈은 왜 계속 움직이지?”
“아까도 말했을 텐데? 내가 네 말을 따라야 할 이유가 있냐고.”
“…결국 쓴맛을 봐야 허세를 거두겠군.”
피로스가 부하 한 명을 바라보며 말했다.
“열댓 놈만 죽여.”
그 주변의 사람들이 비명을 질렀다. 급박해진 상황에 사람들이 긴장을 높이고 많은 이들이 지크를 향해 비난의 시선을 보냈다.
곧 끔찍한 비명과 함께 무고한 인간이 희생될 것이다.
그러나 무정한 칼날은 휘둘러지지 않았다.
덜컥!
차가운 눈으로 검을 휘두르려던 부하의 몸이 멈췄다. 그의 동공이 흐릿해지더니 마치 실이 끊어진 인형처럼 땅바닥에 처박혔다. 떨어진 검이 시끄럽게 울렸다.
예상처럼 비명이 울려 퍼진다. 하지만 그건 무고한 시민들이 희생되며 내는 소리가 아니었다. 예상치 못한 상황에 내질러진 당황하는 목소리였다.
만족스럽게 무지렁이의 죽음을 구경하려던 피로스의 눈이 부릅떠졌다.
그의 귀로 지크의 느릿한 목소리가 들렸다.
“밸리드 놈들 중에 앞으로 움직이는 새끼는 뒤진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