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3화
그건 순식간이었다. 드래곤의 커다란 덩치와 몸을 돌려야 한다는 조건을 생각해보면 꼬리 휘두르기란 건 빈틈이 많을 수밖에 없는 공격이다.
하지만 폭발적인 속력은 그 빈틈을 확연히 없애 버리며 막대한 힘까지 추가했다.
그 결과, 웨즈컬은 피하거나 막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어느새 눈앞까지 다가와 있는 드래곤의 꼬리를 멍하니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죽는다.’
머릿속이 새하얘졌다. 피해야 한다는 생각이 댕댕 머리를 울렸지만 몸이 움직이지 않는다.
그때, 웨즈컬은 어떤 그림자가 자신의 앞으로 뛰어드는 것을 느꼈다. 드리워진 드래곤의 그림자를 한 번에 날려버리는 섬광이 눈앞을 물들였다.
콰아아앙!
굉음에 귀가 먹먹하다. 지진이라도 난 듯 흔들리는 지면이 발바닥으로 느껴졌다. 피어난 흙먼지가 앞을 가리고 튄 파편이 몸을 두들긴다.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하나 확실한 것이 있었다.
‘사, 살았다!’
온몸에 힘이 쭉 풀렸다. 어느새 검까지 떨어뜨렸는지 손이 허전했다. 하지만 몸을 휘감는 안도감이 너무도 커서, 기사의 수치라고 할 수 있는 그런 행동에도 별 감정이 일지 않았다.
안도 뒤에 궁금증이 찾아왔다. 자신이 어떻게 살아날 수 있던 걸까.
후웅!
바람이 일어 흙먼지를 날린다. 자연적인 바람은 아니었다.
시야가 확보되자 웨즈컬은 자신의 앞에 서 있는 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드래곤에게 공격을 당하기 전 봤었던 그림자가 떠올랐다. 아마 방금 전의 바람도 저 사람이 일으킨 것이리라.
‘한스.’
못 알아볼 리 없다. 지크만큼은 아니지만 그도 충분히 드래곤 슬레이어 중 유명한 축에 속하는 사람이었으니까.
‘태양의 용사’라는 거창한 이명까지 붙어 있는, 웨즈컬이 그토록 원하는 명성을 손에 쥔 이.
그가 자신을 돌아본다.
“당장 병력을 물리세요!”
“뭐, 뭐…?”
“병력 물리라고!”
웨즈컬은 주변을 둘러봤다.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바로 옆을 강타한 거대한 드래곤의 꼬리. 아마도 한스가 튕겨낸 모양이었다.
꼬리가 내려쳐진 지면은 완전히 박살 나 있었다. 만약 저것에 맞았더라면. 절로 소름이 돋았다.
하지만 웨즈컬의 성격이 성격인지라 바로 또 다른 생각이 들었다.
질투.
자신의 실력이 결코 드래곤 슬레이어에게 밀리지 않는다고 생각했건만, 지금 꼴이 무엇인가.
고작해야 드래곤의 꼬리 휘두르기 한 번에 아무것도 못 하고 죽을 뻔했다. 게다가 그를 구해준 건 다름 아닌, 그가 그토록 원하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명성을 손에 넣은 자.
그의 비대한 오만함은 죽기 바로 직전까지 몰렸었음에도 전혀 줄어들지 않았다.
“누구 마음대로 병력을 물리라 마라냐! 명성 좀 있다고 지금 누구한테 명령을…!”
“눈깔이 있으면 당신 부하들이나 보고 말해!”
희롱. 그 광경을 그보다 잘 표현할 방법이 있을까. 미프틸 왕국의 기사들은 용감하게도 드래곤에 맞서 한 걸음도 물러나지 않았다.
그게 비극이었다.
마치 날파리 같다. 이를 악물고 행한 기사들의 공격은 드래곤에게 별 타격을 주지 못했다. 하지만 드래곤의 사소한 움직임 하나하나는 기사들에게 치명상을 입혔다.
후웅!
옆에 있던 꼬리가 들리더니 한 기사를 향해 다시금 빠르게 휘둘러졌다. 그는 웨즈컬처럼 운이 좋지 못했다. 유라스에 처박힌 기사의 모습이 사라진다. 아마 몸이 성하진 않을 것이다.
“고, 공자님!”
페이자디루가 웨즈컬의 옆으로 뛰어와 숨을 몰아쉬었다.
“기사단의 피해가 막심합니다! 이, 일단 뒤로 물러나 전열을 정비해야…!”
그 순간이었다.
“우와아아아악! 어, 언데드다!”
“꺄아아아악!”
사람들의 비명이 새로운 적의 출현을 알렸다.
한스와 웨즈컬, 페이자디루도 비명이 들린 곳을 쳐다봤다.
피난을 하고 있던 군중의 앞으로 언데드들이 보였다.
일반적인 언데드가 아니다. 거대한 덩치와 뾰족한 이빨이 인상적인 몬스터들. 그것들이 살점을 내놓고 뼈만 남은 채 움직이고 있었다.
언데드 몬스터. 아무래도 일반적인 인간들로 만든 언데드들보다 그 성능이 월등하다.
“언데드라니! 어디서 나타난 거지?”
“뻔하지! 밸리드 놈들이 마법 상자 안에 보관해 들여 놓은 거야!”
밸리드들이 자주 사용하는 수법이었다.
뒤에는 언데드 드래곤, 앞으로는 언데드 몬스터. 이 공포스러운 조합에, 그나마 침착하게 피난을 하고 있던 군중들은 당연히 공포에 잠겼다.
“침착하세요! 우리에겐 드래곤 슬레이들이 있습니다! 고작 저런 언데드들은 상대도 되지 않습니다!”
“지금처럼 침착하게 행동하면 충분히 피난할 수 있습니다! 저 괴물들은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처리해줄 겁니다!”
다행히 군중의 공포는 피난을 시키고 있던 이들의 필사적인 노력으로 인해 본격적인 혼란으로 치닫진 않았다. 드래곤 슬레이어들의 이름값도 상당한 기여를 했다.
그리고 그건 말로만 끝나지 않았다.
드래곤 슬레이어 몇을 포함한 상당수 병력이 언데드 몬스터 쪽으로 향했다. 이미 시민들을 인도하던 성기사 몇이 전투에 들어간 상태. 거기에 지원군이 가세하니 언데드 몬스터들과의 싸움에서 우세를 점했다.
시민들도 그 모습을 보고 안도했다. 군중의 혼란이 급속도로 가라앉았다.
‘다행이야.’
한스도 그 모습을 보며 일단 안도했다. 하지만 마음을 놓기에는 아직 일렀다.
“흡!”
콰아앙!
다시 한번 휘둘러진 드래곤의 꼬리를 튕겨낸다. 손이 욱신거렸다.
‘젠장! 진짜 생전의 힘을 거의 재현해낸 것 같은데….’
드래곤 한 마리뿐이라면 그리 위협스럽지 않다. 드래곤을 퇴치할 때 힘을 합했던 모두가 모여 있고 무엇보다 지크가 있는데 뭐가 그리 무섭겠는가.
문제는 여기가 도시라는 것이다. 게다가 근처엔 행사를 구경하러 온 군중이 잔뜩 있다.
카르위먼의 움직임도 소극적이다. 아마도 그와 같은 걱정 때문일 터.
‘하지만 이 정도라면 어떻게든….’
그러나 적이 한 준비는 그것이 끝이 아니었다.
음습한 주문을 외는 소리가 들린다. 소리가 들려오는 곳은 드래곤의 머리 위.
‘저건!’
어느새 드래곤의 머리 위로 한 명의 인영이 보였다. 생각보다 손이 먼저 움직인다. 에스텔레이드가 빛을 뿜었다.
콰아앙!
하지만 에스텔레이드의 빛은 언데드 드래곤이 치켜든 팔에 막혔다.
‘젠장!’
주문이 완성된다.
우우우웅!
끔찍한 밸르의 기운이 주변을 뒤덮었다. 밸르의 기운에 민감한 카르위먼의 성기사, 신관들은 있는 대로 인상을 찌푸렸다.
끼이이이이익!
언데드 드래곤의 포효가 다시 한번 울려 퍼졌다. 생전에 들었던, 모골을 송연하게 만드는 광폭한 포효가 아니다. 음습하고 기분 나쁘다. 언데드로 영락한 드래곤의 처지를 그대로 보여주는 것 같다.
“저건 무슨 주문이죠?”
“아마도 언데드를 강화하는 주문일 겁니다.”
옆에서 드래곤을 억제하는 데 한 팔 보태고 있던 성기사가 대답했다.
‘언데드 드래곤을 강화시킨 건가?’
아니, 언데드 드래곤뿐만이 아니다. 언데드 몬스터와의 싸움도 더 격렬해진 것이 느껴졌다. 아마 이 일대의 언데드들을 모두 강화시키는 것이 분명하다.
‘저 팔찌가 수상해.’
밸르의 기운이 드래곤 위에 나타난 자의 팔찌를 통해 강렬히 뿜어지고 있다. 주문의 힘을 증폭하거나 하는 아티팩트가 분명했다.
하지만 그럼에도 진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시민들의 안전만 잘 지킨다면…!’
“병력 빼라고!”
다시 한번 웨즈컬을 향해 윽박질렀다.
아직까지 미프틸 왕국의 기사들은 다른 이들과의 협력을 무시한 채 드래곤과 격전을 아니, 일방적인 학살을 당하고 있었다.
그 용기만은 높이 평가할 만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세는 분명 죽어 있었다. 누가 봐도 그들만으로는 승산이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다른 이들이 지원을 해준다면 또 모르지만, 드래곤 슬레이어들을 비롯한 대부분의 병력은 드래곤과 시민들을 떼어놓는 데 집중을 하고 있었다.
웨즈컬의 얼굴이 시뻘게졌다. 하지만 그도 눈앞의 광경은 확인이 가능했다.
“공자님….”
페이자디루마저 간절한 표정으로 그를 쳐다봤다. 웨즈컬은 이를 악물었다.
“…병력을 빼게.”
“네!”
페이자디루가 극렬히 고개를 끄덕이고 기사들에게 명령을 내리기 시작했다. 그들도 자신들의 행위가 자살 행위와 다르지 않음을 알고 있던 터라 명령이 떨어지기 무섭게 뒤로 물러났다.
“크흐흐흐흐흐!”
드래곤의 머리 위에 내려앉은 이, 피로스가 조소를 흘린다. 그가 웨즈컬을 내려다봤다. 하찮은 벌레를 내려다보는 것 같은 눈빛이었다.
“꼴이 말이 아니군, 웨즈컬 그라셰인. 내 친애하는 동료여.”
주변의 시선이 일순 웨즈컬에게 쏠렸다.
“왜, 생각대로 일이 풀리지 않았나? 그러니까 내 말했지 않나. 거사 일엔 어떻게든 경비 임무에서 빠지라고.”
“개소리 지껄이지 마라!”
웨즈컬은 바로 부인했다. 부인할 수밖에 없었다. 밸리드의 협력자로 낙인찍힌다면 그 미래는 파멸밖에 없으니까.
‘젠장! 젠장! 젠장!’
계획대로라면 이런 상황이 벌어질 리 없었다.
저놈이 등장할 새도 없이 드래곤을 쓰러뜨리고 영웅 대접을 받는다. 설혹 녀석이 나타난다고 해도 바로 죽여버리면 된다. 밸리드의 음모를 막은 그들에게 밸리드 협력 혐의가 씌워질 리 없다.
그러나 지금 상황은 그의 이상적인 계획과 거리가 멀었다.
‘어차피 밸리드의 말 따위 신용도는 없다! 내가 잡아떼면 끝이야!’
하지만 식은땀이 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그건 피로스의 말이 계속될수록 급증했다.
“네 생각이야 뻔했지. 부활한 드래곤을 잡는다면 네놈들도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성을 얻게 될 거라는 얄팍한 공명심. 정말로 주제 파악도 못 하는 놈이라고밖에 설명할 수 없더군.”
“헛소리하지 말라고 했다!”
“크흐흐! 제가 이용당하는지도 모르고 우리를 이용하겠다고 나대는 꼴이 정말로 재미있었다.”
“이, 이…!”
주변의 시선 때문에 속았다는 사실에 대한 분노를 표출할 수는 없다. 하지만 아무렇지도 않게 반응하기에는 웨즈컬의 자존심이 너무도 컸다.
결국 이를 갈며 씩씩대는 수밖에 없었다.
한스를 포함한 다른 이들은 피로스와 웨즈컬의 대화를 가만히 지켜봤다.
다른 걸 떠나 시민들이 조금 더 드래곤과 멀리 떨어질 때까지 시간을 끌수록 그들에게는 좋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번 시간은 그리 많지 않았다.
“그래도 네놈 덕에 이토록 수월히 드래곤을 언데드로 만든 것도 사실이지. 그 답례다. 유라스와 이 도시가 파괴되는 꼴을 똑똑히 지켜보도록. 네놈도 카르위먼에 대한 복수를 원했으니 말이야.”
웨즈컬이 밸리드를 속이기 위해 내세운 거짓된 명분을 언급하며 피로스는 그를 끝까지 조롱했다.
쿠웅!
드래곤이 몸을 돌린다. 드래곤의 등이 시민들을 지키던 한스와 다른 이들에게 그대로 노출됐다.
‘공격할까.’
그러나 조금만 더 시민들이 대피할 시간을 벌고 싶었다. 슬쩍 언데드 몬스터들이 있는 곳을 본다. 아직 그것들이 격파되기에는 시간이 더 필요해 보였다.
“어딜 가려는가, 카르위먼의 교황이여!”
연속적으로 급변하는 상황 때문에 아직 피난을 하지 못한 교황을 보며 피로스가 두 팔을 활짝 펴고 외쳤다.
“설마 이 증오스러운 적을 두고 도망치려는 건 아니겠지! 카르위먼의 최고 지도자라는 이가 말이야!”
“피로스 블링턴. 누가 바퀴벌레 같은 밸리드가 아니랄까 봐 협잡질도 딱 그렇게 하는군. 서부 총지부가 불탈 때도 그렇게 위세를 부렸다면 좋았을 텐데 말이야.”
피로스의 얼굴이 살짝 굳었다.
“아니면 네놈들의 대가리가 죽을 때라든가. 설마 축제에 난입하는 정도로 네놈들의 꼴사나운 몰락을 지워 없앨 수 있다고 생각하는 머저리는 아니겠지? 제발 그렇다고 말해다오. 그런 멍청한 놈에게 이 정도 습격을 당했다고 생각하면 부끄러워 나중에 카르나 님을 뵐 수도 없을 것 같단 말이다.”
주저 없이 쏟아지는 교황의 독설에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루벨라를 너무 타락시킨 게 아닐까 했던 걱정은 더 이상 필요 없겠어.’
자신이 아니었어도 저런 교황 밑에 있었다면 그녀의 성격은 빠르게 물들었을 것이다.
‘제너드 그놈은 저런 환경 속에서 루벨라의 성격을 어떻게 그렇게 유지시켰지?’
참 여러 모로 대단한 놈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