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2화
“저게 대체 무슨 일입니까!”
교황이 옆에 있는 추기경들에게 급히 물었다. 하지만 대답할 수 있는 사람은 없었다. 그들도 갑작스러운 이 상황에 경악을 거듭하고 있을 뿐이었다.
루벨라도 놀라긴 마찬가지였다. 하지만 지크와 함께 겪은 경험으로 인해 그녀는 빠른 속도로 평정심을 되찾은 뒤 사태를 분석했다.
주변에 밸르의 악취가 진동을 하고 있다. 그리고 그 악취가 나오는 곳은 바로 움직이기 시작한 드래곤. 그게 의미하는 바는 하나였다.
“빌어먹을 밸리드의 짓이에요! 저 놈들이 드래곤을 언데드로 만들었어요!”
“언데드라고?”
언데드란 존재는 카르위먼에게는 그리 위협적인 존재가 아니다. 카르위먼의 성력에 무척이나 약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카르위먼 사람들은 긴장했다. 적어도 드래곤의 사체를 재료로 만든 드래곤은 경험하지 못했다.
게다가 언데드도 그 제조 방법에 따라 카르위먼의 힘에 강력한 저항력을 갖춘 녀석도 존재한다. 드래곤의 사체를 재료로 사용했으면서 그저 그런 언데드를 만들진 않았을 것이다.
“대체 어떻게…. 아니, 일단 당장 저걸 막아야 합니다!”
밸리드에게 조종되고 있는 이상 저 언데드 드래곤이 돼먹잖은 짓을 할 건 자명한 이치. 교황은 서둘러 명령을 내리려 했다.
하지만 카르위먼인들에겐 그보다 더 중요한 일이 있었다.
“이, 일단 성하부터 모십시다!”
“성기사들은 당장 성하를 안전한 곳으로 모시시오!”
하지만 정작 교황은 추기경들의 행동이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사람들이! 일단 시민들부터 살려야지 무슨 놈의 내 안전이란 말이오!”
그러나 추기경들도 자신들의 뜻을 꺾지 않았다.
“죄송하지만 일단 성하의 안전이 최우선입니다! 저것의 대응은 저희가 하겠으니 성하는 무조건 안전한 곳으로 대피하십시오!”
카르위먼 최고 직위에 있는 그를 위험한 곳에 그대로 둔다는 것은 그 누구도 용납할 수 없는 일이었다.
성기사들이 움직였다. 강제로라도 교황을 안전한 곳에 데려가려는 의지가 물씬 풍겼다.
교황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내쉬었다.
당장 언데드 드래곤이 날뛴다면 일어날 도시와 시민의 피해 때문에 반박하긴 했지만, 자신의 목숨에 어떤 가치가 있는지 모를 정도로 어리석은 사람이 아니었던 것이다.
하지만 물러나기 전에 할 일은 해야 했다.
“당장 가용 가능한 모든 인원을 투입해 시민들부터 지켜요! 재산 피해 같은 건 일절 신경 쓰지 말…!”
그때, 언데드 드래곤을 쳐다보고 있던 한 추기경이 외쳤다.
“미프틸 왕국의 기사들이 움직입니다!”
사람들의 시선이 그들에게 움직였다. 그들의 눈에 기대가 솟아올랐다.
“오오, 저들이라면…!”
“미프틸 왕국도 분명 군사 강국이지!”
하지만 기대를 하는 사람만 있진 않았다. 아니, 분명하게 사람들의 반응은 두 부류로 갈렸다.
드래곤의 힘을 경험한 자와 그렇지 않은 자로.
“정면으로 달려들면 안 돼요!”
루벨라가 소리쳤지만 너무 늦었다.
후우우웅!
드래곤의 앞발이 휘둘러진다. 그 거대한 몸체에 비하면 빈약하게까지 보이는 것이 드래곤의 앞발이다.
그러나 드래곤의 머리를 노리고 힘껏 뛰어올랐던 미프틸 왕국 기사에게 그것은 그를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한 사신 그 자체였다.
콰앙!
뛰어오른 것보다 훨씬 더 빠른 속도로 기사가 바닥으로 떨어졌다. 단단한 돌바닥이 충격으로 깨졌다. 그리고 기사의 몸도 그 비슷하게 깨졌다.
이리저리 찌그러지고 찢겨 엉망진창이 된 갑옷 사이로 새빨간 피가 흘러 나왔다.
기대를 가지고 쳐다보던 사람들의 안색이 딱딱하게 굳었다. 왕국의 정예 기사가 고작 파리 잡듯 휘둘러진 팔에 즉사한 것이다.
“…안 된다니까.”
안타까운 루벨라의 목소리가 들렸다.
왕국의 기사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들은 또다시 용맹하게 드래곤에게 달려들었다. 그러나 드래곤의 거대한 움직임에 별다른 힘을 쓰지 못했다.
“저들을 도와야 합니다!”
한 추기경이 외쳤다. 누가 봐도 미프틸 왕국의 기사들은 도시와 시민의 안전을 위해 자신들의 목숨을 다 바치는 영웅의 풍모를 보이고 있었다. 그들을 돕자는 의견은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하지만 그에 부정하는 소리가 들렸다.
“가만두세요.”
“…지크 님?”
루벨라가 놀란 눈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다른 이들도 그제야 지크에게 생각이 미쳤다.
“오, 오오! 그러고 보니 여기엔 지크 님이 계셨죠!”
“다른 드래곤 슬레이어분들도 계십니다! 그분들이라면…!”
마치 그들의 말을 듣기라도 한 것처럼 한스를 위시한 다른 이들이 귀빈석에서 뛰어내렸다. 하지만 그들은 열성적으로 드래곤을 공략하는 것보다는 일단 시민들을 지키려는 움직임을 보였다.
그 모습을 보고 사람들의 희망이 더욱 강해졌다.
하지만 단 한 명. 루벨라는 지크가 한 말이 마음에 걸렸다.
“가만두라 하시는 게 어떤 의미죠?”
“말 그대롭니다. 언데드 드래곤을 만들기 위해 밸리드와 협력한 이들이 미프틸 왕국의 사람들, 정확히 말해 웨즈컬 그라셰인과 페이자디루 브라우닝일 겁니다.
지금 모습을 보니 아마 자기들도 드래곤을 한번 잡아 보겠다는 목표를 갖고 있었던 것 같은데 굳이 참견할 필요가 있겠습니까? 목숨을 걸고 꿈을 이루겠다는 새싹 꿈나무들을 굳이 방해할 필요는 없죠.”
주변 분위기가 얼어붙었다. 미프틸 왕국이 밸리드와 협력을 하고 있다. 그 충격적인 주장이 그들의 머리를 두드렸다. 다른 누구도 아닌 지크의 입에서 나온 말이라 그 신뢰성은 무척이나 높았다.
하지만 루벨라는 지크의 말 속에서 희망을 봤다. 대충 이 사태를 짐작하고 있었다는 어조지 않은가. 지크라면 당연히 대비책을 준비해뒀을 터.
“대책은 뭔가요?”
“무슨 대책 말입니까?”
“웨즈컬 그라셰인이 뭔가 꿍꿍이를 가지고 있다는 걸 알고 조사를 한 뒤 대책을 세우신 것 아닌가요?”
그런 낌새조차 눈치채지 못했는데. 역시 지크는 지크인 것일까.
그러나 루벨라는 뭔가 잘못되었다는 것을 알았다.
“그런 거 없습니다만?”
“…대책이 없다고요?”
“대책은 물론이고 조사 같은 걸 한 적도 없습니다. 그저 축제를 즐겼죠.”
어깨를 으쓱이는 지크의 모습에 루벨라는 할 말을 잃었다. 평화에 찌들어 감을 잃어버렸다. 지크에 대한 좋지 않은 평가가 다시 한번 떠올랐다.
* * *
처음 드래곤이 다리를 움직여 자신의 존재를 주변에 드러냈을 때 웨즈컬의 반응은 신속했다. 이미 머릿속으로 수십, 수백 번 돌려본 상황이니 새삼 당황할 것도 없었다. 그는 능력은 출중했던 것이다.
그는 먼저 군중 속에 있는 병력에게 외쳤다.
“시민들을 대피시켜라!”
반드시 필요한 희생이라면 주저 않는 그이지만 그렇다고 막을 수 있는 희생을 방치할 생각도 없었다.
시민의 목숨을 중요시 여겨서 그렇다기보다는 피해가 적어야 그의 명성이 더 찬란해질 거라는 생각 때문이었지만.
처음엔 드래곤이 움직이는 것 또한 행사의 일환이라 생각하고 좋아하던 군중도 조금씩 상황이 이상하게 돌아간다는 걸 눈치챘다. 그리고 그건 웨즈컬의 대피 명령으로 확실시됐다.
“뭐야! 대체 무슨 일이야!”
“이, 일단 도망가자고!”
안 그대로 밀집된 군중이 서로 살겠다고 한꺼번에 도망친다면 끔찍한 재앙으로 이어질 가능성이 높다. 서로가 서로를 밟고 밟히며 사상자가 속출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군중 속에 배치되어 있던 기사들과 성기사들은 모두 상당한 실력자들. 그들은 마력이 깃든 목소리와 초인적인 힘으로 군중의 혼란을 약화시키고 떠밀려 쓰러지는 걸 방지했다.
‘일단 사람들을 지키는 모습은 보였어!’
이제 드래곤을 쓰러뜨리면 된다.
“미프틸 왕국의 기사들이여! 시민의 안전을 위해 드래곤을 막아라!”
우오오오오오!
하나같이 크게 포효를 내지른 기사들이 드래곤을 향해 움직였다.
한 기사가 드래곤의 머리를 노리고 높이 뛰었다. 그 모습을 보며 웨즈컬은 투구 안으로 한가득 미소를 머금었다.
‘좋아! 드디어 나도 드래곤 슬레이어의 반열에…!’
그러나 그의 장밋빛 환상은 가장 먼저 돌진한 기사가 바닥으로 튕겨 나가며 금이 가기 시작했다.
그 기사는 나름 그라셰인 공작가에서도 수위에 드는 강력한 기사였다. 그런 기사가 고작 빈약하기 짝이 없는 드래곤의 앞발을 제대로 감당하지 못하고 즉사한 것이다.
물론 그것 때문에 기사들의 움직임이 멎었다거나 하진 않았다. 그들은 정예였다. 하나, 분명 분위기는 좋지 않았다.
“흐아아앗!”
“하압!”
기사들이 힘찬 기합을 내지르며 검을 들어 올린다. 강대한 마력이 검신을 타고 흘렀다. 주춤했던 자신감이 다시 타올랐다. 기사들은 다시 드래곤에게 돌격했다.
쿠웅!
“크아아악!”
그러나 드래곤의 단순한 걸음걸이에 기사 둘이 걷어차였다. 단단한 갑옷이 드래곤의 날카로운 발톱에 가볍게 찢긴다.
죽지는 않았지만 이리저리 뒤틀린 몸뚱이를 보면 누가 봐도 전투 불능 상태였다.
순식간에 정예 기사 셋이 당했다. 게다가 누가 봐도 현재 드래곤은 제대로 움직이고 있는 것도 아니다. 위기감이 팽배했다.
하지만 희생이 헛되진 않은 듯 몇몇 기사들은 드래곤의 발밑까지 파고들 수 있었다.
“하아아앗!”
“으랴아아앗!”
온 힘을 다해 드래곤에게 검을 휘두른다. 단단한 강철마저 잘라버릴 수 있는 강력한 공격. 그러나 결과는 허무했다.
탕! 탕!
거친 금속음과 함께 손에 커다란 반동이 느껴졌다.
“안 통해?”
약간의 흠집이 가 있을 뿐, 그들의 공격은 드래곤의 비늘을 뚫지 못했다.
그리고 바로 드래곤의 보복이 이어졌다.
후웅!
이번에도 간단한 발길질이다. 하지만 힘과 속도 그리고 내구력 강도만으로 그 단순한 움직임은 살벌한 공격으로 변질됐다.
“큭!”
“이익!”
그 단순한 발길질에 동료가 어떻게 당했는지 안 기사들을 필사적으로 몸을 뒤틀었다. 그래서 다행히 검을 세워 방어한 채 빗겨 맞을 수 있었다.
“크아악!”
“아아악!”
검이 부러지고 기사들이 튕겨 나간다. 하지만 노력이 보상받긴 했는지 그나마 이전 기사들보다는 덜 부상당할 수 있었다.
그것 또한 치명적이긴 마찬가지였지만.
“에잇! 겁먹지 마라! 위대한 미프틸 왕국의 기사로서 목숨을 걸고 공격해!”
신경질적으로 웨즈컬이 외쳤다.
“공자님!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페이자디루의 말에 웨즈컬은 귀빈석을 쳐다봤다. 페이자디루의 말처럼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드래곤을 공격하려는 걸까. 하지만 그들의 움직임을 보면 일단 시민들의 안전을 지키기 위해 움직이는 것 같았다.
순간 그는 갈등에 휩싸였다. 이대로 버티다 드래곤 슬레이어들의 협력을 받을까. 아니면 그들이 시민들의 안전에 중점을 둔 사이 조금 더 격렬하게 공격을 해야 할까.
첫 번째는 안정적이고 두 번째는 공적을 더 얻을 수 있다.
그는 힐끔 언데드 드래곤을 쳐다봤다.
‘아직도 정상은 아닌 것 같아.’
기사 몇몇을 말 그대로 곤죽을 냈지만 그 움직임은 단순했다. 얘기로 듣던 드래곤의 움직임이 아니다.
‘부활한 지 얼마 안 돼 모든 힘을 쓰지 못하는 걸 수도.’
웨즈컬은 결정했다. 애초에 이 모든 건 찬란한 명예를 위한 것이지 않던가.
“모두 공겨…!”
그 순간.
후우웅!
드래곤이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움직임으로 움직였다.
콰아앙!
거대한 꼬리가 웨즈컬을 향해 내려쳐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