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1화
사람들은 드래곤에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가고 싶어 했다.
드래곤의 덩치가 너무도 커, 오히려 조금 거리를 두는 편이 구경하기엔 더 좋았지만 사람이란 신기한 걸 보면 더 다가가고 가능하면 손으로 만져도 보고 싶은 생물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일정 거리 이상 드래곤에게 가까이 가지 못했다. 드래곤을 중심으로 접근을 금지하는 줄이 쳐져 있긴 했다. 그러나 넘어오지 말라는 표식에 불과할 뿐, 접근을 막는 어떤 힘을 갖고 있진 않았다.
시민들의 접근을 막는 것은 완전 무장을 한 채 줄 안에서 삼엄한 기세를 흩뿌리고 있는 미프틸 왕국의 기사들이었다.
약 40여 명 정도 되어 보이는 기사들이 철저하게 주변의 접근을 차단하고 있었다.
누가 봐도 위압적인 모습이었지만 사람들은 그들의 존재를 당연시했다.
사람들조차 그 정도는 돼야 드래곤의 경비가 된다고 생각한 것이다.
하지만 그조차 경비 인원의 전부가 아니었다.
전시대 주변 건물에도 많은 병력이 포진되어 있었고 구경하는 군중 속에도 평상복을 입은 기사들이 주변에 이상이 있는지를 감시했다.
이 모든 경비 인원을 지휘하고 있는 웨즈컬은 완전 무장을 한 채 드래곤의 정면에 서 있었다.
‘이게 드래곤.’
겉으로 티를 내고 있지는 않지만 그의 심정은 연신 경탄의 소리를 높이고 있는 군중들과 다름없었다.
라라에게서 강탈하다시피 구입한 드래곤의 일부를 보며 그 대단함을 간접적으로 체험하긴 했지만, 카르위먼이 완벽히 재현한 원래의 모습에 비하면 그건 어린애 장난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래봤자 죽어 나자빠진 시체다.
사람들은 거대하고 험상궂은 드래곤의 모습에 본능적으로 공포감을 안았지만 그렇다고 패닉에 빠져 도망치거나 하진 않았다.
시체가 어떻게 위협을 가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이 거대한 시체가 곧 생전의 폭력적인 모습을 그대로 드러낼 것이라는 걸 아는 웨즈컬은 그들과 생각이 다를 수밖에 없었다.
‘이길 수 있을까?’
압도적인 위압감의 드래곤을 보고 웨즈컬은 절로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곧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이상한 생각은 하지 마라, 웨즈컬 그라셰인. 당연히 이길 수 있지.’
인간이 범접하지 못한 위업이라면 모를까, 다른 이들도 해냈던 것을 자기가 못 할 리 없다.
‘게다가 설혹 우리만으로 감당하지 못해도 괜찮아.’
여기엔 눈앞의 드래곤을 살아 있을 때 때려잡은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전부 모여 있다. 만약 웨즈컬과 부하들이 위험에 처한다면 그들이 도우러 와줄 것이다.
게다가 이곳은 카르위먼의 본거지. 교황, 성녀, 추기경 등등 수준 높은 신관의 수가 넘쳐난다. 즉사하지만 않는다면 목숨을 잃을 걱정은 없다.
‘아무리 드래곤이 강하다고 해도 지원이 올 때까지는 버티겠지.’
그럼 그들도 드래곤 슬레이어의 칭호를 얻는 게 가능하다. 진짜 드래곤이 아닌 언데드 드래곤이라지만 드래곤은 드래곤이 아니던가.
‘위험 부담도 적고 얻을 이익은 많다.’
심장을 간질이던 공포심이 사그라든다. 아니, 억지로 내리 누른 것이다. 그리고 대신 채운 것은 앞으로 그에게 쏟아질 환호.
크나큰 영광이 눈앞에서 어른거린다.
하지만 이런 때야말로 더더욱 주의를 기울여야 한다. 웨즈컬은 다시 한번 계획을 하나하나 머릿속으로 되뇌었다.
‘빠뜨린 건 없어.’
자신이 할 수 있는 건 전부 했다. 그렇다면 카르위먼이나 다른 이가 자신의 계획을 눈치챈 낌새는 없을까.
‘그것도 없어.’
그의 협력자가 경고했던 지크가 떠올랐다.
웨즈컬도 지크를 경계해야 한다는 것에는 이의가 없었다. 그래서 그의 동태를 유심히 살폈다.
그러나 지크에게서 특별한 움직임은 보이지 않았다.
그는 어디까지나 동료들과 철저하게 축제를 즐기고 있을 뿐이었다.
그가 내밀히 만든 협력자 또한 같은 말을 했다.
‘내가 그만큼 완벽하게 움직임을 숨긴 건가. 아니면 그냥 녀석이 평화에 찌든 것뿐인가.’
솔직히 어느 쪽이든 상관없었다. 어쨌든 자신의 계획을 방해할 자들이 없다는 것이 중요할 뿐.
“브라우닝 공자.”
“네, 그라셰인 공자님.”
웨즈컬의 옆에 서 있던 페이자디루가 고개를 숙였다.
“다시 한번 기사들을 다잡으세요. 마지막에 실패가 있어선 안 됩니다.”
“알겠습니다.”
페이자디루가 다른 기사들에게 접근해 다시 한번 정신을 일깨운다.
그 모습을 한번 바라본 웨즈컬은 다시 드래곤에게로 시선을 돌렸다.
* * *
시간이 흐를수록 드래곤 앞의 인파는 점점 더 많아져 갔다. 드래곤이 전시되어 있는 곳은 유라스 바로 앞. 드래곤을 구경할 수도 있고 곧 있을 대대적인 행사가 예정된 곳이기도 했으니 군중이 모여드는 건 당연했다.
유라스 근처에 임시로 설치된 귀빈석에는 이미 여러 나라의 고위 인사들이 일찌감치 자리를 잡았다.
서로 이야기를 나누는 사람도 다수 있었지만 대부분의 사람들은 구름처럼 모인 군중들처럼 드래곤의 위용에 넋을 잃었다.
드래곤의 모습에 대해 상당히 많은 이야기를 듣긴 했지만 역시 한 번이라도 직접 본 것에 비할 수는 없는 것이다.
그렇게 참석자들이 점점 모이는 와중, 드디어 축제의 중심 인물이라 할 수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들과 밸리드 토벌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그들은 특별히 마련된 좌석에 안내되었다. 사람들이 환호를 보낸다. 멋쩍어하는 자, 손을 흔드는 자, 엷게 미소 짓는 자 등 반응은 제각각이었지만 자랑스러움을 느낀다는 것만큼은 한결같았다.
절정은 지크가 일행을 이끌고 등장했을 때였다.
드래곤 토벌과 밸리드 토벌 모두에서 커다란 공적을 세운 자. 드래곤 슬레이어의 대표.
지크의 명성은 이미 다른 이들보다 훨씬 위에 있었다.
지크는 느긋하게 자신에게 배정된 자리에 앉았다. 교황이 앉을 자리에서 가장 가까운 곳에 배치된 자리는 드래곤과 사람들의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었다.
그의 옆으로 라일라와 한스, 다른 일행들이 앉는다.
“제법 잘 복원했네.”
라일라도 복원된 드래곤이 꽤 감명 깊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너는 완벽한 드래곤의 모습은 처음 보나?”
“라일라로서는 처음이지.”
세르피나로서는 본 적이 있긴 하지만 그건 그녀 자신이 아니니 논외다.
“하긴, 넌 그때 하염없이 잠만 자고 있었으니.”
“잠을 자면서도 도움 줄 건 다 주고 있었잖아. 그렇게 게으름뱅이처럼 말을 하면 섭섭하지.”
“나는 그렇게 말한 적 없는데?”
“그렇게 말한다 이거지?”
엄청난 인파의 시선이 자신들을 꿰뚫는데도 지크와 라일라는 무척이나 태연히 수다를 떨어댔다.
뿌우우우우!
나팔 소리가 들렸다.
잡담을 하든 드래곤을 감상하든 각자의 방식으로 시간을 때우고 있던 사람들이 일제히 하던 행동을 멈췄다.
“시작한다.”
라일라가 숨죽여 말했다.
땡! 땡! 땡! 땡!
도시에 있는 종들이 일제히 울리기 시작한다. 사람들이 커다랗게 환호했다. 나팔이 우렁차게 울리고 북소리가 감정을 고조시킨다.
드래곤을 경비하던 미프틸 왕국의 기사들이 군중들을 서서히 밀어낸다. 일정 거리 이상 떨어뜨린 후 새로운 줄을 쳐 경계를 만들었다.
드래곤 앞에 텅 빈 공간이 생겼다. 나팔이 더욱 소리를 높이고 북소리의 간격이 점점 짧아진다.
뚝!
음악이 끊겼다. 흔들리던 종도 멈췄다. 군중의 웅성거림만이 들릴 때, 한 신관이 임시로 만든 높은 대 위로 올라가 성력을 실어 크게 소리를 쳤다.
“지금부터 밸리드 토벌 1주년 기념행사를 시작하도록 하겠습니다!”
지금까지와는 비교도 할 수 없는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만들어진 공간 안으로 한쪽에서 창칼을 높게 치켜든 성기사들이 입장하고 다른 한쪽에서는 지팡이를 들어 올린 신관들이 입장한다.
그들은 드래곤 앞에서 대열을 이루어 멈춰 섰다.
그리고 새로운 나팔 소리와 함께 카르위먼의 우두머리인 교황이 성녀를 대동하고 나타났다.
사람들이 목청이 터져라 교황과 성녀를 연호한다. 교황과 성녀는 인자한 웃음을 띠고는 사람들에게 손을 흔들며 천천히 자신의 자리로 향했다.
교황과 성녀가 착석하자 행사가 본격적으로 시작됐다.
루벨라는 행사용 미소를 얼굴에 장착한 채 시선을 광장에 뒀다. 하지만 그녀의 눈이 언뜻언뜻 경비를 서고 있는 미프틸 왕국의 병력으로 향했다.
특히 웨즈컬을 주의 깊게 살폈다.
‘뭔가 꿍꿍이를 꾸미고 있을 가능성이 있다고 했지.’
그녀도 이야기를 들었다.
카르위먼이 심혈을 기울여 주최하는 행사에 방해가 될지도 모르니 당연히 불안감이 든다. 정말로 어떤 꿍꿍이를 가지고 있는지, 그렇다면 그 꿍꿍이는 뭔지 알아볼까 생각도 했지만 아무래도 그의 신분이 신분인지라 섣불리 조사를 명령할 수 없었다.
게다가 또 다른 이유도 있었다.
‘괜찮겠지. 지크 님도 조용히 계셨으니까.’
만약 그 꿍꿍이가 위험한 것이라면 지크가 이미 해결을 위해 움직이고 있을 거라는 생각.
‘평화에 찌들어 감이 둔해졌다는 말도 있었지만, 설마.’
지크의 그런 모습은 상상조차 가지 않는다.
어쨌든 지크가 움직이지 않으니, 웨즈컬은 꿍꿍이가 없거나 있다 하더라도 극히 사소할 거라는 게 그녀의 생각이었다.
루벨라는 걱정을 머릿속에서 지우고 행사에 집중하기로 했다.
행사는 점점 클라이맥스로 향했다. 사람들은 손뼉 치며 웃고 환호하며 이 거대한 행사를 즐겼다. 그건 귀빈석에 앉은 이들도 마찬가지.
한스는 옆에 앉은 라라와 여러 대화를 나누면서 행사를 즐기고 있었다.
‘음?’
한스의 눈이 순간 드래곤에게 쏠렸다.
착각일까. 드래곤의 손가락이 살짝 움직인 것처럼 느껴졌다.
‘그럴 리가.’
이미 지크의 손에 목숨이 끊겼으며, 외견만 그럴듯하게 복원된 시체가 움직일 리 없다.
‘혹시 뭔가 외부의 힘이 작용했나?’
끔찍하리만치 엄청난 힘을 휘두르던 드래곤이라 할지라도 지금은 그저 시체에 불과하다. 거센 강풍이나 땅의 흔들림 같은 외부의 힘에 영향을 받은 것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런 낌새는 없었는데….’
그 순간.
스윽!
한스는 똑똑히 봤다. 드래곤의 손가락이 분명히 움직인 것을.
벌떡!
한스가 급히 일어섰다. 그의 생각이 미치지 않는 어떤 우연찮은 이유 때문에 일어난, 극히 사소한 현상일 수도 있다.
하지만 한스의 감은 저 움직임이 심상치 않다고 알리고 있었다.
“왜 그래요?”
라라는 눈치채지 못한 것 같다. 주변에 있는 다른 이들도 마찬가지. 갑자기 일어선 한스를 의문스럽게 쳐다본다.
한스는 자신이 본 광경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사태는 그보다 한발 앞서 일어났다.
스으으윽!
“오, 오오오!”
“와아아! 드래곤이 움직인다!”
“우와아아아아아!”
지금껏 미동도 없이 꼿꼿이 서 있기만 하던 드래곤의 다리가 들렸다. 사람들은 그것도 행사의 일부라 생각하고 즐거워했다.
그러나 정작 행사를 주최한 카르위먼의 사람들은 당황스러워했다.
“저런 계획도 있었습니까?”
“그, 글쎄요. 들은 적이 없는데.”
“아니, 무엇보다 시체를 저렇게 움직이는 기술이 우리에게 있었습니까? 저건 차라리 밸리드의 언데드 같지 않….”
“…….”
“…….”
말을 하던 이도 듣는 이도 주변인도 하나같이 입을 다물었다. 그들의 가슴속에 불길한 감정이 들어차기 시작했다.
“설마!”
그 순간.
끼에에에에에에에엑!
드래곤이 기괴한 목소리로 포효했다. 동시에 주변으로 자욱하게 퍼지는 밸르의 기운. 사람들의 안색이 새하얗게 변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