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0화
“저도 그렇게 생각해서 보고서까지 예쁘게 적어서 가지고 갔잖아요. 나중에 제가 보고서 한 장을 추가했죠? 거기에 방금 제가 말한 사실도 적어 놨어요. 하지만 그것들은 알려지지도 못하고 예쁜 잿더미가 됐죠.”
“…….”
“게다가 당신이 말했잖아요? 그에게 어떤 변화가 있었을지도 모른다고.”
“…그래도 그의 실력은 무시무시해. 너도 알잖아.”
“잘 알죠. 하지만 만약 그가 사라진다면, 저는 원래의 목표를 노릴 수 있을지도 몰라요.”
“성녀 자리 말이야?”
“네.”
“포기한 거 아니었어?”
“그랬었죠.”
지금은 아니란 소리다.
“설혹 성녀 자리가 아니더라도 미프틸 왕국이 제 배후 세력이 되어준다면 지금보다 훨씬 더 높은 자리에 올라갈 수도 있죠. 미프틸 왕국의 카르위먼 세력 전체를 관할하는 대주교를 거쳐 추기경까지 올라갈 수 있을지도 몰라요.”
“진정하고 차분히 생각해. 만약 잘못된다면 이번에야말로 넌 끝장날 거야.”
“그건 모르죠. 아무리 그라도 그라셰인 공자의 꿍꿍이가 무척 사소한 거라면 제 목을 날리진 않을 거예요.”
그녀가 알기로 지크는 절대 자비로운 사람은 아니지만 자신을 향한 사소한 공격에는 그렇게 극렬히 반응하진 않았다.
“게다가 제가 정보를 넘겼다는 걸 그가 끝까지 알지 못할 수도 있고요.”
“하지만 그 꿍꿍이가 엄청난 음모여서, 실패한 후 최우선적으로 그라셰인에게 협력한 널 죽이려 할 수도 있어.”
“피나는 괜찮나요? 지금은 마탑에서 꽤 안정적인 세력을 형성했다지만 전성기와 비교하면 확실히 떨어졌죠. 만약 미프틸 왕국의 제안을 받아들여, 그들이 자기네 왕국에 당신의 학파를 받아주고 밀어주겠다면 어떻게 하실 건가요?”
“…….”
첼시의 말은 분명 매력적이기 짝이 없었다. 만약 그렇게 된다면 그녀의 학파는 순식간에 세를 회복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섬기는 왕국이 바뀌긴 하지만 그 정도는 충분히 감당할 만하다.
“…정말로 도박이구나. 우리의 미래를 걸고 말야.”
“저나 당신이나 저번 도박은 무참히 실패했었죠. 최후의 최후에 어떻게든 판을 따내서 만회를 했지만 우리가 원하던 판돈에는 한참 미치지 못해요. 어때요, 피나. 고민을 좀 해볼까요?”
친근하게 자신의 이름까지 부르는 첼시를 보며, 피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 * *
축제를 나흘 앞두고 스틸월 백작가의 사람들이 유라스에 도착했다. 카르위먼은 그들을 다른 귀족들보다 한층 더 반겼다.
밸리드 토벌의 서막이자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플로드 백작을 중심으로 하는 연합군과의 전투를 벌인 이들이 스틸월 백작가다.
게다가 스틸월엔 드래곤의 사체를 가지고 있는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많아, 드래곤의 모습을 최대한 재현하려면 그들의 협력이 필수적이기도 하다.
이래저래 그들은 카르위먼이 중요시할 요소들을 많이 가지고 있었다.
바깥에서 시간을 때우다 들어온 지크는 유라스의 복도 한복판에서 익숙한 사람을 볼 수 있었다.
“아!”
상대도 지크를 알아봤다. 지크는 히죽 웃으며 손을 들어 올렸다.
“여, 현명하기 짝이 없는 이 몸의 어리석고 멍청한 동생 놈 아니냐.”
“…오랜만에 만났는데 처음 하는 인사가 그거야?”
그레이그가 볼멘소리를 내뱉었다.
“아무리 기분 나쁜 소리라도 사실이라면 대범히 받아들여야지. 그렇지 않다면 네 아버지처럼 꼰대가 돼. 그렇지 않습니까?”
지크가 그레이그의 호위로 따라온, 강철검 기사단의 부단장 대니 크리스넌에게 물었다. 그는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어색하게 웃을 수밖에 없었다.
“네 아버지라니. 하여간 말 험하게 한다니까.”
“내가 스틸월에서 받은 차별을 하나하나 꺼낼 것도 없이 네가 나한테 했던 언동만 생각해도 그보다 못하진 않을 거다.”
그레이그는 입을 다물었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미안해.”
“됐다. 이제 와 사과 받자고 한 말도 아니고.”
지금의 사과 따위 지크에게는 어떤 의미도 없었다. 이제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다.
“그래, 잘 지내긴 했냐?”
“…응. 못 지내진 않았지. 후계자 수업이 조금 힘들긴 하지만.”
“쯧쯧. 그거 뭐 어려울 거 있다고. 복잡한 건 능력 있는 놈들한테 맡겨 놓고 시비 거는 놈들만 다 쳐 죽여버리면 되잖아.”
“…형 얘기를 듣고 보니 조금은 죄책감이 덜어지는 것 같아.”
저런 인간보다는 자신이 백작 자리에 앉는 것이 조금 더 낫지 않을까.
“연약해 빠진 놈.”
“상식적이라고 해줘.”
지크는 콧방귀를 뀌었다.
“꼰대는 안 왔지?”
“아버지야 바쁘시니까.”
밸리드에게 멸망한 나라들의 공백지를 두고 갈등이 벌어지는 와중에 왕국을 대표하는 기사인 그가 자리를 비우는 것도 마땅치 않은 일이었다.
“잘됐네. 그 밉상 맞은 얼굴 보지 않아서.”
다른 이가 스틸월 백작을 이런 식으로 말했다면 그레이그든 대니든 그냥 넘어가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상대가 지크라면 그들도 조용히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틸 씨는 어디 있냐?”
대표적 드래곤 슬레이어 중 한 명이자 상당한 양의 드래곤 사체를 배정받은 그가 오지 않았을 리 없다.
“본인 방에 있을 거야.”
“잘 지내시냐?”
“당연하지. 가문에서도 각별히 대우하고 있으니까.”
스틸월 백작가의 병력으로 흡수된 용병들의 대표이기도 하거니와 틸 본인의 실력 자체도 굉장히 뛰어나다. 아니, 뛰어난 걸 넘어 현재 스틸월 백작가의 최고 실력자가 바로 틸이었다.
백작가의 주인인 스틸월 백작도 백작가 최고, 최강이라 평가받던 미헨 타이너도 틸에 비해서는 손색이 있었다.
안 그래도 다른 가문보다 무를 숭상하는 스틸월 백작가에서 그의 대우가 안 좋을 리 없었다.
“벌써 타이너 단장의 뒤를 이어 강철검 기사단의 단장을 이어받아야 한다는 이야기까지 나오고 있어.”
이제 백작가에 소속된 지 1년밖에 되지 않은 이가 벌써 백작가 최고의 무력 단체인 강철검 기사단의 단장이 되어야 한다는 소리까지 나오다니.
옆에 있는, 원래 미헨 타이너의 후계자 소리를 듣던 대니도 불쾌해하지 않는 걸 보면 정말로 확실하게 백작가 내에서 인정받은 게 분명했다.
‘나나 윌위스 드웨인과 같이 회귀 전에 마왕 소리까지 들었던 사람이니 당연한 일이지.’
게다가 지크가 추천해 줬다는 것도 빠르게 인정받은 이유 중 하나일 것이다.
“잘 대해 줘. 스틸월 백작가에는 솔직히 아까운 인물이니까.”
“부정을 하고 싶지만, 메이브 경이라면 그럴 만하지.”
“메이브 경?”
“이제는 정식 기사가 됐으니까 성이 있어야 하잖아. 그래서 아버지가 지어줬어.”
“틸 메이브 경인가.”
나쁘지 않았다.
“좋아, 그럼 난 이만 그 메이브 경을 보러 가마.”
솔직히 그레이그와 이야기를 나누는 것보다야 틸과 이야기를 나누는 게 몇백 배는 더 즐거울 게 뻔했다.
“잠깐만.”
“뭐야?”
“나중에 대련 한 번 괜찮아?”
“흐음?”
지크는 제법 놀랐다.
예전에 치료(?)를 위해 상당히 험하게 굴렸는데도 불구하고 설마 제 스스로 대련을 청할 줄이야.
눈을 보니 공포를 잊은 건 아니다. 눈썹까지 살짝 떨리는 것이 당장이라도 자신이 한 말을 취소하고 싶어 보인다.
그러나 그의 꽉 닫힌 입매는 끝내 번복하는 말을 내뱉지 않았다.
“대련 상대라면 가문에 많을 텐데?”
“하지만 정말로 나를 일절 봐주지 않고 싸워줄 사람은 없지. 그리고 실력 하나만큼은 형이 최고잖아?”
“그건 맞지. 하지만 내가 네 부탁을 들어줘야 할 이유가 있을까?”
“겁먹은 거야?”
그레이그가 도전적인 눈빛을 보낸다. 지크는 껄껄 웃음을 터뜨렸다. 그리고 그레이그의 어깨를 두드렸다.
“좋아! 어리석고 멍청하고 조금은 용감해진 동생아. 네 그 허접한 도발에 내 자비롭게 넘어가 주마.”
축제가 끝나고 대련할 날짜를 대략 잡은 후, 지크는 그레이그와 헤어졌다.
지크는 틸이 머물고 있다는 방으로 향했다. 틸은 방에 있었다.
그는 갑작스럽게 찾아온 지크의 방문을 환영했다.
“오랜만입니다.”
“오랜만이군요.”
테이블에 마주 앉아 인사를 한 후, 틸은 입을 다물었다.
‘여전하군.’
전과 다름없이 과묵하기 이를 데 없는 틸에게 지크는 먼저 입을 열었다.
“스틸월 백작가에서 잘 지내고 있다 들었습니다.”
“백작님과 다른 분들이 잘 대해주신 덕입니다.”
“전부 메이브 경의 실력 덕분일 테죠.”
틸이 살짝 놀란 기색을 보였다.
“그레이그 녀석을 먼저 만나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기사 작위와 함께 성을 받으셨다죠?”
“그렇습니다.”
“틸 메이브 경. 후후, 나쁘지 않습니다.”
틸의 얼굴이 조금 일그러졌다. 다른 사람들 같으면 화가 났나 싶어 당황하거나 겁을 먹었겠지만 지크는 그게 아님을 알고 있었다. 저건 그저 부끄러워하는 것이었다.
“성이란 것에는 쉽사리 익숙해지지 않더군요.”
“그래도 익숙해질 때가 올 겁니다. 무엇보다 틸 씨의 자식에게도 근사한 성을 물려줄 수 있어서 좋지 않습니까.”
“그건 그렇습니다.”
역시 이 과묵한 거한과 대화를 나눌 때 가장 편한 주제는 그의 자식이었다.
“윌터와 엘리도 많이 컸겠습니다. 그 나이대 아이들은 하루가 다르니 말입니다.”
“저도 가끔씩 깜짝깜짝 놀랄 때가 있습니다.”
“한번 보고 싶군요. 아이들이랑 놀아줄 때 나름 즐거웠었거든요. 나중에 한번 스틸월 영지로 찾아가 보겠습니다.”
“저야 환영합니다. 아이들도 좋아할 거고요. 하지만 지크 님은 괜찮으시겠습니까?”
“제가 그 집안에 해준 게 있는데 설마 쫓아내기야 하려고요.”
“지크 님이 괜찮으시다면야 상관없겠죠.”
다른 이들과의 대화와는 달리 틸과의 대화는 무척이나 담백했다. 그러나 지크는 물론이고 평소 말수가 없는 틸도 서로와의 대화를 썩 즐겼다.
그렇게 지크와 틸은 한참을 담담하게 대화를 나눴다.
그리고 시간이 지나 드디어 축제일이 밝았다.
* * *
축제가 다가오면 다가올수록 도시에는 사람들이 늘어갔고 그에 따라 도시의 활기도 점점 넘쳐흘렀다.
그리고 축제 당일, 그 활기는 정점으로 치달았다.
사람들은 밸리드의 몰락을 기뻐하고 카르위먼을 찬양하며 길거리를 채웠다. 오늘만큼은 고된 일상을 잊어버리고 곳곳에 마련된 볼거리와 먹을거리를 즐겼다.
도시 곳곳에 커다란 인파가 형성된다.
하지만 도시에서 단연코 가장 많은 사람들이 모인 곳은 바로 카르위먼이 만든 전시대였다.
“우와아아!”
“저게 바로 그…!”
“얼마나 큰 거야?”
나이도 성별도 생김새도 전부 다른 이들이 모인 인파였지만 그들의 표정은 한결 같았다.
경외와 감탄 그리고 미약한 공포.
카르위먼이 총력을 다해 부활시킨 드래곤의 모습이 바로 거기 있었다.
날카로운 이빨과 발톱은 당장에 눈앞의 모든 것을 찢어발길 것 같고 육중한 다리는 가로막는 모든 걸 짓밟을 것 같다.
집보다도 거대한 몸집과 그 몸을 띄울 수 있는 커다란 날개. 그 어떤 병장기로도 뚫을 수 없을 것 같은 단단한 비늘까지.
전설이나 소설 속에 나오는 드래곤의 등장에 사람들은 벌린 입을 다물 줄을 몰랐다.
축제를 더욱 성황리에 개최하기 위해 드래곤의 사체를 전시한다는 카르위먼의 전략은 이루 말할 수 없을 정도로 성공적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