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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620화 (620/628)

외전 19화

지크는 별 목적 없이 유라스 내에서 어슬렁거리고 있었다. 눈가에 물기가 맺힐 정도로 크게 하품을 하며 걷는 폼이 그림으로 그린 듯한 한량이었다.

배를 벅벅 긁으며 오늘은 또 어떻게 시간을 때울까 심각한 고민을 하고 있을 때였다.

“지크 님!”

첼시가 피나를 대동한 채로 다가오고 있었다. 해맑은 표정으로 손까지 크게 흔드는 걸 보면 마치 십 년 이상 만난 지기를 반기는 것 같다.

새삼 생각하지만 무척이나 뻔뻔한 녀석이다. 아마 카르위먼에서 쫓겨난다 하더라도 세상 살아가는 데에는 하등 지장이 없지 않을까. 옆에서 무안한 얼굴을 하고 있는 피나를 보면 더더욱 그렇게 생각됐다.

“무슨 일이냐?”

“잠깐 시간 되실까요?”

“바쁜 일은 없다만.”

“그럼 시간 좀 내주세요.”

첼시는 근처에 있는 빈 방으로 지크를 이끌었다.

“그래, 무슨 일인데?”

“이거요!”

그녀가 무언가를 내밀었다. 팔랑팔랑한 종이 한 다발이다. 검은 색 잉크로 무언가 세세히 적혀 있는 것이 어떤 보고서 같았다.

지크는 받지 않고 그저 팔짱을 낀 채 종이 다발을 빤히 쳐다봤다.

“이건 뭐냐?”

“최근 페이자디루 브라우닝과 웨즈컬 그라셰인, 그 외 미프틸 왕국 사람들의 최근 동향이에요.”

지크의 시선이 종이 다발을 떠나 첼시의 얼굴로 향했다. 마치 꼬리를 흔들며 칭찬을 바라는 강아지처럼 그녀의 눈이 초롱초롱했다.

“이건 왜 가지고 왔냐?”

“저번에 페이자디루 브라우닝에 대해 관심을 보이셨잖아요.”

지크는 고개를 갸웃거리며 눈을 껌벅였다.

“내가 그랬나?”

“…예, 예전 술자리에서 그러셨잖아요. 브라우… 아니, 라라 씨가 형편없는 가격으로 드래곤 사체를 넘겨준 날 말이에요.”

“아!”

다행히 기억을 하는 것 같다. 하지만 첼시는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지크의 반응이 그녀의 예상과 크게 달랐기 때문이다. 그건 옆에 있던 피나도 마찬가지였다.

“그래, 기억이 나긴 한다. 하지만 분명 내가 뚜렷이 알아볼 필요 없다고 하지 않았던가?”

“물론 그러긴 하셨어요. 하지만 지크 님이라면 그 이후에 독자적으로 조사를 하셨을 거 아닌가요? 지크 님의 조사 능력에 미치진 못하겠지만, 그래도 한 명이 하는 것보다는 다른 사람이 도움을 주는 게 당연히 어떤 음모를 밝혀내는 데 더 유리할 거라는 생각이 들어서요. 그래서 저랑 어쿠스 씨가 나름 상세히 조사해왔어요.”

하지만 지크는 그 보고서를 받을 생각이 없어 보였다.

“수고하긴 했는데, 솔직히 필요 없어.”

“네?”

지크의 별 감흥 없는 표정에 당황하면서도 여전히 웃는 낯을 유지하고 있던 첼시의 얼굴에 금이 갔다.

“독자적이든 뭐든 정말로 난 조사 같은 건 일절 하지도 않았다. 네가 말한 자들에 대해 딱히 궁금한 것도 없고.”

“그, 그래도 페이자디루 브라우닝에게 관심을 뒀잖아요!”

아직까지 웃는 낯으로 굳어 있는 첼시를 대신해 피나가 다급히 말했다.

“그렇긴 하다만 따로 조사를 해서까지 알 필요는 없거든.”

지크는 당혹해하는 두 사람의 어깨를 툭툭 두드렸다.

“그래도 일단 수고는 했다. 그건 괜히 다른 사람에게 들켜서 이상한 말 나오지 않게 잘 처리하고. 너희도 최대한 축제를 즐기도록 해.”

그렇게 말한 지크가 두 사람 사이를 지나쳤다. 두 사람은 어기적대며 움직이는 지크의 등을 멍하게 쳐다볼 수밖에 없었다.

* * *

“지크 님이 그러셨다고요?”

“그래요!”

첼시가 불퉁하게 외쳤다. 그녀는 차가운 물을 한 입에 털어 넣어 솟아오르는 울화를 억눌렀다.

“씨이! 그래도 나는 나름 도움을 준다고 한 건데. 한 번 보기나 하지.”

그녀가 볼을 부풀린 채 투덜거린다. 물론 지크의 의향도 물어보지 않고 했던 일이라 그녀의 분노는 생뚱맞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하지만 분명 지크와의 친분을 쌓자는 속된 감정이 있었을지라도 최선을 다한 조사였기에 분한 마음이 드는 것도 당연지사.

“어쩌겠어. 괜히 넘겨짚고 그가 미프틸 왕국 사람들의 정보를 원할 거라고 생각한 우리가 바보 같았던 거야.”

그러나 정작 그렇게 말하는 피나도 아쉬움을 느끼고 있는 건 마찬가지였다. 그 보고서엔 그녀의 노력도 상당히 들어갔으니. 보고서의 정리 같은 것에는 아무래도 마법사인 그녀가 더 적성에 맞기에 대부분 그녀가 도맡아서 했던 것이다.

피나의 말에도 첼시는 여전히 아쉬움을 참지 못하며 그녀가 찾아온 한스를 향해 물었다.

“그런데 정말로 지크 님은 미프틸 왕국의 사람들에게 흥미를 느끼지 못하시는 건가요?”

“그건 저도 모르겠네요.”

한스가 머리를 긁적였다.

그도 지크가 적어도 페이자디루는 의심스러운 눈길로 보고 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어느 정도 조사를 하실 거라고 생각했는데….’

그들이 그렇게 생각하는 건 이유가 있었다. 지금껏 지크가 사건을 해결해 온 방식이 문제였다.

지크야 회귀 전의 정보를 토대로 움직였지만 라일라를 제외한 다른 이들이 그런 사실을 알 리 없다.

당연히 한스와 다른 일행들은 지크가 초월적인 육감과 미세한 단서를 토대로 조사를 시작했다고 믿고 있었고, 그 인식은 지크의 활약상이 세계로 퍼져나감과 동시에 다른 이들에게도 퍼졌다.

그러니 당연히 한스든 첼시든 지크가 페이자디루를 적어도 조사 대상으로는 찍었다고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결과는 완전 딴판.

“지크 님이 뭔가 조사를 하는 낌새는 없었나요?”

아직 작은 희망이라도 있지 않을까 첼시가 물었다. 하지만 한스는 고개를 저었다.

“적어도 제가 아는 한 없었습니다. 너희들은 어때?”

그는 같이 모여 있던 스녹과 엘레나, 라라에게 물었다. 하지만 단 한 명도 긍정의 답변을 주지 않았다.

“저는 못 봤습니다.”

“대부분의 시간은 스승님이랑 데이트를 하고 있으신 걸요. 그럴 시간이 있으실까요?”

“그렇지 않은 시간도 보통 축제를 어슬렁대고 있으세요. 아무리 지크 님이 대단하신 분이시더라도 그렇게 시간을 보내시는 와중에 조사까지 하는 건 무리라고 생각해요.”

지금까지의 여러 사건 때도 그가 무엇을 하는지 모를 뿐, 무엇을 하고 있다는 것만큼은 충분히 알 수 있던 지크다. 하지만 지금, 지크에게서 그런 낌새는 전혀 느껴지지 않았다.

“그럼 정말로 별 조사를 하지 않고 계시는 것 같습니다만.”

“역시 그런가요?”

첼시는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럼 이건 정말로 소용없겠네요.”

아쉬운 눈길로 보고서를 내려다본다. 하지만 그걸 만들기 위해 어떤 노력을 기울였든 필요가 없다면 그저 쓸모없는 종잇조각일 뿐이다.

오히려 미프틸 왕국의 사람들이 분명 불쾌해할 만한 정보가 들어 있는 만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 불이익만 있을 뿐이다.

“태워줄까요?”

“부탁해요.”

엘레나는 테이블에 놓인 보고서에 마법을 시전했다.

퍼엉!

종이를 새빨간 불길이 태운다. 순식간에 종이는 재만 남기고 사라졌다. 뛰어난 엘레나의 마법 덕에 테이블에는 작은 그을음조차 남지 않았다.

자신들이 열심히 만든 보고서가 잿더미로 변한 것을 보고 첼시와 피나는 우울한 눈빛을 보냈다.

“일단 지크 님은 미스틸 왕국 사람들에 별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는 건 확실한 거죠?”

“아마도 그렇지 않을까 합니다.”

한스의 대답에 첼시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앞으로 제 일이나 열심히 해야겠네요. 지크 님이 관심이 없다면 그들도 허튼 짓을 하려는 게 아닐 테니까요.”

“…정말 그럴까?”

“어쿠스 씨는 무슨 다른 생각이 있는 걸까요?”

모두의 시선이 피나에게 쏠렸다.

“가능성은 낮다고 생각되긴 한데, 그 사람의 행동 양식이 변한 거라면?”

“지크 님의 행동 양식이 변했다고요?”

“보통 평화에 찌든다고 표현을 하지? 그 정도까진 아니더라도 밸리드의 몰락과 요 1년 사이의 여행 때문에 그의 행동이 온화해졌을 수도 있어. 예전처럼 집요하게 상대를 쫓지 않게 됐을지도 몰라.”

“지크 님이요? 그럴 리가요.”

한스가 대놓고 부정했다. 다른 이들도 피나의 의견에 그리 동의하는 반응은 아니었다.

“그래요. 그래서 내가 말했잖아요. 가능성은 낮다고.”

“낮은 정도가 아니라 아예 없을 걸요.”

“그럼 그가 이렇게 얌전한 것에 대해 짐작 가는 이유라도 있나요?”

“그게….”

한스도 그것에는 할 말이 궁했다.

“물론 그 사람의 생각을 완전히 파악하고 있는 것도 아니니 뭐라 확답을 할 순 없어요. 하지만 약간의 행동 양식이 바뀌었을 가능성은 충분히 있죠.”

“그래도 그렇게 많이 바뀌진 않으셨을 것 같습니다만….”

“솔직히 나도 그렇긴 해요.”

피나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 강렬한 개성이 그리 쉽게 바뀔 리는 없지. 아마 그냥 열심히 만들어 놓은 게 쓸모없이 잿더미로 변해 실망했나 봐요. 마음에 두지 말아요.”

“아뇨. 충분히 일리는 있는 말이라고 생각합니다. 말을 들어보니 저도 혹시 그렇지 않을까 의심이 들었고요. 어쿠스 씨의 말처럼 사고방식이 조금 바뀌셨을지도 모릅니다. 하지만 의심스러운 걸 아무 생각 없이 방치하실 정도까지는 아니라고 생각해서 말입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지크가 그 정도로까지 변했을 것 같진 않았다.

첼시가 자리에서 일어섰다.

“괜히 찾아와서 죄송해요. 시간을 낭비하게 해버렸네요.”

“아뇨. 저희도 충분히 이해할 만한 질문이었습니다.”

첼시와 피나는 한스 일행과 헤어져 방에서 나왔다. 그녀들의 앞으로 유라스의 긴 복도가 펼쳐졌다.

“결국 헛수고였네요.”

아직 실망감이 완전히 가라앉진 않은 듯 첼시가 입을 삐죽 내밀었다. 그에 비해 피나는 벌써 마음의 정리를 모두 끝냈는지 덤덤했다.

“더 이상 담아두지 마. 그래 봤자 너만 속 터질 뿐이야.”

“그건 알아요. 아는데, 으으으….”

앓는 소리를 내던 첼시가 눈을 게슴츠레 떴다.

“어쿠스 씨.”

“왜?”

“혹시 편을 갈아탈 수 있다면 어쩔 건가요?”

“그게 무슨 소리야?”

그다지 온건한 주제 같지는 않아 피나는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낮췄다.

“우리가 미프틸 왕국의 정보를 모아 건네려 한 것도 전부 지크 님의 눈에 들려 한 거잖아요?”

“그렇지.”

속되기 그지없는 말이었지만 그게 사실이었기에 피나도 부정하지 않았다. 애초에 체면 운운 따위 초저녁에 버린 그녀였다.

“사실 웨즈컬 그라셰인으로부터 의뢰 하나를 받았거든요.”

“…무슨 의뢰?”

“지크 님을 감시하고 그 동태를 알려달라고. 아마도 제 과거의 전적 때문에 써먹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나 봐요.”

피나가 눈을 크게 떴다.

“그 사람이 왜?”

“자세한 건 몰라요. 하지만 뭔가 꿍꿍이가 있는 건 확실해 보여요.”

“그럼 말을 했어야지!”

“저도 그럴까 생각을 했는데 말이죠. 들고 있는 패는 많으면 많을수록 좋지 않겠어요? 솔직히 지크 님에게 맹목적인 충성과 믿음을 주고 있는 한스 님이나 그 일행들과는 달리, 우리는 우리의 이득을 위해 움직이고 있잖아요? 그럼 계산 한번 해보기는 해야죠. 어느 쪽이 우리에게 이득일지.”

“…….”

“솔직히 제가 이 말을 카르위먼 상층부나 지크 님에게 해봤자 달라지는 건 별로 없을 거예요. 뭔가 증거가 있는 것도 아니고 그라셰인 공자도 딱 잡아떼겠죠. 게다가 꿍꿍이라고 해도 개인적인 질투일지 아니면 조금 더 규모가 큰 음모인지도 몰라요. 즉, 도박이란 거죠.”

“…그래도 지크의 편에 서는 게 낫지 않을까?”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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