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8화
“거사일은 교황이 연설을 하는 날이오. 웬만하면 그날은 호위든 경비든 빠지시오. 당신들까지 당할 수 있으니.”
“명심하리다. 하지만 일이 잘못돼 설혹 우리가 그날 아예 드래곤의 경비를 서게 된다 하더라도 계획은 강행하시오. 우리도 알아서 대비를 할 터이니.”
“알겠소.”
“얘기가 끝났으면 슬슬 가보겠소.”
웨즈컬이 일어섰다. 피로스가 그를 보며 단호하게 말했다.
“그대가 일을 잘하느냐 못 하느냐에 따라서 우리 계획의 성공이 갈린다는 걸 명심하시오.”
“걱정 마시오.”
웨즈컬은 집을 나가기 위해 등을 돌렸다.
“잠깐!”
피로스가 다시 그를 불렀다.
“또 무슨 일이오.”
“드래곤 슬레이어 지크가 혹시 이미 와 있소?”
“그렇소.”
웨즈컬은 얼마 전 만났던 지크를 떠올렸다.
“그를 특히 조심하시오. 정보에 따르면 굉장히 눈치도 빠르고 계략에도 능하다니, 우리의 계획을 눈치챌지도 모르오.”
“…그를 굉장히 높게 평가하시는구려.”
“드래곤 토벌도 우리 밸리드를 몰아넣은 것도 그의 공이 가장 크오. 당연히 높게 평가할 수밖에 없지.”
“내 기억하리다.”
그 말을 남기고 웨즈컬은 이번에야말로 집을 나섰다.
‘잘되고 있어.’
드래곤의 사체가 든 마법 상자가 품에서 느껴진다. 내용물이 얼마나 무겁든 언제나 같은 무게를 유지하는 마법 상자가 지금만큼은 묵직하게 느껴졌다.
‘거사일에 경비든 호위든 최대한 빠지라고? 웃기는 소리.’
오히려 웨즈컬은 그날 드래곤의 경비를 일찌감치 자원한 상태였다. 그리고 별다른 일이 없다면 통과가 될 것이다.
그렇다면 언데드 드래곤이 깨어날 때 그것에 가장 가까이 있는 자들은 웨즈컬과 그라셰인 기사단을 중심으로 한 미프틸 왕국의 병력이 될 터.
‘우리가 드래곤을 처단한다!’
그리고 세계는 새로운 드래곤 슬레이어의 탄생을 목격하리라.
물론 전투는 쉽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주변에 각 나라의 고위 인사들과 일반 구경꾼들도 많을 터이니 상당한 희생도 날 것이다.
하지만 그는 개의치 않았다.
‘대를 위한 소의 희생은 언제나 있는 법이지.’
오히려 그런 상황에서 한 드래곤 토벌이야말로 더욱 극적이지 않겠는가.
자신을 향해 쏟아질 열광과 환호를 생각하며 웨즈컬은 만족스러운 웃음을 지었다.
* * *
‘그렇게 생각하고 있을 테지.’
피로스는 너무도 선해 마치 손에 잡힐 듯한 웨즈컬의 속마음을 예상하고 이죽댔다.
‘멍청한 놈. 네깟 놈과 잘난 미프틸 왕국의 놈들만으로 언데드로 부활한 드래곤을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으냐.’
분수를 몰라도 너무 모르는 놈이다. 정말로 그의 계획을 위해 밸르가 점지해 준 놈이 아닌가 생각될 정도다.
‘아니, 틀린 말도 아니지.’
그는 이용하기 무척이나 좋은 인물이었다. 그 성향도 지위도.
그런 이가 복수를 위해 이용하기 좋은 인물을 물색하고 있을 때 딱 튀어나올 가능성이 얼마나 되랴.
그에 대한 정보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렌이 세웠던, 나중에 라라를 완벽하게 옭아매기 위한 계획의 준비를 맡았던 곳이 바로 밸리드 서부 총지부였다.
그래서 피로스는 웨즈컬, 페이자디루의 성향과 미프틸 왕국, 그라셰인 공작가, 브라우닝 후작가에 대한 정보 그리고 라라에 대한 정보까지 꽤 상세히 알고 있었다.
그 정보 덕에 피로스는 지금의 계획을 수월히 짤 수 있었다.
‘저놈들이라면 우리와 손을 잡지. 잡고말고.’
밸리드와 손을 잡았던 플로드 백작가가 말 그대로 박살이 난 지 단 1년밖에 지나지 않았다.
다른 정상적인 귀족가라면 아무리 나중에 뒤통수를 치면 된다 생각할지라도 밸리드와 손을 잡을 생각 자체를 하지 않을 것이다.
손을 잡기는커녕 당장에 카르위먼에 일러바치지나 않으면 다행이다.
그러나 저들은 피로스의 손을 맞잡았다.
‘아주 잘 진행되고 있어.’
그들은 카르위먼과 협력해 드래곤의 경비를 맡았고 라라를 통해서 드래곤의 사체를 가져오기도 했다.
이제 시간만 남았다.
‘언데드 드래곤은 절대 원래의 드래곤보다 약하지 않을 거다.’
언데드 제조법도 여러 가지다. 그리고 지금, 그들이 사용하는 제조법은 생전에 거의 근접한 힘을 가지고 부활하는 제조법이다.
물론 당연히 그만큼 복잡하고 정교하며 세심한 과정을 거쳐야 한다. 그리고 많은 재원과 노력도 들어간다.
그 재원엔 사람의 목숨까지 있었다. 피로스가 희생 운운했던 것이 그저 은유적인 표현이 아니었던 것이다.
안 그래도 얼마 남지 않은 소중한 동료들이 이 계획 하나만을 위해서 웃는 낯으로 목숨을 바쳤다.
당연히 그 대가는 카르위먼에서 받아내야 한다.
‘얼마 안 남았다.’
이제 세계와 카르위먼은 밸리드의 분노를 맛보며 아직 밸리드가 몰락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처절하게 깨닫기 되리라.
그러나 모든 것이 잘 풀리고 있는 지금, 그에게 걱정이 없는 것도 아니었다.
과연 웨즈컬이 앞으로도 잘할 것인가, 재수 없게 적들에게 걸리는 건 아닐까. 그리고….
‘지크….’
가장 걱정되는 인물이었다.
밸리드 몰락에 가장 커다란 영향을 끼친 이.
피로스는 그에 대해 상당히 자세히 조사했다. 그 드높은 명성 때문에 지크의 세세한 활약상까지 시중에 나돌고 있어 조사하는 게 그리 어렵진 않았다.
‘힘도 힘이지만 정말로 두려운 건 그 눈치와 머리.’
작은 단서를 잡아 음모의 중추를 찾아낸 후 으깨버린다. 말이야 쉽지, 그것을 현실로 옮길 수 있는 이들은 무척이나 적다. 게다가 출중한 무력까지 갖춘 이라면 더더욱.
하지만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방해가 되는 지크를 죽인다?
‘그게 가능하다면 차라리 카르위먼의 교황이나 성녀를 죽이는 게 낫지.’
피로스는 일어섰다. 이제 계획의 성공 여부는 웨즈컬과 미프틸 왕국의 놈들에게 달렸지만 그라고 할 일이 없는 건 아니다.
더 이상 고민할 시간은 없었다. 계획이 성공했을 때 조금이라도 적들에게 피해를 주기 위해 더 완벽한 준비를 갖춰야 한다.
피로스마저 나간 후, 음침한 음모의 대화가 오고 간 주인 없는 집에는 음습한 침묵이 내려앉았다.
* * *
정말로 축제가 바로 코앞까지 다가왔다. 슬슬 각 나라나 집단의 고위층들이 도착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안면이 있는 사람들과 인사를 하고 새로운 인연을 만들기 위해 움직였다. 그들 정도 위치가 된다면 아무리 크고 즐거운 축제라도 아무 생각 없이 즐길 수는 없는 것이다.
지크를 비롯한 드래곤 슬레이어와 밸리드 토벌자들은 그들에게 있어 가장 중요한 목표였다.
그 실력. 그 명성. 안면을 터서 손해를 볼 건 전혀 없다. 게다가 일이 잘돼서 친분을 만들어 둔다면 여러 도움도 받을 수 있지 않을까 하는 속된 생각도 당연히 있었다.
그 정도 시꺼먼 마음도 가지고 있지 않다면 애초에 그 자리를 유지할 수도 없었다.
하지만 그거야 그들의 입장이고 그들이 만나고 싶은 이들, 특히 지크가 그 의향을 들어줄 이유는 없었다.
때문에 지크를 만난 고위층은 극히 드물었다.
그리고 지크 일행과 안면이 있는 요하임과 이블린은 그 극히 드문 이들 중 일부였다.
지크와 라일라는 요하임, 이블린과 인사를 한 후 마주 앉았다.
“저번 결혼식 이후로군요.”
지크의 말에 요하임이 미소지었다.
“그때는 참석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얼마 전, 요하임과 이블린은 결혼식을 올렸다. 그리고 약속대로 지크는 라일라와 함께 결혼식에 참석했다.
백작과 후작가 영애의 결혼식은 그 자체로 대단한 이벤트다. 주변 영지는 물론 나라에서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런 곳에 그 명성 높은 지크가 나타났으니 그 반응은 그야말로 폭발적이었다.
그것 하나만으로도 드라큘 백작가의 위상은 치솟았고 여러 곳에서 무척이나 짭짤한 이득도 볼 수 있었다.
“이래저래 지크 님께는 너무도 많은 도움을 받았군요.”
백작가에 대한 음모를 막아주고 요하임이 백작이 되게 만들어 줬으며 땅에 떨어진 백작가의 위상도 올려준 데다가 부인인 이블린까지 그와의 인연으로 만나게 되었다.
하나부터 열까지 지크의 도움을 받은 요하임은 당연히 지크에게 크나큰 감사를 느끼고 있었다.
“백작 부인께서는 많이 익숙해지셨습니까?”
드라큘 백작 부인. 루즈 영애라고 불렸던 이블린의 새로운 칭호다.
그녀는 빙그레 미소를 지으며 화답했다.
“네. 가문의 분들도 잘 대해주시고 무엇보다 백작께서 많이 신경을 써주고 계시니까요.”
요하임과 이블린이 서로를 바라봤다. 두 사람의 눈에서 꿀이 뚝뚝 떨어졌다.
요하임은 이제 원숙한 고위 귀족으로서의 분위기가 풍기기 시작했고 이블린도 백작가의 안주인으로서 걸맞은 태도를 보였다.
하지만 역시 예전부터 알고 지냈던 지크와 라일라 앞에서는 예전 모습이 툭툭 튀어나왔다.
요하임과 이블린은 무척 즐거웠다. 지크와 라일라를 무척이나 친근하게 생각하는 것도 있었지만, 무엇보다 그 둘에게는 귀족 특유의 위엄을 유지할 필요가 없던 것이다.
지금만큼은 드라큘 백작이나 백작 부인이 아닌, 예전의 요하임과 이블린으로 돌아가 순수하게 즐거워할 수 있었다.
“그런데 두 분은 언제 결혼을 하실 생각이세요?”
이블린이 눈을 반짝였다.
“저희 결혼식 때 부케를 받으셨잖아요?”
결혼식 마지막 이벤트인 신부의 부케 던지기에서 이블린의 손을 떠난 부케가 안착한 곳은 라일라의 품이었다.
“아하하. 그거야 우연찮게 받은….”
“무슨 소리냐? 육체 능력이 받쳐주지 않았다면 마법까지 쓸 생각 만만이었으…큭!”
쓰잘데기없는 소리를 하려는 지크의 발을 지그시 밟으며 라일라는 말을 이었다.
“아직 정해진 건 없어요. 지금은 여행을 계속하고 싶기도 하고요.”
“그래도 너무 오래 미루진 않으시겠죠?”
“그렇죠.”
“그렇대요, 지크 님. 하루라도 빨리 청혼을 하세요.”
“걱정 마시죠. 이래 봬도 프러포즈 계획은 착실히 세우고 있으니까요.”
어떻게 보면 무척이나 로맨틱한 말이다. 하지만 지크를 신뢰하는 요하임도 사랑 이야기에 사족을 못 쓰는 이블린도 그 포러포즈를 받게 될 라일라도 뜨뜻미지근한 눈으로 지크를 바라봤다.
“실례지만 어떤 계획인지 여쭤봐도 될까요?”
원래 그런 건 상대가 모르는 상태에서 하는 것이지만, 아무래도 이블린은 지금 들어둬야 한다는 예감이 강하게 들었다.
그건 요하임이나 당사자인 라일라마저 마찬가지인지 그녀를 제지하지 않았다.
“원래 숨겨야 하는 일이지만, 간단하게는 말씀드리죠. 원래 그런 건 상대를 감동시키기 위해 하는 것 아닙니까? 그래서 예상치 못한 선물이나 행동을 하는 법이죠. 하지만 전 사람의 심리에 집중을 했습니다.”
벌써부터 불길한 예감이 들어맞는 것 같다.
“위기 상황에서는 사랑에 빠지기 쉽다고 합니다. 흥분과 사랑을 헷갈리기 쉬워서 그렇다나요? 즉, 극도의 흥분은 곧 극도의 애정으로도 느껴진다는 뜻입니다.”
“…계속해 봐요.”
듣고 싶지 않지만 그녀의 친구인 라일라를 위해서 이블린은 그녀의 마음과 고막을 희생할 각오를 다졌다.
“아무래도 평범한 상황에서보다는 극도의 흥분 즉, 극도의 애정 상태에서 받는 프러포즈가 더 감동받고 기억에도 남겠죠. 그래서 지금 적당한 나쁜 놈들을 알아보는 중입니다. 세력도 크고 강하기도 한 놈들이요. 라일라와 같이 그놈들을 싹 쓸어버린 후에 프러포즈를 한다면 그 이상 가는 이벤트도 없….”
“그러기만 해 봐!”
결국 라일라가 빽 소리를 지르며 지크의 멱살을 잡고 흔들었다.
요하임은 쓴웃음을 지었고 이블린은 머리를 부여잡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