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7화
웨즈컬은 초조하게 약속일을 기다렸다.
그의 계획을 이루기 위해선 피로스에게 드래곤의 사체를 건네는 게 필수적이었다. 하지만 저번 만남에서도 알 수 있듯이, 둘 사이에는 어떠한 신뢰도 없었다.
당연히 피로스가 드래곤의 사체만 챙겨 도망가면 어쩌나 하는 두려움이 그를 괴롭혔다.
웬만한 물건이라면 그깟 물건 하나 잃어버린 셈 치고 오히려 자신의 물건을 훔쳐간 상대에 대한 분노와 증오를 표출할 터였다. 하지만 물건이 물건인지라 지금은 물건에 대한 걱정이 우선이었다.
‘정말로 계획대로 돌려주는 거겠지?’
뜬 눈으로 밤을 지새우는 날이 계속되었다. 강한 마력을 가지고 있는 기사로서 그 정도 밤샘에 피로조차 느끼지 못하는 그였지만, 잠을 이루지 못하게 하는 걱정은 굉장한 스트레스가 되어 그를 약간이나마 초췌하게 만들었다.
“혹시 무슨 일이 있으십니까?”
축제를 챙기기 위해 돌아다닐 때 같이 일을 하던 카르위먼의 신관이 그렇게 말을 할 정도였다.
물론 웨즈컬은 별일 아니라고 둘러댔다.
그가 한 거래를 솔직히 말할 수도 없을뿐더러, 이런 일에 압박감을 느끼고 있다는 사실을 오만한 그의 성격이 인정하지 못하기도 했던 것이다.
귀족으로서 언제나 여유를 풍겨야 하는 자신이 초조해한다는 사실이 못내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가 어떤 심정을 가지고 있든 시간은 뚜벅뚜벅 자신의 속도로 계속 걸었다.
그리고 약속의 날.
약속 시간 한참 전부터 안절부절못하던 웨즈컬은 결국 약속 시간이 되기 한참 전에 거의 날듯이 약속 장소로 향했다.
가면서도 오만 생각이 다 들었다. 놈들이 약속을 지키지 않으면 어쩌나. 정말로 밸리드를 믿는 것이 옳은 일이었을까. 만약 드래곤의 사체를 들고 나른다면 어떻게 추적을 해야 하나. 잡을 수는 있는 것인가.
그러나 예전에 그를 만났던 허름한 집의 문을 여는 순간, 그는 지금껏 해왔던 걱정이 한 번에 훅 사라지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굉장히 빨리 오셨구려.”
며칠 전 본 그 모습 그대로, 피로스가 낡은 테이블에 앉아 있었다.
‘카르나시여, 감사합니다.’
웨즈컬은 저도 모르게 카르나를 찾으며 감사했다. 물론 정말로 카르나가 그의 감사를 들었다면 밸리드와 협력하는 주제에 자기를 찾지 말라고 불벼락을 내렸겠지만.
“굉장히 초조해 보이시는구려. 설마 내가 물건을 가지고 도망이라도 갈 거라 생각했소?”
“…누가 초조해했다는 거요.”
웨즈컬은 마치 그런 적 없다는 것처럼 허세를 부렸다.
하지만 그의 눈 밑에 보이는 엷은 다크서클이 그의 말을 손쉽게 부정했다.
피로스는 속으로 그를 열렬히 비웃었다.
‘대범하지도 못한 것이 허세는.’
하지만 그는 티를 내지 않았다.
“그렇소? 내가 잘못 본 모양이구려. 미안하오.”
“물건이나 내어 주시오.”
다짜고짜 드래곤의 사체부터 요구하는 웨즈컬의 모습에 피로스는 비집어 나오려는 비웃음을 간신히 참았다. 초조해한 적 없다는 인간의 행동이 마치 똥 마려운 강아지 같은 모습이었기 때문이다.
조금쯤 조롱을 하는 건 나쁘지 않을 것이다.
“뭘 그리 급하시오. 약속 시간도 한참이나 남았는데. 예전에 하지 못한 차라도 한잔 어떻소. 내가 찻잔도 깨끗하고 멀쩡한 걸로 가져 왔소. 귀족님들이 사용하는 것엔 미치지 못하더라도 한 번 정도라면 못 마실 것도 아닌 물건….”
“물건부터 내어 주시오!”
웨즈컬의 목소리에 짜증이 담겼다.
피로스는 조금 더 웨즈컬을 초조하게 해 볼까 생각했지만, 그가 꽤 진심으로 짜증을 내고 있는 걸 알고는 순순히 물건을 내어 주었다.
“여기 있소.”
피로스가 드래곤의 사체를 꺼냈다.
웨즈컬은 살며시 사체를 들어 봤다. 예전에 느꼈던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진다. 그는 비늘을 두드려도 보고 가죽을 잡아당겨도 봤다.
며칠 전 느꼈던 감촉 그대로였다. 비늘의 수와 가죽의 크기도 그대로다.
그제야 웨즈컬은 안도할 수 있었다.
“만족했소?”
“속인 건 아닌 모양이군.”
“우리가 왜 그런 짓을 한단 말이오. 드래곤의 사체 따위, 앞두고 있는 계획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닌 것을.”
사체를 다시 손에 넣고 초조함이 사라진 것일까. 웨즈컬은 피로스의 맞은편에 앉았다. 조금 전까지 사라져 있던 오만함이 다시 행동에 비치기 시작했다.
“이번에야말로 드시겠소?”
멀쩡한 찻잔을 피로스가 내밀었다. 웨즈컬은 이번엔 그 찻잔을 받고는 피로스가 따라준 차를 홀짝였다.
“싸구려로군.”
“도망치는 입장이니 비싼 걸 구할 순 없지 않소.”
웨즈컬은 어깨를 으쓱이며 자신의 찻잔을 들었다. 여전히 그의 것은 더럽고 이가 나간 그것이었다.
“잘도 그런 걸로 마시는구려.”
“그대도 가진 걸 모두 잃고 도망자 입장이 된다면 이해할 수 있을 거요.”
“그것 참 안됐군.”
코웃음이 새어 나올 뻔했다. 왜 자신이 저런 패배자들처럼 도망자 신세가 된단 말인가. 저 패배자들과 자신은 완전히 다르다.
웨즈컬은 구질구질한 모습의 피로스를 속으로 비웃었다.
완전히 원래의 모습을 되찾은 그였다.
“그래, 조치는 잘 취해 놨소?”
싸구려란 것을 알게 된 후 찻잔에는 손도 대지 않은 웨즈컬이 물었다.
“물론이오. 나와 살아남은 내 부하들이 모든 능력을 총동원해서 만들었지. 가지고 나온 보물들 중 쓸모 있는 것들을 모조리 투입한 데다가….”
지금껏 유들유들한 모습만 보이던 그의 얼굴에 처음으로 묵직한 감정이 비쳤다.
“목숨까지 희생한 자들도 있소.”
목숨을 희생. 그저 그만큼 열심히 했다는 수사는 아니리라. 웨즈컬도 이번엔 속으로라도 비웃지 못했다.
상대는 그만큼 이 일에 진심인 것이 틀림없었다.
“계획에 대해 설명을 할 테니 잘 들으시오.”
웨즈컬이 진지한 태도를 취했다.
“그걸 카르위먼에게 줘서 드래곤에 붙이시오. 그러면 첫 번째 단계는 성공이오. 하지만 그것만으로는 부족하니 당신이 드래곤에 몇 가지 처리를 더 해야 하오. 가능하겠소?”
“상관없소. 우리가 드래곤을 경비할 때 하면 되니까.”
축제가 끝나기 바로 전에 공개하기 위해 드래곤의 사체는 커다란 나무 벽을 만들어 가리고 있었다. 때문에 남에게 들키지 않고 수작을 부리기도 쉬웠다.
“하지만 그 처치, 밸리드의 것이잖소. 혹시 들키지는 않겠지? 만약을 대비해 성기사들과 신관들이 틈틈이 드래곤을 확인하고 있소.”
워낙에 귀한 물건이니 그 일부라도 누군가 빼돌리지 않을까 감시하는 것이다.
“만약 그때 그들이 밸르의 기운을 느낀다면 계획을 성공하기는커녕 당장 놈들이 범인을 잡으려 눈에 불을 켤 것이오.”
그리고 그가 범인인 것까지 들킨다면 그는 물론이고 그의 가문도 철저하게 몰락할 것이다.
“그건 걱정하지 마시오. 밸르 님의 기운은 물론 어떤 처치가 되어 있다는 것까지 철저하게 숨겨져 있으니까. 지금은 전부 제거당했지만 우리가 놈들의 목 바로 아래까지 끄나풀을 집어넣었다는 것을 생각하시오.”
“그럼 다행이고.”
“물론 교황이나 성녀가 작정하고 조사를 한다면 어떻게 될지 모르지. 하지만 그런 일은 없지 않겠소.”
웨즈컬은 그것에도 긍정했다.
그가 알기로 드래곤 슬레이어들은 모두 드래곤의 사체를 카르위먼에 대여하는 데 동의했다. 그건 곧 거의 대부분의 사체들이 아직 남아 있다는 뜻.
하지만 그것들이 드래곤이 죽은 후의 상태를 그대로 유지하고 있느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전설의 물건인 드래곤의 사체에 대해 실험을 한 사람들은 꽤 많았고, 특히 마법사들은 대부분 그랬다.
한데 그들이 실험을 위해 담아 놓은 마력이, 카르위먼의 사람들이 어떤 검사를 한다고 성력을 쏟아붓다가 망가진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때문에 카르위먼, 특히 교황이나 성녀가 직접 드래곤의 사체를 세밀하게 조사하는 일은 없다고 봐도 좋았다.
“내가 잘하면 모든 준비는 끝난다는 소리군.”
“바로 그거요. 그리고 그렇게 된다면 우리의 계획은 성공할 것이오!”
피로스의 목소리에 흥분이 섞였다.
“빌어먹을 카르위먼 놈들. 우리를 완전히 찍어낸 줄 알고 우쭐거리는 꼴이라니! 밸리드 토벌 1주년 축제라고? 그게 난장판이 되고도 어디 계속 우쭐댈 수 있나 두고 보라지!”
그의 목소리가 점점 커진다.
“그 오만한 행동이 파멸로 이루어 질 것이다! 우리 밸리드의 공포를 다시 전 세계의 미련한 놈들에게…!”
“좀 조용히 하시오!”
아무리 이곳이 인적 드문 뒷골목이라지만 누군가 그의 목소리를 들을지도 모른다. 이 허름한 건물의 방음이 좋을 것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었다.
목소리를 높이던 피로스의 말이 뚝 끊겼다.
“…잠시 흥분했군. 미안하게 됐소.”
“조심하시오. 이런 일로 우리의 계획이 새어 나간다면 얼마나 어처구니없는 일이오.”
다행히 감지 범위를 늘렸을 때 근처에서 느껴진 인기척은 없었다.
“어쨌든, 당신이 모든 일을 제대로 끝낸다면 남은 건 거사 일을 기다리는 것뿐이오.”
“꽤나 볼만한 축제가 되겠군.”
“이를 말이오. 어리석은 놈들이 드래곤을 보고 싶어 찾아온다는데 뜻대로 해줘야지. 아주 원 없이 즐기게 해줄 생각이오. 다시는 드래곤을 보고 싶다는 생각 따위 들지 않을 만큼!”
그는 무척이나 살벌한 웃음을 지었다.
“기대되는군. 그때가 바로 당신의 복수가 이루어지는 때일 터이니.”
“뭘 남의 일 보듯 말하시오. 당신도 마찬가지일 터인데.”
“…그랬지.”
“설마 이제 와 겁을 먹은 건 아니리라 믿소.”
“설마.”
겁을 먹은 것이 아니라 복수라는 단어에 공감하지 않은 것뿐이다.
‘멍청한 놈 같으니.’
웨즈컬은 피로스를 비웃었다. 카르위먼에게 복수라니. 자신이 왜 그런 짓을 해야 한단 말인가. 귀족들의 권력에 도전이 되는 카르위먼 교단 자체는 그리 마음에 들지 않았지만 일단 그도 카르나를 믿는 신자긴 했다. 게다가 딱히 카르위먼에게 해를 입었다든가 한 적도 없다.
‘이상한 착각을 하고 내게 협력을 요구하다니.’
처음에는 이놈들을 죽이거나 사로잡아 카르위먼에게 빚을 지우려 했다. 하지만 얼마 안 가 그는 생각을 바꿨다.
드래곤을 언데드로 만든다.
밸리드의 계획이 그 이유였다.
세계에 명성이 자자한 드래곤 슬레이어. 웨즈컬은 자신이 절대 그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걸 증명할 순 없었다.
무지한 인간들은 오로지 드래곤을 잡은 위업을 찬양만 하지 그들이 얼마나 뛰어난 실력을 갖고 있는지 따위엔 관심이 없지 않던가.
때문에 자신이 그들에게 뒤떨어지지 않는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하기 위해서는 그도 드래곤을 토벌해야 했다.
‘하지만 드래곤이 없어.’
그는 이를 갈았다. 만약 드래곤 토벌 때 자신도 같이 있었다면 더욱 수월하게 드래곤을 잡을 수 있었을 텐데.
그런데 그 기회가 생겼다.
드래곤의 사체를 이용해 만들어진다는 언데드 드래곤.
그 힘은 미지수다. 피로스야 원래의 드래곤의 힘과 엇비슷할 거라고 주장하고 있지만 상대의 말을 고스란히 믿을 정도로 그는 바보가 아니다.
‘하지만 상관없는 일이지.’
드래곤을 쓰러뜨렸다는 말만 듣고 열렬히 환호를 보내는 어리석은 놈들이라면 언데드 드래곤을 쓰러뜨리는 일에 대해서도 환호를 보낼 것이다.
‘거기에 이건 밸리드의 음모다.’
즉, 밸리드의 음모를 타도했다는 명성도 같이 따라온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득을 잔뜩 볼 수 있는 상황. 저택에 처박혀 운 좋게 위업을 주워 먹은 놈들을 욕하는 것보다 훨씬 나은 일이다.
거기까지 생각이 미친 웨즈컬은 열렬히 피로스의 계획에 찬동했다. 밸리드의 계획에 따른다는 것이 조금 찝찝하긴 했지만, 결국 그의 손에 밸리드가 타도될 것이 아닌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