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6화
그리고 사내는 집을 떠나려 했다.
“잠깐.”
“뭔가 또 할 말이 남았소? 왜, 이번에는 성실성이라도 확인하려 하오?”
“하나 물어 볼 게 있소.”
사내의 빈정거림을 무시하고 웨즈컬은 말했다.
“그래, 호기심이로군. 웃기지도 않는 신뢰보다는 낫겠지. 궁금한 게 뭐요?”
“라라 브라우닝에게 가문의 피해 상황을 말하며 압박하라는 계획.”
그걸 가르쳐준 것이 사내였다.
“고맙다는 말은 필요 없소. 우리도 원하던 것을 얻기 위해 그랬던 거니까”
“어떻게 알고 있었던 거요?”
사내는 웨즈컬을 쳐다봤다.
“그건 라라 브라우닝을 깊이 아는 사람만이 세울 수 있는 계획이오. 솔직히 나는 그 계획이 실패하리라고 생각했소.”
그래서 페이자디루를 시켰다. 물론 가문을 들먹이기에 가장 적절한 인선이란 이유도 있었지만, 실패할 확률이 높다 생각한 것이 더 컸다.
“하지만 계획은 성공했지.”
“그러면 된 것 아니오.”
“어떻게 가족조차 모르는 그녀의 성향을 예측하고 계획을 짰소?”
사내는 웃으며 한마디 했다.
“난 당신의 선생님이 아니오.”
이번에야말로 사내는 떠났다.
건물 안엔 웨즈컬만이 남았다. 그는 낡디낡은 문을 뚫어지게 노려봤다.
“…좋아.”
그의 눈이 섬뜩하게 빛났다.
“어차피 이기는 건 나다. 뭐가 어떻게 된 건지는 모르지만, 네놈들이 어떤 수를 쓰든 간에 결국은 내 앞에서 무너질 테지.”
그건 이미 정해진 운명이나 마찬가지. 웨즈컬은 못내 모를 불안감을 씹어 삼켰다.
* * *
쿵!
더러운 땅바닥에 드래곤의 가죽이 떨어진다. 고작 그 정도 충격으로 어떻게 될 정도로 드래곤의 비늘이나 가죽은 약하지 않았지만, 그것의 가치를 생각해본다면 너무도 거친 취급이었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았다.
“시작하지.”
웨즈컬에게 드래곤의 사체를 사 온 사내, 피로스 블링턴은 부하들에게 말했다.
카르위먼의 추격대에 시달려 얼마 남지 않은 부하들. 하지만 그 끔찍한 사냥에서 살아남은 이들은 말 그대로 역전의 용사들이다. 그의 눈에 짙은 신뢰가 묻어났다.
피로스의 명령에 부하들은 바로 드래곤의 사체에 달려들었다. 이 세상에 몇 없는 귀물을 만지고 있지만 그들의 눈에 욕심은커녕 감탄조차 없었다. 보이는 건 오직 조용한 분노뿐.
“비늘은 생각보다 더 단단하군요.”
“가죽도 마찬가지요.”
“여기에 진을 새기려면 상당한 힘이 필요하겠군.”
“하지만 성력은 무척이나 쉬이 스며듭니다. 왜 전설에 나오는 무구나 아티팩트가 드래곤의 사체로 만들어졌는지 확실히 알겠습니다.”
“그래서, 할 수 있겠나?”
피로스의 말에 여러 가지 의견을 내놓던 부하들이 서로를 한 번 쳐다보더니 굳게 고개를 끄덕였다.
“해 보이겠습니다.”
그들은 비참하게 죽어야 했던 동료를 기억했다.
이건 성전이자 복수다. 위대한 밸르의 분노를, 개처럼 죽어간 동료들의 한탄을 그들의 적에게 증명해야 했다.
할 수 없다는 말은 나오지 않는다. 실패도 용납할 수 없다.
“아주 좋아! 그럼 이제 시작해보지.”
피로스는 드래곤의 사체 옆에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곧이다.’
놈들의 대단함을 증명하는 빛나는 전리품인 드래곤. 피로스는 인정했다. 멍청한 웨즈컬은 못내 그 업적을 깎아내리려 했지만 그는 달랐다. 그들의 위업을 무척 높게 평가했다.
하지만 그 빛나는 위업이 그들의 축제를 망치는 열쇠가 되어 유라스와 도시에 커다란 피해를 입힌다면 과연 저들은 어떤 얼굴을 할까.
생각만으로도 웃음이 나서 참을 수가 없다.
그러자면 반드시 이 계획을 성공시켜야 한다.
피로스는 부하들과 함께 드래곤의 사체를 가공하기 시작했다.
* * *
라라와 한스가 일행이 있던 곳으로 돌아갔을 때, 그곳엔 한 명의 인원이 늘어나 있었다.
“여, 잘 다녀왔냐?”
“지크 님? 여긴 어쩐 일이십니까?”
“라일라가 엘레나, 레오나랑 나가 버려서 쓸쓸하게 혼자서 어슬렁대다 이 녀석들이 있는 걸 발견했지 뭐냐. 할 일도 없겠다 잽싸게 끼어들었지.”
안주 하나를 질겅거리며 웃는 모습이 동네 한량의 모습이 따로 없다.
“불편하냐? 불편하면 일어나 주고.”
“설마요.”
한스와 라라는 다시 자리에 앉았다.
“그래, 라라의 오빠라는 인간이랑 만났다면서?”
다른 일행에게 들은 모양이었다.
호기심을 보이는 지크와 일행에게 라라는 방에서 있었던 일을 설명해줬다. 딱히 숨길 일도 아니었다.
그녀가 드래곤의 사체를 넘겼다는 이야기를 했을 때, 첼시와 피나의 반응은 똑같았다.
“호구야, 바보야? 대체 어느 쪽이야?”
그보다 더 심한 말을 하고 싶었지만 주변에 다른 이들이 있어 가까스로 말을 순화한 것이 분명했다.
라라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녀 나름으로는 마음의 거리낌을 덜어내는 나쁘지 않은 거래였지만, 제삼자의 눈에는 세상 이를 데 없는 멍청이로 보일 거라는 것도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다만, 예상대로 지크의 반응은 달랐다.
“그래?”
딱 그걸로 끝. 그 이후로 술과 안주만 집어먹을 뿐이었다.
“…그걸로 끝인가요?”
철저하게 지크에게 붙기로 결정한 후, 그의 모든 말과 행동에 오로지 긍정으로만 대답하던 첼시가 어이없어할 만큼 지크의 반응은 밋밋했다.
“본인이 좋다면 됐지, 뭐. 남한테 피해주는 것도 아니잖냐.”
“하지만 한두 푼 하는 게 아니잖아요! 아니, 애초에 가격을 붙이는 것 자체가 어처구니없는 물건인데.”
“그럼 더더욱 자기가 원하는 조건대로 넘기면 되겠네.”
“아니, 그러니까 그게….”
뭔가 아니라고 해주고는 싶은데 딱히 지크의 말이 잘못된 것도 아니다. 아닌 말로 자기 물건 자기가 마음대로 처분했다는데 뭐라 한단 말인가.
“그만둬. 그 사람, 우리 상식은 안 통하는 사람이란 건 알잖아.”
“하지만 어쿠스 씨!”
억울해하며 자신이 잘못된 게 아니라는 걸 열심히 설파하는 첼시의 말을 피나는 반쯤 흘려들으면서도 어울려줬다.
그렌과 함께 있을 때는 서로에게 거의 무관심했던 두 사람이 지금은 무척이나 친해 보이는 것이 아이러니였다.
“그래, 네 오빠가 사 갔다고?”
지크는 라라가 드래곤의 사체를 팔았다는 사실 자체보다는 그것을 사 간 페이자디루에게 더 관심이 든 모양이었다.
“네.”
“어떤 놈이냐?”
“음, 한심한 귀족의 전형이라고 해야 할까요?”
“‘능력 없는’이란 칭호까지 붙는 건 아닌가보군.”
“그래도 무력은 꽤 있었으니까요.”
“어렸을 때 대련만 하면 너한테 처맞았다며?”
첼시가 끼어들었다.
“저래 봬도 라라의 재능은 세계에서도 손에 꼽힐 정도다. 웬만한 작자들은 손도 못 쓰는 게 당연하지.”
“하긴, 대단하긴 했죠.”
“윈드네. 네가 본 그 인간은 어떤 놈 같았냐?”
“어라? 제게 물어보시는 건가요? 남매인 브라우닝… 아, 이젠 성을 쓰지 않겠다고 했죠? 라라가 더 잘 알지 않을까요?”
“라라는 꽤 순진한 면이 있으니까. 비열하고 음습한 너라면 다른 면이 보일까 해서 말이야.”
“…혹시 그거 칭찬이신가요?”
“칭찬이겠냐? 뭐, 칭찬으로 듣고 싶다면 그렇게 들어도 상관은 없다만.”
“우쒸!”
첼시가 기분 나쁜 티를 팍 냈다. 면전에서 저런 말을 들었으니 당연한 일. 물론 첼시도 저 말을 부정하진 않지만 원래 진실을 들을 때가 더 기분 나쁜 법이다.
그러나 지크는 그저 눈으로 어서 말하라고 재촉할 뿐이었다.
“…저도 자세히는 몰라요. 방금 처음 본 사람을 어떻게 평가하겠어요. 그저 무지 재수 없는 사람이구나 하는 정도였어요. 브라우닝이 말한 ‘한심한 전형적인 귀족’에 ‘무례한’이란 수식어를 붙여도 될 정도는 말이에요.”
“흠.”
“뭔가 이상한 점이라도 있는 건가요?”
피나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런 건 아니다. 그저 난데없이 드래곤의 사체를 요구했다기에 살짝 흥미가 인 것뿐이야. 그저 귀한 물건이기에 탐을 낸 건지, 아니면 다른 곳에 써먹으려고 했던 건지.”
“한번 알아볼까요?”
당장이라도 움직일 것 같은 한스에게 지크는 고개를 저어 보였다.
“그럴 필요 없다. 뭔가 뚜렷하게 의심이 가는 요소가 있는 것도 아니니까.”
지크는 술을 들이켰다. 정말로 그저 지나가는 말이었던 듯 지크는 그 이후에 말을 꺼내지 않고 술과 음식을 먹었다.
그 자리가 끝났을 때는 꽤 늦은 시간이었다.
첼시, 피나와 헤어지고 일행은 유라스로 향했다. 지크는 조금 더 놀다 가겠다면서 일행에서 떨어져 나왔다.
세 명이서 거리를 걷길 얼마. 스녹이 입을 열었다.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선배?”
“뭐가 말이야?”
“그 페이자디루 브라우닝이란 사람 말입니다.”
라라가 본격적으로 귀를 기울였다.
“나도 이번에 처음 본 사람이라 잘 몰라. 그래도 일단 무례하고 한심한 전형적인 귀족이란 평가는 맞다고 생각해. 그런데 왜?”
“지크 님이 관심을 보인 게 조금 그래서 말입니다. 그 왜, 지크 님의 육감이 그런 건 꽤 잘 잡아내지 않습니까.”
“그 작자가 쓸데없는 일을 꾸미고 있을 거 같다?”
“가능성은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그렇긴 한데….”
한스는 슬쩍 라라의 눈치를 봤다.
“전 괜찮아요. 말했잖아요. 드래곤의 사체를 넘기면서 브라우닝가의 모든 것과 일단락을 지었다고. 차라리 잘됐어요. 일찌감치 끝을 맺어 놔서 말이죠.”
만약 브라우닝가가 어떤 악행에 연루되었다 해도 절대 봐주지 않을 거라는 마음가짐이 물씬 풍겼다.
당사자가 저렇게 말하는데 계속 눈치를 보는 것도 웃긴 일이다. 한스는 스녹에게 대꾸했다.
“그럴 가능성도 없진 않지만, 그렇다고 정말로 그 사람이 뭔가 일을 꾸미고 있다고 확신할 수도 없어. 지크 님의 육감도 모든 걸 다 맞히는 건 아니잖아. 정말로 예언에 가까운 그런 걸 가지고 있었다면 지금껏 지크 님이 나쁜 놈들에 대한 단서를 찾는답시고 고생을 하진 않으셨겠지.”
“그렇긴 하죠. 바로 때려잡으셨겠지.”
“아니, 오히려 난 시간을 들여 상대를 더 괴롭힐 수 있는 계획을 짜실 거라고 생각한다만.”
“…그 말이 더 일리가 있네요.”
세 명의 머릿속에 히죽거리며 계획을 짜내려 가는 지크의 모습이 떠올랐다.
“정말로 그냥 드래곤의 사체가 탐나서 그랬을 수도 있어. 솔직히 좀 희귀한 물건이냐.”
“마탑에서도 제발 팔아달라는 사람들이 정말 많았습니다. 말마따나 전 재산을 준다는 사람들도 많았죠.”
게다가 그런 사람들의 전 재산은 한두 푼 정도가 아니었다. 스녹이 드래곤의 사체의 가치를 완벽히 이해한 순간이었다.
“넌 확실히 고생 좀 했을 것 같다. 마법사들이 환장할 재료 아니냐.”
“드웨인가에서 보호를 받는 상황에서도 그랬는데, 만약 그렇지 않았다면 그 몇십 배는 더 권유를 받았을 겁니다. 실력 행사를 할 사람도 분명히 있었을 테고요.”
쿠!
노웸의 울음이 설득력을 높였다.
“어쨌든 지금은 확실한 게 아무것도 없다는 거야. 하지만 지크 님이 관심을 가지신 이상, 만약 정말로 그 인간이 뭔가를 하려 한다면 지크 님이 눈치를 채시겠지. 그리고 그 뒤는… 알지?”
스녹과 라라의 표정이 일순 어색해졌다. 노웸은 스녹의 어깨에 얼굴을 묻고 앞발로 머리를 감싸 안았다.
“본인을 위해서도 그냥 드래곤 사체를 가지고 간 것으로 만족했으면 해. 그래도 라라의 오빠니까 말이야.”
“정말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괜한 욕심 부리지 않길 바라야겠네요.”
세 명은 지크의 불쌍한(?) 희생자가 또 나오지 않기를 바랐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