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5화
방금 전까지의 소란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듯 방 안이 일순간에 조용해졌다.
침묵을 깬 건 한스였다.
“왜 팔았습니까? 처음에는 별로 팔 생각이 없어 보였는데요.”
왜 헐값에 팔았냐든가 그 귀한 걸 굳이 왜 넘겼냐든가 같은 타박하는 말이 아니었다. 그저 순수한 의문일 뿐.
“괜찮나요? 드래곤의 사체를 저렇게 헐값에 넘겼는데도?”
“라라의 물건입니다. 어떻게 처리할지는 주인의 마음이죠. 딱히 속았다거나 드래곤 사체의 중요성을 몰랐던 것도 아니고요.
물건의 가치야 사람과 시간마다 다르니 그 순간에 라라에게 드래곤의 사체는 그 정도의 가치였다, 그뿐입니다.
그저 왜 드래곤 사체의 가치가 폭락하게 되었는지 궁금할 뿐이에요. 말하기 싫으면 말하지 않아도 되고요.”
“대단한 이유는 아니에요. 일단 저자의 말에도 일리는 있었어요. 브라우닝가의 생활은 분명 괴로웠지만 물질적으로는 부족함이 없었죠.
괴롭힘이라고는 해도 직접적인 폭력을 가한 것도 아니고 검술도 배울 수 있었어요. 원하는 물건은 바로바로 얻을 수 있는 삶. 그런 삶을 사는 사람이 이 세상에 몇이나 있을까요?”
“아무리 몸이 편하다 해도 마음이 편하지 못하면 사람은 병드는 법입니다.”
“알아요. 저도 그걸 견디지 못해서 뛰쳐나온 거기도 하고요. 하지만 세상을 여행하면서 마음은커녕 몸도 불편한 상황에 처해 있는 사람들을 많이 봤잖아요.
그런 삶에 비하면 어렸을 때의 제 삶은 분명 풍족했어요. 그건 분명 브라우닝가에서 태어났기 때문이에요. 그리고 제가 뛰쳐나옴으로써 브라우닝가가 난처한 상황에 빠진 것도 사실이고요.”
“빚을 갚기 위해서입니까?”
“그런 거창한 건 아니에요. 정확히 말하면 끝맺음이죠. 브라우닝가와의 은원을 완전히 끊어버릴 끝맺음.”
“자기만족이군요.”
“실망인가요?”
“전혀요. 사람들의 행동은 모두 자기만족을 위한 것이 아닙니까. 남에게 피해를 준 것도 아니고, 자기 마음이 편하자고 한 행동에 누가 뭐라 할 수 있겠습니까.”
“지크 님 같은 말이네요.”
“제자니까요.”
“후후, 그렇죠. 솔직히 지크 님의 행동에 영향을 받은 것도 있어요. 그분도 스틸월 백작가와 완벽히 끝을 맺었잖아요?”
모든 은원을 정리하고 앞으로 나아간 지크의 모습에, 그와 비슷한 과거를 안고 있었던 라라는 제법 충격을 받았었다.
“자기만족은 충분히 되셨습니까?”
“네. 예전엔 만약 브라우닝가와 적대하게 되었다면 그게 분노든 슬픔이든 감정에 휩쓸렸을 거예요. 하지만 지금은 아니에요.”
그녀의 눈이 서늘하게 빛났다.
“아무런 감정 없이 적으로서 죽일 수 있어요.”
아무리 남보다 못한 자들이라지만 피로 이어진 자기 가족을 망설임 없이 죽일 수 있을 거라는 흉흉한 얘기. 그러나 한스는 개의치 않았다.
“축하합니다.”
오히려 그녀의 결정을 응원했다.
“자기만족이 되었다면 됐습니다. 사람 마음이란 게, 온갖 재보를 퍼부어도 그 자기만족을 할 수 없는 사람도 많으니까요.”
괜히 마음의 병이라는 것이 생기는 게 아니다. 그리고 마음의 병은 보통 그게 가벼운 것이든 무거운 것이든 치료하는 것이 굉장히 힘들다.
“귀한 물건이라고는 해도, 물건 하나를 넘겨서 마음의 안정을 되찾았다면 충분히 가치 있는 거래입니다.”
“역시 그렇죠?”
라라는 두 팔을 쭈욱 펴 기지개를 켰다. 마치 오랜 시간 얹어 왔던 짐을 덜어낸 것 같은 가벼움이 느껴졌다.
“슬슬 우리도 가요. 아직 윈드네와 어쿠스가 남아 있으려나 모르겠네요.”
“저도 스녹을 챙겨야겠습니다.”
둘은 일어섰다.
“이제 저도 브라우닝이라는 성은 더 이상 쓰지 말아야겠어요. 지금까지는 익숙해서 썼는데, 이렇게 비싼 물건까지 주고 인연을 끊은 가문의 성을 계속 쓰는 것도 좀 그러네요.”
“제게는 별로 달라지는 게 없군요.”
이미 라라를 이름으로 부른 지 꽤 되는 한스다. 이제는 오히려 브라우닝이라는 호칭이 어색했다.
“저도 새로운 성을 찾아봐야 할까 봐요. 그러고 보니 한스도 성을 붙여야 하지 않나요?”
“저는 성이라는 것 자체가 어색해서 말입니다.”
지금이야 무력이든 명성이든 세계에서 손에 꼽히는 존재가 됐다지만 한스의 원래 신분은 백작가의 하인이었다.
게다가 지크라는 초대형 거물 옆에서 실력을 쌓은 터라, 객관적으로 자신이 대단하다는 것은 이해하고 있었지만 심정적으로는 여전히 예전의 소시민적인 감각이 많이 남아 있었다.
“그럼 같이 찾을까요?”
“그것도 좋죠.”
두 사람 다 직접적으로 말을 꺼내지는 않았지만, 그 찾아낸 성은 두 사람이 같이 사용하게 될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숙박비는 어떻게 됐을까요? 일단 그 정도 헐값으로 드래곤의 사체를 샀다는 걸 감안하면, 양심이 있다면 숙박비 정도는 그 사람이 내고 가는 게 맞을 텐데 말입니다.”
“그 인간을 직접 봤잖아요. 양심이란 게 있는 것 같았나요?”
“음, 그럴 사람으로 보이지는 않았죠.”
두 사람의 예상은 정확히 들어맞아 그들은 숙박비를 치러야 했다.
그들에게는 잃어버려도 상관없는, 몇 푼 되지 않는 돈이었지만 페이자디루의 인성에 새삼 감탄하기에는 충분했다.
* * *
웨즈컬은 눈앞에 놓인 물건을 보고 감탄했다.
“이게….”
조심스럽게 손을 가져다 대본다. 단단한 감촉이 느껴졌다.
“어떻습니까, 공자님.”
“잘했소! 아주 잘했소!”
그는 페이자디루를 입에 침이 마르도록 칭찬했다. 드래곤의 사체를 가져오는 임무를 훌륭히 완수한 인물에게는 그럴 자격이 있었다.
페이자디루의 입이 귀에 걸렸다. 하지만 그는 답지 않은 겸양의 말을 내뱉었다.
“이게 다 공자님 덕분입니다! 공자님께서 제게 방도를 알려주시지 않았습니까.”
“설혹 그렇다 해도 그대의 공이 사라지는 건 아니지.”
“그렇게 말씀해 주시니 정말로 감사합니다.”
웨즈컬은 가죽을 들어 올렸다. 꽤 묵직한 감촉이 느껴졌다.
“한데 이게 전부요? 내가 알기로 그녀가 차지한 사체의 양은 이것보다 더욱 많은 것으로 아는데.”
“그, 그것이….”
지금껏 환히 웃고 있던 페이자디루의 얼굴이 굳어졌다. 안절부절못 하며 웨즈컬의 눈치를 본다. 그것만으로도 웨즈컬은 어떻게 된 일인지 깨달을 수 있었다.
“그녀가 판 것이 이것뿐이라는 거군.”
“참으로 욕심 많은 녀석입니다. 지금은 완전히 인연을 끊었다지만, 저 녀석이 저와 같은 피를 가지고 있는 것이 무척 부끄러울 따름입니다.
그래도 값은 최대한 깎아 냈습니다. 가지고 간 돈만으로 어찌어찌 구입을 했죠.”
“그렇소?”
그가 사용하겠다고 한 비용조차 드래곤의 사체를 구입하는 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아니, 애초에 돈이 있다고 해도 구할 수 없는 것이 아닌가. 그 정도면 후려친 정도가 아니라 거저먹은 것이나 다름없다.
“그렇다면 더더욱 잘했군.”
‘됐어!’
페이자디루는 속으로 환호를 내질렀다.
웨즈컬이 저 정도로 기뻐하는 만큼, 앞으로 그의 앞길은 탄탄할 것이다.
‘어리석은 동생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니.’
세상일은 정말 알 수가 없었다. 그러나 그가 라라에게 고마움을 느끼는 건 결코 아니었다.
“수고했네. 이제 숙소로 가 푹 쉬게나. 앞으로의 일은 염려하지 말고. 내가 자네 뒤를 확실히 봐줄 터이니.”
“감사합니다!”
싱글싱글 미소를 띤 채 페이자디루는 방을 나갔다.
웨즈컬은 가죽을 내려놨다.
‘설마 정말로 손에 넣을 수 있을 줄이야.’
그는 드래곤 사체의 가치를 정확히 파악하고 있었다. 당연히 지금 이 거래가 얼마나 말도 안 되는 것인지도 잘 알고 있었다.
페이자디루야 자신의 동생을 너무도 얕보고 있어 이런 거래가 충분히 가능하다고 생각하는 모양이다. 하지만 그는 도저히 이 거래의 성공을 믿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성공했지.’
만약 이 계획이 동생의 행동 양식을 잘 꿰고 있는 페이자디루의 머리에서 나온 것이라면 납득할 수 있었다.
말마따나 세상엔 온갖 특이한 생각과 사상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 있지 않은가. 라라도 그런 부류라고 생각하면 된다.
그러나 놀랍게도 이 계획은 웨즈컬이 페이자디루에게 알려준 것이었다.
전 약혼자인지라 그가 라라의 성격을 확실히 꿰고 있었던 것일까?
그것도 아니었다. 그도 다른 이에게 이 계획을 조언받은 것에 불과했다.
‘녀석들은 오라비인 페이자디루도 몰랐던 브라우닝의 행동 양식을 어떻게 알고 그런 계획을 조언해 줬을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답은 나오지 않았다.
‘어쨌든 목표하던 걸 손에 넣었다. 그걸로 됐다.’
그들이 스토커 같은 짓을 해 라라의 성격을 알아냈든, 아니면 미래의 정보를 가져왔든 알 바 아니다. 그는 그저 자신의 길을 가면 그만이었다.
‘그들을 만날 시간이군.’
* * *
밤이 깊었다. 웨즈컬은 야음을 틈 타 밖으로 나왔다. 축제의 여파로 거리에는 아직까지 사람들이 나돌아 다녔다. 불콰하게 취한 무리들을 지나쳐 그는 뒷골목으로 들어갔다.
카르위먼의 총본산인 유라스가 있는 도시인 터라 다른 도시들보다는 꽤 깨끗하고 안정되어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뒷골목은 뒷골목. 다른 곳과는 달리 음습한 분위기가 주변을 조여댔다.
진창길 옆으로 허름한 건물들이 서 있다. 그는 그중 한 건물로 들어갔다.
끼이이익!
녹슨 경첩이 비명을 지른다. 불쾌한 냄새에 웨즈컬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썼다.
“어서 오시오.”
웨즈컬은 고개를 돌렸다. 거미줄이 덕지덕지 붙어 있는 더러운 테이블에 한 사람이 앉아 있었다.
“오랜만이구려. 차 한잔하시겠소?”
“필요 없소.”
더러운 데다 군데군데 이까지 나간 찻잔을 보고 그는 고민도 없이 내뱉었다.
권유한 자는 자기 찻잔을 살폈다.
“이거 참. 귀족님에게 권할 건 아니었군. 미안하게 되었소.”
“나는 쓸데없는 대화를 하러 온 것이 아니오.”
웨즈컬은 마법 상자에서 드래곤의 가죽과 비늘을 꺼내 테이블에 내던지듯 올려놨다. 잔뜩 쌓여 있던 먼지가 훅 하고 퍼졌다.
찻잔 위로 먼지가 들어갔지만 사내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의 눈이 드래곤의 비늘과 가죽에 쏠렸다.
“정말로 드래곤의 사체로군.”
“정확히는 비늘이 붙어 있는 가죽이오.”
사내는 물건을 살폈다. 비늘을 두드려 보기도 하고 가죽을 잡아당겨 보기도 했다.
“좋군! 아주 좋아!”
그는 가죽을 들었다.
“약속대로 이건 내가 가지고 가겠소.”
사내가 가죽을 마법 상자에 넣었다. 웨즈컬은 제지하지 않았다. 하지만 썩 기분이 좋진 않은지 눈가가 살짝 꿈틀거렸다.
“혹시나 해서 말하건대, 쓸데없는 생각을 한다면….”
“왜, 내가 이걸 가지고 도망이라도 칠 것 같소?”
“사람 일은 모르는 법이지.”
“그리 의심되면 거래를 끊으면 되는 일 아니오.”
그러며 사내는 가죽을 꺼내 다시 웨즈컬에게 내밀었다.
“…갖고 도망가지 않는다는 확답이면 충분하오.”
“아, 그래그래. 당신 말이 맞소. 나는 이걸 갖고 도망가지 않을 거요.”
“…지금 나랑 장난하잔 거요?”
누가 봐도 건성인 사내의 태도에 웨즈컬이 분노를 표출했다. 그러나 사내의 태도는 변함이 없었다.
“장난?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줬잖소. 설마 성의가 없다고 그러는 건 아니겠지?
우리 사이에 성의를 표한다고 신뢰가 생기오? 그런 어린애 장난 같은 행동에 무슨 의미가 있다고. 게다가 우리 사이에 신뢰라는 단어만큼 신뢰할 수 없는 것도 없지 않소?”
“…….”
위즈컬은 대꾸하지 못했다. 그 모습을 보고 사내는 킬킬댔다.
“너무 걱정은 하지 마시구려. 우리의 목표는 같지 않소. 적어도 그걸 이룰 때까지는 배신하지 않을 거요. 어설픈 신뢰보다 그게 훨씬 더 낫지.”
“…그렇지.”
“그럼 그렇게 알고 나는 가보겠소. 축제일까지도 얼마 안 남았으니 어서 일을 해야지.”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