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4화
페이자디루는 잠시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았다. 한스의 말을 인정했다거나 하는 건 당연히 아니었다.
이런 모욕적인 말을 면전에서 대놓고 들어 본 적이 없으니 판단 능력이 일순간 떨어진 것뿐이었다.
당연히 그 순간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시뻘게졌다.
“이, 이, 이 새끼가!”
페이자디루가 벌떡 일어났다. 의자가 큰 소리를 내며 바닥에 굴렀다.
“왜 그러십니까?”
“왜? 왜 그러냐고? 그걸 몰라서 물어?”
한스는 고개를 갸웃거렸다. 그리고 라라를 향해 물었다.
“왜 저러는 겁니까? 딱히 제 말에 화를 낼 요소는 없던 것 같은데요.”
“아, 그게….”
라라는 머뭇거렸다. 한층 더 발광하기 시작하는 페이자디루와 순진한 눈망울을 또륵또륵 굴리는 한스의 모습이 참 대비됐다.
“한스의 말에 저 사람을 조금 거슬리게 할 요소가 있긴 했어요.”
“조금? 조금이라고 했냐!”
대놓고 모욕적인 언사를 했는데 ‘조금’이라는 수식어를 붙이다니. 라라의 말도 페이자디루에게는 충분히 모욕적이었다.
하지만 역시 한스에 비할 바는 아니었다.
“그건 이상하군요. 제가 한 말은 사실밖에 없었을 텐데요.”
“뭐!”
한스가 지크에게 상당히 물들어 있다는 건 알고 있었고, 여행을 하면서 그 편린을 보기도 했다. 게다가 지크와는 달리 그는 의도적으로 상대를 긁어대는 건 아니었다.
‘본능적으로 비꼬는 상대는 선택하는 것 같아 그나마 다행이긴 한데.’
그래도 한스가 그 지크의 제자라는 걸 확실히 알 수 있게 되는 일화였다.
여전히 페이자디루는 버럭버럭 화를 내고 있고 한스는 이해를 못 하겠단 반응이다. 그러면서도 내뱉는 말 하나하나가 예술적으로 페이자디루를 긁어대고 있다.
말려야 하는 상황이다. 이대로 갈등이 커져 정말로 물리적 충돌로까지 이어진다면 원활한 수습은 완벽히 불가능해질 테니.
하지만 저 가슴 아래에서 꿈틀거리는 어떤 감정이 그녀의 행동을 막았다.
입꼬리가 씰룩인다. 심부 저 아래에서 터져 나오려는 어떤 것을 그녀는 입술을 지그시 물어 막았다.
그러나 참을 수 없었다. 거센 폭우에 힘없이 허물어지는 연약한 둑처럼, 결국 그녀는 올라오는 감정을 크게 쏟아내고 말았다.
“하하하하하하하! 하하! 하하하하하하하!”
한스와 페이자디루의, 한쪽만 열이 잔뜩 받은 불공평한 말다툼이 뚝 멈췄다. 둘의 당황한 시선이 자신에게 쏠리는 걸 라라는 느꼈다. 하지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흘러내리는 눈물까지 닦아내며 라라는 너무도 크게 웃어 젖혔다.
“뭐야! 미치기라도 한 거냐!”
“왜 그래요?”
전혀 다른 어조와 내용의 두 목소리가 들린다.
그녀는 자연스레 첫 번째 목소리는 무시했다.
“하, 한스가 하는 말이, 너무 웃겨서…!”
“응? 역시 제가 한 말이 뭐가 좀 이상했습니까? 그저 진심으로 궁금한 점을 물어봤을 뿐인데요?”
“이 새끼가!”
“아하하하하하!”
“넌 뭐가 웃기다고 처웃고 있어!”
그러나 페이자디루의 분노는 지금의 라라에겐 오히려 풍미 있는 조미료밖에 되지 않았다. 사정없이 일그러진 그의 얼굴에 웃음이 더욱 터진다.
그녀의 재능이 자신보다 훨씬 더 뛰어나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그녀를 그토록 괴롭히던 오라비. 가문을 이을 장남이 더 소중하기에 부모도 라라의 편을 들어주지 않았다.
물론 본격적으로 검을 잡은 지 얼마 안 되어 순식간에 자신을 추월해버린 라라에게 감히 대놓고 덤벼들지는 못한 페이자디루지만, 가문의 후계자라는 자리는 굳이 무력을 사용하지 않더라도 충분히 라라를 괴롭힐 수 있는 지위였다.
당연히 그에 대한 라라의 감정이 좋을 리 없었다.
그런 얄밉기 그지없는 페이자디루가 한스의 모욕에- 본인은 전혀 그럴 의도가 없지만- 분개하고 있었다. 그 모습이 너무 통쾌했다.
후작가의 후계자인 그가 어디서 저런 모욕을–다시 말하지만 본인은 ‘전혀’, ‘절대로’ 그럴 의도가 없었다.- 당해 봤겠는가. 게다가 한스에게 악의가 없다는 사실을 페이자디루도 깨닫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래서 오히려 더 화를 내고 있는 것이고.
‘아, 정말로 사랑해요!’
안 그래도 흘러넘치던 한스에 대한 애정이 더욱 증폭된 느낌이었다.
“그만 닥치지 못해!”
그에 비해 아무래도 좋을 오라비의 욕설 따위는 들판에 나부끼는 산들바람만큼이나 의미가 없었다.
“아무리 그래도 너무하지 않습니까? 동생 아닙니까. 어렸을 때 일방적으로 얻어맞아 오빠의 권위 따위 지나가는 개에 주려 해도 없다지만 어린 시절 일인데 슬슬 풀 때도 됐잖아요. 쪼잔하고 옹졸하고 쩨쩨한 인간이나 그런 짓을 하는 겁니다.”
“닥치라고!”
“하하하하하하하하!”
한스에게 자신의 과거에 대해 이야기한 건 그녀가 한 선택 중에서도 수위에 들어갈 것이 분명했다. 조심스럽게 ‘최고가 아닐까’란 생각까지 들었다.
하지만 영원히 계속될 것 같은 그녀의 웃음도 서서히 잦아들었다. 지금까지 쌓아둔 앙금을 폭발시키기도 했고 무엇보다 페이자디루의 반응이 정말로 한계 직전까지 가 있었던 것이다.
“이제 됐어요, 한스. 그만… 풉, 그만해요.”
아직도 간간이 새어나오는 웃음을 어떻게든 참으며 그녀는 한스의 옷자락을 당겼다. 한스도 별다른 의문 없이 순순히 물러났다. 하지만 여전히 그 순진한 표정을 바꾸지 않아 끝까지 페이자디루의 속을 긁어댔다.
한스의 폭언과 라라의 폭소는 일단 끝이 났지만 붉어진 페이자디루의 얼굴은 가라앉지 않았다. 당장이라도 두 사람을 죽여버리고 싶다는 감정이 물씬 풍겨 나왔다.
물론 라라는 신경 쓰지 않았다.
“그래, 그 이상의 거래 조건은 가지고 오지 않으셨다고요?”
“…이 이상 내 인내심을 시험하지 마라.”
“단순한 확인일 뿐이에요. 별로 당신의 인내심을 시험할 생각은 없어요. 그럴 필요도 없고요.”
라라는 가볍게 고개를 끄덕였다.
“알았어요. 팔게요.”
“뭐?”
페이자디루의 눈이 커졌다. 설마 지금 분위기에서 팔겠다는 말이 나올 줄은 몰랐던 것이다. 한스도 제법 놀란 기색이었지만 참견하려는 움직임은 없었다.
“팔겠다고요. 필요 없나요?”
“…혹시 고작 그걸로 내 분노를 진정시킬 생각이라면 턱도 없는….”
“안 살 생각이면 말고요.”
라라는 망설임 없이 일어섰다.
“자, 잠깐 기다려!”
화가 난 상황에서도 자신의 임무를 잊어먹은 건 아닌지 페이자디루는 급히 라라를 붙들었다. 라라는 그를 차가운 눈초리로 쳐다봤다.
“상황 판단 똑바로 해요. 나는 팔 이유가 없어요. 드래곤의 사체를 반드시 사야 하는 건 당신이죠. 당신의 분노를 진정시켜? 그런 것 따위 관심도 없어요. 말마따나 당신의 분노가 내게 무슨 불이익을 줄 수 있죠?”
“너 이…!”
“살 거예요, 말 거예요?”
“…….”
페이자디루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차마 여기서 자존심을 내세울 순 없었다. 왕국과 후작가 그리고 자신의 미래를 위해서도 꼭 드래곤의 사체를 가져가야 했다.
“…사마.”
“좋아요.”
라라는 마법 상자를 꺼내 드래곤의 사체를 꺼냈다.
페이자디루와 호위의 시선이 바로 그것에 집중됐다.
“…이게, 드래곤의 사체.”
바닥에 널찍이 펼쳐진 그것은 묘한 광택을 뿜어내고 있다.
라라가 꺼낸 것은 비늘이 다닥다닥 붙어 있는 드래곤의 가죽 일부였다.
비늘은 척 보기만 해도 무척이나 단단해 보인다. 마력을 받아들이고 증폭시키는 능력도 탁월해 저것으로 무구를 만든다면 기사든 마법사든 탁월한 효과를 보일 것이었다. 게다가 비늘이 달려 있는 가죽도 충분히 질기고 단단했다. 비늘에는 없는 유연성이 있기 때문에 비늘과는 차별화하여 사용할 수 있다.
무구와 아티팩트의 재료로 이만큼이나 매력적인 물건도 없다. 물론 현재 유일한 드래곤의 부산물이라는 희귀성도 그 매력을 한층 더 배가시켰다.
페이자디루가 저도 모르게 드래곤의 비늘을 쓰다듬었다. 뇌리 한 구석이 짜릿했다.
“좋아, 아주 좋아!”
방금 전까지 극도로 성을 내던 모습과는 달리 그의 얼굴이 헤벌쭉해졌다.
“당장 가지고 가마!”
“약속했던 돈부터 주시죠.”
“물론이다. 약속을 어길 생각은 없어.”
드래곤의 사체에 비하면 푼돈밖에 안 되는 액수를 주면서 마치 대단한 대가를 내미는 것 마냥 거드름을 피우는 꼴이 우습다. 라라는 페이자디루에게 막대한 돈이 든 자루를 건네받았다. 그리고 내용을 확인하지도 않고 마법 상자 안에 던져 넣었다.
“확인하지 않는구나. 그래, 내가 액수를 속일 리 없지. 마지막엔 꽤 기특하게 행동하는군.”
“어차피 물건에 비하면 형편없는 대가예요. 몇 푼 정도 덜 받는다고 차이가 있을까요.”
“…끝까지 건방지구나.”
“우리 사이에 예의를 차리는 게 더 정신 나간 짓이죠. 볼일 다 보셨으면 물건 챙겨서 그만 나가주시겠어요?”
라라가 손가락으로 문을 가리켰다. 어차피 더 이상 라라에게 볼일은 없다. 페이자디루는 드래곤의 사체를 마법 상자 안에 넣었다.
“잠깐.”
그가 라라를 쳐다봤다.
“이게 네 드래곤 사체의 전부더냐?”
“아뇨.”
드래곤은 토벌의 공적대로 나눠 가졌다. 라라의 공적은 작진 않지만 그렇다고 대단히 큰 것도 아니다. 때문에 라라에게 배정된 비율도 그리 대단치는 않았다. 다만 비율이 그렇다는 것뿐, 드래곤의 크기를 생각하면 절대량은 충분히 풍족했다. 고작해야 커다란 카펫 정도 크기의 가죽과 거기 딸려 있는 비늘이 그녀가 소유하는 것 중 일부일 정도로는.
하지만 라라가 내놓은 것만으로도 페이자디루가 제안한 금액보다 까마득하게 높은 가치를 가지고 있는 건 사실이다. 애초에 시중에 돌아다니지도 않아 팔아준 것만으로도 감사해야 한다.
그러나 페이자디루가 이제 와 그런 상식적인 판단을 한다면 오히려 더 이상한 일이었다.
“그럼 나머지도 전부 내놓아야지, 뭐 하는 거냐!”
“설마 제안한 금액이 제가 가진 드래곤의 사체 전부를 말하신 거였나요?”
“당연하지!”
말을 나누면 나눌수록 상식을 초월하는 사고방식이다. 이미 미련이라고는 전혀 없지만 라라가 본능적으로 미래의 브라우닝가는 괜찮을까 생각을 할 정도였다.
“지금 건네드린 것만 해도 분에 넘쳐요. 그걸로 만족하세요.”
“웃기지 마라! 그런 헛소리가 통할 것 같으냐!”
“그럼 거래 무를까요? 전 상관없는데요.”
“그러니까 네가 가진 걸 전부…!”
“당신이야말로 헛소리 마요.”
지금껏 페이자디루의 말을 그래도 조용조용 받아주던 라라가 처음으로 안색을 굳혔다.
“어차피 말이 통하지 않을 테니 옳고 그름 같은 걸 따지진 않을 게요. 당신에겐 두 가지 선택지가 있어요. 하나, 지금 챙긴 물건만을 가지고 조용히 떠난다. 둘, 거래를 무른다. 전 이 두 가지 외의 행위를 할 생각은 절대 없으니 알아서 정하세요.”
“그런 말도 안 되는 일을 인정할까 보냐!”
“그럼 어쩔 생각이시죠? 힘으로 뺏으시겠어요? 아니면 바깥에서 제 불공평함을 호소하시겠어요? 좋을 대로 하시죠.”
페이자디루는 대꾸할 수 없었다. 힘으로 뺏는 건 일단 논외다. 카르위먼의 중심에서 그 정도의 소란을 일으킬 수는 없다. 다른 이에게 호소하는 것도 마찬가지. 아무리 지금껏 실컷 떼를 쓴 페이자디루라도 여론이 자기에게 유리하게 움직일 거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던 것이다.
숨을 거칠게 들이쉬던 페이자디루는 결국 몸을 돌렸다.
“욕심이 덕지덕지 붙은 년 같으니라고. 대가는 방금 준 돈으로 끝이다. 네가 사체 일부만 줬으니 나도 대가의 일부만 준다 해도 불만은 없겠지.”
“좋을 대로 하세요.”
어차피 정당한 대가 같은 건 바라지도 않았다.
“다만 명심하세요. 이걸로 나와 브라우닝가의 인연은 전부 끝났다는 걸.”
“내가 하고 싶은 말이다!”
페이자디루는 거칠게 문을 닫고 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