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3화
그러나 한스는 그 말을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다. 그저 한결 깊은 눈으로 눈앞의 상황을 지켜볼 뿐이었다.
“하지만 걱정 말거라. 우리도 맨입으로 달라고 할 생각은 없으니.”
“그것참 다행이군요.”
팔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저 오크보다 한결 더 머리가 빈 것 같은 오라비의 입에서 나올 대가라는 것이 더 궁금했다.
“무슨 대가를 주실 건가요?”
“돈.”
그 돈이 있어도 사지 못하는 것이 드래곤의 사체다. 실제로 라라는 드래곤의 사체가 거래되었다는 사실은 들어 본 적이 없다.
세계의 관심이 집중된 보물인 만큼 만약 거래가 있었다면 적어도 소문쯤은 돌았을 것이건만.
그만큼 드래곤의 사체는 귀했다.
만약 돈으로 산다면 정말로 산만큼 많은 금화가 필요할 것이다. 하지만 페이자디루의 태도를 보건대 그만한 돈을 줄 것처럼 보이진 않았다.
그리고 예상대로 페이자디루가 제시한 금액은 입이 떡 벌어질 만한 것이었다.
안 좋은 쪽으로.
“…고작 이 정도요?”
“고작이라니! 네가 간이 부었구나! 이 정도의 돈이라면 성을 하나 살 수 있어!”
그리고 드래곤의 사체는 성 몇 채로도 살 수 없다.
“그래도 나름 돈은 많이 모았네요. 아무리 브라우닝 후작가라도 이런 돈을 일시금으로 지불할 정도로 여유가 넘쳐나진 않을 텐데요.”
“당장 모두 줄 수는 없다. 일부 돈을 현금으로 지급하고 나머지는 10년 내에 모두 완납하마.”
그것도 대부분은 외상인 모양이었다.
“…거래할 생각이 있으신가요?”
“욕심이 넘치다 못해 호수 하나 정도는 가득 메우겠군. 뭔가 또 원하는 거라도 있느냐?”
“거래를 원하는 건 당신이지 내가 아니에요. 내 구미가 당기는 걸 당신이 제시를 해야죠.”
“그러니까 말했잖느냐. 네 상상을 초월할 만한 금전을 준다고.”
라라는 저도 모르게 코웃음을 쳤다.
그녀가 같이 여행을 했었던 지크 파티를 생각하면 저 돈이 상상을 초월한다는 수식어를 붙일 수 있는지도 의심스러웠다.
가진 재산도 상당하거니와 다른 이들은 구하는 것조차 어려운 미스릴, 오리할콘 같은 희귀 금속을 길가의 돌멩이처럼 꺼내던 게 바로 지크 일행이었던 것이다.
저 정도 돈으로 유세를 떠는 상황이 가소로워 보일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한 번에 준다고 하는 것도 아니지 않은가.
“고작 그 정도로 살 수 있는 게 아니에요. 그리고 별로 상상을 초월할 금액도 아니고요.”
뒤에 있던 한스도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하지만 페이자디루는 생각이 다른 모양이었다.
“…네가 가문에 끼친 폐가 얼마만 한지는 아느냐?”
“고작해야 계집애 하나 뛰쳐나간 걸로 무슨 대단한 폐까지. 무엇보다 당신에게는 무척이나 속 시원한 결과였을 텐데요?”
“건방진 동생 하나 없어진 거야 개인적으로는 기쁘기 그지없었지. 하지만 네게 약혼자가 있던 건 기억나느냐?”
“그런 적도 있었죠.”
“그라셰인 공작가의 자제였다. 너에게는 무척 과분한 분이었지. 그리고 그라셰인 공작가는 미프틸 왕국에서도 굉장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 가문이고. 그런 가문과 일방적으로 약혼을 파기해야 하는 상황이 되어 버렸으니, 우리 가문이 얼마나 곤욕을 치렀을지는 모자란 너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을 거라고 믿는다.”
“그래서 그 대가로 드래곤의 사체를 내놓으라?”
“계속 말했지만 정당한 가격을 지불하고 구입하겠다는 거다. 네 녀석의 과오를 생각하면 공짜로 넘긴다고 해도 할 말이 없겠지만.”
아마도 여기 지크가 있었다면 이미 입꼬리를 비틀고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상대의 어긋난 상식을 친히 수정해주기 위해 입을 열었을 터.
물론 그 친절이 상대의 이득이 된 적은 한스가 알기로 한 번도 없었다.
지크를 공경하고 존중하는 한스였지만 지크의 그 고약한 취미는 도저히 이해하지 못하겠다고 평소에도 생각하는 바였다.
물론 그 라일라조차 포기해버린 일을 자신이 나서 그만두라 어쩌라 할 주제넘은 생각은 꿈도 꾸지 않았지만, 지크를 반면교사 삼아 언행을 조심하는 정도는 충분히 하고 있었다.
한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그때까지도 눈앞의 상황은 변하지 않았다. 라라는 기가 막힌 건지 제대로 말을 못 하고 있었고, 그런 라라의 모습이 마치 자신의 수준 높은 웅변에 감탄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듯 페이자디루는 또 다른 말들을 떽떽대고 있었다.
‘참견하자.’
웬만하면 입을 다물고 있으려 했건만 눈앞의 상황을 방치할 순 없어 보였다. 말마따나 그는 라라의 연인이 아니던가.
게다가 그 이전에 그녀의 동료이기도 했다. 지크의 파티 일원이든 세간에 유명한 드래곤 슬레이어나 밸리드 토벌자든.
하지만 조금 전 지크의 언행에 대한 비판적 생각을 한지라 상당히 신중하게 말을 골랐다.
그리고 당당히 개소리를 쏟아내고 있는 페이자디루를 향해 입을 열었다.
“끼어들어서 죄송합니다만, 혹시 당신은 드래곤 사체에 대한 가치를 정확히 알고 그런 말을 하시는 겁니까?”
페이자디루는 갑자기 참견하기 시작한 한스의 행동에 인상을 찌푸렸다. 누가 봐도 기분이 상한 모양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대꾸를 해줬다. 라라를 몰아붙인 자신의 멋진 말발에 자신감을 가진 것 같았다.
“물론이오. 하지만 아무리 그 가치가 높다고 하더라도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의 은혜와 풍족한 어린 시절을 보내게 해 준 가문의 공적보다 높다고 할 순 없소. 그리고 내 어리석은 여동생은 그 모든 것을 짓밟았지. 그것을 고작 물건 하나로 용서해 준다고 하는 거요. 오히려 우리 쪽이 더 손해를 보면 보았지, 꿀릴 거라고는 생각하지 않소.”
“그렇게 생각하시는군요.”
당장에 개소리하지 말라고 소리치고 싶었지만, 방금 전에 지크처럼 행동하지 말자고 생각하지 않았던가. 그 때문에 한스는 삐딱하게 대답하려는 생각을 필사적으로 억누르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그렇다면 라라가 드래곤의 사체를 넘겨줬을 때, 카르위먼에 기부를 할 생각은 있으십니까?”
“…그게 무슨 소리요?”
전혀 예상치 못한 질문에 페이자디루가 당황했다. 라라도 이해를 하지 못한 건지 동그란 눈으로 한스를 뒤돌아봤다.
하지만 한스는 자신에게 향하는 시선에 개의치 않고 계속 말을 이었다.
“낳아주고 길러준 부모의 은혜와 풍족한 세월을 보내게 해 준 가문의 공적을 생각해서 사체를 팔아야 한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그렇소.”
“그런 식으로 생각을 한다면 위대한 카르나 님의 은혜와 공적은 감히 부모나 가문에 비할 바가 아니지요. 그렇다면 당연히 카르나 님을 모시하는 카르위먼에 그 사체를 양보해야 하지 않겠습니까?”
“…….”
페이자디루의 입이 닫혔다. 눈을 데굴데굴 굴리는 것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했다.
“…그런 말을 타인인 당신이 할 말은 아닌 것….”
“참고로 전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입니다.”
한스는 명예 성기사의 표식을 보였다. 페이자디루가 다시 입을 다물었다.
“정식 성기사는 아니지만 저도 개인적으로는 카르나 님을 깊이 공경하는 몸입니다. 브라우닝 공자가 그런 생각을 한다면 무척이나 기쁜 일이죠. 아, 혹시 그 생각이 미프틸 왕국의 전체적인 생각입니까? 이번 축제에서 카르위먼을 돕고 있다 들었는데, 혹시 그것도 카르나 님의 은혜와 공적을 갚기 위해서인지요.”
한스의 말이 점점 페이자디루의 말을 확대 해석해 간다. 그만큼 페이자디루의 당혹감도 더해갔다.
“그렇다면 제가 교황 성하나 성녀님께 직접 말씀드리겠습니다. 두 분도 무척 기뻐하실 것이 분명….”
“자, 잠깐만!”
페이자디루는 급히 한스의 말을 끊었다. 자칫하다간 축제를 도와주며 카르위먼에게 받을 유무형의 대가 자체를 완전히 날려버릴 수도 있었다.
“그게 어떻게 같은 말이란 말이오!”
“응? 이상하군요. 태어나고 자랄 때 받은 은혜를 갚으라 하는 것 아니셨습니까?”
“가문의 일과 신앙은 별개로 봐야 하지 않소!”
“혹시 브라우닝 공자님은 카르나 님께 받은 은혜를 부정하시는 겁니까?”
“그…!”
한스의 말을 인정할 수 있을 리 없다. 카르위먼의 중추인 유라스가 있는 도시에서, 게다가 카르위먼과 협업을 하고 있는 상황에 카르나의 은혜를 부정하다니.
특히 지금처럼 카르위먼의 위세가 하늘을 찌르고 있는 상황에서 저런 말을 하게 된다면 후작가 후계자의 신분을 갖고 있다 하더라도 파문을 당할 수도 있다.
“음, 아무래도 공자님은 동의하지 못하시는 모양이군요. 뭐, 아무래도 조금 비약이지 않을까 생각했습니다.”
“그, 그렇소! 내가 하고 싶은 말이 그것이오!”
한스가 한발 물러나는 것 같자 페이자디루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하지만 뒤이은 한스의 말에 얼굴을 와락 일그러뜨렸다.
“그렇다면 라라에게 하신 말씀도 충분히 비약이라는 것도 알고 계시겠군요.”
“그게 어찌…!”
“음? 교황 성하와 성녀님께 말씀드릴까요?”
“…….”
페이자디루는 이를 갈았다. 하지만 한스가 종교를 엮기 시작한 이상 제대로 섣불리 반박을 할 수 없었다.
“아무래도 이해해주신 것 같군요.”
라라의 가정 사정은 한스도 전부 알고 있었다. 분명 가문에 피해가 간 건 사실일 것이다.
하지만 가문 내에서 라라가 받은 대우를 생각하면 어처구니없는 요구인 것도 분명했다.
‘지크 님의 심정이 공감이 가.’
연인이 받은 대우를 듣고 한스는 비로소 지크가 받은 대우에 이해를 넘어 공감할 수 있었다.
“그럼 이제부터 본격적으로 이야기를 나눠보죠.”
“…본격적인 이야기?”
페이자디루가 이 무슨 개소리냐는 눈길을 보낸다.
“정말로 집안의 빚과 은혜 운운으로 드래곤의 사체를 사려고 생각하진 않았을 것 아닙니까.”
아마도 아니, 분명 협상의 주도권을 가지기 위한 공갈일 게 뻔했다.
집안이 싫다고 뛰쳐나온 사람에게 집안의 빚과 은혜만큼 허허로운 발언이 어디 있겠는가. 당연히 진짜 대가는 따로 생각해뒀을 것이다.
물론 라라의 태도를 보면 팔 생각은 별로 없어 보이지만 그래도 일단 협상의 자리가 마련은 됐으니 상대의 말을 전부 들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았다.
라라도 같은 생각인지 아예 팔짱을 끼고 대화를 관망하는 태도를 취했다.
하지만 한스의 예상은 빗나갔다.
“무슨 소리요! 부모와 가문의 은혜는 당연히 갚아야지!”
“그러니까 그런 겉치레는 됐으니 진짜 대가를….”
“그딴 건 없소! 그보다 이만큼이나 막대한 돈을 제안하고 있지 않소!”
“…정말로 준비한 게 그것뿐입니까? 본격적인 협상을 위한 전략이 아니었고요?”
“이보다 뭘 더 준비하란 말이오!”
한스는 페이자디루를 빤히 쳐다봤다.
“제가 정말로 몰라서 물어보는 것이니 오해 없이 들어주셨으면 합니다.”
잠시 뜸을 들이던 한스가 천천히 입을 열었다.
“정말로 당신과 라라는 남매입니까? 혹시 뭔가 가문의 비사 같은 게 있지 않던가요?”
“…그게 무슨 소리요.”
“아니, 라라에 비하면 당신의 두뇌 수준이 그, 너무 떨어지지 않나 싶어서 말입니다.”
“…뭐?”
“분명 가문에서도 라라에게 개 쳐 맞듯 처맞… 아, 죄송합니다. 표현이 조금 거칠었군요. 대련 때마다 라라에게 손도 못 쓰고 두들겨 맞았다고 들었습니다만.”
말을 고친다고 고쳤지만 전해진 뜻은 그다지 다를 바 없었다. 오히려 배려한답시고 발언을 수정하는 모습이 더욱 열을 뻗치게 했다.
“그 정도로 실력이 떨어진다면 적어도 두뇌 회전은 그나마 괜찮아야 하지 않나 생각을 해서 말입니다. 한데 머리도 라라에 비할 바가… 아니, 라라까지 가지 않더라도 평범한 사람 정도도 되지도 못하는 모습이 보이는 판국이니 두 사람이 같은 피를 나눈 남매인지 살짝 의심이 가서 말입니다.”
놀랍게도 한스에게 악감정은 없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