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2화
두 사람은 제법 놀랐다. 상대가 강국인 미프틸 왕국 후작가의 후계자란 것도 그랬고 라라의 오빠라는 사실도 그랬다.
“브라우닝 씨는 후작가의 영애셨나요?”
“지금은 아니에요.”
첼시의 물음에 라라는 딱 잘라 부정했다.
“잘했다. 아직까지 후작가 영애 운운했다면 따끔하게 혼을 냈을 거다.”
“제가 어째서 가문의 이름을 빌려야 하나요? 제게는 좋지 않은 기억밖에 남지 않은 곳인데.”
“그렇다기엔 브라우닝이란 성은 아직까지 쓰는 모양이지 않느냐.”
“익숙해서 쓰는 것뿐이에요. 그걸로 이득 본 건 하나도 없으니 걱정 마시죠.”
남매라고 하기엔 날 선 대화가 오고 간다. 하지만 첼시와 피나는 그리 놀라지 않았다.
권력을 위해 가족 간에도 피로 피를 씻는 관계가 되는 게 흔한 것이 귀족 가문의 생리다. 저 정도 말다툼 정도면 아직까지 온건한 편이었다.
“그렇다면 됐다. 어쨌든 내 용건 말이다만.”
꿋꿋하게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는 그 모습이 이제는 감탄이 나올 정도다. 남을 무시하고 오로지 자신의 용건만 중시하는 모습이기에 그리 좋은 감탄이 아니었지만.
결국 라라가 한발 물러섰다.
“…간단히 말해줘요. 오래 걸리면 바로 무시할 거니까.”
“여기서 말하기엔 좀 그렇군. 장소를 옮기자.”
“내가 간단히 말해달라고 했을 텐데요?”
“…굉장히 건방져졌구나. 가문에서와는 전혀 다른 모습이야.”
“그게 싫어서 가문을 뛰쳐나왔으니까요. 옛날 추억을 떠올리고 싶다면 혼자 하시는 게 어떠세요?”
“…….”
페이자디루는 라라를 노려봤다. 하지만 그가 아무리 눈에 힘을 줘 봤자 라라가 겁을 먹는 일은 없었다.
검을 뽑아 들고 싶은 충동이 페이자디루를 감쌌다. 하지만 그는 그 감정을 내리눌렀다.
이미 그들의 다툼은 주변 사람들의 관심을 끌고 있었다. 여기서 검을 휘둘렀다가는 당연히 커다란 소동으로 발전될 터. 축제를 돕기 위해 왔다는 자들이 오히려 소동을 일으켰다는 소문이 퍼지면 여간 망신살이 뻗치는 게 아니다. 왕국의 이름에 흠집이 날 것이고 웨즈컬도 결코 좋아하지 않을 것이다.
그래, 이유는 오직 그 때문이다. 라라와 검을 맞대는 것이 두려운 것이 결코 아니었다.
그녀에게 패배하기만 하던 건 어디까지나 어렸을 때의 일이 아니던가.
지금은 다를 게 분명했다.
그렇게 자신을 타이른 후 페이자디루가 다시 입을 열려 할 때였다.
“무슨 일 있습니까?”
새로운 인물이 등장했다.
중요한 순간에 갑자기 난입한 인물을, 페이자디루는 당연히 좋게 보지 않았다. 호위를 시켜 쫓아내려 할 때였다.
“한스!”
라라가 난입한 인물을 반겼다.
‘한스?’
익숙한 이름이다. 페이자디루는 머리에서 한스란 이름을 뒤적였다. 찾는 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진 않았다. 최근에 무척 유명해진 이름이었던 것이다.
‘이자가!’
페이자디루는 한스를 쳐다봤다. 그의 눈에 강렬한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그건 질투심이었다.
* * *
한스는 스녹과 외출을 나와 있었다.
오랜만에 제자들 중 남자들끼리만 얘기를 나눠보자는 한스의 제안을 스녹이 받아들인 것이다.
그들은 적당한 술집을 찾아 어슬렁거렸다. 딱히 급한 것도 없는 터라 그들의 행동은 느긋했다.
“이거 봐, 노웸. 샘에게 주면 재미있지 않을까?”
쿠!
어느 가판대에서 희한하게 생긴 장신구를 들어 올리며 스녹이 히죽댔다.
“분명 네 형 같은 사람이었지?”
“네.”
오래전, 스녹을 처음 만났을 때 부모가 없던 그를 보살펴주고 있던 광부. 그게 샘이었다. 상당히 오래전의 일이었지만 스녹의 가족과도 같은 사람이었기에 한스도 그를 기억하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고향엔 가 봤어?”
“마탑에 가기 전에 그리고 이곳으로 오기 전에 한 번씩요.”
“어땠어?”
“좋았어요. 예전에는 그렇게 벗어나고 싶던 동네인데 오랜만에 가 보니 무척 그리운 거 있죠.”
“고향이란 그런 거지.”
한스는 스틸월 영지를 떠올렸다. 그것만으로도 절로 마음이 편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도 나중에 한번 찾아가 봐야겠어.’
스녹은 기념품의 값을 치르고 상자 안에 넣었다. 둘은 다시 길을 걷기 시작했다.
“고향 사람들 반응은 어땠어? 거기도 우리 이야기는 퍼졌을 텐데.”
“굉장히 좋아했어요. 샘도 자기 일처럼 자랑스러워했고요.”
“엘레나는 소개시켜 줬어?”
“네. 아직 자기도 없는 여자 친구가 있다고 부러워했어요.”
나름 좋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한스는 내심 안도했다.
스녹은 누가 봐도 커다란 성공을 거둔 사람이다. 그리고 성공이란 존재는 주변 인간관계를 파탄 내는 원인이 되기도 한다. 스녹이 고향으로 돌아가서 상처를 받을 가능성도 충분했다.
하지만 적어도 아직까지는 괜찮은 모양이었다.
‘하긴, 샘이란 사람은 꽤 괜찮은 사람처럼 보였으니까.’
지크에게 끌려 나온 지 얼마 안 됐을 때라 철이 없었던 시기였지만 당시 그의 눈에도 샘의 됨됨이는 무척 올곧아 보였다. 어쩌면 그는 스녹과 예전처럼 계속 지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지크 님과 상의해보자.’
둘은 적당한 술집을 잡아 들어갔다. 나름 가격대는 있지만 그렇다고 너무 고급은 아닌, 그런 술집이었다.
두 사람은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기묘한 분위기와 맞닥뜨려야 했다.
보통 술집이라 함은 왁자지껄한 게 보통이다. 술이 들어가 자제심이 낮아지고 흥분도는 높아진 사람들이 웃고 떠드는데 조용하다면 그게 이상한 일이 아닌가.
하지만 그들이 들어 온 술집은 그 이상한 일이 현재 진행형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시비가 붙은 모양인데요?”
사람들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돌리던 스녹이 찬바람을 날리는 두 집단을 발견했다.
그의 눈이 크게 떠졌다. 두 집단 중 하나에 익숙한 얼굴들이 포함되어 있던 것이다.
“선배! 저기…!”
“가자.”
여타의 말을 덧붙일 것도 없이 한스는 바로 시비가 붙은 자리로 향했다.
* * *
페이자디루는 상황을 살폈다. 그의 괘씸한 동생이 한스에게 지금까지의 사정을 설명하고 있었다.
‘되는 게 없군.’
밉살맞기 짝이 없는 동생이지만 그는 나름 부드럽게 나갈 생각이었다. 그녀가 자신의 말을 잘 들었다면 이렇게 소란이 일어나는 일도 없었을 것을.
그는 소란의 원인을 철저하게 라라에게 전가하고 있었다.
‘저들이 내 편을 들어주진 않겠지.’
한스. 그리고 스녹. 세계에 명성 높은 이들이자 라라의 동료. 그런 그들이 자신의 편을 들어준다면 오히려 그들의 꿍꿍이를 의심해봐야 하리라.
‘주변의 시선도 신경을 써야 해.’
지금껏 주변에서 보내지는 시선은 술집에서 일어난 소란을 방관 혹은 구경하는 시선일 뿐이었다. 아직 라라의 정체는 밝혀지지 않았다.
하지만 여기에 한스와 스녹까지 끼어들었으니, 그들의 정체를 구경꾼들이 알게 될 확률이 높아졌다. 그렇게 된다면 구경꾼들은 확실히 명성 높은 드래곤 슬레이어들의 편을 들리라.
우매한 인간들 따위 자신을 적대하든 말든 관심이 없는 페이자디루였지만 그 때문에 미프틸 왕국의 이름에 흠집이 나게 되는 건 좋지 않은 일이었다.
호위 기사들의 표정도 좋지 않다. 그들도 상황이 좋지 않은 것을 아는 것이다. 여기선 물러나는 게 좋을 것 같았다.
하지만 페이자디루는 차마 발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의 발목을 꽉 붙들고 늘어지는 건 다른 것이 아니었다.
바로 자존심.
‘이 녀석에게만큼은 등을 보이고 싶지 않아!’
안 그래도 비대하기 짝이 없는 그의 자존심이다. 거기에 라라에 대한 어두침침한 감정이 더해지니 물러나야 한다고 소리치는 이성이 감성에게 사정없이 짓밟히는 상황이 됐다.
“라라에게 용건이 있다고 하시던데, 그게 뭡니까?”
전후 사정을 들은 한스가 페이자디루에게 물었다. 일단 예의를 차리고 있었지만 그의 안색은 딱딱하게 굳어 있었다.
“사람들이 많은 곳에서 말할 수는 없소.”
“그렇다면 돌아가 주시죠. 라라는 귀하와 따로 만나서까지 얘기를 나누고 싶은 마음이 없는 듯하니까요.”
“그럴 순 없소.”
“그럼 어떻게 하시렵니까. 힘으로라도 끌고 가시렵니까?”
한스의 손이 자연스럽게 에스텔레이드의 손잡이 위에 얹어졌다. 그 모습을 보고 페이자디루의 호위 기사들도 슬그머니 칼에 손을 가져갔다.
긴장감이 순식간에 높아졌다.
“…후우, 좋아요.”
작은 한숨과 함께 라라가 일어섰다.
한스와 스녹까지 끼어든 이상 사태는 더욱 커졌다. 여기까지 온 이상 차라리 빌어먹을 오라비의 말이라는 걸 한번 들어보는 게 나아 보였다.
“사람들이 없는 곳이면 되는 거죠?”
“그래, 그러면 된다.”
페이자디루의 우쭐거리는 얼굴이 짜증 난다. 다시 확 자리에 앉아버릴까 생각도 들었지만, 좋게도 나쁘게도 라라는 페이자디루보다 훨씬 더 어른이었다.
“날 따라오….”
“잠깐.”
거만하게 라라에게 명령을 내리려 하는 페이자디루를 한스가 막아섰다.
“사람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이 필요하다면 굳이 멀리 갈 필요 있겠습니까. 이 술집은 여관도 겸하고 있으니 방이나 하나 빌려서 거기서 이야기를 나누면 되겠죠.”
“여기서?”
페이자디루의 얼굴이 찌푸려졌다. 딱히 계획이 어긋났다거나 해서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술집의 수준이 높은 만큼 숙소도 꽤 높은 수준이 곳이었지만 페이자디루에게는 썩 눈에 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한스는 강건했다.
“그리고 하나 더. 그 자리엔 저도 동행합니다.”
“당신이 상관할 일이 아니오.”
“나는 라라의 연인입니다. 더 이상 가족도 아닌 당신과는 다르게 말이죠.”
‘연인?’
일반적인 동료인 줄 알았는데 설마 그런 관계로까지 발전했을 줄이야.
페이자디루는 머리를 굴렸다.
어차피 라라와 얘기를 할 수 있는 기반은 마련되었다. 그렇다면 저 정도의 양보는 해도 될 터.
“…좋소. 단, 나도 호위 기사 한 명을 데려가겠소.”
“좋을 대로 하십시오.”
어차피 한스나 라라에게 호위 기사 한 명 정도는 별 위협도 되지 않는다.
그렇게 가게 안에서의 소동은 일단락되었다.
단, 그게 모든 일이 끝났다는 뜻은 아니었다.
* * *
한스와 라라 그리고 페이자디루와 호위 기사 한 명은 방 하나를 빌렸다. 축제라는 시기와 꽤 고급스러운 숙소라는 특성상 방의 가격은 꽤 비쌌지만 여기서 그걸 신경 쓰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 무슨 일인가요? 누누이 말하지만 빨리 해주세요. 어서 일행에게 돌아가고 싶으니까요.”
일련의 소동 때문에 기껏 올라왔었던 취기도 사라져버린 지 오래였다. 빨리 눈앞의 보고 싶지 않은 면상을 치워버리고 다시 술잔을 기울이고 싶었다.
빨리 헤어지고 싶은 건 페이자디루도 마찬가지인지라, 지금껏 뻗댄 것에 비해 그의 입은 무척이나 쉽사리 열렸다.
“단도직입적으로 말하마. 드래곤의 사체를 넘겨라.”
라라는 입을 꾹 다물었다.
드래곤의 사체. 지금 이 세상에서 가장 희귀한 보물이 무어냐고 묻는다면 많은 사람들이 손가락을 가리킬 대상이 바로 그것이다.
한데 페이자디루는 마치 길가에서 주운 돌덩이라도 달라고 하는 것처럼 너무도 태연히 요구하고 있었다.
하지만 라라는 의외로 놀라지 않았다. 정확한 의도는 몰랐지만 그사이 나쁜 오라비가 끈덕지게 달라붙을 때부터 뭔가 상당히 무리한 부탁을 하리라고 예상을 했던 것이다.
그 때문에 그녀는 꽤 침착하게 대꾸했다.
“대가는요?”
일단 들어는 본다는 식으로 라라가 물었다. 그 대답 또한 꽤 돼먹지 못할 것이라고 그녀는 예상했다.
그리고 예상은 적중했다.
“네가 가문을 뛰쳐나가 우리에게 끼친 피해가 얼마인 줄 아느냐! 그걸 생각한다면 대가라는 단어도 입에 올리지 말아야지!”
한스는 라라의 뒤에서 가만히 대화가 오가는 걸 지켜봤다. 그리고 생각했다.
‘이거 참 참신한 또라이로군.’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