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1화
맥주잔이 기울어지며 내용물이 단숨에 첼시의 입 속으로 사라진다. 상당히 큰 용량의 잔인지라 들어 있는 맥주 양도 꽤 많았지만 그것이 전부 사라지기까지의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크!”
첼시가 맥주잔을 거칠게 탁자에 내려놓고는 입가에 묻은 맥주를 혀로 핥으며 헤실헤실 웃는다. 그녀와는 다르게 술을 조금씩 홀짝이고 있던 피나가 입을 열었다.
“절대로 카르나를 모시고 있는 신관으로는 보이지 않을 모습이네.”
“지금은 신관이든 뭐든 쉬는 시간이에요. 그래서 신관복도 벗고 왔잖아요.”
그녀의 옷은 조금 고급스럽긴 하지만 여느 사람들이 입을 평범한 옷이었다.
“그리고 카르나께서는 음주를 금하지 않으셨어요. 교리에 과음하지 말라는 말도 없고요. 그 이유 하나만으로도 정말로 위대한 분이시죠.”
“술 마시게 해 줬다고 위대한 신이라니. 너 정말로 카르나 님을 신앙하는 게 맞니?”
“왜 이래요? 이래 봬도 저 카르위먼의 성녀 최종 후보에까지 올라갔다고요. 루벨라에게 밀렸지만.”
“다행이네. 카르위먼의 판단력이 제대로 살아 있어서. 아니, 네가 최종 후보에까지 올라간 것만으로도 우려를 표해야 하는 거 아냐?”
“뭐라고요? 그런 어쿠스는 학파 자체가 마탑에서 밀려 신세가 이상하게 됐잖아요!”
“뭐가 어째?”
순식간에 두 사람 사이에서 냉기가 흘렀다.
“저, 저기! 일단 두 사람 다 진정해요!”
라라가 식은땀을 흘리면서 두 사람을 말리려 들었다.
‘여, 역시 무리였나?’
두 사람의 성질이 절대 온건한 편이 아닌 것을 알고 있음에도 밀어붙인 자리다.
하지만 자리에 앉은 지 얼마 되지 않아 서로의 민감한 부분을 공격하는 모습이 아무래도 자신이 너무 쉽게 생각한 게 아닌가 싶었다.
그러나 라라의 걱정이 무색하게도, 당장이라도 멱살을 잡을 것 같은 두 사람은 순순히 흥분을 가라앉혔다.
“여기 한 잔 더요!”
첼시가 목청 높여 지나가던 종업원에게 주문을 넣었다.
“저도 한 잔 더요.”
홀짝홀짝 느린 속도로 어느새 잔을 모두 비운 피나도 새로 주문했다.
“아, 저도요.”
일찌감치 잔을 비워 놓았던 라라도 주문 대열에 합류했다.
세 명의 앞에 새로운 잔이 놓였다. 첼시가 다시 한번 호쾌하게 맥주를 들이켰다. 그리고 아까처럼 거친 탄성을 내뱉으며 잔을 내려놨다.
“생각해보니 이렇게 서로를 공격해서 뭐가 이득이겠어요. 제가 성녀에서 밀린 건 사실인데.”
“…우리 학파가 주류에서 밀려난 것도 그렇지.”
‘어, 어라?’
라라는 눈을 깜박였다. 거세게 흥분한 아까의 광경이 거짓말인 듯 두 사람은 자조에 가까운 말을 중얼거렸다. 그렇다고 의기소침해하는 것도 아니었다. 비교하자면 무언가를 벗어던진 것 같은 모습이었다.
“왜? 우리가 멱살 잡고 싸우지 않아서 놀랐어?”
“아, 그렇진….”
피나의 말에 라라는 말꼬리를 흐렸다.
마음속으로야 골백번도 더 고개를 끄덕였지만 그렇다고 대놓고 긍정할 수도 없다. 라라는 그 정도로까지 뻔뻔하진 않았다.
“여기서 목소리 높여 뭐 해. 우리 학파가 밀려난 건 사실인걸. 오히려 괜히 현실을 인정하고 싶지 않아서 어떻게든 빨리 학파의 명예를 되살려 보겠다고 나대다가 밸리드의 협력자라는 낙인이 찍혀 명예 회복은커녕 학파의 미래를 끝장낼 뻔했는걸. 그걸 생각하면 현실 인식은 제대로 해야지.”
“그때의 어쿠스는 정말로 눈앞밖에 보지 못했으니까요.”
냉정하게 자신의 상황을 파악하던 피나였지만 첼시의 말에 다시 좀 울컥한 것 같았다.
“그건 너도 마찬가지잖아. 어떻게든 지금의 성녀를 끌어내리겠다고 난리 쳤으면서. 밸리드 협력자라는 낙인은 오히려 네가 더 위험했던 건 알지?”
“그랬죠.”
첼시는 어깨를 으쓱였다.
“예전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성녀 자리를 차지하고 싶었고, 그 때문에 무리를 해서 어쿠스 씨 말마따나 인생이 위험했어요.”
그녀는 한숨을 한 번 내쉬었다.
“지금 생각하면 용케도 지금 이곳에 앉아서 술 마시고 떠들고 있다고 생각해요. 당시 상황을 생각하면 목이 베어 본보기로 성문에 내걸리기 딱 좋은 상황이었는데 말이죠. 아니, 참수형 같은 미적지근한 형벌이 아니라 화형을 당했으려나요?”
“마찬가지야. 학파의 명예를 회복하기는커녕 마탑에서 아예 금기가 되어버릴 뻔했으니까. 다시 생각하면 오싹해.”
그러며 둘이 두런두런 얘기를 나눈다.
아무래도 과거의 경험과 지금 처한 상황이 비슷한지라 둘은 제법 얘기가 잘 통했다. 아까의 험악한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둘 다 독기가 빠진 느낌이야.’
분명 둘의 강렬한 성격이 확연히 변한 건 아니었다. 하지만 예전의 그 앞만 보고 방해되는 모든 걸 박살 낼 것 같은 기세는 사라져 있었다.
하지만 나쁘지 않았다. 술 한 잔을 곁들이며 사소한 이야기를 나누는 것. 그녀가 지금 이 자리에서 원하던 바로 그 장면이었다.
저도 모르게 라라의 입가에 미소가 걸렸다.
하지만 그것도 잠깐. 첼시와 피나의 시선이 동시에 자신에게 쏠리자 그녀는 움찔했다.
“브라우닝은 정말로 부러워요. 원래 우리랑 같은 집단에 있었으면서도 지금은 완벽히 성공한 집단에 들어가 있잖아요.”
“그러고 보니 제너드 그놈이랑 먼저 다니고 있던 건 브라우닝이었지?”
“네?”
난데없는 화제에 라라가 당황했다.
하지만 두 사람은 딱히 라라를 원망할 생각은 없는 듯했다. 오히려 무척이나 부러워했다.
“브라우닝이 파티를 나갔던 가장 큰 이유가 제너드가 쫓아내서였죠?”
“브라우닝이 방패를 위주로 쓰지 않는다고 괄시하다가 쫓아냈지.”
“그놈은 나도 좀 쫓아내주지 왜 계속 잡고 있어 가지고는.”
“그러게 말이야.”
두 사람의 불평에 라라는 어색하게 웃음을 흘릴 수밖에 없었다.
“어쨌든 그 집단에 들어간 김에 꾹 눌러 앉아요. 멋있는 남자 친구도 생겼고. 무엇보다 거기엔 지크 님이 계시잖아요? 이득을 보려면 그 사람에게 끈덕지게 들러붙는 걸 추천드려요.”
“이득 때문에 사람과 친해지는 건 조금….”
지크에게 가르침을 받는 건 분명 즐거운 일이었지만 그것 때문에 친분을 쌓는 건 저어됐다.
하지만 여기서 그런 생각을 하는 건 아무래도 그녀뿐인 모양이었다.
“누구는 어떻게든 그 사람과 인연을 강화해서 교단 내 지위를 높이려고 하는데, 누구는 그런 것에 관심이 없다니.”
“원래 자기가 갖고 있는 게 얼마나 대단한 건지 정작 갖고 있는 사람은 모르는 경우도 많으니까. 아니면 그저 착한 것뿐일까? 자기에게 필요 없다고 생각하는 거라면 살짝 열받는데.”
“아니면 저런 사람이니까 저 집단에 들어갈 수 있었던 걸지도요.”
“…나 갑자기 브라우닝이 취하는 게 보고 싶어졌어.”
“저도 그러네요.”
첼시와 피나가 사냥감을 보는 눈초리로 자신의 술잔을 들어 올렸다.
둘의 공격에 충분히 당황한 라라였지만 적어도 이 말만은 할 수 있었다.
“술을 먹이는 건 상관없는데, 육체적 능력을 키우는 제가 당신들보다 술에 훨씬 강한 건 알고 있죠?”
첼시와 피나가 눈을 맞췄다.
“카르나 님은 헛된 증오를 삼가라고 하셨죠.”
“마법사는 이성적으로 생각하는 존재야. 화풀이 따위는 아무것도 낳지 못해.”
뻔뻔하기 짝이 없는 둘의 변명에 라라는 짧게 웃음을 터뜨렸다.
“좋은 생각이에요. 남을 취하게 하니 뭐니 하지 말고 자기 속도대로 즐기도록 해요.”
라라가 술잔을 들어 올리자 첼시, 피나가 그녀의 잔에 자기 잔을 가져다 댔다. 세 개의 잔이 테이블 위에서 가볍게 부딪쳤다.
술기운이 오르고 세 사람의 대화도 점점 더 자연스러워졌다. 무척이나 사소한 것들부터 조금은 민감한 문제까지.
하지만 누구의 기분도 상하지 않고 다른 이를 필요 이상으로 자극하지도 않으면서-아무래도 모인 이들의 성격이 성격인 만큼 가벼운 빈정거림은 꽤 잦았지만- 술자리는 꽤 부드럽게 이어졌다.
첼시의 가벼운 농담에 피나와 같이 웃으면서 라라는 즐거워했다. 그녀의 기대와 무척이나 가까운 장면이 눈앞에 펼쳐지고 있었다.
이렇게 아무런 일도 없이 수다를 떨다가 헤어지게 되면 오늘의 일정은 완벽하다. 아마도 지금의 좋은 기분 그대로 잠자리에 들어갈 수 있을 것 같았다.
하지만 원래 나쁜 일은 갑자기 찾아오는 법이다.
누군가 자신의 옆에 서는 걸 느낀 라라가 고개를 들었다.
“설마 이런 자리에서 만나게 될 줄은 몰랐군.”
기분 나쁜 목소리. 라라의 얼굴이 저절로 찌푸려졌다. 꽤 오랫동안 듣지 못했던 목소리지만 라라는 바로 목소리의 주인을 알아차렸다.
“…와 있지 않았을까 생각은 했어요. 건강해 보이시네요.”
“너도 말이다.”
갑작스럽게 끼어든 남자를 보며 피나가 첼시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누구야? 혹시 알아?”
“글쎄요, 잘 모르겠어요. 귀한 신분의 사람 같긴 한데….”
입고 있는 고급스러운 옷이나 양옆에 서 있는 호위들, 그리고 무엇보다도 목소리에 스며든 숨길 수 없는 오만함이 그가 상당히 높은 신분임을 확실히 나타내고 있었다.
그녀들이 불청객의 신분을 추측하고 있을 때, 그와 라라의 대화는 계속됐다.
“그래서, 무슨 일이시죠?”
“무척이나 쌀쌀맞은 대우로구나. 남도 아닌데 말이다.”
“남보다 못한 사이죠. 용건이 없다면 물러나 주시겠어요? 지금 친구들과 같이 이야기를 하는 중이라서요.”
그의 시선이 첼시와 피나를 슬쩍 훑었다. 하지만 흥미가 없는 듯 다시 라라에게 고정됐다.
“용건이 없는 건 아니지. 마침 잘됐다. 만난 김에 말을 하는 게 낫겠어. 어차피 너나 나나 얼굴 보기 싫은 건 매한가지일 테니.”
“제가 말을 잘못 했네요. 용건이 있어도 나중에 말씀해 주시겠어요? 다시 한번 말하지만 지금 친구들이랑 이야기를 하는 중이에요.”
“그런 하잘 것 없는 일보다 훨씬 더 중요한 일이다.”
피나와 첼시는 눈살을 찌푸렸다. 갑자기 나타난, 라라와 인연이 있는 것 같은 상대. 말투와 태도에서 묘하게 자신들을 무시하는 태도가 드러나 둘은 그에게 뚜렷한 혐오감을 품었다. 안 그래도 성격이 강한 둘이다.
“죄송하지만 신사분? 우리 브라우닝 씨와 어떤 관계인지는 모르겠지만 본인이 대화를 거절하고 있는 건 분명해 보이네요. 적어도 오늘은 이만 물러나는 게 어떠신가요?”
마음 같아서는 쌍욕을 퍼부은 후 ‘꺼져!’라는 한 마디로 마무리를 짓고 싶지만, 첼시는 일단 부드러운 어조로 불청객에게 제안했다. 하지만 말을 하면서도 불청객이 쉽게 물러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그렇게 말을 잘 듣는 인물이었으면 이미 진작에 물러났을 것이다.
재수 없게도 첼시의 예감은 적중했다.
“제삼자가 끼어들 일이 아니오.”
“우리가 먼저 브라우닝과 얘기를 하고 있는 걸 보지 못했나요? 그리고 당신의 등장 때문에 방해받았죠. 저와 윈드네도 이미 훌륭한 당사자예요.”
이번엔 피나가 항의했다. 불청객은 혀를 차며 기분 나쁜 티를 냈지만 그래도 일리가 있다고 생각한 것일까. 피나의 말을 대놓고 부정하진 못했다.
“잠깐이면 된다. 그리 오래 걸리진 않을 거야.”
끈질기기 짝이 없다. 이쯤 되니 불청객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첼시와 피나 둘 다 라라에게 눈치를 줬다. 누구냐는 것이었다.
라라는 어쩔 수 없이 불청객의 정체를 털어놨다.
“미프틸 왕국 브라우닝 후작가의 후계자, 페이자디루 브라우닝이에요. 일단 혈연으로는 제 오라버니기도 하고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