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0화
도시 안으로 두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원래 유동 인구도 상당한 데다 축제가 다가올수록 도시 안으로 진입하는 사람이 많은 만큼 그들에게 관심을 두는 사람은 없었다.
북적이는 인파를 지나 한 가게 앞에 멈춘 그들은 바깥에 준비된 탁자에 마주 앉고는 가벼운 음식을 주문했다.
주위에선 사람들이 요란하게 수다를 떨고 있었다. 두 사람은 사람들의 대화에 귀를 기울였다.
며칠 전 커다란 소란의 중심이 된 엘프들부터 마법사들의 등장 등,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하나하나 모여들고 있는 일을 사람들은 목 놓아 떠들어댔다.
“꽤 많은 분들이 먼저 온 모양이에요.”
“많이 변했으려나요?”
“헤어진 지 고작 1년 정도밖에 되지 않았으니 그리 변한 건 없지 않을까요?”
종업원이 가져다준 음식과 음료를 받아 들고 한스가 덧붙였다.
“우리도 그다지 변한 건 없잖아요.”
“혹시 아나요. 다른 사람들의 시각으로 본다면 우리도 조금 변했을지도 모르죠.”
음료를 한 모금 마신 후 라라가 말을 이었다.
“빨리 만나보고 싶네요. 모두 요 1년간 어떻게 지냈는지 궁금해요.”
“예전부터 생각했는데 라라는 동료란 존재에 대해 상당히 의미를 두는군요.”
“가문을 뛰쳐나왔을 때부터 잔뜩 기대하고 나왔으니까요. 동료들과 함께 정의를 베풀고 신비로운 모험을 하는 그런 일을요. 그런데 나와서 만난 동료라는 게 제너드와 그 동료들이었잖아요?”
“최악이었군요.”
“확실히 제너드는 그랬죠.”
이미 시간도 흘렀고 마음속에서 결론도 확실히 냈기에 그렌을 언급할 때 라라의 안색은 평온했다.
“하지만 윈드네나 어쿠스는 모르겠어요. 윈드네는 솔직히 속물 느낌이 나긴 했지만 어쿠스는 딱히 나쁜 사람은 아닌 것 같았으니까요. 뭔가에 정신이 팔려 다른 건 아무래도 좋다는 느낌이었달까요? 윈드네도 제너드에 비하면 귀여울 정도였고.”
“그 작자와 비교해서 귀엽지 않은 사람은 없을 겁니다.”
“그도 그렇네요. 아무튼, 그래서 그 파티에서 나와 지크 님의 파티에 들어갔을 때는 상당히 기분이 좋았어요. 조금 특이하긴 했지만, 그래도 동료들과의 정은 확실히 있었으니까요.”
“그렇군요.”
“아, 물론 지금까지 당신과 한 여행도 무척 즐거웠답니다?”
라라가 빙그레 미소 지으며 말했다. 한스도 옅은 웃음을 피웠다.
지난 1년간의 여행은, 지크 및 다른 동료들과 함께했던 여행과는 분명 달랐지만 무척이나 즐거웠던 것만큼은 같았다.
“이번에 만나게 되면 윈드네, 어쿠스와 한번 얘기를 해 봐도 괜찮을 것 같아요. 당시에는 서로 간의 목적에만 매몰돼서 툭 터놓고 얘기를 못 해 봤었으니까요.”
“잘됐으면 좋겠네요.”
“예감은 좋아요. 한 번, 제가 그 파티를 나오기 바로 전에 꽤 즐겁게 얘기를 나눈 적이 있어요. 제너드가 나와서 바로 끊겼지만요. 그걸 생각하면 아마도 괜찮지 않을까 생각돼요.”
“혹시 도움이 필요하면 말해줘요. 저도 도울 테니까요.”
“고마워요.”
두 사람의 눈이 따뜻한 빛을 품고 교차한다. 보는 것만으로 절로 흐뭇해지는 광경. 웬만큼 비뚤어진 사람도 두 사람의 방해는 하지 않을 것 같다.
하지만 언제나 예외는 있는 법.
“어이, 형씨! 예쁜 언니랑 데이트 중이군그래? 거 엄청 좋겠어? 나도 좀 끼워주면 안 될까?”
무슨 뒷골목 삼류 악당을 표현한 진부한 소설도 이렇게 만들진 않을 것 같은 말투. 주인공과 그 연인에게 시비를 걸다가 격퇴당하는 일회용 엑스트라 수준의 껄렁껄렁한 목소리가 들린다.
한스와 라라에게는 낯설지 않은 광경이다. 어디나 쓰레기 같은 인간은 존재하고 라라는 아무리 깎아내린다고 해도 미인이라는 부류에서 떨어지지 않으니, 같이 있는 남자-한스- 를 배제하고 그녀를 빼앗겠다는 정신 나간 생각을 하는 무리는 꽤 많이 존재했다.
물론 한스와 라라 모두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이기에 그런 인간들은 둘에게 별다른 위협조차 되지 못하고 오히려 응분의 대가를 받았다.
하지만 기분이 나쁜 건 어쩔 수 없는 법. 평소 같았으면 화가 난 한스가 대번에 지크식 훈육을 녀석들에게 베풀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달랐다. 한스는 화를 내긴커녕 피식 웃었다. 그리고 입을 열었다.
“라라가 예쁜 건 확실합니다만, 당신 옆에 계신 분도 미모 하면 알아주는 분 아니었습니까? 괜히 바람피우다가 낭패당하지 말고 라라는 포기해 주시면 좋겠습니다만.”
“뭔 소리야? 원래 나 같은 능력자라면 애인 서너 명 정도는 기본 크헉…!”
“아주 뚫린 입이라고 잘도 지껄이지? 입 안에 흙을 퍼넣고 얼음으로 그 주둥이를 막아줄까?”
껄렁껄렁한 목소리는 어디론가 가고 고통에 찬 비명과 불쾌한 투가 뚝뚝 묻어나는 목소리가 교차한다.
한스는 몸을 돌렸다.
두 사람이 그의 뒤에 서 있었다.
팔이 뒤로 꺾인 채 꺽꺽대고 있는 남성과 남성의 팔을 꺾은 채 눈을 부라리고 있는 여성.
두 사람 모두 그 자신이 알고 있는 모습과는 살짝 달랐다. 하지만 그런 가벼운 변장으로 그들과 인연이 깊은 한스를 속이는 건 불가능했다.
“건강해 보여 다행입니다. 지크 님, 그리고 라일라 님.”
“오랜만이에요, 두 분.”
근 1년여 만에 만난 둘을 보고 한스와 라라는 반갑게 인사했다.
* * *
“아야야! 아직도 뼈가 욱신거리네.”
지크가 과장된 몸짓으로 팔을 돌렸다. 물론 라일라는 그 모습을 봐도 죄책감에 휩싸이지 않았다. 오히려 가증스러워할 뿐.
“엄살은. 온몸이 피범벅이 돼도 신음 소리 하나 안 내는 녀석이.”
“그거야 전투에서나 그런 거고. 아픈 건 아픈 거야. 특히 방금 공격은 지금껏 당한 어떤 공격보다도 아팠어.”
“퍽이나.”
전혀 변하지 않았다. 지크와 라일라의 투덕거림에 한스는 마치 시간이 1년 전으로 되돌아간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절로 마음이 편해졌다.
“두 분도 먼저 오셨었군요. 레오나나 스녹, 엘레나가 먼저 왔다는 얘기는 들었습니다만, 두 분의 얘기는 없어 아직 오시지 않았을 가능성도 있다 생각했는데 말이죠.”
“그 사람들은 대놓고 왔고. 레오나와 엘프들은 그 탓에 군중에 둘러싸여 한동안 성문 앞에서 움직이지 못할 정도였으니 말 다 했지. 그에 비해 우리는 변장하고 조용히 들어왔거든. 너희처럼 말이야.”
지크는 한스와 라라의 허리춤을 살폈다. 그들의 인상착의 중 가장 큰 특징이라 할 수 있는 에스텔레이드와 토르니움은 평범한 검처럼 위장되어 있었다. 검집과 검자루 위에 위장용 껍데기를 덧댄 것이다. 물론 외모를 가볍게 바꾼 건 당연했다.
“두 분은 변하신 것이 없네요.”
라라가 말했다.
“너희들도 그런 것 같은데? 아, 그래도 관계성은 확실히 변한 것 같다만.”
라일라의 짓궂은 표정과 은근한 목소리가 어서 사실을 털어놓으라 재촉한다. 어차피 숨길 생각도 없었던지라 한스는 바로 대답했다.
“네. 저희 연인이 됐습니다.”
“역시나 그렇구나! 축하해!”
방금 전까지의 짓궂은 얼굴이 거짓말이라도 된 것처럼 라일라가 밝은 얼굴로 말했다. 그러곤 옆의 지크를 팔꿈치로 툭툭 쳤다.
“뭐 하는 거야? 네 애제자가 드디어 애인을 만들었다는데 얼른 축하해주지 않고.”
“애제자라니, 그런 소름 끼치는 표현은 그만둬.”
그가 팔을 들어 오돌토돌 돋아난 소름을 보인다. 하지만 그래도 축하를 해주는 건 잊지 않았다.
“그래, 축하한다. 솔직히 시간문제라고 봤고, 지금까지 진전이 없었다면 내가 직접 특별 지도를 해주려고 했는데 그건 필요 없겠구나.”
“…지금만큼 라라에게 고백을 해서 다행이라고 생각한 적도 없는 것 같습니다.”
지크의 특별 지도라니. 그 내용이 어떤 것이든 절대로 온화한 것은 아니라고 그는 확신했다. 에스텔레이드를 걸 수도 있었다.
“이걸로 제자들이 다 커플이 됐구나.”
“다? 혹시 스녹과 엘레나도 그렇게 됐습니까?”
“응. 지금은 드웨인가에서 머물며 이것저것 배우고 있는 모양이야.”
라일라의 대답에 조금 놀란 것도 잠깐, 한스는 이내 수긍했다.
“그 둘 사이를 보면 충분히 그렇게 됐겠죠. 오히려 그렇게 되지 않는 게 이상했을 겁니다.”
“우리가 보기엔 너희들도 충분히 그랬어.”
“하하, 역시 라일라 님. 처음부터 전부 꿰뚫어 보셨군요.”
“내가 좀 그런 면이 있지.”
의기양양한 라일라. 지크는 그녀를 비웃었다.
“이블린 앞에서 그 말을 해 봐라.”
“으윽!”
사랑이란 감정에 어색해하던 라일라에게 온갖 연애 관련 조언을 해준 게 바로 이블린이다. 그 통한의 일격에 라일라도 할 말을 잃었다.
“그러고 보니 그분을 뵌 지도 꽤 오래됐군요. 그분도 오시려나요?”
“내가 불러달라고 했다. 요하임과 같이.”
카르위먼도 거절하진 않았다. 지크의 부탁인 데다가 드라큘 백작가와 루즈 후작가는 밸리드가 본격적으로 침략을 개시하기 전, 전초전이라 할 수 있는 스틸월 백작가 대 플로드 백작가를 중심으로 한 연합군의 전쟁 때부터 스틸월 백작가를 지원한 가문이다.
한마디로 대밸리드전에 초반부터 도움을 준, 카르위먼 입장에서는 무척이나 고마운 존재.
드래곤 슬레이어나 밸리드 토벌자의 명단에 올라 있진 않더라도 이 축제의 초청장을 보내는 데 아무런 거리낌이 없는 상대였다.
“오랜만에 뵙겠군요.”
“아마도 축제의 일정에 최대한 맞춰서 올 거다. 영지를 경영하는 입장상 영지를 비우는 시간은 최대한 줄이는 게 좋을 테니까. 아마 스틸월도 그럴 거고.”
스틸월. 아무래도 민감한 단어일 수밖에 없다. 하지만 말하는 지크도 듣는 다른 이들도 별다른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이미 지크와 스틸월의 관계는 결착이 나 있던 것이다.
“백작님이 오시진 않겠죠?”
“글쎄다. 아마 그레이그를 대표로 보내올 것 같긴 하지만, 그 인간이 직접 오지 말란 법도 없지.”
“그럼 나중에 한 번 찾아뵙는 것도 좋겠네요.”
아무래도 한스는 스틸월에 대한 감정이 지크와는 달랐다. 그리고 지크도 그에 대해 뭐라 할 생각은 없었다.
“다 먹었으면 슬슬 일어나자. 너희들도 일단 교황에게 인사는 해야지. 그 이후에 실력이 얼마나 좋아졌는지 한번 보자고.”
스녹과 엘레나에 대한 평가는 이미 끝난 상태. 제자의 실력 확인은 스승으로서의 의무였다.
한스도 라라도 피하지 않았다.
“네. 오랜만에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잘 부탁드려요.”
긴장과 기대를 한껏 안고 한스와 라라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 * *
한스와 라라까지 합류한 이후, 지크 일행은 꽤 떠들썩하게 지냈다. 1년의 공백이 무색하게도 일행은 그런 공백 따위 없는 것처럼 어울렸다.
처음엔 다 같이 행동했지만 며칠 지나 그들은 몇 개의 무리를 지어 움직였다. 무리의 구성원은 그때그때 달랐다.
그리고 오늘, 라라는 계획해 오던 일을 실행에 옮겼다.
“왜 우리 둘을 데리고 나온 거야?”
피나가 앞서 걷는 라라를 향해 의심스러운 눈길을 던졌다. 그에 비해 그녀 옆에 있던 첼시는 두 팔을 올려 기지개를 켜면서 이 난데없는 동행을 반겼다.
“전 어떤 용건이라도 좋아요. 눈코 뜰 새 없이 바쁜 상황에서 해방된 것만으로도 즐겁거든요.”
“많이 힘들었던 모양이에요.”
라라가 물었다.
“축제 준비가 한창이니까요. 지금 성기사든 신관이든 카르위먼 소속이라면 전부 정신이 없어요. 그래도 우리를 왜 부른지 궁금증은 드네요.”
“별일 아니에요. 그래도 예전에 같이 여행한 사이잖아요. 셋이서 제대로 된 이야기 한번 나누지 못했으니, 이참에 한번 해보자는 취지예요.”
첼시가 반색했다.
“아, 그렌 제너드 피해자 모임을 해보자는 거군요. 그거라면 환영이에요! 그 개…사람에 대해서는 아무리 불평을 늘어놔도 모자라거든요.”
성직자답지 않은 욕설이 튀어나올 뻔한 걸 첼시가 급히 말을 돌려 막았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성격에 익숙한 두 사람은 별 신경을 쓰지 않았다.
“피해자 모임이라. 그럴듯한 이름이네요. 저는 상관없어요. 어쿠스 씨는요?”
“나도 상관없어.”
“정해졌네요. 그럼 적당한 가게에 들어가서 아무 이야기든 나눠 보자고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