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8화
“아무렴요. 낳고 키워준 은혜조차 저버리고 가문을 뛰쳐나간 어리석은 동생이 그나마 가문을 위해 도움을 줄 기회입니다. 상식이 있는 녀석이라면 당연히 우리의 제안을 받아들이겠죠.”
“음, 아주 좋소!”
무척 기꺼운 듯 웨즈컬이 손뼉을 한 번 쳤다.
“이 일이 잘되면 세계는 나 웨즈컬 그라셰인과 미프틸 왕국의 이름을 선명히 새기게 될 거요.”
“그때가 정말로 기다려지는군요.”
“그래, 정말로 기다려져.”
두 사람의 음습한 웃음소리가 방 안에서 메아리쳤다.
* * *
지크와 라일라는 도시를 돌아다녔다. 아직 축제가 열릴 때까지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벌써부터 유동 인구가 꽤 늘어났다. 몇몇 곳에는 임시 가게가 들어서 호객을 하고 있었다.
지크와 라일라는 착한 일이고 뭐고 골치 아픈 모든 걸 머릿속에서 날려버린 채 축제의 번잡함을 즐겼다.
물론 사람들의 시선을 피하기 위한 변장은 필수였다.
여러 가지 음식들을 사 먹고 물건들을 구경하며 간단한 놀이를 즐긴다. 전형적인 축제를 즐기는 연인의 모습이었다.
머릿속에 있는 지식만으로는 그 어떤 사람들보다 많은 축제를 알고 있는 라일라지만 그녀가 직접 겪은 축제는 무척 적다. 그래서 그녀는 눈밭에서 뛰어노는 강아지처럼 지크를 끌고 이곳저곳을 돌아다녔다.
지크도 제법 이 상황을 즐겼다.
라일라보다는 많긴 하지만 그도 축제의 경험이 별로 없는 건 매한가지였다.
회귀 전에는 전 세계를 상대로 투쟁을 하느라 축제를 즐길 겨를도 없었고 무엇보다 마왕과 마인의 난동으로 엄청나게 황폐해진 회귀 전의 세계는 축제가 열리는 일도 적었던 것이다.
지금 열려 있는 모든 가게를 전부 돌아보기라도 하겠다는 듯 두 사람은 열심히 발품을 팔았다.
아직 축제가 시작하지도 않았는데 벌써 즐길 거리를 모두 즐겨버리면 정작 축제 때 재미가 떨어지는 것이 아닌가 싶기도 했지만, 하루하루 늘어가는 점포를 보면 그런 걱정은 접어둬도 될 것 같았다.
그렇게 두 사람이 최선을 다해 도시를 쏘다닐 때였다.
성문 쪽에서 소란이 일어났다.
“뭐지? 몬스터라도 쳐들어왔나?”
방금 전에 산 쿠키 하나를 입에 집어넣던 라일라가 소란이 인 쪽을 쳐다봤다.
“그런 소란은 아니야. 공포에 질린 소리라기보다는 환희나 환호성에 더 가까워. 누가 왔나 본데?”
두 사람은 서로를 마주 봤다.
“아마 우리가 변장 안 하고 들어왔으면 저런 소란이 일었겠지?”
“우리가 아는 사람일 가능성이 높겠군.”
그들은 바로 성문으로 향했다. 성문에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인파가 많아졌다. 지크와 라일라는 인파를 헤쳐 나가면서도 주변에서 들리는 말에 귀를 기울였다.
“뭐야? 왜 이렇게 사람들이 몰리는 거야? 뭔 일이라도 났어?”
“엘프래! 엘프가 왔대!”
“엘프?”
보통 인간에게 엘프는 그 자체만으로도 신기한 존재다. 하지만 그것만으로 성문에 일어난 소란을 설명할 수는 없다. 아무리 신기하다고 해도 이렇게 사람이 몰려들 정도의 존재는 아닌 것이다.
하지만 한 가지, 이렇게 사람이 모일 만한 경우가 하나 있었다.
“드래곤 슬레이어인가?”
“그렇겠지.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사람들이 몰릴 리가 없잖아.”
“그럼 나도 구경하러 가야지!”
얘기를 나누던 사람들도 성문으로 향했다.
지크와 라일라는 눈을 마주쳤다. 그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레오나가 온 것이 틀림없었다.
둘은 사람들 사이에 끼어 어떻게든 성문 가까이에 접근했다.
그리고 둘은 볼 수 있었다. 한 무리의 엘프가 군중에게 둘러싸여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모습을.
“레오나 맞네.”
“그렇군.”
“어쩔까?”
라일라의 물음에 지크는 생각에 잠겼다.
하지만 그 시간은 그리 길지 않았다.
지금 여기서 아는 척 레오나에게 다가갔다가는 그들까지 이 막대한 인간 포위망에 걸려들 것이 분명했다.
여기선 눈물을 머금고 후퇴를 해야 할 시간이었다.
“참 좋은 녀석이었어.”
지크의 말뜻을 라일라는 어렵지 않게 알아들었다. 그리고 그녀도 바로 지크의 의견에 동조했다.
“그렇네.”
안타까운 눈으로 레오나와 그 일행을 한 번 바라본 지크와 라일라는 몸을 돌리려 했다.
“아!”
레오나가 소리쳤다. 지크, 라일라와 눈이 마주친 것이다.
그녀가 자신들을 눈치챘다는 걸 안 지크와 라일라가 황급히 몸을 돌린 채 인파를 헤치고 뒤로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어, 어? 야, 잠깐…!”
뒤에서 레오나가 뭐라 외치는 소리가 들렸지만 지크와 라일라는 무시했다. 적어도 여기서 빠져나가기 전에는 그들은 레오나와 아는 사이가 아니었다.
“어딜 가는 거야! 우리 좀 구해…! 어? 어? 진짜 가? 야! 야, 지크! 라일라!”
레오나가 목놓아 소리쳤다. 그러나 지크와 라일라의 모습은 어느 순간 인파 속으로 사라졌다. 아무리 사람이 많다고 해도 눈 좋은 엘프인, 그것도 실력마저 출중한 그녀가 사람을 그리 쉽게 놓칠 리 없다.
작정하고 숨은 게 틀림없었다. 지크든 라일라든 그런 능력 정도야 차고 넘쳤으니.
그제야 레오나는 알 수 있었다.
자신과 일행은 둘에게 버림받았다는 것을.
“씨이!”
레오나의 입에서 볼멘소리가 터져 나왔다. 그러나 그 소리를 들어야 할 인물은 이미 사라진 상태. 그들은 여전히 군중 속에 갇혀 있었다. 오히려 레오나가 내지른 지크, 라일라의 이름이 군중들을 더 흥분시켰다.
결국 레오나와 엘프들은 유라스에서 보낸 성기사들이 그들을 구출해줄 때까지 성문 앞에서 하염없이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이 배신자들!”
쾅!
레오나가 거세게 탁자를 내려친다. 찻잔 밖으로 찻물이 흘렀다. 그러나 지금의 레오나에게 그런 사소한 일 따위는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어떻게 우리를 버리고 갈 수가 있어!”
“자자, 우리 진정하자고.”
지크가 해맑은 미소를 지으며 레오나를 진정시키려 했다. 하지만 아무래도 역효과가 난 것 같았다.
“지인저엉? 지금 진정이라고 했어?”
쾅!
레오나는 다시 한번 탁자를 두드렸다.
“곤란에 빠진 우리를 내버려 두고 도망친 주제에 지금 진정을 하라고?”
“어쩔 수가 없었어. 우리가 거기서 널 구하려고 했다면 모인 사람들이 더더욱 흥분했을 거야. 이런 말 하기 좀 그렇지만 아무래도 네 명성보다는 내 명성이 더 높으니까. 그 군중의 벽이 몇 배는 더 두터워졌을걸.”
레오나도 지크의 말에 일리가 있다고 느꼈는지 입을 다물었다. 물론 여전히 눈초리는 험악하기 그지없었지만.
“그렇다고 거기 있는 사람들에게 무력을 쓸 수도 없지 않냐. 너희를 당황시키긴 했지만 전부 다 너희에게 호감이 있기 때문에 모인 사람들이라고. 그건 알고 있지?”
“…알지.”
사람들의 벽에 기가 질리긴 했지만 거기 있던 사람들이 자신들에게 순수한 호의를 보내고 있다는 걸 레오나가 모를 리 없었다. 그렇기에 레오나와 엘프들도 강제로 군중을 뚫어내지 못하고 당황하고만 있던 것 아닌가.
“그런 군중은 많은 사람을 동원해 천천히 해산시키는 게 좋아. 그게 무언가를 요구하는 시위였다면 역효과였겠지만 그저 네 얼굴을 보기 위해 순수하게 호기심으로 모인 사람들이었을 뿐이니까.”
“…일리가 있는 건 알겠어.”
“그렇지?”
구슬렸다. 지크는 속으로는 흐뭇하게 웃으며, 하나 겉으로는 침착하게 차를 마셨다. 여기서 자신이 기뻐하고 있다는 티를 내면 안 된다.
그러나 지크는 자신이 쌓은 업보가 있다는 걸 잊었다.
“그리고 지크 네 수법이 이런저런 말로 상대를 구슬려 바보로 만드는 거라는 것도 알고 있고.”
“풉!”
옆에서 모든 걸 지크에게 맡긴 채 차를 홀짝이던 라일라가 급히 입을 막았다. 그녀의 어깨가 사정없이 떨렸다.
그녀 또한 지크와 공범이고 지금의 행동이 자신에게나 지크에게나 뭐 하나 도움이 되는 게 없다는 걸 충분히 알고는 있지만 그래도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을 수가 없었던 것이다.
“분명 이번 일도 비슷하겠지?”
“설마. 어디까지나 나는 진실을 얘기하고 있을 뿐이야.”
지크의 얼굴엔 한 점 흔들림도 없었다. 다른 이라면 여기서 넘어갈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러기엔 레오나는 지크를 너무도 잘 알았다.
“그래, 너는 진실을 얘기하고 있어. 하지만 다른 진실이 있다는 걸 부정하고 있지도 않지.”
‘…이게 정말 그 호구 레오나인가?’
처음 만났을 때 인간 세상에서 온갖 사기를 당하던 그 레오나와 눈앞의 인물이 동일 인물인지 분간이 가지 않았다.
그러나 레오나의 말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
“너라면 그 사람들을 해산시키는 것도 가능했을 거야. 네 말발이라면 지금처럼 구슬리는 것도 가능했을 거고. 혹은 약간의 기세를 쏘아 사람들의 흥분을 가라앉힐 수도 있지 않았을까? 당장 내가 생각하는 것도 이 정도인데, 네가 그 생각을 못 했다고?”
“누누이 말하지만 그때는 그게 최선….”
“귀찮아서 도망쳤구나.”
“…….”
지크는 정말로 놀랐다. 설마 레오나가 여기까지 꿰뚫어 보다니. 옆을 보니 라일라도 적잖이 놀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지크는 웃으며 따뜻한 눈빛을 하고 레오나의 어깨에 손을 올렸다.
“그 어리숙하던 레오나가 이렇게까지 성장할 줄이야. 역시 함께 여행을 하며 내가 시켰던 경험이 결실을 맺….”
“역시 도망친 거잖아!”
레오나가 벌떡 일어나 소리쳤다. 그 후로 한동안 세 명은 소란을 피워댔다.
* * *
“흥! 흐흐흥!”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앞서 걷는 레오나의 발걸음이 가볍다. 그녀의 뒤를 지크와 라일라가 뒤따랐다.
“빨리 안 따라와?”
레오나가 도끼눈을 한 채 두 명을 뒤돌아본다. 지크와 라일라는 조금 걸음을 빨리 해 레오나에게 다가왔다.
레오나는 만족스러운 미소를 띠고는 손가락으로 한쪽을 가리켰다.
“다음은 저걸 보러 가자!”
“그래.”
“좋아.”
지크와 라일라는 거부하지 않았다. 아니, 거부할 수 없었다.
자기를 내버려 두고 도망간 대가로 레오나는 한동안 두 사람을 끌고 다닐 권한을 요구했다.
뭔가 대단한 요구라도 하는 것 같았지만 결국은 같이 축제를 즐기며 놀자는 뜻이었다. 당연히 둘에게 거부권은 없었다. 그리고 거부할 만한 일도 아니었다.
“역시 인간의 축제는 즐거워!”
양손에 노점에서 산 음식을 들고 레오나가 웃었다.
“불편하진 않아?”
라일라가 물었다.
“아, 이거? 괜찮아.”
레오나의 머리에는 두건이 씌워져 있었다. 엘프 특유의 긴 귀를 가리기 위해서였다.
“그리 불편하지도 않고, 마음대로 축제를 즐기기 위해서라면 불편해도 감수를 해야지.”
“그럼 다행이고.”
“응. 숲에 돌아가기 전까지 마음껏 놀고 먹을 거야.”
어떤 비장한 각오를 늘어놓는 것 같다. 내용은 비장함이 감도는 어조와는 전혀 달랐지만.
“그런데 이렇게 놀기만 해도 괜찮겠어? 너는 엘프 일행의 대표일 텐데. 일단은 이것도 외교 일정이잖아?”
지크의 질문에 레오나는 딱 잘라 대답했다.
“어차피 대부분의 일은 나랑 같이 온 다른 이들이 할 거야. 나보다는 더 전문적인 엘프들이니까. 게다가 중요한 일정은 전부 머릿속에 넣어 놨으니 대표의 일은 그때 하면 돼.”
그러며 그녀는 두 팔을 쭉 폈다.
“그 이외의 시간에는 계속 놀아야지! 또 언제 숲 밖으로 나올지 모르니까. 이런 때 놀지 않으면 손해잖아? 그러니까 제대로 나랑 놀아달라고. 아까처럼 도망가지 말고.”
입술을 삐죽이는 레오나를 보며 지크와 라일라는 피식 웃었다.
“알았다. 축제 내내 놀아주지는 못하겠지만, 적어도 지금만은 최선을 다해 놀아주마.”
“진짜지? 약속이다?”
레오나가 해맑게 웃었다.
그렇게 세 사람은 한동안 도시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며 즐길 거리를 찾아다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