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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607화 (607/628)

외전 6화

방금 전에 쓴 인상이 마치 환영이 아닐까 착각될 정도로 루벨라는 아무렇지도 않게 웨즈컬을 대했다.

정말 그림으로 그린 듯한 공손한 태도. 조금 전까지 눈앞의 인간에 대한 불평을 내뱉었던 사람이라고는 도저히 믿기지 않았다.

“참 운이 좋군요. 오늘 성녀님을 뵙지 못하고 돌아가게 되는 줄 알았습니다.”

“약속을 어기게 된 것에 대해서는 사과드립니다. 하지만 그만큼 중요한 일이 있었으니 아무쪼록 불쾌함을 거둬 주시지요.”

“불쾌함이라니요. 설마요. 이미 협약이 되어 있지 않았습니까. 드래곤 슬레이어분들이 온다면 우리와의 약속보다 그쪽을 우선시하겠다고요. 암요. 일개 공작의 자제보다는 위대한 드래곤 슬레이어를 우선시하는 게 당연하죠.”

웃는 낯으로 루벨라를 충분히 이해한다고 말하고는 있지만 그 말투에 진하게 배인 비아냥을 눈치채지 못 할 사람은 없었다.

와이그의 손가락이 살짝 꿈틀거렸다. 당장이라도 검을 빼서 눈앞의 싸가지 없는 놈의 골통을 깨부수고 싶은 모양이었다.

“이해해 주셔서 감사드려요.”

그에 비해 루벨라는 차분하게 고개를 숙였다.

“한데, 이미 오래전에 돌아가셨으리라 생각했는데 혹 무슨 볼일이라도 있으셨는지요.”

“그런 건 없습니다. 교황 성하와도 이야기를 잘 끝마쳤고요. 그저 오랜만에 들른 유라스라 잠시 구경을 하던 중이었습니다. 그러다 이렇게 성녀님을 만나게 되었으니 충분히 가치 있던 구경이었지요.”

넉살 좋게 말을 하지만 그가 구경이라는 핑계를 대며 루벨라를 기다렸다는 사실을 눈치채지 못하는 이는 없었다.

아니, 기다린 건 루벨라 때문만이 아닌지도 몰랐다.

“그래, 이 사람이 그 위대한 드래곤 슬레이어십니까?”

웨즈컬의 눈이 지크와 라일라를 향했다. 관찰하는 시선이 둘을 훑는다.

‘참 알기 쉬운 놈이군.’

본인은 숨기려 하고 있고, 웬만큼 눈치 빠른 이가 아니라면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잘 숨기고도 있지만, 지크는 웨즈컬의 눈에 담긴 감정을 바로 알아챘다.

질투와 시기.

시선이 라일라를 향했다 돌아온 이후에는 그 감정이 더욱 심해졌다.

드래곤 슬레이어라는 명성을 가지고 있고 카르위먼과의 친분도 그들이 자신과의 약속을 일방적으로 미룰 정도로 강한 데다가, 라일라라는 비할 데 없는 미모를 가진 여성까지 곁에 두고 있다.

지크 본인이 생각하기에도 자신은 속물인 놈들이 질투하기 딱 좋은 위치에 있었다.

“반갑습니다. 아마도 드래곤 슬레이어 중에서도 최고, 최강이라 이름 높은 지크 씨이신 것 같은데, 맞습니까?”

“맞습니다.”

“힘의 용사라고도 불린다죠?”

“…그렇기도 하죠.”

비올루윈에서 시작된 그 빌어먹을 명칭이 결국 여기까지 퍼진 모양이었다.

이미 예정된 상황이긴 했다.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위업을 지닌 지크의 과거를 궁금해하는 사람은 무척이나 많았고, 그중 행동력까지 갖춘 이의 숫자도 적지 않았다.

게다가 비올루윈에서는 무너진 관광 산업을 일으키기 위해 지크 일행의 용사 홍보를 계속하고 있는 상황.

비올루윈을 구해준 힘의 용사와 그 일행이 위대한 드래곤 슬레이어이자 밸리드 토벌자라는 사실이 밝혀지기까지는 그리 길지 않았다.

그리고 당연히 두 개의 업적이 결합해 지크의 명성은 더욱 폭증했다.

비올루윈은 당연히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찬란한 영웅의 행보가 바로 자신들의 도시를 관통한 것이다. 그들은 더 대대적으로 지크 일행을 홍보했다.

당연히 그들이 내세운 용사의 칭호도 지크와 일행의 이명으로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당연하게도 지크는 그 명칭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았다.

많이 익숙해져서 예전처럼 듣기만 해도 소름이 올라오는 정도는 아니었지만.

“그럼 옆에 계신 분은 마도의 용사인 라일라 씨고요.”

“맞아요.”

“소문처럼 무척이나 아름다운 분이시군요.”

“칭찬 감사해요.”

그의 끈적이는 듯한 시선이 불쾌했지만 라일라는 받아넘겼다.

애초에 익숙하기도 한 데다가 지크나 동료도 아닌 타인의 시선 따위 그녀에게 어떤 감흥도 주지 못하는 것이다.

그런 모습이 조금 더 웨즈컬의 신경을 건드렸다. 지크는 그의 질투심이 조금 더 강해진 것을 느꼈다.

“여러분의 활약상은 저도 즐거이 들었습니다. 오랜만에 어렸을 때 읽던 소설을 다시 보는 느낌이 들더군요. 혹시 바쁘지 않으시다면 여러분의 활약상을 직접 들을 수….”

“바쁩니다.”

지크는 칼같이 그의 제안을 끊어냈다.

웃고 있던 웨즈컬의 표정에 금이 갔다. 씰룩이는 눈썹이 그의 감정을 대변하는 것 같다.

너무도 쉽게 가면이 깨어져 나간 것 같지만 그도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미프틸 왕국이라는 강국의 공작 자제라는 신분을 가진 그의 부탁을 누가 이렇게 거절한단 말인가. 만약 거절하려 해도 좋은 말로 거절하는 것이 당연했다.

즉, 지크의 반응은 그가 한 번도 겪어보지 못한 무례한 거절이었던 것이다.

그의 가면이 망가지는 것도 당연한 일이었다.

하지만 웨즈컬은 그 이상 반응하지 않았다. 썩어도 귀족이라고, 지금껏 그가 받은 교육과 사교계에서 쌓은 경험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

“…그러시군요. 아쉽지만 어쩔 수 없죠.”

그는 한 걸음 물러났다. 생각 같아서는 당장이라도 지크를 끌어내어 목을 쳐버리고 싶었지만 지금은 불가능했다.

다만 웨즈컬은 이 사건을 마음 깊숙이 새겨뒀다.

“성녀님의 얼굴도 봤고 위대한 영웅도 만나 봤으니 전 이제 그만 돌아가 보도록 하겠습니다.”

웨즈컬은 고개를 한 번 숙이고는 지크 일행을 떠났다.

“얌전히 물러났네?”

“여기서 싸워봤자 자기만 손해니까. 나처럼 뒷생각 없이 들이받을 수 있는 놈이 얼마나 되겠어.”

“뒷생각 없이 들이받았다는 건 알고 계셨네요.”

루벨라의 말에 지크는 가슴을 폈다.

“물론이죠.”

“성녀님은 칭찬하시는 게 아냐.”

“물론 그것도 알고 있어.”

그 어떤 말도 통하지 않는다. 그 뻔뻔함은 정말로 존경심이 들 정도였다.

이미 지크에게 익숙해진 세 사람도 새삼 혀를 내두를 정도였다.

“그리고 솔직히 성녀님도 내심 통쾌해하셨을걸? 뒷일이 어떻게 되든 말이야.”

“…대답하지 않을래요.”

“그 정도면 이미 대답한 것과 다름없습니다만.”

“그런데 정말 괜찮나요? 그는 미프틸 왕국 공작가의 후계자예요. 그와 적대한다면 공작가는 물론 나아가 왕국 전체와 적대하게 될지도 몰라요.”

“그래서 제게 불이익이 되는 일이 있습니까?”

“그야….”

생각해보니 딱히 없었다. 미프틸 왕국이 강하다고는 하지만 지크와 활동 범위와는 거리가 상당히 떨어져 있다.

“그래도 그들이 암살자를 보낼 수도….”

루벨라는 다시 말을 흐렸다. 암살자 정도로 눈앞에 있는 지크가 당할 리가 있겠는가.

“그거 보세요. 아무리 화를 내봤자 저 작자는 제게 뭔가 할 힘이 없습니다.”

“그래도 조심하세요. 나라 하나를 적으로 돌려서 좋을 건 없어요.”

“명심하죠.”

하지만 말만 그럴 뿐, 지크는 그다지 태도를 바꿀 생각이 없었다.

상황이 정말로 최악으로 흘러가 미프틸 왕국과 완전히 대적하게 된다 해도 마찬가지다.

‘왕국 하나 정도야 그냥 갈아버리면 되니까.’

다른 이라면 엄두도 내지 못할 생각. 하지만 지크는 무척이나 태연하게 그런 생각을 했다.

지크에게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루벨라와 와이그도 지크의 생각을 알게 된다면 분명 입을 떡 벌리고 경악할 것이 분명했다.

루벨라와 와이그는 지크와 라일라에게 방을 안내해주고 떠났다.

배정된 방은 상당히 호화로운 곳이었다. 라일라는 침대로 뛰어들었다. 푹신한 이불의 감촉이 그녀를 감쌌다.

“그 사람이 웨즈컬 그라셰인이구나.”

그녀가 목만 움직여 지크를 보며 말했다. 지크는 근처에 있던 의자를 빼 앉으며 대답했다.

“넌 그놈을 직접 만나 본 적이 없었지.”

“응. 그냥 기억만 있어.”

“오만함이 극에 이른 녀석이었다.”

“실력은 나쁘지 않잖아.”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지. 오히려 재능과 능력만 따지면 최상급에 속하는 녀석이야. 마인 시대 때 마인 몇을 처리했을 정도였으니. 하지만 그래봤자 거기까지야. 놈은 자기 힘에 너무 취해 버렸어. 분수를 모르게 됐지.”

“힘의 마왕 지크 모어와 정면 승부를 하려 했을 정도로 말이지?”

라일라가 장난스럽게 말하자 지크가 낄낄거렸다.

“당시의 난 아직 마왕이라고 불릴 때가 아니었으니 실력에 자신이 있다면 그럴 만도 하지. 그리 기억력이 좋은 편이 아닌 나지만 그때 상황만큼은 확실히 기억나. 녀석의 실력도 꽤 괜찮았던 데다, 무엇보다 나한테 사정없이 박살 난 후 짓던 표정이 너무도 재미있었거든.”

지크의 가학적인 취미에 적격인 무척이나 재미있는 장난감이었다.

하지만 그때 지크는 웨즈컬을 죽이지 못했다. 딱히 살려 보내려는 건 아니었다.

“그렌 제너드가 끼어들지만 않았어도 조금 더 가지고 놀았을 텐데 말이야.”

지크는 웨즈컬과의 재전을 바랐었다. 다음번에는 그가 어떤 표정으로 자신을 즐겁게 해줄지 기대했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크는 기대를 충족하지 못했다.

“그런데 설마 놈을 구출한 그 그렌 제너드에게 빼앗길 줄이야.”

그 소식을 들었을 때 지크는 무척이나 혀를 찼었다. 아껴서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망가졌을 때 아이가 느끼는 상실감 딱 그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것도 그런 제너드의 계획이었나?”

“맞아.”

“하여간 안 끼는 곳이 없군. 그럼 놈의 그 성격도 놈에 의해서 만들어진 거야?”

“아니, 그건 아니야. 그라셰인은 원래부터 그런 놈이었어. 제너드는 그런 성격을 이용한 것뿐이야.”

“원래부터 그런 멋진 성격이었다고? 그놈도 참 대단한 놈이네.”

지크는 한껏 비아냥거렸다.

“그런데 괜찮겠어?”

라일라가 물었다.

“뭐가?”

“그라셰인 말이야.”

“그놈이 축제에서 뭔 일을 일으킬까 봐? 걱정 마라. 그러면 회귀 전에 제너드 놈에게 빼앗겼던 끝내기를 내가 직접 할 테니까.”

“녀석의 성격상 그럴 가능성은 충분하지만 내가 말하는 건 그게 아냐.”

“그럼?”

“나중에 애들도 온다고 했잖아.”

그녀가 말한 애들이란 한스와 스녹, 엘레나, 라라, 즉 제자들을 일컫는 것이었다.

그들도 어엿한 드래곤 슬레이어인 데다가 드래곤의 사체를 분할받은 이들이니 이 축제에 참가하는 게 이상한 건 아니었다.

“그게 왜?”

“그 녀석은 라라의 약혼자잖아.”

라일라의 말을 듣고서야 지크도 무언가가 떠올랐다.

분명 라라의 성은 브라우닝. 그녀의 출신 가문은 미프틸 왕국의 브라우닝 후작가였다.

“그러고 보니 얼핏 들은 것 같기도 한데.”

“물론 라라가 가문을 뛰쳐나오고 제적당하면서 약혼은 파기됐지만, 그 녀석이 라라를 만나면 고이 넘어가진 않을 거야. ‘자기 것’이라고 생각되는 것에 대해서는 신경질적으로 집착하는 녀석이니까.”

“‘자기 것’이라…. 상당히 재미있는 생각이로군. 뭐, 놈이라면 충분히 가지고 있을 만한 생각이지.”

“그라셰인이 제너드와 충돌한 이유도 그거야. 제너드에게 호감을 갖고 있던 라라를 보고 그라셰인이 음모를 꾸몄었거든. 그리고 제너드는 그 상황을 이용해 라라가 자신에게 품고 있던 호감을 강화시키는 데 썼고.”

“쓰레기들끼리 쌍으로 난리를 쳤군.”

그 사이에 낀 라라가 무척이나 불쌍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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