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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606화 (606/628)

외전 5화

“솔직히 지크 님이 아니었다면 지금도 그 나라들 중 한 곳에서 온 사람과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을 거예요.”

“그리 달가운 사람은 아닌 모양입니다.”

“예에. 무지무지요.”

루벨라가 슬쩍 지크의 눈치를 봤다.

“혹시 어디 가서 퍼뜨리고 다니시는 건 아니겠죠?”

“전 방에서 나가자마자 여기서 나눈 이야기를 모조리 잊어버릴 생각입니다만. 라일라는 어때?”

“나는 머리가 너무 좋아서 그런 간단한 방법은 불가능해. 그러니까 머릿속에 따로 공간을 만들어 놓아 저장해야지. 잠금쇠를 한 200개 정도 만들어 걸어 놓으면 보안은 확실할 거야.”

“참고로 잠금쇠나 방어벽의 재질은?”

“오리할콘보다 만 배 정도 단단한 어떤 물질.”

“그럼 걱정 없겠군.”

지크는 다시 루벨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렇답니다, 성녀님.”

“네, 마음을 놓아도 되겠네요.”

어린애들이나 할 법한 표현의 약속이었지만 루벨라는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애초에 그들이 함부로 퍼뜨릴 거라고 진심으로 생각하지도 않았다.

“미프틸 왕국이라고 아세요?”

“알죠. 서쪽의 대국이 아닙니까.”

제국이라 불릴 정도까지는 아니더라도 상당히 넓고 풍족한 영토를 바탕으로 한 강력한 군사력을 자랑하는 국가다.

“만약 전쟁 때 가까운 곳에 있었다면 상당한 도움을 받을 수 있었을 텐데.”

“아서, 라일라. 그놈들의 도움은 웬만하면 받지 않는 게 좋아.”

“그게 무슨… 아!”

머릿속 지식을 뒤적여 미프틸 왕국을 조금 더 자세히 살펴본 라일라는 지크의 말에 동의할 수밖에 없었다.

“왕국 주제에 저 군사 강국이랍시고 툭하면 주변 나라를 윽박지르던 브로드스탁 제국보다 평판이 나쁜 놈들이야. 만약 밸리드 토벌 때 한 손 보탰으면 그걸 명분으로 온갖 트집을 잡아댔겠지.”

“카르나 님을 모시는 기사로서 이런 말을 하는 건 어떤가 싶기도 합니다만, 저도 그 점에 관해서는 지크 님과 같습니다. 그 정도로 미프틸 왕국은 골치 아픈 자들이죠.”

“그리고 지금 그 미프틸 왕국이 이 축제의 협력자가 됐고 말이죠.”

루벨라와 와이그가 동시에 한숨을 내쉬었다.

“협력국이 미프틸 왕국만이 아니라서 그나마 얌전한 편이긴 해요. 게다가 지금 아쉬운 쪽은 철저하게 미프틸 왕국을 포함한 협력국 쪽이니까요.”

“그래도 그 작자들이 얌전할 리는 없을 텐데요.”

“당연히 그렇죠.”

“동쪽은 멸망한 왕국의 영토에 대한 각 나라들의 신경전. 서쪽은 미프틸 왕국을 포함해 밸리드 토벌전 때 참여를 못 한 나라의 숟가락질. 정말로 두 분의 고생이 훤하십니다. 저흰 상관없는 일입니다만.”

“한 대만 때려도 될까요, 지크 님?”

“천하의 성녀님의 요청을 그 어찌 거부할까요. 때리고 싶은 곳만 말씀해 주시면 바로 준비해 드리죠.”

루벨라의 한숨 소리와 지크의 얄미운 웃음소리가 교차했다.

“어쨌든, 저희가 오지 않았다면 만나야 했던 반갑지 않은 사람이 미프틸 왕국의 사람이라는 거군요.”

“정확히는 미프틸 왕국의 그라셰인 공작 자제예요.”

“그라셰인 공작 자제 말입니까? 아마 여기까지 왔다면 후계자겠죠. 이름이 웨즈컬이라 했던가요?”

“알고 계시나요?”

“조금은요. 라일라도 알지?”

“분명 쓰레기 같은 인간이었…!”

라일라가 입을 다물었다. 그리고 슬쩍 루벨라의 눈치를 봤다.

“걱정 마세요. 저도 여기서 나눈 대화는 완전히 봉인해둘 생각이니까요.”

루벨라가 한쪽 눈을 찡긋하며 말했다. 라일라가 긴장을 풀었다.

“후후, 그렇죠. 여기서 나눈 대화는 여기서 끝나는 거죠.”

“그래. 그리고 뭘 그렇게 말을 하다 말아? 쓰레기를 쓰레기로 부르는 게 뭐 어떻다고.”

“…….”

“…….”

“…….”

라일라가 하던 말을 멈추고, 루벨라가 발설하지 않을 테니 걱정하지 말라 말할 정도로 민감한 말을 지크는 아주 태연스레 내뱉었다.

자신을 향해 쏟아지는 세 쌍의 시선을 지크는 뻔뻔스럽게 마주 봤다.

“…그러네. 네 말이 맞아. 어차피 외부로 발설되지도 않을 테니,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부르지 못하리란 법은 없지.”

“…생각해보니 그러네요. 저도 여기서만큼은 그 작자를 쓰레기라고 부를래요. 카르나 님도 관대히 봐주시겠죠.”

“뭐, 그 작자의 성품은 저도 참기가 힘들 정도였으니, 여기서만큼은 그 작자의 칭호를 통일해도 별 상관은 없을 겁니다.”

웨즈컬의 신분 때문에 함부로 부르기가 꺼려졌을 뿐, 이미 그의 이미지는 모두 같았던 모양이다.

지크가 한 번 물꼬를 트자 너 나 할 것 없이 웨즈컬에 대한 칭호를 하나로 만들었다.

“먼저 쓰레기를 쓰레기라고 부르는 게 뭐가 문제냐고 한 제가 할 말은 아닌 것 같지만, 그렇게 시원히 인정하시다니. 상당히 고생을 많이 하신 모양이십니다.”

“지크 님도 그 사… 쓰레기가 어떤지 아신다고 하셨잖아요.”

“그림으로 그린 듯한 악덕 귀족이죠.”

그게 주변에서 평가한 웨즈컬 그라셰인이라는 인물이었고 그의 본질도 평가와 다르지 않았다.

“하필이면 미프틸 왕국은 그 작자를 보낸답니까.”

“그래도 왕국의 고위 귀족이니까요.”

“하긴.”

이 세계는 엄연한 신분제 사회다. 가지고 있는 능력보다는 신분이 더 중요하게 취급되는바.

공작가의 후계자라는 그의 신분은 분명 그를 무척이나 중요한 인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래도 이런 중요한 일엔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생각됩니다만. 미프틸 왕국의 고위 귀족이 그 인간밖에 없는 것도 아니니 말입니다.”

“제 말이 그 말이에요!”

그러며 루벨라는 지크와 라일라에게 한탄을 시작했다. 옆에서 와이그도 조금씩 루벨라를 도와 웨즈컬을 욕했다.

어떻게든 이 축제에서 자신들의 존재를 부각시키기 위해 무리한 조건을 요구하는 데다가 말투나 행동에서 거만함이 물씬 풍겨 나온다.

어떤 때 보면 주객이 전도된 것이 아닐까 생각마저 들 정도였다.

물론 썩어도 귀족이라고 그도 아슬아슬한 한계는 파악하고 있어 정말로 카르위먼이나 다른 협력국이 분노할 정도까지 발을 디디진 않았다.

하지만 오히려 그게 더 짜증 날 때도 있었다.

“정말로 자기 분수를 모르고 행동하는 것이라면 당장 쫓아내 버리는 건데 말입니다.”

명분만 있다면 당장이라도 그를 쫓아내고 싶은 감정이 와이그에게서 넘실거렸다.

“지금의 카르위먼이라면 충분히 그럴 수 있지 않습니까.”

밸리드의 토벌로 지금 카르위먼의 위세는 끝 간 데 없이 높아져 있는 상황.

아무리 미프틸이 강국이라고 해도 지금 카르위먼과 대립각을 세울 정도로 멍청하진 않을 것이다. 카르위먼의 항의라면 적어도 파견인을 바꾸는 성의 정도는 보일 터.

“아까 말씀드렸지만 그라셰인 공자의 무례는 어디까지나 선을 넘지 않고 있습니다. 게다가 일단 현재 세계의 긴장 상황을 누그러뜨리려는 교단의 입장상 태도가 불쾌하다고 바로 추방하기가 또 난감합니다. 그라셰인 공자의 인성이 어떻든 그의 뒤에는 그라셰인 공작가가 있고 그라셰인 공작가는 미프틸 왕국에서 상당한 영향력을 자랑하는 가문이니까요.”

“그럼 어쩔 수 없군요. 두 분 아니, 카르위먼에서 고생을 좀 하는 수밖에요.”

“네, 그럴 수밖에 없죠.”

“너무 그렇게 실망하지 마십시오, 성녀님. 적어도 지금 정도는 한탄을 들어드릴 테니까 말이죠.”

“아뇨, 이제 그만할래요. 지금껏 충분히 하기도 했고, 더 이상 했다가는 참지 못하고 그 인간의 면전에다 불평을 늘어놓을지도 몰라요.”

“그건 또 안 될 일이죠. 그런 인간들에겐 약점을 내보이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니 말입니다.”

어차피 루벨라에게 물어보고 싶은 것도 있었다. 지크는 바로 화제를 돌렸다.

“그러고 보니 밸리드 놈들에 대한 토벌을 계속하고 있다고 알고 있습니다만, 성과는 어떻습니까? 저희도 나름 지부를 부수고 다니긴 합니다만 아무래도 둘뿐이라는 한계가 있어서 말입니다.”

“수월해요. 이미 주력은 예전 전쟁에서 모조리 날아간 데다 지크 님이 주신 밸리드 거점의 정보도 정확했으니까요. 카르위먼이 영향력을 미치는 곳의 지부는 대부분 박살 냈다고 생각하시면 돼요.”

“무척 고무적인 일이군요. 역시 카르위먼에게 믿고 맡긴 보람이 있습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해요. 하지만 그래도 완벽한 건 아니에요.”

“뭔가 미진했던 점이 있었던 모양이군요.”

“피로스 블링턴을 놓쳤어요.”

“밸리드 서부 총지부의 책임자로군요. 녀석이라면 그럴 만하죠. 밸리드의 추기경인 만큼 강한 데다가 집요하고 교활하니까요.”

“이대로 고이 숨어 지낼 놈은 절대로 아니죠. 분명 어떤 식으로든 움직일 게 분명해요.”

“성녀님은 그게 이 축제가 될 거라고 생각하시는 겁니까?”

“모르죠. 밸르 같은 악신을 믿는 정신 나간 놈들의 사고를 제가 어떻게 알 수 있겠어요. 다만 가능성은 충분히 있죠.”

“솔직히 이 축제에서 일을 벌인다는 것 자체가 멍청한 짓이긴 합니다. 온 세계의 눈이 집중되는 곳인 터라 여기서 커다란 일을 벌인다면 분명 밸리드의 악명을 더욱 높이고 자신들이 아직 건재하다는 것도 알릴 수 있긴 하겠습니다만, 이 축제에 모일 면면들을 생각하면 철저한 악수밖에 되지 않을 겁니다.”

와이그는 밸리드가 이번 축제에 손을 쓸 거라는 것에 회의적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그가 방심하고 있다고도 할 수 없었다.

저번 전쟁에서 특히 공을 세운 이를 모두 초대한 축제다. 초대자 한 명 한 명이 절대 약하지 않고, 지크 수준에 이르러서는 완전히 괴물이다.

한데 그런 인물들이 바글바글 모인 곳에서 음모를 꾸민다? 그것도 전성기 때가 아니라 몰락할 대로 몰락한 지금의 밸리드가?

놈들이 자살 지원자가 아니라면 당연히 축제엔 얼씬도 하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밸리드는 목적을 위해서라면 목숨을 쉽게 던질 수 있는 놈들이긴 했지만 그렇다고 자살 지원자도 아니었다.

“만약 놈들이 이 축제에 손을 뻗는다면 둘 중 하나일 겁니다. 축제에 모일 강대한 전력을 무력화시킬 자신이 있거나 아니면 상황 판단을 잘못하고 있거나.”

“어쩌면 둘 다일 수도 있겠군요.”

“놈들이 쳐들어온다면 차라리 좋겠습니다. 이참에 밸리드의 잔당들을 모조리 쓸어버리게 말이죠.”

“안 돼요, 와이그 경. 일반인도 많이 참가하는 축제예요. 혹시나 아무 힘도 없는 일반인들이 죽을지도 몰라요.”

“그도 그렇군요. 확실히 제 생각이 짧았습니다. 하지만 설혹 놈들이 이상한 수를 써 온다 하더라도 그리 큰 피해가 나오겠습니까. 다른 건 둘째 치더라도 드래곤 슬레이어 분들이 모두 모이는데요.”

“그래도 민간인 피해는 절대로 없도록 해야 해요.”

루벨라의 의지는 굳건했다. 그리고 그녀의 의견을 와이그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도 성기사이기 전에 한 명의 신앙인이다. 수명을 다하지도 않고 꺼지는 생명은 하나라도 주는 것이 좋았다.

밸리드 같은 더러운 생명은 빼고.

“그러려면 더 경계를 철저히 해야겠군요. 무슨 일이 터지더라도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말이죠.”

와이그가 그렇게 말하며 일어섰다.

“슬슬 일어나야 할 것 같습니다. 두 분을 뵌 건 정말로 기쁜 일이지만, 저희도 한가한 편이 아니라서요. 성녀님도 그만 직무에 복귀하셔야 할 듯합니다.”

“알겠어요.”

그녀도 와이그를 따라 일어섰다.

“두 분, 오랜만에 뵈어서 정말로 반가웠어요. 나중에 짬이 날 때 다시 보도록 해요.”

그녀는 문을 가리켰다.

“가시죠. 여러분이 묵으실 곳까지 안내해드릴게요.”

넷은 방을 나왔다. 루벨라의 안내 아래 복도를 걸을 때였다.

“이거 성녀님 아니십니까.”

낯선 목소리가 들린다. 와이그와 성녀의 얼굴이 미미하게 찌푸려졌다.

하지만 그건 아주 잠깐이었다. 그들은 재빨리 표정을 평소처럼 고치고 말을 걸어 온 자를 쳐다봤다.

루벨라가 그를 향해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그라셰인 공자님.”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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