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4화
지크와 라일라, 루벨라와 와이그는 서로 마주 봤다.
교황이 나가며 명령을 내렸는지 한 신관이 새로운 차를 가져다줬다. 차 한 모금을 마신 루벨라가 살짝 한숨을 쉬었다.
“꽤 경험을 쌓아서 어느 정도 성하나 지크님을 따라잡았다고 생각했는데, 역시 아직은 무리였네요.”
“성녀님께서는 잘하고 계십니다. 성하나 지크 님이 조금 규격 외이실 뿐이죠. 저도 두 분에게는 이리저리 휘둘리지 않습니까. 두 분은 분명 목표로 삼을 만한 분들이지만 단시간에 따라잡으려 드는 건 오히려 성녀님께 해가 될 수 있습니다. 두 분 다 평생을 바쳐도 따라잡을 수 있는 분들인지부터 의문이니까요. 게다가 절대, 절대 두 분의 성격은 닮지 마시고요.”
아마도 와이그가 정말로 하고 싶은 말은 마지막 말이 아니었을까.
“저는 몰라도 교황님에게까지 그렇게 말해도 되는 겁니까?”
별로 비꼬는 건 아니다. 그저 순수하게 궁금했기에 지크는 그렇게 물었다. 그에 대해 와이그는 단호히 대답했다.
“오히려 그래서 더욱 그런 겁니다.”
“큭큭! 역시 교황께서는 상당히 재미있는 분이십니다.”
조그맣고 재미있던 소란에 대해 그들은 그렇게 일단락했다.
네 사람은 담소를 나누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최근 근황이나 아무래도 좋은 사소한 이야기들이 주제가 됐다.
그러다 점점 이번에 열릴 축제에 대한 것으로 주제가 옮겨갔다.
“그러고 보니 지금 드리면 되겠죠.”
지크가 품을 뒤적이더니 마법 상자 하나를 꺼내 테이블에 올려놨다.
“제가 가지고 있는 드래곤의 사체입니다.”
대부분의 나라, 가문, 사람들이 그 비늘 하나를 얻기 위해 눈에 불을 켜고 있는 귀중품을 한가득 넘기고 있음에도 지크의 행동은 담백하기 그지없었다.
누가 보면 쓸모없는 돌이라도 건네주는 줄 알 것 같았다.
“알고는 있었지만 지크 님의 배포는 정말로 혀를 내두를 정도군요.”
“그만큼 카르위먼을 믿는다는 소리입니다, 와이그 님. 게다가 훔쳐 가 볼 테면 훔쳐 가 보라죠. 다만 그 뒷감당은 해야 할 겁니다.”
“…지크 님을 상대로 말이죠?”
지크가 미소를 지었다. 물론 여기 있는 사람 중 지금의 지크의 미소를 보고 안정감을 느끼는 이 따위는 없었다.
“알겠습니다. 지크 님의 카르위먼에 대한 믿음, 확실하게 보답하도록 하죠!”
와이그가 가슴을 탕탕 쳤다.
“믿습니다. 뭐, 카르위먼이라면 괜찮을 겁니다.”
“…뭔가 의미가 있는 말씀 같습니다만.”
“이번 축제의 주최에 협력하는 세력이 좀 있다고 들었습니다.”
“아, 그것 때문이군요.”
어디까지나 카르위먼이 계획하고 카르위먼이 주최하는 축제지만, 그렇다고 다른 외부 협력 세력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아니, 오히려 외부 세력은 생각 외로 상당히 많은 지원과 영향력을 행사하고 있었다.
“정치라는 건 참 귀찮습니다. 그렇지 않습니까?”
“…역시 지크 님. 이미 파악하고 계셨네요. 솔직히 조금 아니, 꽤 많이 골치가 아픈 상황이에요.”
지금껏 지크, 라일라와 활달하게 대화를 나눈 사람이라고는 생각할 수 없는 정도로 루벨라의 얼굴에 피곤이 드리워졌다.
정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와이그도 마찬가지. 그저 그는 피곤보다는 짜증 쪽을 더 느끼고 있는 게 다를 뿐이었다.
“외부 세력? 골치 아픈 상황?”
라일라가 고개를 갸웃거리자 지크가 설명했다.
“생각하면 간단한 일이야, 라일라. 우리는 분명 울텔과 그렌 제너드 그 쓰레기들을 치워버리고 밸리드의 몸통을 갈가리 찢어발겨 박살 냈어. 이 세계에 커다란 그림자 하나를 걷어버렸지. 하지만 무슨 소설처럼 ‘그 이후 주인공들은 행복하게 살았답니다’ 하고 끝날 리가 없잖아.”
마지막 장이 넘어가면 끝나버리는 소설과 달리 세계는 계속 이어진다.
오히려 그 전의 이야기가 세계에 어떤 식으로든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면 높은 확률로 그 이후의 세계가 안정될 가능성은 적다.
그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바로 지금의 상황이다.
모든 것은 지금은 사라진 밸리드, 정확히는 울텔로부터 시작된 일이었다.
지크를 잡기 위해 울텔은 거의 모든 전력을 동원해 크로뇽 왕국 쪽으로 진군했다. 그 사이에 있던 브로드스탁 제국을 비롯해 왕국 몇 개를 짓밟으면서.
게다가 그냥 짓밟은 정도가 아니다. 전력을 늘리기 위해 그곳에 사는 사람들을 학살, 언데드로 만들기까지 했다.
당연히 그들 나라는 완전히 초토화되어 멸망했다. 살아남은 이들조차 적은, 완벽한 멸망.
하지만 그들이 다스리던 땅은 그대로 남았다.
그것도 사람들이 관심을 가지지 않는 황폐한 땅이 아니다. 나름 기름진 땅과 풍족한 자원이 있는 지역을 영토로 삼고 있던 왕국의 땅들은 충분히 군침이 돌 만한 먹이다.
그리고 제국. 다른 나라와는 비교를 불허하는 막대한 영토를 쥐고 있던 나라.
그 덩치를 유지하려면 막대한 소비가 생길 수밖에 없고, 따라서 그 소비를 충당할 생산성이 보증되어야 한다. 그리고 브로드스탁 제국은 그 생산성을 충분히 감당할 수 있는 나라였다.
즉, 브로드스탁 제국이 있던 영토에는 굉장히 풍족한 땅이 많다는 뜻이었다.
그것들이 붕 떠 버렸다.
당연히 주변국들이 그 땅을 탐내지 않을 리 없다.
전쟁이 끝난 즉시 주변 세력들은 몰락한 나라의 영토를 게걸스럽게 집어삼키기 시작했다.
특히 기름진 평원이나 광물이 생산되는 산지, 그리고 수원이 있는 지역이 최우선 대상이 되었다.
당연히 조금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려 주변 나라와 경쟁이 붙을 수밖에 없었다.
주인 없는 땅은, 후일 일어날 갈등은 차치하고서라도 말 그대로 깃발을 먼저 꽂는 사람의 것이었으니까.
그러다 보니 세상은 밸리드가 준동하기 전보다 훨씬 혼란스러워졌다.
멸망한 나라의 인접국끼리는 멸망한 나라의 땅을 조금 더 차지하기 위해 경쟁을 한다. 게다가 멸망한 나라의 인접국이 아닌 나라도 이 쟁탈전에 목소리를 높였다.
밸리드 토벌은 멸망한 나라의 인접국만 참여한 전쟁이 아니었다.
다른 나라들도 밸리드 토벌 때 상당한 지원을 하고 있었기에 충분히 자신의 몫을 주장할 명분이 있었다.
욕심만으로 그렇게 주장한 것은 아니다.
이대로 멸망한 나라의 인접국들만 막대한 영토를 차지한다면 후일 그 영토를 바탕으로 성장한 나라들이 자신들을 집어삼킬 수도 있다는 위기감이 들 수밖에 없던 것이다.
그걸 생각하면 명분이 없다고 해도 그들은 어떻게든 멸망한 나라의 인접국들의 발목을 잡으려 했을 게 분명했다.
강화되는 견제와 의심. 이미 소규모 무력 충돌은 곳곳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대규모 전쟁으로 확산되지 않은 것은 어디까지나 밸리드와의 전쟁 때문에 대부분의 나라의 여력이 대폭 내려갔기 때문일 뿐, 이대로 가다간 분명 대규모 무력 충돌이 일어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카르위먼은 그 충돌을 무마하기 위해 엄청나게 노력 중이었다.
“그럼 이번 축제는 그 나라들을 중재하기 위한 외교 회담장이기도 하겠네?”
“그렇지. 뭐, 그쪽은 우리랑은 상관이 없는 일이야. 그냥 축제를 즐기면 돼.”
시원스레 ‘우리랑은 상관없음’ 선언을 해버리는 지크에게 루벨라와 와이그는 쓴웃음을 지었다.
하지만 어찌 보면 저게 차라리 나을 수도 있었다. 괜히 지크까지 이 복잡한 상황에 끼어들었다간 상황이 훨씬 더 혼돈으로 치달을 수도 있다.
‘아니, 그냥 더 복잡해지는 거면 차라리 낫지. 괜히 지크 님의 심기를 건드리는 작자가 나올 수도 있어.’
루벨라는 지금 협력하는 세력을 떠올렸다. 다시 한번 골이 지끈 당겼다.
“근데 축제에 협력하는 세력은 누구야? 지금까지의 이야기를 들어보면 축제에 협력하는 세력이 각 나라들인 것 같은데, 그러기엔 여력이 없어 보이는데?”
라일라가 그 화제를 꺼내자 머리의 지끈거림이 조금 더 심해지는 것 같았다.
“나라는 맞지만 지금 언급된 나라들은 아니야. 조금은 더 먼 나라들이지.”
“…아!”
라일라는 바로 지크의 말의 의미를 깨달았다.
“과연, 이 커다란 사건에 방관자가 돼버린 나라들 말이지?”
이번 밸리드 토벌전이 단순한 사교도의 토벌, 혹은 나라 간의 전쟁이라면 괜찮았을 것이다.
오히려 다른 나라들의 국력이 깎이는 걸 먼 곳에서나마 즐거이 바라봤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이번 전쟁은 일반적인 전쟁과는 그 궤를 달리했다.
일단 밸리드 토벌.
그것은 어느 나라나 실행하고 있는 일이다. 카르위먼을 진실로 신앙해서가 아닌, 밸리드의 악행이 너무 심하기 때문에 솎아내려는 의도가 더 컸지만.
그 때문에 이번 밸리드 토벌전이 그저 조금 커다란 지부의 토벌이었다면 별다른 일이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번 전쟁에서 밸리드는 거의 뿌리가 뽑혔다. 그건 말 그대로 성전이었다.
당연히 그 위신의 상승은 고작 소규모 밸리드 지부 몇 토벌하는 것과는 차원이 달랐다.
당연히 성전에 참여한 나라들의 명성은 끝 간 데 없이 올랐다.
게다가 본격적인 성전이 벌어지기 전, 밸리드의 음모로 벌어진 스틸월 백작가와 연합군의 대결에서 전설의 드래곤이 나타났다는 사실은 그 성전에 방점을 찍었다.
거짓말이라고 코웃음을 치기엔 드래곤의 사체라는 증거가 너무도 뚜렷했다.
즉, 이번 전쟁에 직접적으로 참여한 나라들은 말 그대로 전설에서나 나올 법한 위업을 쌓았지만 다른 나라들은 일절 아무것도 없던 것이다.
물론 그것으로 뭔가 직접적으로 피해를 보는 건 없다.
하지만 나라, 왕족, 귀족들 간의 위신 문제는 그리 쉽게 넘어갈 일이 아니었다.
“그래서 이번 축제에 협력자로 참가했다는 거네. 자기들도 어떻게든 이 장대한 사건에 한 발이라도 걸치기 위해서.”
“그게 왕이든 귀족이든 종교 관계자든 정치를 하는 사람들이라면 당연히 떠올릴 일이지. 그리고 그런 골치 아픈 안건들은 정치인들의 숙명이기도 하고.”
지크와 라일라가 루벨라와 와이그를 불쌍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힘내십시오, 두 분.”
“조금이라도 도울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도울게요. 아, 골치 아픈 일에 휘말리지 않을 범주에서만요.”
“…저는 그저 성기사일 뿐입니다. 정치는 성하와 성녀님께서 잘들 하시겠죠.”
“잠깐, 와이그 경?”
있는 대로 배신감을 표현한 채 루벨라가 와이그를 쳐다본다.
그러나 전투 때는 성녀를 목숨 바쳐 지키는 성기사로서, 일상 때는 손녀를 돌보는 할아버지로서 그녀를 보좌하던 와이그가 이번만큼은 루벨라의 시선을 피했다.
“와이그 님도 골치 아픈 일은 있으신 모양입니다.”
“그건 오해이십니다, 지크 님. 원래 사자는 자기 새끼를 벼랑으로 떨어뜨려….”
“실제로 그런 일은 없다고 하더군요.”
“…제가 아는 지역의 사자는 그렇습니다. 무척이나 특이한 생태를 가지는 녀석이지요. 그렇게 큰 새끼 사자들은 곧 온 평원을 호령하며 바실리스크조차 물어 죽이는….”
“이상한 말 하지 마세요!”
루벨라의 일성에 와이그는 입을 다물었다.
“적어도 성녀님이 고생하실 건 확실하군요. 지금 어느 정도 기분 전환을 하고 가시는 게 좋겠습니다.”
“…지크 님의 말대로 하는 게 제일 낫겠네요.”
그녀는 몸에 힘을 쭉 뺀 채 의자에 기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