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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604화 (604/628)

외전 3화

대신전 유라스는 예전에 봤던 그대로였다. 신성하고 웅장하다.

전 세계에 그 영향이 미치는 카르위먼의 위세를 고스란히 내비치고 있었다.

유라스가 보이는 위세만큼 그곳을 오가는 카르위먼 교인들의 얼굴에도 자부심이 넘쳤다. 성기사든 신관이든 어깨를 쭉 펴고 자신감 있게 발걸음을 내디딘다.

밸리드를 거꾸러뜨리고 카르나의 위엄을 찬란하게 나부끼고 있는 지금, 그들은 카르위먼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하고 있다는 것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그러나 그토록 자신감 넘치는 카르위먼 교인들도 지크와 라일라가 신분을 밝힌 순간 바로 고개를 숙였다.

“뵙게 되어 영광입니다!”

카르위먼의 표식이 선명하게 새겨진 갑옷을 입고 검을 찬 다음 창을 세운 채 위풍당당하게 유라스를 지키고 있던 성기사가 깊게 허리를 숙였다.

“영광입니다!”

다른 성기사도 고개를 숙였다.

그들의 행동 하나하나에 지크와 라일라에 대한 존경심이 엿보였다.

상대는 위대한 드래곤 슬레이어이자 밸리드의 총단을 파괴하고 교황을 죽인 자였다. 거기에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이기까지 하다.

이미 그들이 방문하면 깍듯이 대접하라는 교황의 직접적인 명령까지 하달된 상황.

무례를 범한다는 생각은 그들의 뇌리에 존재조차 없었다.

둘은 기사들의 안내에 따라 교황에게 안내됐다.

둘이 유라스로 오리라는 건 알고 있었어도 정확히 언제 올지는 알 수 없었기에 교황과 미리 약속이 잡혀 있던 건 아니다.

당연히 일반적이라면 바로 교황과 만날 수 없다. 교황도 바쁜 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교황은 일정을 미루고 바로 둘을 만났다.

일국, 그것도 상당한 강국의 왕이나 황제 정도가 되어야 교황이 일정을 미루고 그들을 우선시하는 걸 생각하면 지크와 라일라를 카르위먼이 어떻게 생각하는지 확실히 알 수 있는 장면이었다.

교황은 예전에 봤을 때와 같이 인자한 미소로 그들을 맞아줬다.

“오랜만이군요. 지크 님, 라일라 님.”

“오랜만입니다, 성하.”

“오랜만입니다.”

가벼운 인사를 나누고 지크와 라일라는 교황의 맞은편에 앉았다.

교황이 미리 준비해놓은 듯 탁자 위에는 따뜻한 차가 김을 모락모락 피워 올리고 있었다.

“그래, 그간 잘 지내셨습니까.”

“덕분에 잘 지냈습니다.”

“착한 일을 하며 다니고 있다 들었습니다.”

“가벼운 취미 생활로 하고 있죠.”

“과연. 두 분 같은 실력자가 인성마저 고우니, 이 모든 것이 카르나 님의 은총입니다.”

“하하, 제가 한 인성 하죠!”

“허허, 잘 알고 있습니다!”

라일라는 지크와 교황이 나누는 가증스러운 대화를 어처구니없이 바라봤다.

지크의 인성을 확실히 알고 있으면서도 고운 인성 운운하는 교황이나 그 말을 한 치의 부정도 없이 긍정하는 지크나 여러모로 대단한 사람들이었다.

그래도 조금 더 대단한 인물을 따지자면 역시 지크였다.

교황이야 지크에게 진 빚이 있으니 저런 과한 칭찬을 할 수 있다고 납득이라도 할 수 있으니, 아무렇지도 않게 자신의 얼굴에 말도 안 되는 금칠을 할 수 있는 지크가 역시 한 수 위였다.

“앞으로도 부디 그 뛰어난 능력을 세계를 위해 사용해 주시기 바랍니다.”

그때 누군가 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들렸다.

“들어오세요.”

교황의 허락에 문이 열리고 두 명의 사람이 들어왔다.

루벨라와 와이그였다. 두 사람은 지크와 라일라를 보고 무척이나 반가운 얼굴을 했다.

“오랜만이에요! 지크 님, 그리고 라일라 님!”

“오랜만입니다.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지크와 라일라가 일어섰다.

“오랜만에 뵙습니다, 두 분. 저희야 잘 지냈죠.”

“오랜만이에요.”

각자 인사를 끝내고 루벨라가 교황을 향해 물었다.

“무슨 이야기를 하고 계셨나요?”

“두 분의 근황을 듣고 있었습니다. 여전히 착한 일을 하신다고 들어서 말이죠. 두 분의 인성이 곱다는 덕담을 좀 드리고 있었죠.”

“아, 인성… 말이죠?”

루벨라가 본능적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와이그도 마찬가지.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교황께서 제 인성을 완벽히 파악하셨더군요. 과연 카르위먼이 커다란 세력을 자랑하는 이유를 알겠습니다. 이런 훌륭한 교황을 두셨으니 어찌 그 세력이 약할 수 있겠습니까.”

“허허허! 이 늙은이를 그리 높게 쳐주시니 고마울 따름입니다!”

“그, 그러시군요.”

교황의 의견을 반대할 수도, 그렇다고 양심상 찬성할 수도 없는 루벨라는 그렇게 말할 수밖에 없었다.

그 모습을 교황은 뚱한 표정으로 바라봤다.

“우리 성녀는 다 좋은데 장난을 장난으로 받아들이지 못합니다. 조금은 능글맞은 게 좋을 텐데 말이죠.”

“그게 루벨라 님의 매력이 아니겠습니까. 딱딱하긴 하지만 말이죠.”

교황과 지크의 놀림에 루벨라의 얼굴이 조금 붉어졌다.

“허허허! 그만 놀리도록 하죠. 조금 더 놀렸다가는 와이그 경이 제 멱살을 잡을 것 같으니까요.”

“제가 어찌 교황 성하의 멱살을 잡을 수 있겠습니까. 그저 성녀님에게 조금만 덜 짓궂게 굴어달라며 부탁드릴 뿐이죠.”

“이거 보셨습니까, 지크 님, 라일라 님? 말은 저렇게 하지만 조금만 더 입을 놀리면 교황이든 뭐든 일단 한 대 날리고 볼 것 같지 않습니까. 교황이란 자리가 이리 힘이 없어요.”

“성하.”

와이그가 조금 힘주어 부르자 교황이 허허롭게 웃었다.

“이제 정말로 그만하도록 하죠.”

그러며 그는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제는 젊은 사람들끼리 이야기를 나누세요. 아, 와이그 경은 젊은 사람이 아니던가?”

“저도 충분히 젊습니다.”

“마음을 얘기하는 거라면 저도 아직 20대입니다. 카르나 님 앞에서 맹세할 수도 있어요.”

교황이라는 자가 자신이 모시는 신의 이름을 저렇게 쉽게 언급해도 되는지 의문이 들기는 했지만, 적어도 루벨라와 와이그의 반응을 보면 두 사람은 포기한 것 같았다.

너털웃음을 터뜨린 교황이 문득 떠올렸다는 듯 말을 이었다.

“아, 그러고 보니 한 가지 더 묻고 싶은 게 있습니다. 두 분은 언제 결혼하실 겁니까?”

“결혼이요?”

라일라가 반응했다.

“네, 결혼. 당연히 우리 카르위먼의 힘을 빌리시겠죠? 두 분의 결혼식이라면 당연히 제가 직접 주례를 서 드리죠.”

카르위먼 교황의 주례. 일국의 수장들도 감히 요구할 수 없는 엄청난 특혜다.

카르위먼이 자신들에게 정말 웬만한 건 다 들어주려고 할 정도로 호의를 가지고 있다 알고 있던 지크와 라일라조차 가볍게 놀랄 정도로.

하지만 상대가 아무리 대단하다 하더라도 교황이 직접 결혼식의 주례를 서준다는 걸 인정할 수 없는 사람은 있는 모양이었다.

“잠깐만요, 성하! 그건 반대입니다!”

“응? 설마 우리 성녀께서 반대를 표하실 줄은 몰랐는데. 내가 아무리 교황이라지만 두 분의 공적을 생각하면 주례 정도는….”

“두 분의 주례는 제가 설 거예요!”

무례하지 않게, 하지만 자신의 의지는 똑바로 전한다.

자신이 속한 조직의 수장에게 자신의 주장을 강하게 밀어붙이는 그 모습은, 그녀의 꺾이지 않는 강인한 의지를 보여주는 것 같아 일순 감탄마저 나올 정도였다.

내뱉은 말의 내용은 아무리 좋게 봐줘도 교황에게 들이대다시피 해야 할 정도로 대단한 게 맞는 것인지 의심이 될 만한 것이었지만.

“허허, 그렇군요. 즉, 성녀께서는 제 경쟁자라는 것이군요.”

어안이 벙벙한 다른 사람들과는 달리 교황은 짓궂은 미소까지 지어가며 성녀에게 대답했다.

“두 분과의 인연을 생각하면 당연히 제가 서는 게 맞지 않을까요?”

“보통 규모 있는 결혼식의 주례는 연륜이 있는 자가 섭니다. 성녀님의 능력과 인품은 충분히 인정합니다만, 아직 제가 연륜마저 따라잡힌 건 아닌 것 같습니다.”

두 사람 다 웃고는 있지만 누구 하나 물러설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당황한 라일라가 그나마 이 상황을 말려줄 수 있는 인물로 보이는 와이그를 쳐다봤지만, 그는 손으로 머리를 짚은 채 작게 한숨을 쉬고 있었다.

밸리드 토벌자이자 지금은 오지 않을 미래에 타스니아 평원의 킬링머신이라고까지 불릴 강하고 용맹한 그이지만, 적어도 지금 사태에 믿을 수 있는 자 같지는 않았다.

“그럼 우리 당사자인 두 분께 물어보는 게 어떤가요?”

“그거 좋군요. 두 분도 이 늙은이의 청을 거절하진 않을 겁니다.”

루벨라와 교황, 두 쌍의 시선이 지크와 라일라를 향한다.

“두 분의 생각은 어떤가요?”

“어려울 것 없습니다. 마음 편히 선택해 주시면 됩니다.”

교황은 그리 말했지만, 이게 어딜 봐서 마음이 편해질 선택지란 말인가.

천하의 라일라조차 이 상황에서 정답을 도출해 내기란 어려웠다.

‘어, 어쩌지?’

그녀의 얼굴이 저절로 지크에게 돌아갔다. 그리고 그녀는 보았다. 자신과는 달리 마치 얼굴에 철판을 깐 것 같은 지크의 뻔뻔한 얼굴을.

‘아, 또 엉뚱한 생각을 하고 있네.’

그건 추측이 아닌 확신. 예언이라고 해도 상관없다.

그리고 그녀의 예언은 어렵지 않게 적중했다.

지크는 팔짱을 끼고 다리를 꼬았다. 그리고 턱을 들어 마치 내려다보듯 교황과 루벨라를 쳐다봤다.

장난기 가득한 눈빛을 하고 있는 교황도 나름 필사적인 루벨라도 슬슬 두 사람을 말려야 할 타이밍을 헤아리던 와이그도 일순 당황했다.

그 모습을 즐기듯 지크는 한쪽 입꼬리를 틀어 올리며 입을 열었다.

“제 결혼식을 굳이 카르위먼의 주최로 할 필요는 없어 보입니다만, 그렇게까지 원하시면 해 드리죠. 우리가 어디 보통 사이입니까?”

카르위먼의 교황이나 성녀가 주례까지 맡으며 주최해 준다는, 다른 이라면 황금을 산처럼 바쳐서라도 원할 제안을 지크는 마치 어쩔 수 없이 들어준다는 듯 언급했다.

라일라의 입이 떡 벌어졌다. 능글맞은 교황은 물론이고 루벨라와 와이그조차 할 말을 잃었다.

그러나 지크의 말은 거기가 끝이 아니었다.

“그래서, 두 분이 제 결혼식의 주례를 서기를 원하신다는 거죠? 일생에 단 한 번뿐인 결혼식의 주례라 아무리 저라도 무척이나 숙고할 수밖에 없는 문제입니다. 그래서 여쭤보건대, 제가 주례를 맡겨 드린다면 구체적으로 제게 뭘 해 주실 수 있을까요? 어디 성녀님부터 제안을 말씀해 주시죠.”

카르위먼 측 사람들의 입이 라일라처럼 벌어졌다. 그 누구도 지크의 이런 태도는 예상하지 못한 것이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교황이 크게 웃음을 터뜨렸다.

“허허허허허허! 역시 지크 님이로군요! 교황인 저나 성녀의 주례에 더해 결혼식의 모든 것을 우리가 도와준다 하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넙죽 받아들일 것이니 지크 님도 그러리라고 저도 모르게 생각해 버렸군요! 그런 판에 박힌 분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는데 말이죠.”

“편견이란 무섭죠.”

“아무렴요. 카르나 님을 모시는 이로서 최대한 세상을 객관적으로 보려고 노력은 하고 있습니다만, 역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보는 건 어렵습니다. 그나마 지금 미혹 하나를 깨달은 것에 감사를 해야겠죠.”

세계 최고 종교의 교황이라는 직위에 있으며 많은 경험도 쌓은 그가 이런 사소한 사실을 깨달은 것에 진심으로 기뻐하고 있었다.

그것은 교황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를 극명히 보여주는 광경이었다.

라일라와 루벨라, 와이그도 새삼 교황이란 사람에 감탄했다. 역시 카르위먼 최고의 자리는 아무나 앉는 것이 아니었다.

지크도 축하를 건넸다.

“축하드립니다. 성하의 미혹을 걷어내는 데 조금이라도 도움을 드릴 수 있어 저도 무척이나 기쁘군요.”

“감사드립니다. 역시 지크 님과 인연을 맺은 건 우리 카르위먼의 홍복이 틀림없습니다.”

두 사람이 서로 덕담을 건네며 미소 짓자 주변 사람들도 절로 얼굴에 훈풍이 불었다.

“그래서, 성하. 제 결혼식에 주례를 서시는 데 필요한 조건을 아직 듣지 못했습니다만.”

“이런! 급한 일이 있다는 것을 깜박 잊고 있었군요! 늙으면 기억이 깜박깜박해서 문제라니까요. 그럼 젊으신 분들께서 잘들 이야기 나누시지요.”

그리고 교황은 허둥지둥 방을 나섰다.

남은 건 낄낄거리는 지크와, 조금 전까지의 훈훈한 분위기는 날아간 채 아연한 표정을 하고 있는 다른 이들이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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