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2화
“어쩔까?”
지크가 라일라에게 물었다. 라일라는 별 고민 없이 대답했다.
“거절할 필요 없지 않아? 다른 사람들도 온다 하니 오랜만에 얼굴 볼 기회도 될 테고.”
그녀는 썩 내키는 모양이었다.
지크도 반대할 이유가 없는 상태에서 라일라가 찬성했다. 그렇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다.
“알겠습니다. 가도록 하죠.”
“감사합니다!”
신관이 반색했다. 하지만 곧 무언가 부탁할 것이 있는 듯, 조금 우물쭈물하더니 입을 열었다.
“그리고 혹시 아직 드래곤의 사체를 가지고 계십니까?”
“가지고 있습니다.”
드래곤 슬레이어들이 나눠 가진 드래곤의 사체.
드래곤 토벌의 공헌도를 토대로 나누었기에 지크에게 배정된 사체의 양이 가장 많았다.
“얼마나 남았는지 여쭤도….”
“쓴 적 없습니다. 원래 배정받은 그 양 그대로 가지고 있습니다.”
돈이 부족한 것도 아니고 무구도 윈두르라는 최고의 무기를 가지고 있다. 챙기긴 했지만 어디 쓸데가 없었다.
“그럼 이번 축제 때 잠시 대여를 할 수 있을는지요.”
보통 가치가 있는 물건이 아니기에 신관의 태도는 계속 조심스러웠다.
“다른 곳도 아닌 카르위먼이라면 충분히 빌려드릴 수 있습니다만, 용도를 알 수 있을까요.”
“이번 축제 때 드래곤의 사체를 전시하면 어떨까 하는 의견이 나와서 말입니다.”
“흥미로운 의견이군요.”
지크가 긍정적으로 반응하자 신관은 한 시름 놓은 듯 조금 편안하게 말을 이었다.
“밸리드와의 최후의 전쟁 때 결정적인 활약을 하신 분들은 대부분 드래곤 슬레이어 분들이 아니십니까. 그리고 드래곤 슬레이어 분들의 훌륭함을 가장 직관적으로 보여주기 적절한 것이 바로 드래곤의 사체를 전시하는 것이라는 의견이 나왔습니다. 모형을 제작하자는 말도 있었습니다만, 아무래도 크기가 크기인지라 제작 난도가 높은데다가 그 위압감을 생생히 재현해내는 것도 어렵다 생각돼서 말입니다.”
“그래서 드래곤의 사체를 모아 그 모습을 재현하겠다는 거군요.”
“다른 드래곤 슬레이어 분들에게도 의견을 여쭐 겁니다. 하지만 일단 지크 님의 허락이 떨어져야 본격적으로 계획을 진행할 수 있겠죠. 드래곤의 사체의 상당 부분을 지크 님이 가지고 계시고, 무엇보다 가장 중요한 머리 부분을 가지고 계시잖습니까.”
“그렇긴 하죠.”
“사체는 저희 카르위먼이 철통같이 지킬 겁니다. 와이그 님을 비롯해서 최고의 성기사들을 주변에 배치할 계획이죠.”
“와이그 님을요?”
이 말엔 지크도 놀랐다. 자타공인 카르위먼 최고의 성기사인 그가 일개 경비를 설 것이라니.
게다가 말을 들어보면 와이그뿐만 아니라 다른 카르위먼의 실력자들도 경비에 동원하려는 태세가 아닌가.
“그 정도가 아니라면 드래곤의 사체 같은 귀한 물건을 선뜻 맡길 수 없지 않겠습니까. 와이그 님과 다른 분들도 흔쾌히 허락을 하셨습니다. 이건 조금 속물적인 이야기입니다만, 드래곤의 사체를 전시한다면 이번 축제에 더욱 사람들의 시선이 몰리지 않겠습니까.”
“겸사겸사 카르위먼의 위신도 높일 수 있겠군요.”
“그렇습니다.”
“솔직하시군요.”
“총단에서 지크 님과 라일라 님을 찾으라는 명령과 함께 내려오길, 성녀님과 와이그 님이 한 입으로 말씀하셨답니다. 지크 님 상대로는 괜히 숨기지 말고 그게 이득이든 손해든 꿍꿍이든 모두 말을 하라고요.”
옆에서 듣고 있던 라일라가 절로 고개를 끄덕였다.
의외로 지크는 그 성질머리답지 않게 솔직히 자신을 이용할 거라 하고 협력을 부탁하면, 그걸 거절할지언정 악감정을 갖지 않았다.
반대로 괜한 음모를 품고 지크를 이용하려 한다면 철저한 보복을 각오해야 했다.
“좋습니다. 제공하도록 하죠.”
“정말로 감사드립니다!”
부탁한 모든 것을 허락받아서인지 신관의 얼굴엔 미소가 가득했다.
“그래도 완전한 드래곤의 사체를 전시하려면 다른 사람들의 협조가 필수겠죠.”
“그렇죠. 일단 어느 분에게 사체가 있는지는 알고 있긴 하지만, 그분들도 사용하거나 처분을 끝냈을 수도 있으니 말이죠. 그래도 최대한 모아볼 작정입니다. 결손이 그리 크지 않다면 그건 다른 모조품으로 채울 예정이고요.”
“완성되면 볼만하겠군요. 저도 축제 기대하고 있겠습니다.”
신관은 만족스러운 모습으로 돌아갔다.
다시 둘만 남은 방에서 그들은 서로 마주 앉았다.
“유라스라… 1년 만이네.”
라일라가 1년 전을 회상하며 말했다.
“유라스로, 그것도 카르위먼의 초대를 받아서 간다라. 아직까지 살짝 실감이 나지 않아.”
“회귀 전의 일 때문에?”
“내가 유라스로 간다면 전쟁 이외의 다른 이유가 없을 때였으니까.”
라일라가 테이블 위에 놓인 지크의 손 위로 자신의 손을 포갰다.
“지금은 달라.”
“그래. 다르지. 걱정하지 마. 그저 한 번 해본 말일 뿐이야.”
“하긴. 지금은 마왕이 아니라 세계에서 알아주는 영웅님이니까.”
“으음.”
지크가 의미 모를 앓는 소리를 냈다. 그 모습을 라일라는 빙글빙글 웃으며 쳐다봤다.
“언제 갈 거야?”
“아직 시간은 있으니 천천히 움직이지 뭐. 별로 할 일도 없으니.”
카르위먼이 드래곤의 사체를 원래의 형태로 조립할 시간이 필요하니 축제일보다 훨씬 일찍 가긴 해야 했다. 그러나 어느 정도 시일이 남아 있었다.
“일단 오늘까지는 푹 쉬자고.”
“응. 저녁 뭐 먹을까?”
“글쎄. 어제는 뭐 먹었지?”
최강의 힘을 가진 자와 고대 제국의 공주님이자 최고의 마법사인 둘이었지만, 지금 그들의 대화는 여느 연인들의 대화와 조금도 다를 바가 없이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 * *
비가 내린다. 하늘에 구멍을 뚫어 누군가 무차별적으로 물을 쏟아내는 것 같다.
혹은 어떤 초상적인 존재가 눈물을 흘리고 있든가.
블링턴은 이게 밸르의 눈물이라고 생각했다. 자신의 신도들이 무참히 죽어나가는 모습을 보고 한탄하는 신의 눈물이 틀림없었다.
그는 손바닥을 펴 앞으로 내밀었다. 굵은 빗방울이 손바닥에 부딪혀 튕겨나간다.
그때마다 느껴지는 충격. 그것이야말로 밸르의 한탄이요 절규이리라.
그는 손을 내렸다. 비를 피하기 위해 그리고 정체를 숨기기 위해 두른 로브 안으로 그의 손이 사라졌다.
체온으로 데워진 로브의 온기가 손을 감싼다. 그러나 손에 묻은 물기에서 올라오는 냉기는 쉽사리 없어지지 않았다.
그는 도시 안을 거닐었다. 억수같이 쏟아지는 비와 늦은 시각 덕에 주변의 인적은 없었다.
그의 발걸음이 한 가게 안에서 멈추었다.
콰직!
잠금쇠를 너무도 쉽게 부순 그는 가게 안으로 들어갔다.
식료품 가게인 듯 진열대엔 아직 팔리지 않은 밀가루와 과일, 야채 등이 있었다. 그는 성큼성큼 다가가 진열대의 식료품들을 마법 상자에 모조리 쓸어 담기 시작했다.
문득 그의 손이 멎었다. 위대한 밸리드의 추기경인 자신이 이런 천한 짓을 해야 하다니.
하지만 지금은 어쩔 수 없었다. 언제나 호화로운 음식을 바치던 그의 휘하 세력은 이미 소멸한 것이나 마찬가지였으니.
그가 거느리고 있는 밸리드의 생존자들도 지금 다른 곳에서 필요한 물품들을 약탈하고 있을 것이다.
가게에 있는 금고까지 깡그리 털어버린 블링턴은 바깥으로 나왔다. 다른 가게를 털기 위해 움직일 때였다.
그의 눈에 하나의 벽보가 보였다.
멈칫!
그는 발걸음을 멈추고 벽보 앞에 섰다.
빛 한 점 존재하지 않은 환경 속에서도 밸리드 성법의 가호가 부여 중인 그의 눈은 벽보의 내용을 정확히 읽을 수 있었다.
“…하, 하하, 하하하하하!”
그가 웃음을 터뜨렸다. 분노와 증오가 한껏 들어 찬 섬뜩한 웃음. 맹렬한 빗소리가 그의 웃음을 가린다. 그 때문인지 그는 더욱 소리를 내어 웃었다.
갑자기 그의 웃음이 멎었다. 그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그러나 마음 속 분노는 여전히 타오르고 있었다.
벽보는 카르위먼의 홍보물이었다.
[밸리드 토벌 1주년 기념 축제]
절로 이가 갈리는 제목. 그 아래로 쓰여 있는 내용도 가관이었다.
특히 밸리드 토벌에 공훈이 높은 사람들을 초청할 것이라는 문구에는 분노가 머리 끝가지 솟구쳤다.
그러나 한 가지, 그의 눈길을 잡아끄는 문구가 있었다.
‘드래곤을 전시한다고?’
찌익!
그는 벽보를 뜯어 더욱 자세히 들여다봤다.
그곳에는 밸리드 토벌에 특히 공훈이 높은, 일명 드래곤 슬레이어들의 위엄을 사람들에게 직접 보여주기 위해 죽은 드래곤의 사체를 복원시켜 전시한다고 쓰여 있었다.
그걸 본 순간, 블링턴의 머릿속에 어떤 방법이 스쳐 지나갔다.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을지 몰라도, 그 방법이라면…!’
밸리드에 강력한 전력을 추가시킴과 더불어 축제를 망쳐 카르위먼의 위신을 진흙탕에 처박을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밸리드 토벌에 깊이 관여한 놈들도 죽일 수 있을지도 모른다.
‘특히 그놈! 지크라고 했지!’
일명 힘의 용사. 드래곤 슬레이어의 주역.
드래곤 토벌에 참여한 모든 인간들을 드래곤 슬레이어들이라고 부르긴 하지만, 드래곤 슬레이어를 단일 명칭으로 호칭한다면 그건 지크를 가리킬 정도로 그는 드래곤 슬레이어의 대표로서 이름 높았다.
게다가 밸리드 토벌에도 적극적으로 나선 이다. 실제로 밸리드의 총단을 부수고 교황을 쓰러뜨린 건 그와 그 일행이라고 하지 않던가.
‘만약 죽일 수 있다면 반드시 죽여야 해!’
밸리드의 건재를 알리기 위해서. 그리고 복수를 위해서.
그는 벽보를 품 안에 대충 집어넣고 몸을 돌렸다.
지금부터 계획을 짜야 한다. 거의 모든 세력을 잃은 그이지만 그래도 밸리드 서부 총지부의 총책임자였던 자.
아직 써먹을 만한 지식이 있고 총지부에서 갖고 도망친 귀한 물건도 있다. 그것들을 어떻게 써먹어야 최선의 효과를 낼 수 있을지 생각해야 한다.
블링턴은 도시의 어둠 속으로 사라졌다.
* * *
도시는 기분 좋은 기대감에 휩싸여 있었다. 1년 만에 다시 열리는 카르위먼 주최의 축제.
밸리드를 토벌한 기념으로 열렸던 저번 축제의 기억을 아직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은 이번 축제도 무척 기대하고 있었다.
게다가 보이는 광경이나 들려오는 풍문으로 이번 축제는 저번 축제보다 훨씬 더 크고 풍성한 축제가 될 것이라 예측되고 있지 않던가.
솔직히 저번 축제는 조금 급하게 열린 감이 있었다. 전쟁으로 인해 물자가 상당히 소모된 상황에서 밸리드가 토벌된 기쁨으로 일단 열고 본 축제가 저번 축제였다.
그러나 이번엔 시간을 들여 차곡차곡 그 준비를 해나가고 있다. 당연히 저번 축제보다 훨씬 더 훌륭한 축제가 될 게 뻔했다.
성문으로 많은 인파가 오고 간다. 앞으로의 축제를 기대하고 일찌감치 도착한 여행자부터 축제에 쓸 물품들을 운반하는 짐꾼, 돈 냄새를 맡고 몰려든 상인들까지.
도시의 열기는 계속 뜨거워지고 있었다.
지크와 라일라는 성문을 지났다. 둘은 살짝 변장을 하고 있었다.
아무래도 저번 축제와 카르위먼의 대대적인 선전 때문에 유라스에서는 둘의 인상착의를 아는 자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이런 인파가 모이는 상황에서 두 사람의 신분이 들통났다가는 무척 귀찮은 일이 일어날 게 뻔했다.
윈두르도 지크의 의견에 동의한 듯, 제 맘에 들지 않으면 절대로 형태를 바꾸지 않는 검이 지금은 얌전히 보통의 검처럼 의태하고 있었다.
지크야 어쨌든 상식을 초월한 미모를 가지고 있는 라일라를 변장시키는 것이 조금 힘들었지만, 어떻게 앞머리를 내려 얼굴을 가리는 것으로 처치를 했다.
노력이 통한 듯, 두 사람은 조용히 성문을 통과하는 것에 성공했다.
얼마 후, 그들의 앞에 카르위먼의 총단인 대신전 유라스가 그 웅장한 모습을 드러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