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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602화 (외전) (602/628)

외전 1화

밤이었다.

환한 달빛은커녕 작은 별빛마저 짙은 구름에 가려져 있어 말 그대로 칠흑 같은 어둠이 내린, 그런 시간.

그러나 하늘의 빛이 사라진 것을 보충이라도 하듯 지상에서 환한 빛이 타오르고 있었다.

마치 하늘 끝까지 닿을 것 같은 짙은 화광. 주변의 모든 것을 잿더미로 만들 것 같은 불꽃이 미친 듯 춤을 추고 있다.

그와 함께 커다란 함성이 들렸다.

“전부 죽여라! 밸리드 놈들을 단 한 놈도 살려둬선 안 된다!”

“이참에 완전히 뿌리 뽑아야 한다! 세상에 해악밖에 되지 않는 놈들이다! 의심스러운 곳은 모조리 뒤져라!”

번쩍거리는 갑옷을 입은 카르위먼의 지휘관들이 크게 소리친다.

그에 따라 다른 성기사들이 분주하게 돌아다니며 남은 밸리드의 생존자들을 찾아다녔다. 그리고 찾아낸 밸리드 교인들은 가차 없이 도륙했다.

밸르에게 바치기 위해 웅장하게, 하지만 비밀리에 지어진 신전이 검게 그을려 간다.

하지만 카르위먼의 성기사와 신관들은 고작 그 정도로 만족하지 않았다. 돌조각 하나 남기지 않겠다는 듯 신전 전체를 허물어버릴 듯한 공격을 퍼부어댔다.

그렇게 밸리드의 신전은 소멸해 갔다.

신전이 한눈에 들어오는, 조금은 떨어진 거리의 산. 일단의 무리가 신전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들의 얼굴은 제각각이었다. 눈물을 흘리는 자도 있었고 입술을 짓씹어 입가에 피를 흘리는 자도 있었으며 마치 생명이 없는 것처럼 무표정을 유지하고 있는 자도 있었다.

그러나 각자 다른 얼굴을 하고 있더라도 그들의 마음속에 품고 있는 감정은 단 하나였다.

맹렬한 증오.

그들의 신앙의 거점이 타오르고 있다. 그것도 뼈째 씹어 먹어도 분이 풀리지 않을 증오스러운 카르위먼의 손에.

당연히 있는 대로 고함을 내지르며 분노를 표현하고 싶다. 그러나 그것도 할 수 없었다.

그들은 간신히 카르위먼의 포위망을 벗어난 상태였다. 만약 여기서 증오를 직접적으로 토해낸다면 속은 편할 수 있을지언정 목숨을 잃게 될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분노를 안으로, 안으로 삭였다. 그리고 그럴수록 그들의 증오는 더더욱 진해져갔다.

“추기경님.”

무리의 가장 앞에 서 있던 자에게 한 신관이 접근했다.

“슬슬 떠나셔야 합니다. 더 이상 이곳에 머물렀다가는 카르나의 개들에게 들킬 염려가 있습니다.”

“…그래, 떠나야지.”

밸리드의 추기경이자, 밸리드 서부 총지부의 책임자인 피로스 블링턴이 대답했다.

막중한 직위를 갖고 있는 그였지만, 지금은 아무런 의미도 없었다.

밸리드 서부 총지부는 이미 1년 전 카르위먼과 여러 나라의 합공으로 괴멸된 상태.

블링턴을 포함한 소수의 인원만이 간신히 살아남았다. 그것도 각자 꽤 심각한 부상을 입은 채.

때문에 그들은 일단 몸을 숨겼다. 어느 정도 몸을 추스른 후 교황의 명령에 따라 총단으로 복귀할 생각이었다.

그러나 그들이 몸을 추스르고 총단으로 향할 때 충격적인 소식이 들려왔다.

밸리드 총단의 괴멸과 교황의 사망.

얼마간의 조사 끝에 그것이 사실임을 안 그들은 다시 숨어들었다.

교황이 죽고 총단이 박살 난 이상 지금은 목숨을 부지하는 것이 먼저였다.

하지만 그것도 쉽지 않았다. 밸리드의 신전들은 모두 꼭꼭 숨어 있건만, 어찌 된 일인지 빌어먹을 카르위먼 놈들은 속속들이 신전들을 발견하여 깨부쉈다.

지금 저기서 불타고 있는 신전도 마찬가지.

‘이 정도면 우리 신전들의 위치는 전부 꿰고 있다고 봐야 해.’

앞으로 신전에 몸을 숨기는 건 피해야 할 듯싶었다.

블링턴은 몸을 돌렸다. 살아남은 인물들이 보인다. 무척이나 적은 숫자. 그것도 전부 꾀죄죄하기 짝이 없다.

절로 한숨이 나왔다.

세상을 공포와 절망으로 물들이며, 그 강대한 카르위먼과 세력 싸움을 벌이던 밸리드가 어찌 이런 상황까지 떨어졌단 말인가.

‘아니, 이유야 뻔하지.’

밸리드의 교황이 카르위먼과의 전쟁에서 패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밸리드는, 카르위먼이 그들을 부르는 멸칭과 같이 벌레처럼 퇴치당했다.

밸리드는 끝났다. 세계도 카르위먼도, 심지어 밸리드인 그 자신들조차도 그렇게 생각했다.

그러나 블링턴은 이대로 끝낼 수 없었다. 다시 위대한 밸리드를 재건해야 했다.

‘그것도 안 된다면 복수라도 해야 한다!’

블링턴은 슬쩍 뒤를 돌아봤다.

여전히 불타오르는 신전의 모습이 보인다. 마치 그 광경을 뇌리에 선명히 새겨 넣기라도 하겠다는 듯 그는 눈에 힘을 주어 그것을 바라봤다.

휙!

그가 고개를 돌렸다.

보이는 건 마치 그들의 미래를 상징이라도 하는 것 같은, 어둠에 뒤덮인 숲속.

그러나 그의 눈동자에는 아직 선명히 불타오르는 신전이 비치고 있었다.

“가자.”

블링턴은 살아남은 이들을 이끌고 숲속으로 숨어들었다. 언젠가 이 굴욕을 갚아줄 그날을 벼르며.

콰르르르르르!

저 멀리 밸리드의 신전이 무너지는 소리가 벼락처럼 들렸다.

* * *

“정말 감사드립니다! 이, 이 은혜를 어찌 갚아야 할지!”

전형적인 이 시대 농부의 모습을 한 노인이 연신 허리를 숙인다.

그는 이 마을을 책임지는 촌장이었다. 하얀 수염이 날리며 조금은 굽은 등이 제 위치를 찾을 수도 없이 허리를 숙이는 것이 그가 얼마나 고마움을 느끼고 있는지 여실히 보여주고 있었다.

그가 감사를 표하는 상대는 한 쌍의 젊은 남녀였다.

그중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여성이 노인을 일으켜 세웠다.

“너무 그렇게 감사해하실 필요는 없어요. 저희는 그저 당연한 일을 했을 뿐인 걸요.”

“그래도 어찌 그렇습니까! 두 분 덕에 크나큰 걱정이 덜어졌는데 말입니다! 만약 놈들이 계속 있었다면 우리 마을은 모두 놈들의 노예가 됐을 겁니다!”

얼마 전, 이 마을 근처에 도적들이 자리를 잡았다. 그들은 마을에서 행패를 부리며 식량을 축내고 마을 여자들을 욕보이려 했다.

그런 위기 상황에서 나타난 것이 바로 눈앞의 두 사람이었다.

그들은 행패를 부리던 도적들을 너무도 쉽게 때려잡았다.

그에 도적들은 제대로 저항도 하지 못하고 두 사람에게 목숨을 잃어야 했다.

당연히 마을 사람들은 두 사람에게 깊은 감사의 마음을 가졌고, 그에 대한 반응이 바로 지금 촌장의 행동이었다.

“이건 저희 마을의 성의입니다. 부족하지만 받아 주시지요.”

노인이 낡은 꾸러미 하나를 내밀었다. 안쪽에서 동전 부딪치는 소리가 들린다. 아마도 마을의 얼마 되지 않는 재산을 아득바득 모은 것일 터.

여성, 라일라는 그 꾸러미를 든 노인의 손을 다시 노인 쪽으로 밀었다.

“괜찮아요. 이러면 오히려 저희가 곤란해요.”

“하지만….”

“도적에게 입은 피해가 없는 게 아니잖아요? 이건 그 피해를 복구하는 데 사용하세요.”

“그녀의 말이 맞습니다, 촌장님. 그리고 죄송한 말씀입니다만 저희에게 그 정도의 금전은 그다지 의미가 없습니다. 마을을 위해 사용하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남성, 지크도 라일라를 거들었다.

두 사람이 단호하게 거절하자 노인은 우물쭈물하더니 곧 꾸러미를 거뒀다.

“그럼 어찌 이 은혜를 갚아야 할지….”

“그럼 간단히 식사 한 끼만 주시겠습니까? 배가 고파서 말이죠. 그렇다고 너무 화려한 건 말고요. 여러분이 평소에 먹는 것 정도면 됩니다.”

“네? 귀한 분들에게 어찌 그런 걸….”

“정말로 그거면 됩니다. 그렇지?”

“응.”

라일라마저 동의하자 촌장은 여전히 납득하진 못했지만 일단 수긍했다.

둘은 그렇게 마을에서 식사를 해결하고 마을 사람들의 열렬한 배웅을 받으며 떠났다.

솔직히 음식의 맛은 없었다. 작은 마을에 사는 농민의 식단이 그리 좋을 리 없다.

반대로 상당히 많은 돈을 갖고 있는 그들은 평소의 식생활도 풍족했다. 그러니 작은 마을에서 대접하는 일반적인 식사가 그들의 혀를 만족시킬 수 있을 리가.

그러나 두 사람의 불만은 없었다.

마을 사람들의 감사함을 받아 주기 위해 먹었을 뿐, 애초에 맛을 기대하고 먹은 게 아니었다.

지크가 지금 불만을 갖고 있는 것은 다른 것이었다.

“요새는 나쁜 놈들이 별로 없네.”

“무슨 소리야. 지금도 한 무리 없앴잖아.”

정말로 사람들을 괴롭히는 도적은 세상에 끝도 없이 솟아난다. 없애도 없애도 계속 나타나는 것이 그런 무리들이다.

물론 그중에는 사연이 있는 자들도 많았다. 그런 길을 걸을 수밖에 없는 과거를 가진, 어찌 보면 불쌍한 자들.

그러나 어쨌든 그들은 죄 없는 사람들을 괴롭히는 자들이었고, 지크와 라일라는 그들에게 자비를 베풀지 않았다.

“그런 연약하기 짝이 없는 놈들이 아니라 울텔이나 마인들 같은, 괴롭힐 보람이 있는 놈들 말이야.”

“그런 놈들이 넘쳐나는 건 마인 시대뿐이잖아. 지금은 그런 지옥 같은 세상이 아니니까. 그리고 앞으로도 없을 거고.”

“쯧! 평화로운 게 꼭 좋은 것만은 아니군.”

“참아. 네 심심함이 이 세상이 평화롭다는 증거니까. 그러니까 헛소리는 그만하고 빨리 다음 도시로 가자. 오랜만에 편안한 곳에서 자고 싶어.”

“그래.”

둘은 도시를 향해 길을 따라 걸었다. 지금 둘의 사이를 보여주듯 둘의 팔은 꼭 얽혀 있었다.

* * *

근처 커다란 도시에 들른 둘은 고급 숙소를 잡고 노고를 풀었다.

그 어떤 생각도 하지 않고 머리를 싹 비운 채 오로지 쉬는 데에만 열중했다.

도시라 즐길 거리도 많고 음식은 맛있으며 잠자리도 편하다.

무엇보다 옆에 사랑하는 사람이 떡하니 존재하니 불만이 있을 리 없었다.

그렇게 두 사람이 즐겁고 편안한 시간을 보낼 때였다.

누군가 그들을 찾아왔다.

“안녕하십니까! 그 고명하신 지크 님과 라일라 님을 만나 뵙게 되어 무척 영광입니다!”

카르위먼에서 찾아온 신관은 반짝이는 눈으로 지크와 라일라를 쳐다봤다. 그의 눈에 존경심이 뚝뚝 떨어졌다.

“너무 그리 대우해주실 것 없어요.”

라일라가 말했지만 신관은 단호히 부정했다.

“어찌 그럴 수가 있겠습니까! 밸리드의 토벌자! 드래곤 슬레이어! 전설 속에 나올 법한 활약으로 세상을 구하신 두 분이 아니십니까! 게다가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이시기도 하죠! 이 정도 대우는 당연합니다!”

정말로 마음속에서 우러나오는 말. 라일라는 어색하게 웃었다.

“그래, 저희를 찾아온 이유가 뭡니까?”

지크가 직접적으로 물었다.

“지크 님과 라일라 님, 그리고 다른 위대한 분들의 협력으로 밸리드가 쓰러진 지 얼마 후면 1년이 되지 않습니까.”

“벌써 그렇게 됐군요.”

“그래서 우리 카르위먼에서는 대대적인 축제를 열 생각입니다. 밸리드 토벌 1주년 기념으로 말이죠.”

“그 축제에 참가해 달라는 말입니까?”

“그렇습니다. 밸리드 토벌의 주역께서 오신다면 축제는 더욱 빛을 발하겠죠. 이미 다른 분들에게도 사람을 보내 놨습니다.”

“용케 우리를 찾았군요. 목적지도 없이 떠돌아다니는데 말이죠.”

“총단에서 모든 신전에 두 분의 용모를 보내 정보를 모은 걸로 알고 있습니다. 무엇보다 지크 님의 검은 무척 특징적이지 않습니까.”

“그렇긴 하죠.”

윈두르처럼 생긴 검이 어디 흔할까. 특징이 뚜렷하니 사람들을 많이 동원하면 찾기 어려운 건 아니었다.

게다가 지금 지크는 예전처럼 사람들이 없는 곳을 주파하는 짓도 그만둔 상태였으니 더더욱 그랬을 것이다.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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