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1화
한스와 라라는 검을 수납했다.
전력을 다하긴 했지만 그들에게 별로 지친 기색은 없었다.
애초에 몇 날 며칠을 싸울 수 있는 그들에게 이런 짧은 전투 정도야 그리 지칠 만한 일은 아니었다.
다만 지크의 집요하고 날카로운 공격을 피하느라 살짝 정신적 피로감을 느끼는 정도였다.
“정말로 굉장해지셨군요.”
한스가 혀를 내둘렀다.
윈두르의 힘이 올라 지크의 힘이 상승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하지만 직접 맞붙어보니 상상 이상이었다.
예전에도 도저히 지크를 범접할 엄두가 나지 않았지만 지금은 무슨 끝이 보이지 않는 하늘을 올려다보는 느낌이었다.
“그렇게 대단하게 볼 건 없어. 내 실력이 높아진 건 아니니까.”
그는 이미 드래곤과의 전투가 끝난 이후 전성기의 힘을 모두 되찾았다. 그 후에 일어난 힘의 상승은 전부 윈두르로부터 공급받는 세계수의 마력을 이용한 것.
그러나 한스는 고개를 저었다.
“그걸 에스텔레이드를 사용하는 제게 말씀하시면 무척 찔리는데요.”
“저도요.”
옆에서 라라가 한스의 말에 힘을 보탰다.
지크는 한 번 웃어주고는 등에 윈두르를 동여맸다.
“수고했어.”
바닥에 깔린 결계를 해제하고 다가온 라일라가 차가운 물 한 잔씩을 건넸다.
셋은 그것을 단숨에 들이켰다.
“그런데 지크 님은 여기에 어쩐 일이십니까? 저희처럼 훈련을 하러 오신 것 같지는 않은데요.”
“너희를 찾아왔다.”
“무슨 시키실 일이라도 있으십니까?”
말만 하면 당장이라도 그의 지시를 따를 것 같다.
역시 스녹이나 엘레나처럼 한스도 아직 지크의 밑에서 졸업했다는 실감은 없는 것 같았다.
“아니, 슬슬 떠나려고. 그래서 작별 인사를 하러 왔다.”
“아….”
한스가 살짝 입을 벌리고 지크를 쳐다본다.
그것도 잠깐. 그의 눈이 침착하게 가라앉았다.
“가시려는 거군요.”
그래도 지크와 가장 오래 여행을 한 자라서 그런 것일까. 무척 당황하던 스녹과는 달리 한스는 꽤 빠르게 안정을 되찾았다.
“가야지. 여기 계속 있을 순 없으니까.”
“저희는 데려가지 않으시겠죠?”
“말했잖냐. 너희는 졸업이라고. 졸업한 놈이 계속 졸졸 따라다니면 그게 졸업이겠냐?”
“그도 그렇군요. 게다가 두 분 사이의 방해가 될 수도 있고요.”
그는 지크와 라일라를 번갈아 보며 말했다.
가볍게 얼굴을 붉힌 라일라와는 달리 지크는 한스의 머리에 손을 올리고 사정없이 헝클어뜨렸다.
“그런 건 눈치채도 조용히 속에 숨기는 거야, 녀석아.”
“앞으로는 그렇게 하겠습니다.”
지크는 손을 떼고 한스를 바라봤다. 한스도 지크의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처음에는 그저 주제 파악 못하는 하인 한 놈에게 세상의 쓴맛을 보여줄 생각뿐이었는데 말이야.”
지크가 과거를 언급하자 한스가 곤란한 표정을 지었다.
“그때는 정말로 죄송했습니다.”
“암, 죄송해야지.”
당시 한스의 행위는 정말로 지크가 단칼에 목을 날려도 할 말이 없을 만한 폭거였던 것이다.
“그래도 네놈을 끌고 다닌 덕에 여러 모로 편한 것도 사실이었다. 네게도 나쁜 일은 아니었지?”
“당연하죠.”
한스의 목소리엔 어떤 망설임도 없었다.
당시에는 정말로 세상이 무너지는 충격을 받았다. 자신의 인생은 끝났다는 절망감이 온몸을 휩쓸었다.
그러나 지금, 한스는 자신 있게 말할 수 있었다.
그의 인생에서 가장 행운이었던 순간은 바로 그 순간이었다고.
귀족의 일개 하인-물론 스틸월 백작 부인 덕에 나름 지위 있고 편한 생을 사는 하인이 됐겠지만-으로 인생을 마칠 그가 엄청난 실력을 가지고 막대한 명성을 쌓았다.
무엇보다 그가 막연하게 꾸던, 영웅이 되고 싶다는 꿈을 이루었다.
물론 그 과정이 험난하고 힘들었던 건 사실이지만, 꿈을 이루었다는 사실은 그 모든 것들을 사소한 것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그리고 그것들을 가능하게 만들어줬던 것이 바로 지크다.
남들이 들으면 열렬히 비웃을 꿈을 진지하게 받아주고 그 길을 걷도록 도와줬다. 본인은 그 꿈을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최선을 다해 도와준 것이다.
“뭘 그렇게 보냐?”
지크가 의아한 시선을 던진다.
“새삼 지크 님에게 감사하는 마음이 들어서요.”
“뭐야, 그렇다면 지금까지는 감사하는 마음이 없었단 거냐?”
“그런 건 아니죠.”
예전 같으면 이런 짓궂은 농담에 무척이나 당황할 한스였지만 지금은 차분하게 대응할 수 있었다.
“재미없어졌군.”
“이것도 지크 님 덕입니다.”
“아, 됐다 됐어.”
지크는 손을 휘휘 저었다.
“너는 이제 뭘 할 생각이냐?”
“여행을 할 생각입니다.”
“스틸월로 돌아가진 않을 거냐?”
“백작님과 백작 부인님에게 많은 은혜를 받은 건 사실입니다. 후일 돌아갈 마음이 들지도 모르죠. 하지만 지금은 여행을 해보고 싶습니다. 지크 님 없이요.”
“뭘 위해서?”
“지크 님과 같이 다니며 원하던 영웅이 될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크 님이 닦아 놓은 길을 같이 걸어간 것뿐입니다.”
“혼자서 영웅이 되어 보고 싶다?”
“그렇게 말하면 너무 건방진 말 같군요. 도움 없이 꿈을 향해 걸어보고 싶다고 해주셨으면 합니다.”
“그렇군.”
스녹과는 달리 한스는 꽤 구체적인 목표를 가지고 있었다.
“좋아, 그 정도로 확신에 차 있다면 내가 더 할 말은 없겠군. 응원하마.”
“네!”
한스가 힘차게 대답했다.
“라라, 너는 어떻게 할 거냐?”
“한스 씨와 같이 다니려고요.”
별로 놀랄 일은 아니다. 애초에 처음부터 정의감에 불타던 그녀다. 그 때문에 가문을 나오기까지 하지 않았던가.
모험을 다니며 영웅의 길을 걷겠다는 한스의 목표는 그녀의 구미에 딱 알맞았을 것이다.
물론 한스에 대한 호감도도 굉장히 많은 영향을 끼쳤을 게 분명했다.
‘에스텔레이드와 토르니움의 소유자가 함께 여행이라. 회귀 전에는 절대로 생각할 수도 없던 일이야.’
에스텔레이드는 태양의 용사 그렌 제너드의 상징.
토르니움은 힘의 마왕 지크 모어의 상징.
만나면 죽일 듯이 싸워대는 두 존재가 하하호호 즐겁게 여행을 하는 일이란 상상조차 불가능했다.
그러나 지금 두 검의 주인인 한스와 라라는 회귀 전 검들의 주인들과는 달리 함께 같은 길을 걸어가려 하고 있었다.
“한스와 같이 정의로운 일을 하려는 건가.”
“네. 한스 씨도 저와 같은 생각을 가지고 있으니 같이 여행하는 게 좋다고 판단했어요. 그리고….”
그녀가 살짝 말끝을 흐렸다.
“응? 무슨 말이든 해도 된다. 너도 알다시피 난 뒤끝 같은 게 있는 인간이 아니니까. 관대하기도 하지.”
옆에서 들리는 라일라의 혀 차는 소리는 무시했다.
“아무래도 한스 씨도 지크 님에게 상당히 물든 모습이 보여서 말이죠. 지크 님식 착한 일을 하려 할지도 모르니 그걸 말려볼까 해서요.”
옆에서 라일라가 자지러지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잘 생각했어! 그런 기미가 보이면 바로 옆에서 고쳐 줘. 절대 이렇게 되게 하지 말고.”
“…아프다. 놔라.”
그러나 지크의 볼을 잡아당기는 라일라의 손은 멈추지 않았다. 지크도 입으로만 투덜거릴 뿐, 딱히 라일라의 손을 쳐낸다거나 하지 않았다.
그 모습을 보며 라라가 미소 지었다.
“지크 님도 라일라 님에게 맡겨두면 되겠네요.”
“이 녀석이 그렇게 쉽게 변할 일은 절대 없겠지만, 노력은 해야지. 그래야 조금쯤은 누그러질 테니까.”
“아흐댜고….”
이제는 발음마저 어눌해질 정도로 지크의 볼이 늘어났다.
적잖이 만족했는지 그녀가 손을 놓았다. 조금 빨개진 볼을 문지르던 지크가 옆으로 손을 뻗어 라일라의 볼을 꼬집었다.
“야, 뭐 햬…!”
“복수.”
“이잇!”
라일라가 다시 손을 뻗어 지크의 볼을 잡았다. 연인인 두 사람이 서로의 볼을 잡아당기고 있는 모습이 퍽 우스꽝스러워 보였다.
둘의 철없는 자존심 싸움은 한동안 계속됐다.
“스녹과는 얘기를 나눠봤냐?”
아까보다 조금 더 빨개진 볼을 하고 지크가 물었다.
“네. 그 녀석은 뭔가 뚜렷한 목표는 없는 것 같더군요. 그래도 엘레나와 같이 움직일 거라는 말은 했었습니다. 엘레나는 나중에 마탑으로 돌아갈 것 같으니, 아마 녀석도 따라가겠죠.”
그래도 사제랍시고 스녹과는 어느 정도 이야기를 나눈 모양이었다.
“그래도 녀석은 당분간은 지크 님과 계속 같이 여행을 할 거라고 생각하고 있었습니다.”
“각자의 길을 가자더니 확실히 놀라더군.”
“그랬을 겁니다. 언제 떠나실 겁니까?”
“며칠 안으로. 짐 정리도 다 끝났고 인사도 너희들이 마지막이다.”
“그렇군요.”
한스가 지크에게 손을 내밀었다.
“가르침을 주신 지크 님의 이름에 절대 부끄럽지 않도록 행동하겠습니다.”
지크도 손을 내밀어 한스의 손을 붙잡았다.
“만약 그런 일이 있으면 잡으러 간다.”
“하하하! 네, 명심하겠습니다!”
그렇게 지크가 회귀 후, 여행의 첫 발걸음을 뗐을 때부터 함께했었던 지크와 한스는 진정한 의미로 각자의 길을 가기 시작했다.
그리고 며칠 후.
지크와 라일라는 유라스를 떠났다. 둘을 배웅하기 위해 많은 사람들이 나왔다. 지크와 인연이 있던 사람들은 물론 카르위먼의 교황까지 나왔다.
이미 지크가 한 명 한 명 만나 작별 인사를 마쳤기에 긴 인사는 없었다.
각자의 눈동자에 서로의 얼굴을 비추며 크게 손을 흔든다.
지크와 라일라의 모습이 사라질 때까지 배웅하는 이들은 계속 그곳에 서 있었다.
“낯설군.”
지크가 입을 열었다.
“뭐가?”
“새로운 여행을 시작할 때 이런 배웅을 받은 적이 처음이라서 말이야.”
회귀 전과 회귀 후, 지크의 여행은 전부 스틸월 백작가에서 시작됐다. 물론 그곳에서 지크를 배웅하는 사람 따위 없었다.
회귀 전은 반쯤 쫓겨난 것이었고 회귀 후는 지크가 깽판을 치고 나왔기 때문.
여행 도중 배웅을 받은 적은 꽤 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여행의 도중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하나의 여행을 끝내고 새로운 여행을 시작하는 상황.
그리고 이번엔 배웅을 받았다.
지크와의 이별을 아쉬워하고 슬퍼하며 또한 진심으로 그의 앞날이 밝기를 바라는 배웅을.
라일라가 지크의 손을 살짝 잡았다.
“이제부터는 저런 사람들이 많을 거야.”
“그렇겠지.”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그렇게 걱정할 필요 없어. 저런 걸로 마음이 흔들릴 만큼 내가 감수성 풍부한 녀석도 아니고.”
“알아. 그냥 내가 이러고 싶어서 이러는 거야.”
“그렇다면야.”
지크도 그녀의 손을 마주 잡았다.
그렇게 얼마나 걸었을까. 라일라가 지크의 손을 잡아끌었다.
“왜 그래?”
“너야말로 어디로 가려고 하는 거야?”
지크는 자신이 가려고 하던 곳을 쳐다봤다. 가도를 벗어나 수풀이 무성한 산이 보인다.
그가 다시 라일라에게 시선을 돌렸다.
“앞.”
“보통 사람들은 앞으로 간다는 말을 가도를 따라간다는 뜻으로 써. 목표 지점까지 산이든 숲이든 강이든 일직선으로 뚫고 가는 걸 말하는 게 아니라고.”
그녀가 지크를 다시 가도 안으로 끌어당겼다. 지크는 일단 라일라의 의도대로 끌려갔다.
“갑자기 왜 그래? 지금까지 계속 이렇게 다녔잖아.”
“지금까지 그랬다고 앞으로도 꼭 그래야 하는 건 아니잖아.”
“그건 그렇지.”
“지금까지처럼 뚜렷하게 목적지가 있는 것도 아니고.”
“목적지라면 다음 도시….”
“가도로 가자?”
“…좋아.”
싱글싱글 웃고는 있지만 이마에 미세하게 실핏줄을 드러낸 라일라의 박력을 이기지 못하고 지크는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천천히 가도를 따라 걸었다. 물론 손은 여전히 서로 꽉 잡은 채였다.
“목적은 있어?”
“착한 일을 하는 것.”
“그 외엔?”
“그다지 없어. 고작해야 그렌 제너드나 울텔이 남겨 놓은 찌꺼기가 있으면 치워버리는 것 정도랄까.”
“그럼 내가 하나 제안해도 돼?”
“물론.”
“우리의 성을 생각해보는 게 어때?”
“성?”
“응. 지금 너는 스틸월도 브레이브도 모어도 아니잖아. 나도 클로원이 아니고. 그러니까 앞으로 우리가 쓸 새로운 성을 찾아보자. 그, 그 왜 우리 아이가 태어나면 붙여야 할 수도 있고.”
마지막 말을 할 때 부끄러운지 라일라가 살짝 말을 더듬었다.
“예전엔 브레이브를 추천했었잖냐. 마음이 달라졌어?”
“기억이 돌아와 보니 브레이브는 별로더라고. 너무 바른 생활 사나이라 재미가 없어.”
“크큭, 그렇긴 하지.”
“그리고 지금의 넌 그 어떤 성을 가진 지크와도 다른 존재니까.”
지크는 고개를 들어 하늘을 올려다봤다. 하늘은 무척이나 새파랬다.
“성이라. 하나 붙여서 나쁠 건 없지. 좋아, 앞으로 생각해 보자고.”
“응!”
그 후로도 둘 사이의 이야기는 끊이지 않았다. 천천히 가도 너머로 둘의 모습이 사라진다.
지금껏 많은 사건과 고난, 시련, 피와 함께한 것이 지크의 길이었다.
그러나 브뤼셀 시스템이 파괴되고 그렌과 울텔이 악의로 깔아 놓은 길이 사라진 이상, 앞으로 그가 걸을 길이 어떤 것이 될지는 이젠 그 누구도 알지 못했다.
다만 하나.
적어도 지금까지 그가 걸었던 길과는 확연히 다를 것이라는 것만큼은 확실했다.
<완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