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600화
“생각해보면 자네와 라일라의 자식도 궁금하군.”
“저와 라일라를 닮는다면 어느 쪽으로든 최고의 녀석이지 않겠습니까. 분명 대단하겠죠.”
“벌써부터 자식 바보가 되려는 건가? 하긴, 아무리 성질이 더러운 자라도 자기 자식은 끔찍이 여기는 녀석들이 많지.”
“저는 성격이 좋습니다만?”
“자기도 안 믿을 농담을 잘도 하는군.”
윌위스는 털털거리며 웃었다. 그러나 곧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나도 자네와 라일라의 아이들이라면 무척이나 뛰어날 거라 생각하네. 하지만 어리석은 늙은이의 노파심에서 한 가지만 충고해 주자면, 만약 조금 모자란 아이가 태어난다 해도 꼭 정을 주게나.”
회한에 잔뜩 젖은 목소리.
“자네라면 무슨 소리를 하는지 알겠지?”
“아드님을 말씀하시는군요.”
“그렇네. 못난 아비 때문에 비뚤어져 결국 가서는 안 될 길을 가버렸지. 자기 아내와 딸에게까지 피해를 끼치고 말이야. 제 자식도 잘못 키운 멍청이의 한심한 소리라고 생각해도 상관없네. 하지만 자네 자식이 태어나면 꼭 한 번 정도는 떠올려 주게나.”
“마음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지크도 무척 진지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고맙네. 늙은이의 헛소리를 진지하게 들어줘서.”
지크와 윌위스 사이에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얼마 후, 윌위스가 짐짓 편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뭐, 그 때문에 스녹 녀석에게 심술을 더 부리는 걸지도 모르겠네. 아들을 그렇게 보낸 후 내게 엘레나는 유일한 가족이 됐으니 말일세. 그래도 그건 핑계일 뿐이겠지. 역시 나도 조금은 더 침착하게 행동해야겠어.”
그러다 윌위스는 피식 웃었다.
“그 엘프 녀석의 말처럼 늙어도 좀처럼 철이 들질 않는구먼.”
“뭘 그런 걸로 그러십니까. 저는 나이를 아무리 먹어도 철이 들고 싶은 생각이 없는데요.”
“라일라 양이 기겁을 하겠군.”
둘은 킬킬대며 웃었다.
“이왕 이야기가 나온 김에 스녹 녀석을 괴롭힌 것에 대한 변명을 좀 하자면, 솔직히 아직 저 두 녀석이 사귀지도 않는 상황에서 설레발을 치는 건지도 모르지만 스녹이 정말로 엘레나와 같은 길을 가려 한다면 마력 제어 수준은 높으면 높을수록 좋아.”
“다른 마법사들의 눈 때문이겠죠?”
“그렇지. 솔직히 저 둘이 결혼한다면 스녹 녀석에게 드웨인이란 성이 붙지 않겠나.”
일명 데릴사위. 지크도 윌위스의 말에 동의했다.
“스녹 드웨인. 말만으로도 살짝 열받는군. 어쨌든 아마 엘레나가 마탑으로 돌아온다면 녀석도 엘레나와 같이 스누위크에 뿌리를 내리겠지. 내가 보기에 스녹 녀석은 딱히 어디에서 무얼 하겠다는 목표가 없으니까.”
“그렇죠.”
“솔직히 괜찮은 녀석이야. 능력은 말할 것도 없고 인성도 괜찮아. 게다가 저런 능력을 지녔으면서도 쓸데없는 야망을 가지지 않은 것도 훌륭하고. 녀석이 괜한 야망을 가진다면 엘레나가 힘들 게 뻔하니.”
“영웅이 되겠다는 꿈이 있긴 했습니다만, 그건 이미 이뤘으니 말이죠.”
“스누위크에서 살게 된다고 해도 힘든 일은 없을 게야. 오히려 무척이나 환영받겠지. 녀석의 명성은 물론이고 대지의 환수의 계약자라는 사실도 마법사들에겐 무척이나 호기심을 불러일으킬 테니까.”
그건 마법사인 윌위스가 장담할 수 있었다.
지크는 지금껏 만난 마법사들이 하나같이 노웸에게 관심을 보였다는 걸 떠올렸다. 노웸이 생체 실험을 두려워해 스녹의 품에 숨었을 만큼.
“하지만 마법사란 인종은 호기심만큼이나 자부심도 강한 족속일세. 스녹을 인정하지 않는 이도 있을 게야. 특히 엘레나가 높은 자리에 올라가면 올라갈수록 스녹도 더욱 눈에 띄겠지. 할아버지로서 편을 드는 것이 아니라, 엘레나의 마법사로의 능력은 무척이나 뛰어나. 자네도 인정할 걸세.”
“아무렴요.”
그녀가 얼마나 대단한지는 회귀 전, 그렌 제너드와 치렀던 최후의 전투에서 확실히 알 수 있었다.
“당연히 마탑에서 꽤 높은 자리에 올라갈 걸세. 개인적인 생각으로는 마탑의 탑주 자리도 충분히 맡을 수 있다고 보네.”
“그때 비마법사인 스녹이 약점이 될 수도 있다는 소리군요.”
“약점은 무슨. 그건 약점 축에도 끼지 못해. 아니, 스녹 녀석의 명성을 생각하면 이득만 한가득이지. 하지만 자네의 말처럼 주장하는 놈들이 분명 나오기도 할 걸세.”
“그런 놈들은 신경을 끄면 되지 않습니까? 그냥 엘레나가 하는 일은 모두 싫어하는 놈들일 게 뻔하니까요. 스녹의 마력 제어 능력이 아니더라도 온갖 트집을 잡겠죠.”
“그래, 그렇지. 하지만 나도 너무 늙었나보이. 나중에 그런 놈들에게 트집을 잡힐 일들은 최대한 해결하고 싶어.”
윌위스는 한숨을 내쉬었다.
“그렇다고 너무 걱정할 필요는 없네. 스녹 녀석을 드웨인가에 어울리도록 완전히 뜯어고치겠다고 생각하진 않아. 내가 가르친 훈련법은 분명 스녹 녀석에게 도움이 되는 방법이야.”
“동의합니다.”
“나중에 혹시라도 저 두 녀석이 상처를 받을까 걱정하는 늙은이의 미련함이라고 생각해주게.”
“알겠습니다. 하지만 너무 걱정을 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특히 스녹은요.”
윌위스가 의아한 눈으로 지크를 쳐다봤다.
“제가 가르친 녀석들입니다. 특히 스녹은 한스 녀석 다음으로 저와 오래 다녔죠. 당연히 제 행동거지에 많은 영향을 받았습니다. 아, 제 취미를 배운 건 아니니 걱정 마시고요. 만약 윌위스 님께서 걱정하는 놈들이 나타난다고 해도 저 녀석이 상처를 입진 않을 겁니다. 오히려 상대를 벅벅 긁어대겠죠.”
“크큭, 그건 좋은 소식이로군.”
“하지만 약점이 될 만한 걸 없애겠다는 윌위스 님의 생각도 틀리진 않습니다. 지금 정도의 수준이라면 가르침을 준다 해도 상관은 없을 겁니다.”
“역시 그렇지?”
윌위스가 눈을 빛냈다.
“아직 가르칠 게 많거든. 이래 봬도 우리 드웨인가는 명문 중의 명문일세. 예절 같은 것도 가르쳐야 한다고 생각하거든.”
“심하지만 않으면 됩니다.”
스승인 지크가 동의했다. 윌위스는 스녹을 향해 눈을 빛내며 앞으로의 계획을 짜기 시작했다.
스녹의 미래가 약간 어두워지는 순간이었다.
* * *
스녹과 엘레나, 윌위스와 충분히 담소를 나눈 후, 지크와 라일라는 일어섰다. 아직 인사를 나눌 사람이 남아 있었다.
한스의 방을 찾아가던 지크는 옆을 지나가던 신관에게 한스와 라라가 연무장에 있다는 소식을 듣고 방향을 틀었다.
축제의 도중이라 그런지 아니면 카르위먼의 영웅인 한스와 라라를 배려해 성기사들이 자리를 비켜준 것인지 연무장엔 한스와 라라뿐이었다.
쾅! 쾅! 쾅!
강렬한 소리가 연신 울려 퍼진다. 에스텔레이드의 빛의 마력과 토르니움의 어둠의 마력이 연신 부딪쳤다.
콰아앙!
굉음이 터지고 맞붙어 검을 날리던 두 사람이 떨어졌다.
에스텔레이드를 든 한스와 토르니움을 든 라라였다.
마치 원수를 대하는 것 같은 살벌한 검과 마력의 난무였지만, 정작 두 사람의 얼굴엔 땀 한 방울 흐르지 않았다. 그만한 마력이 부딪친 것치고는 연무장에 상처도 없었다.
어디까지나 가벼운 대련. 그것도 주변에 피해를 끼치지 않도록 억제까지 하는 대련이었을 뿐이다.
물론 그것만으로도 오금을 저리게 할 엄청난 광경이 펼쳐졌지만.
“하여간 부지런한 녀석들이야.”
지크는 두 사람을 보며 중얼거렸다.
한스와 라라가 지크와 라일라의 등장을 알아차렸다. 그들은 급히 검을 수습하고 둘에게 다가왔다.
“안녕하십니까, 지크 님, 라일라 님.”
“안녕하세요.”
“그래, 안녕하다. 너희들은 축제 때까지 칼부림을 하고 있냐?”
지크의 타박 아닌 타박에 둘이 머쓱해했다.
“며칠 놀기만 하니 몸이 좀 찌뿌둥해서 말입니다.”
“저는 토르니움에 하루라도 빨리 적응하고 싶어서요.”
둘이 변명 아닌 변명을 했다. 라일라가 지크의 옆구리를 쿡 찔렀다.
“왜 노력하는 애들에게 면박을 주는 거야.”
“면박은 무슨. 그냥 말 한번 해 본 거지.”
그리고 지크는 연무장 중앙으로 뚜벅뚜벅 걸어갔다. 세 사람의 시선이 그에게 쏠렸다.
지크는 등에 차고 있던 윈두르를 뽑아 들었다. 그리고 한스와 라라를 향해 손짓을 했다.
“졸업은 시켰다만, 그래도 전 제자들이 노력하는 모습을 보이는데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덤벼 봐. 적당히 상대해 주마.”
한스와 라라가 서로의 얼굴을 한 번 마주보더니 지크를 향해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알겠어요!”
두 사람이 서둘러 연무장 중앙으로 나가 지크와 마주 보고 섰다. 그리고 각자의 무기를 꺼내 지크를 향해 겨눴다.
라일라는 세 사람과는 달리 연무장에서 조금 거리를 벌렸다. 그리고 마법 상자에서 지팡이를 꺼내 주문을 외웠다.
우우웅!
순간 연무장의 바닥에 얇지만 단단한 마력이 깔리는 게 느껴졌다.
“어느 정도의 공격 정도는 막아 줄 거야!”
라일라가 외쳤다. 아무리 카르위먼이 지크 일행에게 한없이 호의적인 집단이라 하더라도 남의 연무장을 괜히 박살 낼 필요는 없었다.
“고마워!”
지크는 고마움을 표한 후에 한스와 라라를 쳐다봤다.
“준비됐으면 와.”
지크의 말이 떨어지기 무섭게 한스와 라라가 지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그건 무척이나 신비롭고 아름다운 광경이었다.
에스텔레이드의 빛과 토르니움의 어둠. 도저히 양립할 수 없을 것 같은 두 마력이 함께 지크를 향해 짓쳐든다.
방해를 하긴커녕 오히려 서로가 서로의 약점을 없애고 강점을 강화했다.
그림으로 그린 듯한 합격.
실력이 뛰어난 한스가 조금 더 맞춰주는 경향이 보이긴 했지만, 그럼에도 날카로웠다.
실력 좀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이 합격을 단 한 번이라도 받아칠 수 있는 사람은 손에 꼽으리라.
그러나 지크는 예상대로 그들의 합격을 너무도 쉽게 쳐냈다.
콰앙!
“큭!”
“윽!”
지크가 무언가 대단한 기술을 사용한 것은 아니다. 그저 윈두르를 옆으로 휘둘렀을 뿐.
하지만 그 한 번의 공격에 빛의 마력이 박살 나고 어둠의 마력은 으스러졌으며, 한스와 라라는 손목의 욱신거림을 안은 채 크게 뒤로 물러나야 했다.
하지만 둘의 얼굴에 실망 어린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고작 이 정도로 지크가 낭패를 본 모습을 보였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 당황스러웠을 것이다.
둘이 서로의 얼굴을 마주 보더니 고개를 끄덕였다. 동시에 땅을 박찼다.
서로 반대 방향으로 향해 지크의 양옆을 점한다. 앞뒤로 공격을 할 셈이었다.
후웅! 후웅!
지크의 왼쪽에서 빛을 내뿜는 에스텔레이드가 아래를 향해 떨어지고 오른쪽에서는 어둠을 휘감은 토르니움이 위를 향해 솟는다.
공격 타이밍도 무척이나 적절했다. 어느 한쪽을 쳐낸다면 다른 쪽은 이미 지크의 급소에 닿을 것 같았다.
타앙!
그러나 이번에도 두 검은 튕겨나갔다.
지크는 이번에도 검을 휘둘렀을 뿐이다. 다만 무척 빠르게 휘둘렀을 뿐.
두 개의 검을 쳐냈음에도 한 번의 충돌음밖에 들리지 않은 이유가 그것이었다.
한스와 라라는 그 이후에도 계속 지크를 공격했다. 그러나 단 한 번도 지크를 당황하게 할 수조차 없었다.
어느새 둘은 거의 전력을 다하고 있었다. 그럼에도 지크는 여유가 넘쳤다.
둘의 헛된 공격이 괜히 연무장을 손상시키지 않도록 모조리 무효화해 버리는 터무니없는 일까지 저질렀다.
라일라가 보호를 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래도 확실한 것이 좋지 않겠는가.
그렇게 대련은 철저하게 지크의 승리로 끝이 났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