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9화
틸과의 이야기가 끝나고 지크와 라일라가 다른 이들을 찾아갈 때였다.
“어라? 지크랑 라일라잖아?”
복도 저편에서 레오나가 두 사람을 보고 크게 손을 흔들고는 성큼성큼 다가왔다.
“오늘도 바깥에 나갔다 온 거야?”
“응! 숲으로 돌아가면 인간의 축제는 즐기지 못하잖아. 게다가 이번 축제는 밸리드 토벌 때문에 무척 크게 하는 거라며? 끝까지 즐겨야지.”
그녀는 마법 상자에서 물건 몇 개를 꺼내 자랑하듯 보여줬다. 전부 축제에서 파는 기념품들이었다.
그녀는 축제에서 꾸준히 기념품 같은 것들을 사 모으고 있었다.
“많이 샀네.”
“포상금이란 걸 많이 받았으니까. 어차피 숲으로 돌아가면 인간의 돈은 쓸데도 없는걸. 차라리 이런 신기한 물건들을 사는 게 훨씬 나아.”
레오나가 지크와 라일라를 번갈아 쳐다봤다.
“두 사람도 놀러 나가려는 거야? 그럼 나도 같이…!”
그러다 문득 깨달았다는 듯 말을 멈췄다.
“아, 방해하는 건가?”
살짝 물러나려 하는 그녀를 라일라가 만류했다.
“아니, 놀러 나가려는 거 아니니까 괜찮아. 슬슬 떠나려고 하는 거거든.”
“어, 벌써? 조금 더 놀다 가지?”
아무래도 레오나는 조금 더 인간의 축제를 즐기고 싶은 모양이었다. 그것도 가능하면 친구들과 같이.
“지금까지도 충분히 쉬었다. 슬슬 움직여야지.”
“악당을 괴롭히지 못해서 심심해졌어?”
레오나의 말에 지크는 자지러지게 웃었다. 그에 비해 라일라는 어깨를 조금 늘어뜨렸다.
“크큭! 그렇지! 조금 심심해졌어.”
“뭐, 지크가 괴롭히는 상대라는 게 전부 쓰레기들뿐이니 별 상관은 없지만. 혹시나 싶어 말하는데 평범한 사람에게 하면 안 돼.”
“안 해. 내가 괴롭히는 상대는 나쁜 놈뿐이다.”
“그럼 됐어. 아, 한 가지만 약속해 줘. 나중에 또 드라우드 수림에 놀러 올 것.”
“그래. 안 그래도 어차피 한 번 가긴 할 생각이었어.”
세계수의 분신이 있던 유적들을 돌며 분신이 사라진 후 어떤 변화가 있었는지 알아볼 생각이었다.
“그럼 됐어.”
지크와 라일라는 레오나와 잠시 이야기를 더 나눴다.
“다른 사람들과도 인사를 할 거지? 윌위스와 스녹, 엘레나는 바깥의 정원에 있을 거야. 들어올 때 봤거든. 윌위스 녀석이 스녹을 괴롭히고 있었어. 정말로 어처구니가 없다니까. 본인도 스녹을 꽤 좋게 보고 있는 주제에.”
“할아버지의 복잡한 마음이란 거겠지.”
가족이라고는 엘레나밖에 남지 않은 그다. 당연히 손녀의 애인이 될 가능성이 높은 녀석에게는 깐깐해질 수밖에 없다.
“오히려 그 정도의 심술로 끝난다는 것 자체가 그 사람이 스녹을 좋게 보고 있다는 뜻이야. 애초에 드웨인 가문은 엄청난 명문가다. 그런 가문은 당연히 연애 상대라도 엄격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지. 그런데 스녹은 가문이라고 부를 만한 게 전혀 없는 녀석이거든.”
솔직히 아무리 엘레나에게 무르고 그녀에게 죄책감을 가지고 있는 윌위스라도 아무런 능력도 신분도 갖고 있지 않은 이를 엘레나의 연인으로 인정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스녹은 출신도 신분도 전혀 내세울 게 없는 자다. 부모도 없는 전직 광산 노동자. 명문가 영애와의 연애는 절대로 인정받을 수 없다.
만약 윌위스가 스녹을 인정하지 않았다면 심술을 부리긴커녕 철저하게 타인 대하듯 대하며 엘레나와의 만남을 철저하게 차단했을 것이다.
“하지만 지금의 스녹에게 출신 성분 따위는 아무래도 좋은 일이야.”
노웸과 계약을 한 환수의 계약자인 데다가 지크의 엄청난 훈련, 그리고 지금까지 겪은 경험으로 스녹은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실력자가 되어 있었다.
거기에 드래곤 슬레이어와 밸리드를 토벌한 영웅이라는 지위를 확립했으며, 무엇보다 현 세계 최고의 영웅이라 할 수 있는 지크의 제자라는 인맥이 있다.
밸리드를 토벌한 후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 직위를 받은 건 덤이다.
딱 까놓고 말해, 어설프게 좋은 신분을 타고난 놈들은 스녹의 발끝에도 미치지 못한다.
“무엇보다 엘레나가 좋아하는 녀석이니, 할아버지로서 약하게 시비를 거는 게 전부겠지. 뭐, 나쁘게만 대하는 것도 아니니 놔둬도 될 거야.”
윌위스는 스녹을 괴롭히는 것만은 아니었다. 나름 여러 모로 챙겨주기도 했고 가르침을 주기도 했다.
아무리 윌위스와 스녹의 능력이 다르다고는 하지만 윌위스는 많은 지식을 습득해 온 노마법사.
게다가 불의 마법이 전문이지만 대지의 마법이라고 절대 꿀리는 것도 아니다. 스녹에게 도움을 줄 능력은 무궁무진했다.
“그래도 쪼잔하단 건 변하지 않아.”
그 말엔 지크도 부정하지 않았다. 제삼자의 입장에서 보면 윌위스의 지금 행동이 조금 졸렬하게 보이는 것도 사실이었으니까.
“게다가 너무 급진적이잖아. 애초에 그 둘, 아직 사귀는 것도 뭣도 아니니까.”
사귀기는커녕 둘 다 서로를 친한 친구라고 생각할 뿐, 자신의 감정을 제대로 자각하고 있지도 못했다.
“물론 시간문제긴 하지만.”
“솔직히 그 두 사람만 모를걸?”
라일라가 웃으며 맞장구쳤다.
“어쨌든 가서 그 녀석 좀 말려줘.”
“방금 말했듯이 나는 방치해도 상관없다고 생각한다만. 그래도 작별 인사를 나눌 때 정도는 해방되겠지.”
지크와 라일라는 레오나와 헤어진 후 그녀가 가르쳐 줬던 곳으로 걸음을 옮겼다.
“저기 있네.”
카르위먼의 사람들이 매일 세심히 가꾼 정원. 그곳에 세 사람이 보였다.
둘은 그들에게 접근했다. 다가가면 다가갈수록 두 사람의 민감한 마력 감지 능력이 세 사람 주변에서 마력이 기묘한 움직임을 보이고 있다는 걸 알아챘다.
라일라가 마치 마력을 만지기라도 하듯 손을 내밀어 한 번 휘저었다.
“마력 제어 연습인가?”
“그럴 거다. 저거면 스녹 녀석에게도 충분히 도움이 되지. 윌위스 드웨인의 특기 분야이기도 하고.”
무척이나 세밀하게 움직이는 세 사람의 마력.
그러나 곧 하나의 마력이 흔들리기 시작하더니 통제를 벗어나 사방으로 흩어졌다.
감겨 있던 세 사람의 눈이 떠진 건 그때였다.
“쯧쯧쯧! 그것도 못하느냐.”
윌위스의 한심하다는 말투가 스녹을 찌른다.
흔들린 마력의 주인은 스녹이었다. 그는 마치 껍질 안에 들어간 거북이처럼 목을 움츠렸다.
“무슨 말도 안 되는 말을 하는 거예요, 할아버지! 스녹의 마력은 대지에 특화되어 있으니 이런 일반적인 마력의 제어가 어려운 건 당연하잖아요!”
엘레나가 스녹을 비호했다. 그러나 그다지 소용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오히려 엘레나가 스녹을 비호하는 모습에 윌위스의 기분이 살짝 더 나빠진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녀석이 대지의 마력에 특화되어 있다는 건 나도 잘 안다. 하지만 아무리 대지의 마력에 대해 적응력이 뛰어나다고 해도 그 근본에 깔린 게 순수한 마력이라는 건 변하지 않아. 녀석이 순수한 마력의 제어를 너만큼만 한다면 녀석의 대지의 마력에 대한 장악력은 몇 배로 뛰어오를 거다.”
“그건 알고 있어요. 하지만 할아버지가 지금 너무 높은 수준을 요구하고 있는 게 문제잖아요!”
“높은 수준이라니! 너도 충분히 하고 있는 게야!”
“마법사인 나와 환수의 계약자인 스녹이 같냐고요! 아이, 참! 왜 이렇게 스녹에게 심술을 부려요?”
“심술이 아니라 나는 어디까지나 걱정되어서…! 아, 이 두더지 녀석이 어딜 깨물고 있는 게야!”
쿠우우우우!
“아, 안 돼 노웸!”
심술을 부리던 윌위스에게 노웸이 덤벼들고 그걸 스녹이 황급히 말린다.
엘레나가 그 모습을 조금은 속 시원하게 쳐다보고 있는 것이, 노웸을 말리고 싶은 마음은 없는 모양이었다.
조금 전까지 조용히 마력 제어 훈련을 하고 있던 장소는 순식간에 난장판이 되고 말았다.
“개판이군.”
“그러네.”
그 모습을 지크와 라일라는 조금 떨어진 곳에서 바라봤다.
* * *
“스승님!”
난장판이 어느 정도 수습된 이후 접근한 지크와 라일라를 세 사람이 발견했다.
가장 먼저 반응한 건 엘레나였다. 그녀는 황급히 라일라에게 뛰어갔다.
“마력 제어 연습 중이었구나.”
“네!”
“축제 중에도 연습이라니. 대견해. 하지만 쉬는 것도 훈련이란다. 이런 때 정도는 마음 놓고 쉬어야지.”
엘레나의 표정이 미묘해졌다. 지크는 바로 실상을 눈치챘다.
“드웨인 님에게 스녹이 끌려가서 그걸 감시하기 위해 너도 참여했다는 거로군.”
“…네.”
모두의 시선이 윌위스에게 쏠렸다. 그가 헛기침을 내뱉었다.
“스녹 군에게 아직 발전할 가능성이 많이 보이더군. 게다가 환수의 계약자라는 희귀한 존재인지라 내가 조금, 아주 조~금 흥분을 한 모양….”
쿠!
“아직도 안 떨어진 게냐! 에이, 환수 정도씩이나 돼서 뭐 그리 속이 좁은 게야!”
스누위크 마탑의 전대 탑주이자 세계 최고, 최강의 마법사라 칭해질 수 있는 그가 할 말은 아니었다.
얼마 안 있어 소동은 그럭저럭 마무리됐다.
다섯 사람은 잔디 위에 편하게 앉았고, 노웸은 그의 지정석인 스녹의 어깨로 다시 올라갔다.
지크와 라일라는 자신들이 떠난다는 걸 그들에게 알렸다.
“떠, 떠나시는 겁니까?”
스녹이 당황해 물었다. 그에 비해 지크의 반응은 무척이나 담담했다.
“내가 카르위먼의 정식 성기사도 아니고 계속 유라스에 머무를 이유는 없지.”
“그렇군요.”
하지만 스녹이 상당히 초조해하는 티가 났다. 그건 엘레나도 마찬가지.
“뭐냐. 헤어진다니까 불안한 거냐? 독립한 이후에도 잘해 왔잖아?”
“그거야 독립이라고 해도 옆에 지크 님이 있었잖습니까.”
제자에서 동료로 지위가 상승했다고 해도 그들의 곁엔 계속 지크가 있었다.
이번에 있던 섬의 임무처럼 떨어질 때가 없는 건 아니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잠시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바야흐로 지크와의 진정한 이별이었던 것이다.
“저, 저! 전 아직 스승님에게 배울 게 많아요!”
엘레나가 조금 커다란 목소리로 말했다.
“게다가 제가 졸업이란 말을 들은 건 어디까지나 지크 님한테서였는 걸요! 아직 스승님에겐…!”
“엘레나.”
라일라가 잔잔한 음성으로 엘레나의 말을 끊었다.
“너는 충분히 성장했어. 내가 가르칠 만한 건 전부 가르쳤단다. 앞으로는 너 스스로 헤쳐 나가는 게 네 성장에 더 도움이 될 거야.”
그녀는 조용히 엘레나의 손을 잡았다.
“너는 무척이나 뛰어난 아이야. 내가 장담컨대, 만약 이 세계에 마왕 같은 존재가 나타났다면 넌 분명히 그를 쓰러뜨리는 사람 중 한 명이 됐을 거란다.”
듣고 있던 지크가 피식 웃었다.
“그러니 이 이상 내가 가르칠 필요는 없어. 그리고 너무 걱정 말렴. 완전히 이별하는 것도 아니야. 내가 종종 찾아갈 테니까.”
방울방울 눈물을 흘리는 엘레나에게 라일라는 조용히 말했다.
“엘레나. 넌 졸업이란다.”
* * *
엘레나가 얼마 동안 눈물을 흘렸다. 라일라와 스녹이 그녀의 곁에서 위로를 해줬다. 노웸도 그녀의 어깨에 올라가 그녀의 볼을 핥았다.
지크와 윌위스는 그 모습을 조금 거리를 둔 채 바라봤다.
“드웨인 님은 끼지 않으셔도 괜찮겠습니까?”
“제 스승과 이별하는 순간에 눈치 없이 끼어들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네. 스녹 저 눈치 없는 놈이나 찰싹 붙어 있는 게지.”
“그렇게 말하기엔 엘레나가 스녹에게도 상당히 안정감을 느끼는 모양인데요.”
윌위스가 앓는 소리를 냈다.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분위기가 줄줄이 흘러나왔다.
지크가 웃으며 말했다.
“스녹을 싫어하는 것도 아니고 오히려 무척이나 마음에 들어 하면서 심술을 부리시다니. 할아버지란 입장은 참 복잡한 건가 봅니다.”
“심술이라니! 내가 하는 건 어디까지나 정당한…!”
발작적으로 부정을 하던 윌위스는 능글맞은 지크의 얼굴을 보고는 입을 다물었다.
“…흥! 자네도 자식을 낳아보면 알게 될 게야.”
“그럴지도 모르죠.”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