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98화 (598/628)

제598화

“그러고 보니 제가 착하게 살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지 나름의 방식을 찾아낸 계기가 루벨라 님과의 만남이었죠.”

“…그렇죠.”

지크의 생각은 존중한다. 지크의 조금, 아주 조금은 비뚤어진 정의관이 도움이 된 것도 인정한다.

지크에게 작게는 자신의 생명부터 크게는 세계의 구원까지 은혜를 입었다는 것도 아주 잘 알고 깊은 감사를 느끼고 있다.

‘하지만 지크 님의 착하게 사는 방식의 계기가 됐다는 건….’

저도 모르게 부정하고 싶은 마음이 솟구쳐 올랐다.

“새삼 감사를 드립니다. 루벨라 님이 아니었으면 제게 적합한 착하게 사는 방법을 깨닫지도 못하고, 아무런 즐거움도 느끼지 못한 채 의무적으로 착한 일이라고 생각한 것들을 무의미하게 하려 했을 겁니다.”

‘차라리 그게 낫지 않았으려나.’

그러나 루벨라는 필사적으로 미소를 피워 올렸다.

“다, 다행이네요. 저도 지크 님의 도움이 되어서 기뻐요.”

“하하하! 역시 카르위먼의 성녀님이군요!”

호탕하게 웃는 지크와 어색하게 웃음 짓는 루벨라의 차이가 참으로 대조적으로 보였다.

그때 누군가 방문을 두드렸다.

“들어와요.”

문이 열리고 신관 한 명이 들어 왔다.

그녀의 손엔 다과가 놓인 쟁반 하나가 들려 있었다. 방에 들어오기 전, 루벨라가 부탁한 다과가 온 것이다.

하지만 방의 사람들은 다과보다는 그걸 들고 온 사람에게 시선을 줬다.

“안녕하세요, 성녀님. 부탁하신 다과를 갖고 왔어요.”

“…고마워요. 하지만 제가 부탁한 건 당신이 아니었던 걸로 기억하는데요, 윈드네.”

그녀, 첼시는 뾰족한 루벨라의 말투에도 방긋방긋 웃었다.

“모두 바쁘신 것 같아 제가 대신 가지고 왔어요. 다과를 나르는 거야 그리 어려운 일도 아닌데 바쁜 사람을 시킬 수는 없으니까요.”

“윈드네는 한가하신가 봐요.”

“설마요. 그저 제가 요령이 좀 좋아서 웬만한 일은 모두 끝냈거든요. 그래서 잠시 짬이 나 도움을 드리는 거랍니다.”

“그래도 이번 전쟁의 공으로 윈드네도 다시 지위를 많이 회복했는데 이런 사소한 일을 부탁하는 게 조금 부담되네요.”

“어머, 우리 카르위먼의 얼굴이라 할 수 있는 성녀님과 카르위먼의 무력 그 자체라 할 수 있는 와이그 님께 다과를 갖다드리는 일이 어찌 사소한 일일 수 있겠어요.”

루벨라의 뼈 있는 말을 유들유들하게 받아 넘긴 첼시는 지크를 보며 살짝 고개를 숙였다.

“오랜만이에요, 지크 님.”

“그래, 오랜만이네.”

“라일라 님도 안녕하셨나요.”

“안녕하세요.”

“후후, 두 분 다 잘 지내신 것 같아 다행이에요. 그러고 보니 두 분 다 이번 전쟁에서 대단한 공을 세우셨죠. 정말로 대단하세요.”

그녀가 두 사람에 대한 칭송을 늘어놓는다. 루벨라가 살짝 헛기침을 했다.

“미안하지만 윈드네. 지금 두 분과 이야기 중이니 다과 놓고 가 주지 않겠어? 너도 그렇게 여유가 있는 건 아닌 것 같은데.”

“네, 성녀님.”

첼시는 가지고 온 다과를 사람들 앞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꾸벅 인사를 했다.

“다음에 또 봬요, 지크 님, 라일라 님.”

두 사람에게 인사까지 한 후 그녀는 방을 나섰다.

루벨라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그에 비해 와이그는 쓴 웃음을 지으며 그녀가 가지고 온 찻잔을 들어 올렸다.

“하여간 뻔뻔한 녀석입니다. 지금껏 꽤 많은 사람들을 보아왔지만 저 녀석처럼 얼굴에 철판을 넘어 오리할콘 판을 깐 녀석은 또 처음이군요. 누가 보면 성녀님과 무척이나 친근한 사이인 줄 알겠습니다.”

“절대 그렇지 않지만요.”

루벨라가 다시 한번 한숨을 내뱉으며 찻잔을 들었다.

그러다 잠시 멈칫하고 찻잔을 빤히 쳐다봤다.

“혹시 침이라도 뱉은 건 아니겠죠?”

하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아니, 지금 저 녀석의 행동을 보면 그럴 리 없지.”

“만에 하나라도 책잡힐 일은 절대 지양하고 있으니까요.”

와이그가 동의했다. 그녀는 찻잔을 그대로 입에 가져다 댔다.

“차가 맛있는 게 더 짜증나요.”

루벨라가 투덜댔다.

“말씀을 들어보니 저 녀석, 다시 지위가 그런 대로 높아졌나 봅니다.”

“지크 님도 아시다시피 저 녀석도 이번 밸리드와의 전투에 참가했잖아요. 그때 상당히 공을 올렸거든요.”

“하긴, 그래도 한때 성녀 후보였죠.”

“능력만큼은 확실한 녀석입니다. 물론 저 녀석이 성녀님과 같이 한때 성녀 후보였다는 점은 아직도 납득할 수 없습니다만, 그건 인성 문제지 능력 문제가 아니었으니까요.”

말은 그렇게 하지만 와이그의 어조에는 첼시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는 감정이 물씬 풍겨 나왔다.

“아마 다과를 갖고 온 것도 성녀님이 지크 님과 만나고 있다는 말을 듣고 온 걸 겁니다.”

“제 근처에서 얼쩡대는 것 같긴 하더군요.”

“지크 님의 명성이 하늘을 찌르니 잘 보여서 어떻게든 끈을 만들려는 거겠죠. 지크 님과의 사이도 좋지 않았으면서 말이죠.”

“생각해보면 그런 면은 대단한 것 같긴 해요. 만약 저 대신 그녀가 성녀 자리에 올랐다면 저는 절대 저렇게 할 수 없을 것 같거든요.”

“대단하긴 하죠.”

절대 그녀를 곱게 보진 않지만 루벨라도 와이그도 첼시의 그 뻔뻔함과 끈질김만큼은 인정했다.

“보통 저런 녀석들이 성공을 많이 하죠. 저것도 일종의 처세술이니까요. 하지만 아무리 능력과 처세술이 좋다고 하더라도 성녀님이 작정하고 찍어내려 한다면 카르위먼에서 발을 붙이지 못할 텐데요. 카르위먼에서 쫓아내는 게 꺼려지신다면 한직으로 처박아버릴 수도 있고요. 아마 제게 끈을 대려는 이유 중에 그에 대한 공포도 있을 겁니다. 물론 그런 일이 생겨도 전 저 녀석의 편을 들어줄 생각이 없지만요.”

지크의 말에 루벨라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처럼 얌전히 지낸다면 딱히 손댈 생각은 없어요.”

“혹시 저 녀석이 허튼 생각을 하면 어떻게 하실 겁니까?”

“찍어내야죠.”

루벨라가 단호하게 말했다. 옆에서 와이그가 만족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요새는 주제 파악을 잘하는 것 같으니, 그럴 가능성은 적을 거예요.”

“그래 보이긴 하더군요.”

첼시의 행동을 보면 이젠 성녀 자리는 거의 포기하고 나름의 높은 지위를 얻는 것으로 목표를 바꾼 것 같았다.

아마도 그녀가 다시 분수에 맞지 않는 욕심을 부리지 않는다면 그럭저럭 풍족한 삶을 누릴 수 있을 터였다.

네 사람은 그 후로 얼마간 더 담소를 나눴다.

“슬슬 저희는 일어나겠습니다.”

“벌써 가시려고요?”

“다른 사람들과도 작별 인사를 해야 하거든요.”

지크와 라일라가 일어섰다. 루벨라와 와이그는 그들을 방문 밖까지 배웅했다.

“지크 님과 만나 정말로 다행이었어요. 여러모로 많은 도움을 받았죠. 혹시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다면 부담 없이 우리를 의지해 주세요. 우리 카르위먼은 우리의 존경스럽고 좋은 친구인 지크 님의 부탁을 절대 외면하지 않을 테니까요. 혹시 교단의 사정이 좋지 않아 도움을 주기 어렵다면 저 개인적으로라도 꼭 들어드릴게요.”

“저도 한 팔 거들도록 하죠.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불러주시기 바랍니다.”

“카르위먼의 성녀님과 최고 성기사의 도움이라니. 분에 넘치는 영광이군요. 꼭 그러도록 하겠습니다.”

지크는 루벨라, 와이그와 힘차게 악수를 나눴다.

“라일라 님께는 따로 말씀드릴 필요가 없겠죠? 앞으로는 지크 님과 찰싹 붙어 다니실 테니, 도움이 필요한 일이 있으시다면 지크 님과 함께 요청하면 되실 테니까요.”

“물론이죠!”

라일라는 지크의 소매를 꽉 움켜잡았다. 그 모습을 보고 와이그가 껄껄 웃었다.

“참 잘 어울리는 한 쌍입니다.”

라일라가 살짝 얼굴을 붉히자 와이그는 더욱 크게 웃었다. 루벨라도 두 사람을 흐뭇하게 바라봤다.

물론 지크와 라일라의 사이를 축하하고 있긴 하지만, 루벨라와 와이그는 조금 다른 생각을 하고 있기도 했다.

‘라일라 님은 그래도 상식인이시니, 그래도 지크 님의 행동을 조금 막아 주시겠지?’

‘가족이 생긴다면 지크 님의 저 성정도 조금은 누그러질지도 모르지.’

두 사람은 정말로 열렬하게 라일라를 응원했다.

루벨라와 작별 인사를 하고 지크와 라일라는 다른 이를 찾아 나섰다.

다음으로 찾아간 이는 틸이었다.

두 사람의 방문을 틸은 조용히 환영했다.

그의 방에 풀어진 짐은 거의 없었다. 그도 지크처럼 슬슬 이곳을 떠나려 하는 건 아니었다. 그저 그의 성격상 방에 짐을 많이 풀어 놓지 않았을 뿐.

“저희는 슬슬 떠나려 합니다.”

“그렇군요.”

그리고 말이 끊겼다. 침묵이 흐른다. 말수가 적은 틸이 얘기를 잘 이끌어갈 수 있을 리 없다.

그는 조용히 지크의 다음 말을 기다렸다.

“앞으로의 길은 정하셨습니까?”

“스틸월 백작가로 들어가기로 했습니다.”

틸은 마음을 굳힌 모양이었다.

“잘 생각하셨습니다. 저번에 말씀드린 대로 그들은 틸 씨를 절대 나쁘게 대하지 않을 겁니다. 혹 뭔가 차별 대우를 받는다고 생각되면 제게 말씀해 주시지요.”

그때는 정말로 스틸월 백작가를 철저하게 털어버릴 것이었다.

“알겠습니다.”

“그래도 꽤 고민을 하셨을 것 같습니다. 오라는 곳은 많았을 테니까요.”

대부분의 다른 동료들과 달리 틸은 뚜렷한 소속 세력이 없다. 당연히 주변에서 어마어마한 권유를 받았다.

따라서 지크는 틸이 다른 곳으로 갈 가능성도 충분히 있다고 생각했었다.

“이미 제 부하들이 스틸월 영지의 병사들로서 꽤 자리를 잡았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윌터와 엘리도 백작가에 많이 익숙해졌고요.”

“다른 곳에 가면 더 좋은 조건으로 부하들까지 고용해 줄 겁니다만.”

“칼같이 조건을 따졌다면 오히려 계속 용병 활동을 했을 겁니다. 벌이는 그 편이 나았을 테니까요.”

세상에 퍼진 틸의 명성이라면 그의 용병단은 정말로 대단한 수입을 올렸을 것이다.

“하지만 저도 그렇고 제 부하들도 그렇고, 지금 원하는 건 안정적인 신분과 편안한 삶입니다. 스틸월 백작가의 조건이 나쁘다면 모를까, 그것도 아니죠. 이미 어느 정도 자리까지 잡은 상황이니 떠나고픈 마음은 없습니다.”

“그러면 됐습니다. 다른 이들이 뭐라 말하든 자기가 마음에 들면 그만이죠. 어떤 가치에 더 중점을 두는지는 철저하게 자신의 몫이니까요.”

솔직히 지금 틸의 실력이라면 당장 어느 나라의 고위 귀족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다.

회귀 전에는 지크, 윌위스와 함께 3마왕이라고까지 불린 자가 아니던가.

아무리 스틸월 백작이 변경백이라는 높은 지위를 가진 자라지만 일개 귀족의 수하로 들어간다는 것은 확실히 손해를 보는 일이었다.

그러나 틸이 그러고 싶어 그러는 것이라면, 주변 조건 따위는 다 필요 없다. 그저 그가 원하는 것이 정답일 뿐.

“윌터와 엘리는 잘 지낸답니까?”

“네. 백작가에서 잘 보살펴 주고 있는 모양입니다. 여러 교육도 받고 있는 것 같더군요.”

아무리 과묵한 틸이라도 한 사람의 아버지인 법. 자식의 얘기가 나오자 그 과묵하던 입이 열렸다.

지크는 적당히 그의 말을 맞춰주면서 이야기를 이어나갔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