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7화
어느새 지크가 그가 있는 곳까지 다가와 있었다.
몇몇 용기 있는 자들이 달려들었지만 대충 휘둘러진 윈두르에 목이 달아났다.
“거 참 띨띨하게도 생겼네. 울텔은 어떻게 이런 놈에게 군을 맡겼는지. 아, 어차피 버림패였으니 상관없나?”
지휘관은 입술을 한 번 깨물고는 각오를 굳힌 채 지크를 향해 무기를 겨눴다.
“여기서 우리를 모두 없앤다 하더라도 우리의 신앙은 사라지지 않는다! 교황께서 꼭 우리들의 복수를 해주실 것이다!”
결연한 목소리. 하지만 그에 대한 대답은 지크의 폭소였다.
“푸하하하하하! 멍청한 놈. 너희 교황은 죽었어. 그것도 자기가 이용하던 놈에게 뒤통수를 맞고 죽었지. 하여간 무능력하기 짝이 없는 녀석이야.”
“헛소리!”
“헛소리가 아냐. 이제 슬슬 시작할 텐데….”
지크의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전쟁터에 어떤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리기 시작했다.
“사악한 밸리드 놈들은 들어라!”
한 기사가 말 위에 올라 목청을 높이고 있었다.
“너희의 수괴인 교황은 죽었다!”
당황한 상태에서도 그 말을 귀담아 듣는 밸리드 교인들은 없었다. 그들에게 교황은 밸르의 가호로 인해 절대로 살해당하지 않는 인물이었으니까.
그러나 기사가 높이 들어 올린 물건으로 인해 그 믿음은 산산이 깨졌다.
“이게 그 증거다!”
그의 손에는 탑의 파편 사이에서 루벨라 일행이 회수한 울텔의 지팡이가 들려 있었다.
말단의 신도들은 모르지만 어느 정도 높은 지위에 있는 성기사나 신관들은 그 지팡이를 알고 있었다.
그건 지휘관도 마찬가지.
“마, 말도 안 돼!”
그는 경악했다.
‘설마 가짜인가!’
하지만 감각을 집중해보니 지팡이에서 음습하게 뿜어져 나오는 밸르의 기운이 느껴졌다. 틀림없는 진품이었다.
‘그렇다면 정말로…!’
“봤지?”
지크가 이죽거렸다.
“네놈들이 경애해 마지않는 그놈은 이미 갈가리 찢겨서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뒤져버렸어. 내가 한동안 전장에 나타나지 않은 이유가 그놈을 죽이기 위해서였거든. 뭐, 놈도 예측을 하고 날 잡겠다며 너희 주력을 빼냈지만 고작 그깟 놈들 좀 동원한다고 날 어떻게 할 순 없었지.”
“그, 그걸 왜 이제야….”
“확실히 전투 초반에 알려 준다면야 사기가 떨어진 네놈들을 쉽게 이길 수 있었을 거야. 그런데 그러면 네놈들이 도망갈 확률이 높아지잖아.”
지크의 눈에 짙은 살기가 어렸다.
“이건 국가 간의 전쟁이 아니야. 종교 전쟁이지. 밸르 따위를 믿는 네놈들은 단 한 놈도 살려 보낼 수 없어.”
그래서 포위망이 완성되기까지 울텔의 죽음을 숨겼다.
물론 지금 지크의 실력이라면 정면으로 맞붙는다 해도 정말로 단 한 놈도 놓치지 않을 자신이 있었지만 연합군의 지휘부, 특히 카르위먼의 사람들은 확실한 것을 원했다.
지크도 굳이 거기서 자신 혼자 모두 쓸어버려야 한다고 강하게 주장할 이유가 없었다.
어쨌든 포위망은 완성되었고, 밸리드 교인들이 한 사람이라도 살아남는 건 요원해 보였다.
절망에 빠진 지휘관을 보며 지크는 말했다.
“아까 로브를 입은 가짜들이 달려올 때 희망에 부풀었었지? 어때, 잠깐의 희망은 달콤했어?”
“너, 너 이자시이이이익!”
두텁게 형성된 포위와 죽어나가는 동료들 그리고 무엇보다 정신적 지주인 울텔의 죽음이라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당한 조롱은 결국 지휘관의 이성적인 판단을 날려버렸다.
오로지 분노와 증오만 남은 그는 지크를 향해 달려들었다.
현재의 상황도, 지크와 자신의 능력 차이도 지금의 지휘관에게는 중요하지 않았다. 오로지 지크를 죽이고 싶다는 본능에 몸을 맡길 뿐.
하지만 그렇다고 현실의 능력 차이가 메워지는 것은 아니다.
콰직!
“컥!”
윈두르의 날이 지휘관의 가슴을 꿰뚫었다. 당연히 지휘관의 공격은 지크에게 닿지 않았다.
“너…어어어…!”
죽어 가면서까지 원망과 증오의 눈빛을 지크에게 부라린다.
입과 가슴에서 꾸역꾸역 피를 내뿜는 것이 꿈에서 나올 것 같아, 평범한 사람이라면 몇 달간은 잠을 설칠 그런 모습이었다.
그러나 지크는 이미 그에게 신경을 끄고 있었다. 현 밸리드 군의 총지휘관으로 보인 터라 대충 갖고 놀았을 뿐, 애초에 이름조차 기억할 가치도 없는 놈인 것이다.
콰아아앙!
지크는 다시 다른 밸리드 군을 박살 내기 시작했다. 지휘관은 숨이 끊어지기 전까지 지크를 노려봤지만, 지크가 그에게 시선을 향하는 일은 두 번 다시 없었다.
그렇게 지크는 계속해서 밸리드 군을 일소해갔고, 연합군의 다른 이들도 단 하나의 밸리드 교인도 살려 보내지 않겠다는 의지를 불태우며 공격을 계속했다.
그날, 밸리드 군은 비유도 뭣도 아닌 단어 뜻 그대로 몰살당했다.
* * *
연합군의 승리는 바로 주변 국가로 퍼져나갔다. 소식을 들은 사람들은 승리를 기뻐하며 연합군을 칭송했다.
다른 나라에게 점령을 당한다면 생활이 나빠질 수도 있다. 혹은 죽임을 당할 수도 있다.
그러나 사교인 밸리드에게 점령을 당한다면 그보다 훨씬 더 나쁜 일이 생길 게 뻔했던 것이다.
밸리드가 멸망시킨 브로드스탁 제국을 포함한 여러 나라들의 경우로 완벽히 증명되지 않았는가.
그러니 밸리드를 이겼다는 사실에 기뻐하지 않는 이는 없었다.
그리고 연합군 중에서도 이번에 가장 많은 활약을 한, 명성 높은 드래곤 슬레이어들의 이름값은 더더욱 높아졌다.
카르위먼의 총단, 대신전 유라스.
그곳에는 커다란 축제가 진행 중이었다. 일반 시민들부터 귀족과 왕족에 이르기까지 존경을 받는 종교답게 사치를 지양하는 분위기를 가지고 있는 카르위먼이었지만, 그렇다고 무조건 검소하게 살라 강요하는 것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번 축제의 이유는 그들의 가장 큰 적이었던 밸리드의 토벌이 아니던가.
물론 카르위먼도 그 바퀴벌레 같은 밸리드가 모조리 퇴치된 건 아니라고 예상했다.
그러나 밸리드의 교황과 본거지, 그리고 많은 수의 밸리드 교인들을 없앴으니 그 세력이 크게 약화될 건 명확하다.
즉, 이 정도로 커다란 축제를 열어도 문제될 건 아무것도 없었다.
며칠 동안 계속된 축제.
카르위먼의 사람들이고 일반인들이고 드디어 거의 뿌리가 뽑히다시피 한 밸리드의 몰락을 즐겼다.
하지만 아무리 밸리드의 몰락이 기쁜 일이라고는 해도 계속해서 축제를 즐길 수는 없는 법. 카르위먼이 개최한 축제도 슬슬 그 끝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카르위먼의 초대와 루벨라, 와이그의 간곡한 부탁으로 카르위먼의 축제에 참가하여 유라스에서 머무르던 지크는 슬슬 짐을 정리하고 있었다.
정리라고 해 봐야 방에 꺼내놓았던 짐을 다시 마법 상자 안에 집어넣는 간단한 일이었다.
“들어와.”
갑자기 지크가 입을 열었다. 곧이어 지크의 방문이 열렸다.
“여전히 대단한 기척 감지네.”
“안됐지만 라일라, 문 앞에 선 네 기척 좀 감지한다고 별로 대단한 건 아냐.”
“그래?”
라일라는 문을 닫고 지크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그의 앞에 서서 그대로 지크의 목에 팔을 휘감아 입을 맞췄다.
짧은 키스 시간이 지나고 라일라가 지크에게서 떨어졌다.
“바깥에서는 손도 제대로 못 잡더니 둘만 있을 때는 상당히 적극적이네?”
“사, 사람들이 보는데 그런 짓을 어떻게 해!”
빨간 얼굴로 라일라가 항변했다. 그저 그녀의 성격이 그런 것일까. 아니면 기억을 잃은 부작용으로 그런 쪽의 내성을 완전히 잃어버린 것일까.
‘아, 기억은 다 찾았지.’
그렇다면 아마 라일라의 성격 자체가 그런 쪽에 약한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의외로 기억을 되찾은 티가 나지 않지.’
사람의 인격이란 것은 그 사람의 본성과 더불어 과거로부터 만들어지는 법이고, 그 과거는 기억이나 추억으로 남는 법이다.
즉, 세르피나의 기억을 모조리 되찾은 라일라가, 세르피나처럼 변하진 않더라도 어느 정도 영향은 받을 가능성은 높았다.
그러나 지금의 라일라는 여전히 지크가 아는 라일라였다.
“왜 그렇게 봐?”
“옛 기억을 되찾았어도 별로 달라진 게 없구나 해서.”
“그거야 당연한 거야. 세르피나의 기억은 고작해야 제국을 위해서 길러졌던 때의 것이 다인걸. 뚜렷한 추억 같은 건 없어. 다른 건 윈두르나 에스텔레이드, 토르니움으로부터 얻은 완전한 타인의 정보고. 무엇보다.”
라일라는 지크를 슬쩍 올려다보며 조금 부끄럽다는 듯 입을 뗐다.
“너와의 추억이 고작해야 그런 자잘한 기억들에 밀릴 리 없잖아.”
“그렇군. 내가 바보 같은 생각을 했었어.”
지크는 피식 웃으며 라일라를 품에 안았다.
지크의 품에 안겨 그의 감촉을 즐기던 라일라는 그의 방에 짐이 상당히 줄어 있는 것을 발견했다.
“떠나려고?”
“슬슬 그래야지. 언제까지 여기 있을 수도 없잖아?”
“그건 그래. 그럼 다른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해야겠네.”
당연히 지크를 따라간다는 식으로 말을 하는 라일라.
그리고 지크도 그런 그녀의 태도를 지적하지 않았다. 애초에 원래도 같이 여행을 했던 둘이다. 연인 사이로까지 발전한 지금 떨어질 이유는 없었다.
“안 그래도 짐만 모두 집어넣고 그러려고 했어.”
“그럼 같이 가자. 나도 인사는 하고 싶으니까. 조금만 기다려. 나도 짐을 정리하고 올게.”
“그래.”
라일라가 쪼르르 방을 나갔다. 지크는 남은 짐을 마법 상자 안에 모두 집어넣었다.
방은 처음 지크에게 배정됐을 때의 모습으로 돌아왔다.
라일라가 돌아오기까지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그녀도 꺼내 놓은 짐을 모조리 마법 상자에 쓸어 넣으면 되었으니 그리 시간이 걸릴 이유가 없었다.
“갈까.”
“응.”
라일라가 지크의 곁에 선다. 그리고 조심스럽게 그의 소매를 잡았다.
남들 앞에서는 부끄러움을 타는 그녀로서는 그게 최선이었다. 그러나 라일라의 얼굴에 어린 미소는 그녀가 충분히 만족하고 있음을 보여줬다. 그리고 조금 더 강한 애정 표현에도 곧 익숙해 질 것이었다.
지크와 라일라는 사람들에게 작별 인사를 하기 위해 방을 나섰다.
* * *
가장 먼저 방문한 이는 루벨라였다. 아무래도 그들을 초대한 카르위먼 내에서도 높은 지위에 있는 이니만큼 먼저 말을 꺼내는 것이 좋겠다 생각해서였다.
마침 이 들뜬 시기에도 충실히 기도를 끝내고 돌아오던 그녀와 마주친 그들은 루벨라의 방에 초대됐다.
그녀와 같이 기도를 하고 오던 와이그도 자리를 함께 했다.
“떠나시려고요?”
루벨라가 되물었다. 그러나 그녀에게서 크게 놀란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그녀도 지크와 라일라가 슬슬 떠날 때임을 예상하고 있던 것이다.
“네. 계속 이곳에 머물 수도 없는 노릇 아닙니까.”
“계속 머무르셔도 되는데요. 이참에 정식으로 카르위먼의 성기사가 되는 게 어떠세요?”
“그거 참 좋은 생각이군요, 성녀님!”
루벨라와 와이그가 기대감으로 눈을 반짝인다. 물론 지크의 성격을 잘 아는 둘인 만큼 지크가 거절을 할 가능성이 높다는 건 잘 알고 있었다.
이번 권유도 반쯤은 농담으로 한 것. 하지만 지크가 카르위먼에 완전히 들어왔으면 한다는 것도 분명한 진심이었다.
그러나 둘의 예상대로 지크는 고개를 저었다.
“죄송합니다만, 어떤 특정한 신을 신앙하고 싶은 생각은 없습니다.”
“그렇군요. 아쉽네요.”
유감스러운 표정을 짓는 둘. 하나 역시 크게 실망하지는 않았다.
“앞으로 어떻게 지내실지 여쭤봐도 될까요?”
“글쎄요. 가장 중요한 일은 모두 처리한 터라 깊이 생각해 보지는 않았습니다.”
그렌 제너드도, 울텔도, 브뤼셀 시스템도 모조리 박살 냈고 세계수도 해방시켰다.
“한동안은 여유롭게 세상을 떠돌 생각입니다. 지금처럼 착한 일도 하면서 말이죠.”
“아, 착한 일.”
루벨라와 와이그의 표정이 조금 어색해졌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