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6화
육지에서 멀리 떨어진, 황량하기 짝이 없는 데다가 화산 활동마저 계속되어 사람들의 관심에서 먼 한 섬.
하지만 지금, 그 섬은 주변에 자신의 존재감을 거침없이 피력하고 있었다.
평소에도 용암이 넘실대며 연기를 뿜어내던 분화구에서 지금까지와는 차원이 다른 연기가 뿜어져 나온다.
대지가 떨리며 바람이 미친 듯이 불고 그에 따라 섬 주변의 바다도 거칠게 넘실거렸다.
콰아아아앙!
섬의 옆면이 통째로 터져나간다. 저 먼 바다까지 섬의 파편이 날아가 커다란 물보라를 만들었다.
치이이이익!
섬의 무너진 부분에서 새빨간 용암이 맹렬히 뿜어졌다.
그것은 차가운 바닷물과 만나 막대한 증기를 일으키며 섬 주변을 자욱하게 가렸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퍼어어엉!
엄청난 마력이 솟구치며 순식간에 증기를 흩어버렸다.
그리고 한 존재가 그 모습을 드러냈다.
가지에 달린 새파란 잎들은 그 하나하나에서 막대한 생명력을 뿜어내고 갈색의 몸통은 강인한 마력이 맥동하며 그 위엄을 뽐낸다.
두터운 뿌리는 대지를 꽉 쥐어내 그 어떤 강렬한 폭풍에도 버틸 수 있게 할 것 같다.
섬이 무너진 단면에 난 통로에서 지크와 그 일행은 그 존재를 올려다봤다.
얼핏 느껴지는 마력만으로도 절로 경외심과 두려움이 이는 존재.
신 혹은 그에 한없이 가까운 존재라고 주장해도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을 것 같은 존재.
“…저게 진짜 세계수로군.”
지크가 중얼거렸다.
2차 억제 체계가 완전히 부서진 후 세계수와 그 분신들은 하나로 융합했다. 정확히 말해 분신들이 본체에게 끌려들어 갔다.
그리고 나타난 한 그루의 나무.
그것이 지금 그들의 눈앞에 떠 있는 세계수였다.
“저런 걸 억류했다니. 새삼스레 클로원 제국의 저력이 느껴지는걸.”
“그렇게 격렬하게 저항하지는 않은 걸로 알고 있어. 의지는 있지만 그렇게 강하지는 않으니까. 물론 제국의 저력이 강한 것도 맞지만.”
이야기를 나누는 지크와 라일라와는 달리 한스를 위시한 다른 일행들은 감히 입을 열지 못했다.
세계수의 존재감에 압도되어 멍하니 그 엄청난 존재를 바라보기만 했다.
우웅!
세계수가 마력을 살짝 뿜어냈다. 그것만으로도 압도적이었지만 위기감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따스하고 편안한, 그런 마력이었다.
“고맙다고 하는 건가?”
“아마도.”
세계수가 다시 마력을 방출했다. 이번엔 방금 전 것보다 거칠고 파괴적이었다.
콰지직!
직접적으로 소리가 나진 않았지만 지크 일행은 마치 귓가에 그런 소리가 생생히 들린 것 같았다.
놀랍게도 하늘에 균열이 가고 있었다. 세계수의 마력이 짙어질수록 균열은 점점 커져갔다.
곧 세계수의 거대한 덩치도 너끈히 들어갈 것 같은 구멍이 하늘에 뚫렸다. 그 너머에는 여러 가지 색깔의 빛이 찬란하게 이지러지고 있었다.
세계수의 몸체가 떠오른다. 천천히 구멍 안으로 진입해 갔다.
“가는군.”
“그래.”
일행은 세계수의 몸체가 구멍 안으로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것을 쳐다봤다.
스으윽!
균열이 서서히 작아지더니 곧 완전히 사라졌다.
남은 건 파란 하늘뿐. 그것도 곧 용암과 바닷물이 마주쳐 쏟아지는 증기에 가려졌다.
할 일이 모두 끝났다. 하지만 그건 브뤼셀 시스템의 파괴와 세계수의 해방에 관한 것에 국한될 뿐, 울텔의 끄나풀들을 쓸어 버린다는 일은 아직 남아 있었다.
지크가 일행에게 귀환을 지시하려 할 때였다.
“응?”
등에서 느껴지는 낯익은 감촉에 지크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등에 손을 뻗어 매달려 있는 것을 꺼냈다.
윈두르였다.
“…이건 왜 안 가져갔지?”
윈두르는 세계수의 가지로 만든, 세계수의 일부다. 세계수가 해방되는 즉시 세계수의 일부로 돌아갈 줄 알았건만.
라일라도 윈두르를 눈을 크게 뜨고 바라봤다.
“설마 까먹고 두고 간 건가?”
“까먹을 게 따로 있….”
라일라의 말을 부정하려다 지크는 입을 다물었다.
말마따나 인간에게나 윈두르가 가치를 헤아리기 힘든 신검이지, 가지 하나쯤 세계수에게는 아무것도 아닐 수 있었다.
“…설마 진짜 그냥 두고 간 건가?”
지크도 그렇게 결론을 내리려 할 때였다.
우우우웅!
마치 지크의 말을 부정하는 것처럼 윈두르가 울었다.
동시에 윈두르의 검신에서 세계수의 마력이 확 피어올랐다 사라졌다.
“…그러고 보니 윈두르에서 보내지는 세계수의 마력이 아직 끊기지 않았어.”
“그럼 혹시 일부러 두고 간 건가? 네게 보답이라도 하려고 말이야.”
우우우우우웅!
윈두르가 다시 한번 울었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울림이 긴 것이, 라일라의 말을 긍정하는 것처럼 들렸다.
지크는 윈두르를 슥 훑어봤다가 다시 등에 동여맸다.
“남으면 좋지, 뭐. 어렵게 생각하지 말자고.”
윈두르만큼 좋은 검은 없다. 게다가 공급되고 있는 세계수의 마력도 끊기지 않은 상황. 지크에게 나쁜 점은 단 하나도 없었다.
“이제 돌아가자. 남은 벌레들을 짓밟아야지.”
아직도 울텔의 부하들이 연합군과 대치를 하고 있다면 깡그리 박멸해야 했다.
* * *
지크가 연합군 진영으로 귀환했을 때, 아직까지 두 세력의 대치는 풀리지 않고 있었다.
다만 어디까지나 대치를 할 뿐, 전투는 거의 행해지지 않았다. 연합군도 밸리드도 주력이 빠져나간 터라 서로를 먼저 공격하기 꺼려 했던 것이다.
그러나 지금 상황이 바뀌었다.
밸리드의 주력은 깡그리 날아갔지만 떠나간 지크 일행은 단 한 명의 희생자도 없이 귀환했다.
아니, 윈두르와 세계수의 마력, 라일라 그리고 토르니움이라는 요소를 생각한다면 오히려 전력이 늘어났다.
특히 지크의 세계수의 마력은 가히 압도적이었다.
콰아아아아앙!
“크아아아악!”
“아아악!”
고작 한 번의 휘두름으로 지표면에 거대한 상처가 났다.
그에 휘말린 적들은 인간이고 몬스터고 언데드고 할 것 없이 모조리 박살났다.
“막아아아!”
“고위 몬스터! 고위 몬스터들을 보내라!”
지크의 앞으로 덩치 큰 몬스터들이 가로막았다. 주력이 빠진 밸리드 군을 위한 것인지, 아니면 탑 안에는 덩치 큰 몬스터들을 들일 수 없어서 그런 것인지 고위의 대형 몬스터들은 여전히 전장에 남아 있었다.
웬만한 실력자들도 감히 쉬이 볼 수 없는 상대다.
그러나 이미 모든 마력을 해방한 데다 세계수의 마력까지 공급받고 있는 지크에게 그것들은 그저 덩치가 조금 더 큰 벌레들에 불과했다.
콰앙! 콰앙!
몬스터 특유의 단단한 가죽도 질긴 근육도 튼튼한 뼈도 지크의 검기를 단 한 순간도 막을 수 없었다.
지크의 앞을 가로막기 무섭게 대형 몬스터들은 전부 산산조각 났다.
밸리드 군은 얼어붙었다.
지크는 그리 빠르게 움직이지도 않고 있었다. 그저 평범한 사람이 빠른 걸음으로 걷는 정도.
그러나 그를 막기 위해 달려든 이들은 전부 제대로 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말 그대로 파괴됐다.
그 어떤 존재도 지크를 막기는커녕 그 걸음을 조금이라도 느리게 하지 못했다.
“막아라! 무슨 일이 있어도 주력이 돌아오기까지 놈들을 막아야 한다!”
지휘관인 듯한 이가 소리를 친다. 돌아오지 못할 놈들을 기다리다니. 아무래도 밸리드 놈들은 지크 일행은 돌아왔지만 그들의 주력은 돌아오지 못한 현 상황을 이해하지 못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하긴, 알려줄 필요가 없긴 했지.’
울텔의 입장에서는 지크를 잡은 후 브뤼셀 시스템을 고치는 법을 알아낸 후에 바로 회귀를 하면 됐을 테니, 여기 있는 놈들에게 시시콜콜 상황을 알려줄 필요가 어디 있을까.
솔직히 지크를 잡기 위한 시간만 끌 수 있다면 싹 전멸한다 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았을 것이다.
하지만 놈들은 그것도 모르고 악다구니를 쓰며 연합군에게 달려들었다.
동정심이 솟을 법도 하건만, 지크는 그저 윈두르를 휘두를 뿐이었다.
‘다른 놈들이라면 불쌍하게 생각하지 않을 것도 아니지만, 저놈들은 밸리드 놈들이잖아?’
벌레를 대체 왜 불쌍해한단 말인가. 그런 데 쓸 동정심이 있으면 길 가다 만나는 거지에게 돈 한 푼이라도 적선하는 게 훨씬 나았다.
연합군은 계속해서 밸리드를 몰아붙였고 밸리드는 계속해서 쓰러졌다.
누가 봐도 밸리드에게는 승산이 없었다. 아무리 막강한 신앙으로 무장했다고 하더라도 여기 모인 밸리드의 인원이 모두 그럴 순 없는 노릇.
몇몇이 슬슬 명령을 무시하고 발을 빼려는 모습을 보였다. 누구 한 명이 도망을 친다면 그 분위기는 순식간에 밸리드 군 전체에 퍼져 순식간에 무너져 내릴 게 뻔했다.
밸리드의 지휘관은 절망했다. 하늘 같은 교황이 내린 명령을 이행하지 못하게 되는 상황에 분통이 터졌다.
그러나 아직 희망을 놓기에는 일렀다.
“아, 아군이다!”
옆에 있는 부하가 뒤쪽을 바라보며 소리를 쳤다. 지휘관이 급히 고개를 돌렸다.
지평선 저 너머에서 한 무리의 사람이 달려오고 있었다. 하나같이 로브를 뒤집어 쓴 이들. 지휘관의 표정이 환해졌다.
“교황께서 원군을 보내셨다! 조금만 더 버텨라!”
그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조금 전까지 거무죽죽하게 죽어가던 안색이 다시 환하게 퍼졌다.
다른 밸리드군도 저 멀리서 로브를 쓰고 달려오는 이들을 보았다.
그들은 로브들을 마인들이라 생각했다. 수도 상당히 많다. 저 정도 숫자라면 연합군의 가장 앞에서 밸리드들을 말 그대로 도륙하고 있는 지크도 억제할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전 전투에서도 그들은 지크를 막지 않았던가.
사기가 박살 나 슬슬 도망을 치려 눈치를 보는 자들도 분명 있었지만, 그들은 기본적으로 광신도.
자신들을 도울 강자들이 도착해 버틸 만하다고 생각이 들자 다시 전의를 불태우기 시작했다.
“위대한 밸르께서 우리를 수호하신다! 여기서 죽는다 해도 우리는 밸르의 품 안에서 영원한 영광을 누릴 것이니! 밸리드여, 우리의 신을 위해 그 목숨을 바쳐라!”
[우와아아아아!]
밸리드 신도들은 다시 연합군에게 달려들었다. 당연히 그들은 달려드는 족족 살해당했다.
그러나 그들은 포기하지 않았다. 저 로브를 입은 자들이 도착한다면 어떻게든 균형을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로브를 입은 자들은 순식간에 밸리드의 후미에 도착했다. 밸리드들이 그들에게 길을 비켜주려 움직일 때였다.
“크아아악!”
“아아악!”
“뭐, 뭐야! 당신들이 왜… 아아아아악!”
로브들이 밸리드인들을 베어 넘기기 시작했다. 아무런 대비도 하지 못하고 있던 밸리드들은 순식간에 죽어나갔다.
“저, 적이다!”
“이 녀석들, 아군이 아니야!”
그제야 로브 안에 보이는 번쩍이는 갑옷을 눈치챈 몇몇 밸리드인이 소리를 쳤다.
다른 이들도 지원군인 줄 안 로브들이 사실 적이었단 사실을 깨달았다.
당연히 밸리드의 사기는 완전히 무너졌다. 밸리드군은 우왕좌왕한 채 하나둘 피를 뿜으며 쓰러졌다.
도주를 시도하는 자들이 하나둘 나오기 시작했지만 그것도 여의치 않았다.
전방엔 연합군, 후방엔 가짜 로브들. 그들은 완전히 포위되어 있었다.
연합군이 극히 유리한 상황에서도 일부 병력에 로브를 입혀 밸리드의 후방으로 보낸 이유가 여실히 드러났다.
단 한 사람의 도주도 용납지 않겠다는 것이었다.
“이, 이럴 수가….”
사방에서 죽어가는 아군을 본 밸리드 지휘관의 심정은 참담하기 그지없었다. 그러나 그런 감정도 오래 가진 않았다.
“네가 대장이냐?”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