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3화
《너… 너… 그, 그 말….》
“그래. 내가 예전에 말해줬지? 회귀 전, 네가 내 숨통을 끊기 전 한 말이다. 역시 최후에 용사가 악당을 쓰러뜨리는 데 이만한 말이 없더라고. 어때, 기분 좋지? 네가 원하던 상황에 그대로 내뱉어 줬으니까 말이야. 이거야말로 네가 꿈꾸던 상황이잖아?”
《이, 이…!》
“아, 그래도 지금과 조금 어울리지 않는 말이기도 해.”
지크는 빙글빙글 웃으며 내뱉었다.
“너에게 다음이란 없으니까.”
그렌의 얼굴이 일순 굳었다.
《다, 다…다음…?》
“그래, 다음.”
《나…나 죽으…면…또 시…작….》
“이제 그게 불가능하다고. 내가 예전에 말했잖아. 넌 더 이상 회귀를 할 수 없어.”
《아…아…냐….》
“아직도 부정할 생각이야? 뭐, 그거야 네 자유겠지. 입 아프게 설명할 필요도 없고, 그럴 생각도 없고. 한 번 경험하면 알게 되겠지. 물론 내 말이 맞았다 틀렸다 인식할 순 없겠지만. 죽음이란 그런 거잖아?”
《주…죽…어…?》
그렌의 마음속에 죽음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의 볼이 실룩였다.
막대한 마력의 고양감에 힘입어 마치 회귀 능력을 가지고 있을 때처럼 지크와 싸워댄 그였지만, 더 이상의 기회가 없게 되었다는 현실을 극복한 건 아니었다.
그의 마음은 드래곤이 나타나기 전, 월등한 실력을 가지고 있었으면서도 지크에게 벌벌 떨어대던 그때와 한 걸음도 나아가 있지 않았다.
천천히 그때의 공포가 되살아나기 시작했다.
“그래. 죽어. 네 삶의 끝이란 거다.”
《…시…싫어….》
“그렇게 말해 봤자야. 무엇보다 너도 남이 어떤 상황에 어떤 생각을 가지고 있든 네 생각을 강요해 왔잖아. 이제 와서 싫다고 해 봐야 설득력이 전혀 없어.”
《우… 웃기지…마…! 내, 내가…왜…!》
“왜긴. 네 소원대로 용사가 이기고 최악의 악당이 지는 상황이니까. 네가 원하는 대로 된 거야.”
《요…용사는… 나….》
“몇 번이고 말하지만, 용사는 나야. 그리고 그건 전부 너 때문이지. 이제 그만 받아들여, 악당. 넌 꿈을 이루지 못하고 여기서 악당으로 비참하게 끝나는 거야. 네가 지내온 그 기나긴 세월이 전부 헛수고가 됐다는 것을 받아들이라고.”
《그…그럴… 리….》
“그러고 보니 나와 윌위스 드웨인, 틸에게는 멋들어진 별명이 붙었었지. 우리를 전부 제멋대로 휘둘러대던 너이니, 내가 자비롭게 너도 마왕으로 인정해주마. 그럼 너는 무슨 마왕으로 불러야 할까? 찌질이의 마왕? 벌레의 마왕? 멍청이 마왕? 아, ‘이제는 회귀 못 하는 마왕’이라고 불러도 괜찮을 것 같은데.”
《아…아니…야아아…아아아아아…!》
그렌이 몸을 버둥거렸다.
그러나 지크의 발이 가슴을 짓누르고 있어 그저 땅바닥에서 몸을 조금 들썩이는 정도밖에 하지 못했다.
그렌의 주변으로 다시 마력이 요동쳤지만 지크는 마력이 구체적으로 형태를 갖추기 전에 윈두르로 전부 무효화시켰다.
환상적인 마력 감지와 소름 돋는 정확도가 맞물려 행해진 묘기였다.
당연히 그렌이 그 이상 반항할 수단은 없었다.
《놔…아아…아아아아아…!》
“싫어.”
팔다리를 버둥대는 그렌을 보며 지크는 단호하게 대답했다.
“아직 안 끝냈나?”
어느새 다가온 윌위스가 지크의 뒤에서 말을 걸었다. 고개를 돌려 보자 멀리 떨어져 있던 일행이 모두 모여 있었다.
“오셨습니까?”
“그래. 전투가 거의 끝난 것 같아 와 봤네. 혹시 민폐였나?”
“괜찮습니다. 이 녀석은 더 이상 뭘 어떻게 할 힘이 없으니까요.”
“그렇게 말하기엔 지금도 녀석 주변의 마력이 무시무시하네만….”
아직 포기하지 않았는지 그렌은 계속 주변 마력을 막대하게 움직이고 있었다.
그 영향으로 지크와 그렌의 대화 소리가 조금만 떨어져도 들리지 않을 정도였다.
그러나 역시 마력들은 윈두르에 의해 완성되기 전에 모두 박살 났다.
지크는 어깨를 으쓱였다.
“어쨌든 놈이 남에게 해를 끼칠 수 없으니까요. 힘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죠.”
“그렇긴 하지.”
말은 그렇게 했지만 윌위스는 속으로 경이로움을 느꼈다.
지크를 제외하고 파티 내에서 가장 마력 감지 능력이 뛰어난 그다. 주변 마력이 몰아치는 느낌에 소름이 일어났다.
그러나 그 마력의 흐름은 지크가 슬쩍슬쩍 쏘아내는 마력의 줄기에 모조리 와해됐다.
대마법사인 윌위스조차 차마 엄두가 나지 않는 기술이었다.
《…아이네… 레오…나….》
“으아, 저 녀석. 또 우리 이름을 부르고 있어.”
“…솔직히 기분 나빠요.”
레오나와 루벨라가 혐오스럽게 그렌을 내려다봤다.
“우리는 녀석의 동료 대상이 아니라서 정말로 다행이네.”
“…그렇습니다.”
그에 비해 윌위스와 틸은 그렌이 자신들을 완벽히 적으로 생각함에 안도했다.
그러나 기분이 나쁜 건 그들도 마찬가지였다.
“이제 슬슬 끝을 내는 게 어떻겠나.”
“그러죠.”
충분히 갖고 놀 만큼 놀았다. 게다가 지크는 어서 맞이하러 가야 할 이도 있었다.
윈두르가 그렌을 노리고 겨눠진다. 모두가 악당의 최후를 기다렸다.
그렌이 지크를 올려다봤다. 지크의 일행도 쳐다봤다.
그가 꿈꾸던 상황이다. 완벽한 파티를 맺어 마지막 마왕 지크를 처단하고 계획을 완성하는 바로 그 장면.
문제가 있다면, 쓰러져 있어야 할 지크가 서 있고 서 있어야 할 자신이 쓰러져 있다는 것.
그리고 기괴한 검의 끝이 자신을 향하고 있다. 더 이상의 기회는 없다는 말과 함께.
《시…싫…어…!》
그렌이 더욱 몸부림쳤다. 하지만 그의 가슴을 짓누르고 있는 지크의 발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지크 일행의 눈길도 여전히 싸늘했다. 이제 와 그에게 값싼 동정심을 느끼는 사람은 없었다.
《…나…나…는… 용사가… 용사가아아아아아…!》
콰직!
“컥!”
윈두르의 날이 그렌의 목에 깊숙이 파고들었다.
짧은 신음.
그의 목에서 피가 울컥하고 쏟아져 나왔다.
스윽!
윈두르가 빠졌다. 그러나 윈두르에 찔린 그렌의 목에는 검의 흔적이 확실히 남았다.
“끄륵! 끅!”
혀가 잘리고 이제는 숨마저 제대로 쉴 수 없는 그렌의 입에서 헛된 신음이 흘러 나왔다.
《아…안 돼…!》
그렌의 생기가 천천히 사라진다. 아무리 막대한 마력이 있더라도 꺼져가는 생명까지 잡아주진 못했다.
《아…아이…네… 살…려…!》
그렌이 루벨라를 향해 손을 뻗는다. 루벨라의 성법이라면 이 정도의 부상 정도는 금방 치료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루벨라는 일절 미동도 없었다. 그렌을 향하는 서늘한 시선이 지금 그녀의 마음을 대변하고 있었다.
《이럴… 순… 없…어…!》
우우우웅!
그렌이 다시 한번 마력을 모았다. 그러나 이번에도 지크의 마력이 그것들을 전부 없앴다.
발악이라도 하듯 그렌은 목구멍의 상처를 마력으로 틀어막으려 했지만, 그것조차 지크는 방해했다.
점점 죽음이 다가온다. 기나긴 삶의 종착점.
《나…난….》
그의 몸에 생기가 점점 사라진다.
《완벽한… 삶…을….》
그렌의 말이 제대로 알아들을 수 없을 정도로 뭉개졌다. 이미 언어를 구사할 정도의 마력 제어조차 불가능해진 것이다.
그렌이 발악을 하며 만들어내던 마력의 덩어리도 물리력으로 전환되지 못하고 뭉쳐지기 위해 한 점을 중심으로 빙글빙글 돌다 그대로 흩어지길 반복했다.
그가 마력의 제어를 상실하고 있다는 뚜렷한 증거였다.
“…그륵! 그르륵…!”
그의 입에서 나오는 신음조차 천천히 사그라졌다.
그리고 어느 순간, 그렌의 모든 움직임이 멎었다.
스으윽!
그렌의 곁을 머물던 막대한 마력들도 서서히 사라지기 시작해서, 어느 순간 자취를 감추었다.
시간을 되돌리고 사람들을 절망에 빠뜨려 자신이 가고 싶은 영광의 길의 제물로 만들었던 이기적인 자는 그렇게 최후를 맞았다.
루벨라가 지크의 옆으로 걸어왔다.
“끝났나요?”
“그래요.”
지크는 그렌의 시체를 뒤로하고 몸을 돌렸다.
“시체는 어떻게 할 건가?”
윌위스가 물었다.
“별 관심 없습니다. 여기다 두면 알아서 없어지지 않겠습니까? 동물에게 먹히든 그대로 썩어가든 시간이 해결해 주겠죠.”
“하긴, 저 녀석이 한 짓을 생각하면 장례를 치러주는 것 자체가 사치니까 말일세.”
“그냥 호수 속에 처넣으면 되지 않아?”
레오나가 의견을 말했지만 루벨라가 바로 반대했다.
“그건 밸리드 놈들의 장례 방법이에요. 그 벌레들의 장례대로 시체를 처리해줄 필요는 절대로 없어요.”
“이놈은 밸리드를 이용하려 했을 뿐 밸리드는 아닙니다만, 성녀님께서 그러시다면 그 방법은 쓰지 않도록 하죠.”
그렌의 시체 처리 따위로 루벨라의 기분을 상하게 할 필요는 전혀 없었다.
“나도 그냥 해 본 말이니까 상관은 없는데, 그렇다면 적어도 여기서 시체를 치워야 하지 않아? 섬의 상태를 보면 이곳도 곧 물에 잠길 것 같은데.”
마지막까지 지크와 그렌의 전투가 있었던지라 그렌의 시체가 있는 곳은 이미 수면보다 지대가 한참 낮아져 있었다.
호수와 가까운 곳의 구덩이들을 먼저 메우느라 아직 호수 물이 여기까지 침범하진 못하고 있었지만, 구덩이를 둘러싼, 중심부보다 높은 테두리 부분도 호수 표면보다 높이가 낮았기에 호수 물이 여기까지 넘치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높은 지대로 옮길까요.”
틸이 당장이라도 그렌의 시체를 짐짝처럼 짊어질 것처럼 나섰다.
“굳이 그렇게 수고를 들일 필요가 있겠나. 어쨌든 물 아래로 잠기지만 않으면 되는 거 아닌가.”
콰아아앙!
윌위스가 커다란 화염구를 만들어 그렌의 시체에 던졌다.
높은 온도에 그렌의 몸이 급속도로 타들어갔다. 그의 몸이 한 줌의 재로 변하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그토록 오랜 시간을 존재해온 그렌의 몸이라고 생각하면 더더욱 짧은 시간이었다.
휘이이잉!
불이 꺼지자 윌위스는 바람을 일으켰다. 작은 돌풍이 그렌의 잔해를 하늘 높이 띄워 올렸다.
“됐지?”
“깔끔하게 처리됐네요.”
밸리드의 장례식과는 전혀 다른 윌위스의 방식에 루벨라가 무척 만족스러움을 표했다.
그렇게 그렌은 시체조차 남기지 못하고 완전히 세상에서 사라졌다.
“그럼 이제 전부 끝났군.”
윌위스는 주변을 둘러봤다.
섬의 모습은 정말로 처참했다.
그렌과의 전투로 섬의 2/3 정도가 수몰됐다.
섬 중앙에 하늘을 찌를 듯 서 있던 탑은 섬과 얕은 수면에 늘어진 잔해만이 그 증거로서 존재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섬을 뒤덮고 있는 몬스터들의 시체.
그나마 섬 지면에 대기하고 있던 몬스터들은 시체라도 어느 정도 남겼지, 탑 안에 있던 울텔의 부하들과 몬스터들은 시체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었다.
“그래요! 밸리드의 수장도 그 협력자도 부하들과 몬스터들도 모조리 사라졌어요! 우리의 승리예요!”
루벨라가 두 손을 활짝 펼치며 외쳤다.
“…그래, 이겼구나.”
슬슬 승리의 실감이 드는지 레오나의 얼굴도 환해졌다. 다만 틸은 못내 찝찝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최후에 우리가 한 일은 얼마 없는 것 같긴 합니다만….”
“그런 거 일일이 신경 쓰지 마. 우리가 논 것도 아니고. 충분히 제 몫을 했잖아.”
“물론입니다. 여러분은 충분히 자신의 역할을 다하셨습니다.”
“저 봐, 지크도 저렇게 말하잖아.”
레오나와 지크가 그를 두둔한 후에야 틸은 표정을 조금 풀었다.
“그럼 이제 돌아가죠! 더 이상 밸리드가 거점으로 쓰던 이 더러운 곳에 있을 필요는 없으니까요. 가서 나머지 잔당들을 쓸어버려요! 그리고 밸리드를 완전히 박살 낸 이 기쁜 소식을 전 세계에 알리는 거예요!”
“성녀의 말대로 하는 게 좋겠네. 나도 슬슬 따뜻한 잠자리에서 자고 싶거든. 나이가 들면 노숙을 할 때마다 관절이 아파서 말이야.”
“관리를 안 해서 그래.”
“하여간 저 엘프는…!”
여유가 생기자마자 다투려는 둘에게 지크가 말했다.
“아무래도 저는 따로 가야 할 것 같습니다.”
“음?”
“무슨 소리야?”
윌위스와 레오나는 물론이고 루벨라와 틸도 의문에 찬 시선을 보냈다.
지크는 조용히 대답했다.
“만나봐야 할 사람이 있거든요.”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