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92화
《뭐…어…어어어어…어…?》
지크의 예상대로 그렌은 지크의 말을 똑똑히 들었다.
당연히 분노했다. 그의 감정에 동조하듯 주변 마력도 섬뜩하게 물결쳤다.
그러나 지금의 지크에겐 봄날에 불어오는 산들바람 정도의 존재감 정도밖에 되지 못했다. 그의 얼굴이 무척 평온하다.
그렌은 더더욱 분노했다. 자신의 이 압도적인 힘 앞에서 잔뜩 긴장해야 할 지크가 너무도 여유롭지 않은가.
그렌은 다시 한번 마력을 일으켰다. 조금 전 그의 공격이 모조리 지크에게 막히고 오히려 지크의 공격이 그를 기겁하게 만들었지만, 그는 그걸 전부 우연이라고 생각했다.
《내… 내… 공격이… 막히는… 건… 있을… 수… 없어…!》
후웅!
또다시 막대한 마력이 하늘 위에서 쏟아진다. 안 그래도 주저앉은 섬을 더더욱 호수 밑으로 처박아 버릴 수 있는 공격.
하지만 지크의 검은 이번에도 그것들을 깔끔히 동강냈다.
《우…아…아아아아…!》
그렌이 기괴한 비명을 질러대며 무차별적으로 마력 덩어리들을 던진다.
지크는 그것들조차 수월하게 잘라내 갔다.
탓!
지면을 박찬다. 지크의 몸이 솟구쳤다.
살벌한 마력의 비를 정면으로 분쇄해가며 그는 그렌을 향해 계속 치솟았다.
꽈아아앙!
특대의 마력 덩어리를 베었다. 이번에는 그렌이 나름 공을 들여 만든 것이라서 그런지 확실히 손에 둔탁한 반동이 느껴졌다.
그러나 그뿐. 그렌의 공격은 지크에게 상처를 만들지 못했다.
오히려 지크의 반격에 그렌은 마력의 벽을 몇십 몇백 겹을 세워 자신을 보호해야 했다.
지크가 다가올수록 그렌도 지크가 다루는 마력을 어느 정도 파악할 수 있었다.
정말로 열받게도 지크가 다루는 힘이 자신의 것과 같다는 것을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진정한 용사의 각성으로 얻은 이 신비롭고 찬란한 힘을, 지크가 똑같이 사용한다는 것에 그렌은 절로 욕설이 터져 나왔다.
하지만 그렌을 더욱 분노로 몰아넣는 건 다른 이유였다.
《내… 내 마력이… 더… 마…많은…데… 왜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애!》
그렌이 울부짖었다. 마치 자신의 뜻대로 되지 않는 장난감을 내팽개치며 빽빽 울어대는 아기 같다. 물론 아기 특유의 귀여움 따윈 전혀 없었다.
하지만 그가 징징대는 이유를 파악하는 데는 무리가 없었다.
그렌의 말처럼 지크도 윈두르를 통해 엄청난 마력을 공급받고 있었지만, 아무래도 그렌이 휘감고 있는 것보다는 손색이 있었다. 그것도 굉장히.
그러나 결과는 보이는 그대로 지크가 그렌을 압도하고 있었다.
“마력만 많으면 뭘 하냐! 그걸 제대로 써먹지를 못하는데!”
꽝!
자신 앞을 가로막는, 현기증이 날 것 같은 마력 벽의 향연을 향해 지크가 윈두르를 휘둘렀다.
마력 벽의 일부가 그대로 작살났다.
“그런 마력을 고작 이렇게밖에 사용할 수 없다고? 네놈의 재능 없음에 역으로 감탄이 나올 정도다!”
주어지는 마력을 세련되게 다듬어 손발처럼 사용하고 있는 지크와 달리 그렌은 무식하다는 표현이 딱 들어맞을 정도로 아무렇게나 마력을 휘두르고 있었다.
아니, 그 정도면 그렌이 마력에 휘둘리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물론 제대로 다룰 수 있든 없든 그 양이 정신 나간 수준이었기에 지금까지는 압도적으로 지크 일행을 유린할 수 있었지만, 지금은 지크도 충분히 많은 양의 마력을 사용할 수 있지 않은가.
《아…냐…. 나… 용사…!》
“용사고 나발이고 제대로 못 쓰고 있다니까!”
꽈아아아앙!
던진 마력 덩어리든 세운 마력 벽이든 무차별적으로 베고 찢고 부수며 돌진해오는 지크의 모습에 그렌의 얼굴에도 슬슬 초조함이 깃들었다.
그는 지금의 상황을 타개하기 위한 방법을 찾으려 주변을 둘러봤다.
《아…!》
그렌이 지크를 향해 엄청난 수의 마력 덩어리를 내던졌다.
살벌한 공격이었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지크의 시야를 가리기 위한 미끼에 지나지 않았다.
후웅!
그렌의 몸이 아래로 떨어져 내렸다.
‘뭐지?’
혹시 동료들을 인질로 삼으려는 건가? 지금 그렌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생각되는 건 그 정도가 다였다.
하지만 아니었다. 지크는 그렌이 향하는 곳에서 반짝이는 검 한 자루를 발견할 수 있었다.
‘에스텔레이드.’
아까 윈두르를 잡기 전 그가 놓친 것이었다.
설마 지금의 차이가 들고 있는 검 때문이라고 생각하는 것일까. 지크는 그렌의 단순함에 혀를 찼다.
‘하긴, 그 외에 뚜렷한 해결 방안이 있는 것도 아닐 테니.’
그리고 분명 에스텔레이드는 좋은 검이다. 그렌의 전력 상승에 확실한 도움이 될 터.
그러나 지크는 그렌이 에스텔레이드를 줍는 것에 아무런 감흥이 없었다.
‘그래도 저거 한스한테 빌린 건데, 멀쩡히 돌려주긴 해야지.’
딱 그 정도의 생각뿐이었다.
덥석!
그렌이 에스텔레이드를 쥐었다. 에스텔레이드의 검신에서 빛이 새어나왔다.
《아…아하…아하하하…하하하하하하…! 들린…다… 들려…!》
예전 지크에 의해 회귀 능력을 잃은 이후 그렌은 에스텔레이드를 들지 못했다.
애초에 자격도 없으면서 에스텔레이드를 사용할 수 있었던 이유가 브뤼셀 시스템의 등록자라는 이유 때문이었으니 당연했다.
하지만 지금, 막대하게 공급받는 세계수의 마력으로 인해 그는 에스텔레이드를 다시 거머쥘 수 있었다.
《역시… 내가…내…가 용사야…!》
그렌은 연신 에스텔레이드의 검신에서 빛을 뿜어내며 희열에 차 외쳤다.
조금 전까지 상당히 떨어졌던 자신감이 다시금 차올랐다. 어떤 이라도 쉽게 고꾸라뜨릴 수 있을 것만 같았다.
처음 세계수의 마력이 공급됐을 때의 전능감이 치솟았다.
《지…크… 모어…. 죽어…!》
에스텔레이드의 검신에 빛이 모여든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지크의 손에 들려 환하게 빛나던 에스텔레이드의 빛이 전 사용자에게 이빨을 드러냈다.
그렌이 에스텔레이드를 휘둘렀다. 새하얀 빛이 하늘을 향해 솟았다.
그 찬란한 광경을 그렌은 황홀하게 바라봤다.
마력은 그가 압도적으로 위. 거기에 이제 에스텔레이드라는 용사의 검이 자신의 손에 들어왔다.
어느 모로 봐도 자신이 질 이유가 없다. 이 한 번의 공격으로 지크를 죽일 수 있다는 생각은 하지 않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 피해는 입힐 수 있을 것이다.
아무리 못해도 갑자기 날아든 강맹한 공격에 허둥대는 꼴은 피할 수 없음이 분명하다.
그랬을 터다. 그랬을 터인데….
《…왜…?》
그렌이 멍청하게 되뇌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곧 그의 피맺힌 절규가 울려 퍼졌다.
《왜…왜…왜 멀, 멀, 멀쩡한… 거야…! 지크 모어어어어어어!》
날아든 빛을 말 그대로 짓밟아버린 지크의 태연한 모습이 마력을 이용한 감각 기관에 선명하게 잡혔다.
그렌의 절규에 지크가 답했다.
“네 공격이 약해서.”
《너…너…너어어어어…어어어어어!》
“거 참, 말도 제대로 못 하는 놈이 떽떽대긴 더럽게 떽떽대네.”
지크는 가볍게 윈두르를 휘둘렀다. 거대한 마력이 깔끔하게 제련되어 쏟아진다.
그렌이 이를 악물고 에스텔레이드를 휘둘렀다. 그러나 에스텔레이드의 빛은 조잡하고 엉성했다.
꽝! 꽝! 꽝!
《끅!》
에스텔레이드의 빛을 사정없이 깨뜨린 윈두르의 검기가 쏟아지자 그렌은 허둥지둥 공격을 막고 피했다.
지크에게 기대했던 추한 모습을 바로 그 자신이 하고 있었다.
“아하하하하! 데굴데굴 굴러다니는 게 딱 벌레 그 자체잖아!”
“아아아아아악…!”
마력이 아닌 자신의 목소리로 울부짖는 그렌.
《나… 용사… 용사가… 돼…야…아아아아!》
“용사라….”
중얼거리는 그렌에게 지크는 이번엔 꽤 진지하게 물었다.
“어이, 그렌 제너드. 넌 용사가 되는 게 목표지?”
《나… 이미… 용사…아아아….》
“그래그래. 이미 용사가 됐다고 치자. 그럼 그 이후엔 뭘 할 거냐?”
에스텔레이드를 휘두르던 그렌의 움직임이 멈췄다.
《요, 용사가 될….》
“그러니까 넌 이미 용사라며. 그 이후에 뭘 할 거냐고. 생각해둔 게 있을 거 아냐. 커다란 제국을 세워 세계를 지배할 거라거나 미녀들에게 둘러싸여 문란한 생활을 보낼 거라거나 아니면 조용히 고향에 은거해서 여생을 보낼 거라거나. 무척이나 사소한 것도 좋고 비웃음당할 만큼 허황돼도 좋으니까 뭐라도 알려줘 봐. 용사가 된 이후에 뭘 하려 했는지.”
《…….》
그렌은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못 했다. 지금껏 그의 머릿속에 용사 이후의 세계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아는 가장 강한 인간인 지크를 마왕화시켜 멋지게 퇴치한다.
그러면 그는 그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지금껏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최고의 영웅이 될 것이다. 그것이 목표였다. 그것이 바로 완벽한 삶이었다.
하지만 그 이후라니.
지크를 쓰러뜨리는 데까지 이어지는 길은 온갖 계획과 음모를 버무려 선명한 이미지로 그렌의 머릿속에 존재했다.
그러나 지크를 쓰러뜨린 이후의 미래는, 마치 이 세상에서 가장 짙은 검은색으로 물들인 장막으로 덮어버린 듯 생각나지 않았다.
《…용사가… 될 거…야….》
그렌이 중얼거렸다. 그가 텅 빈 눈구멍을 지크에게 향했다.
《용사가… 될 거야….》
“…하긴, 이제 와서 해 봐야 의미 없는 질문이었군. 미안하다. 이번엔 내가 바보 같았어.”
지크는 시원스레 사과를 했다.
이미, 아니, 꽤 예전부터 제정신이 아닌 놈에게 이런 상식적인 질문 따위가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지크 자신의 말대로 바보 같은 짓 이상이 아니었다.
콰아앙!
전투가 재개됐다.
그렌은 거친 고함을 내지르며 빛을 쏘아댔다.
지크도 윈두르를 휘둘러 맞섰다. 그렌의, 엉성하게 마력만 잔뜩 주입된 빛이 사정없이 깨어진다.
《마…마왕… 죽여…어어어어….》
“지금은 네놈이 마왕이다. 이 내가 용사고.”
《아니…야아아아아….》
그렌의 공세는 엄청났다. 그도 더 이상 뒤가 없다는 걸 느끼고 있는 것일까.
그러나 재능의 차이는 너무도 무정했다.
그렌이 사용하는 마력의 1/10이나 될까 싶은 마력으로도 지크는 그렌의 공격을 계속 파훼했다.
콰직!
그렌이 앞에 만들어 둔 마력 벽이 연신 깨어져 나간다. 악착같이 마력 벽을 더 만들었지만 그가 만드는 것보다도 지크가 부수는 속도가 더욱 빨랐다.
결국 그렌의 마력 벽에 한계가 왔다.
콰앙!
《으…으으으…!》
지크의 공격이 그렌 최후의 방벽인 몸을 두르고 있는 결계에 부딪쳤다.
그렌의 몸이 확 튕겨나갔다. 다른 방벽보다 훨씬 단단한 몸 위의 결계 덕에 그의 몸에 상처는 없었다.
그러나 그것도 오래가지 않았다.
쾅! 쾅! 쾅! 콰아앙!
“아아악!”
그렌의 어깻죽지에서 피가 확 튀었다.
《으…으아아아아…!》
그렌이 마구잡이로 에스텔레이드를 휘둘렀다. 그러나 궁지에 몰려 아무렇게나 휘두르는 공격에 지크가 당할 리 없었다.
서걱!
《끄아악!》
그렌의 오른팔이 잘려나갔다. 동시에 오른팔로 쥐고 있던 에스텔레이드 또한 땅바닥에 뒹굴었다.
“어차! 이건 잊지 말고 챙겨야지.”
지크는 에스텔레이드를 주웠다. 마치 다시 지크의 손으로 돌아와 반갑다는 것처럼 에스텔레이드가 검신을 반짝였다.
《내… 내 거…야…! 내…내…놔…!》
“웃기고 있네. 이건 한스 거야.”
지크는 코웃음 치며 그렌의 다리를 박살 냈다. 또다시 비명을 지르며 그렌이 쓰러졌다.
《으…아아아아아…!》
최후의 발악을 하듯 그렌이 엄청난 마력 덩어리를 난사한다.
그러나 지크는 그 모든 것을 깨트리고 그렌의 옆구리를 베어냈다.
“끄어어어…!”
땅바닥에 쓰러진 그렌이 벌레처럼 뒹군다.
지크는 그에게 다가가 가슴을 발로 짓밟았다. 그렌이 숨이 막혀 켁켁거렸다.
누가 봐도 승부가 난 상황. 남은 건 그렌의 숨통을 끊는 것뿐이다.
“그러고 보니 지금 네게 해 줄 이야기가 있었지.”
지크는 그렌을 향해 윈두르를 겨눴다.
그리고 그답지 않게 엄숙하고 진지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다음에 태어난다면 부디 착한 일을 하는 사람이 되도록 하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