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91화 (591/628)

제591화

라일라와 함께 있을 저 검이 어째서 전장 한복판에 나타난 걸까.

라일라가 깨어났다는 증거일까? 그렇다면 어떻게 저 검을 여기로 보낸 걸까. 혹시 라일라도 근처에 있는 게 아닐까?

순식간에 여러 생각이 머릿속을 스쳤지만 지크의 몸은 이미 머리와는 달리 움직이고 있었다.

“잠깐만 시간을 벌어주세요!”

“음!”

다짜고짜 한 요구에도 묵묵히 받아주는 틸의 짧지만 믿음직한 대답을 뒤로하고 지크는 앞으로 튀어나갔다.

그렌도 윈두르에 신경이 쓰이는 듯 시선 아니, 얼굴을 그것 쪽으로 향했다. 물론 공격은 여전히 행하고 있었다.

《…저… 검….》

그렌이 얼굴을 찌푸렸다.

윈두르의 너무나 특색 있는 외형은 잊어버릴 수가 없었다.

이번 시간선에서 지크에게 들려 몇 번이나 자신을 몰아넣은 검.

그리고 지금, 지크가 그 검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위협을 느끼진 않았다. 그렌도 난데없이 튀어나온 윈두르가 좋은 검이라는 건 알고 있다. 어쩌면 에스텔레이드나 토르니움보다 더 좋은 검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지금 그의 힘은 검 하나 바꿔 든다고 어떻게 대적할 수 있는 수준의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지크가 원하는 바를 이루게 해주고 싶지도 않았다.

그렌의 공격이 지크에게 집중되기 시작했다.

쾅! 쾅! 쾅!

에스텔레이드의 빛이 그렌의 마력과 맞부딪친다.

하지만 대부분의 승리는 그렌의 마력에 돌아갔다. 지크의 몸에 점점 상처가 늘어갔다.

하지만 지크는 즉사할 수 있는 부위와 달릴 수 없게 만드는 부위의 공격만 집중적으로 쳐내면서 윈두르를 향해 나아갔다.

엄청난 의지와 정신력.

그러나 지크라고 해도 물리적 한계까지 벗어던질 수는 없다. 그의 발걸음이 천천히 느려진다.

하지만 그는 포기하지 않고 한 걸음 한 걸음 나아갔다.

콰앙!

머리로 날아오는 공격을 쳐내려 지크가 에스텔레이드를 휘두르려 할 때, 공격이 갑자기 사라졌다.

“가십시오!”

어느새 다가온 틸이 지크의 뒤를 받치고 있었다. 그도 지크처럼 온몸이 상처투성이였다.

하지만 지크는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그러지 않아도 그가 얼마나 심한 부상을 입고 있는지는 뻔히 예상됐다.

그리고 벽 두 개가 모두 사라진 나머지 일행이 지금 그렌의 공격에 어떤 꼴을 당하고 있을지도.

감사함도 표하지 않았다. 지금은 그럴 때가 아니다. 입을 열어 감사의 말을 내뱉고 고개를 숙이는 그 짧은 시간조차 걸음을 내딛는 데 사용해야 한다.

저벅!

세 걸음이 남았다. 여전히 그렌의 마력 폭격은 진행 중이었다.

무릎으로 날아오는 공격을 막아낸다. 뒤에서 날아오는 공격은 틸이 막아줬다.

저벅!

두 걸음 앞. 틸의 신음성이 귀를 간지럽힌다. 레오나의 비명이 들린 것도 같다. 윌위스와 루벨라의 상태도 분명 좋지 않으리라.

저벅!

나머지 한 걸음. 이미 주변은 그렌의 마력 폭격으로 엉망진창이 된 상태. 흙먼지가 너무도 짙게 일어 시야조차 제대로 잡히지 않는다.

하지만 윈두르만큼은 뚜렷이 느껴졌다.

카앙!

결국 에스텔레이드가 튕겨져 나갔다.

아무리 지크가 검이 없어도 강자라 하지만, 그렌 같은 규격 외의 괴물을 상대하는 데 에스텔레이드의 아니, 검의 도움 없이는 힘들다.

지크에게 마력이 떨어져 내린다. 얼마 안 되어 지크의 온몸이 꿰뚫리는 상황이 그림처럼 그려졌다.

아무리 지크라도 그런 꼴이 되어서까지 살아날 수는 없다.

지크가 윈두르를 잡은 건 바로 그때였다.

우우우우우웅!

오랜만에 잡은 주인이 반가운 듯 윈두르가 미친 듯이 울어댔다.

지크는 그렌의 공격을 막아내기 위해 윈두르에 마력을 집어넣으려 했다.

하지만 그 전, 역으로 윈두르에서 미친 듯이 마력이 흘러들어 왔다.

꽈아아아아아앙!

그렌과의 전투가 시작된 후 처음으로 그렌의 공격이 모조리 튕겨나갔다.

마력 덩어리들은 섬의 해안가와 호수, 하늘로 멀찍이 사라졌다.

그렌의 공격이 멈췄다. 갑작스러운 상황에 당황한 모양이다.

가지고 놀던 장난감이 갑자기 예상 이상의 힘으로 반항을 했으니 놀랄 만도 했다. 하지만 놀랐다고 공격을 멈추다니.

‘역시 저놈은 글렀어.’

포션을 꿀꺽꿀꺽 마시며 지크는 생각했다.

몇 병의 포션을 더 꺼내 몸 전체에 뿌린다.

그러며 지크는 그렌의 공격에 울퉁불퉁해진 지형을 넘어 틸에게 다가갔다.

틸의 몸은 처참했다. 온몸에 구멍이 뚫리고, 왼쪽 팔은 어디론가 날아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다행히 숨은 붙어 있었다.

지크는 그에게 포션을 뿌렸다. 그의 부상이 급속도로 회복되어 갔다. 숨도 안정적으로 변했다.

“…지크… 님…?”

“고생했습니다. 지금은 좀 쉬어요.”

지크는 틸을 어깨에 둘러메고 나머지 일행 쪽으로 다가갔다.

그곳엔 루벨라가 성력으로 자신과 레오나, 윌위스를 치료하고 있었다.

루벨라의 압도적인 성력으로 대부분의 상처가 이미 치료된 그들이었지만, 온몸에 붙어 있는 핏자국과 찢어진 옷들이 그들이 어떤 꼴을 당했었는지 확연히 보여주고 있었다.

《뭐…야…. 뭐야…. 뭐야아아아아아!》

그렌이 광분했다.

감히, 감히 자신의 공격을 막다니.

갑자기 생겨난 압도적인, 특별한, 위기에 빠진 용사가 각성할 법한 힘에 취해 있던 그렌은 분노했다.

영웅적으로 변한 자신의 공격에 결국 쓰러져야 하는 악당 따위가 반항을 한 것이다.

게다가 지크의 여유 있는 태도도 마음에 안 들었다.

마치 그도 이야기 속의 용사처럼 마지막에 멋진 각성을 한 것 같지 않은가.

아니, 이 구도라면 오히려 용사는 지크였다. 그렇다면 그렌 자신은 용사와 대적하다 결국 패배해 사라지는 악당이라는 뜻.

용납할 수 없었다. 절대 용납할 수 없었다.

우우우웅!

지금과는 비교가 되지 않은 거대한 마력 덩어리가 생성됐다.

족히 섬의 절반은 날려버릴 만한 규모다. 그것에 더해 그 마력을 압축시킨 후 회전력까지 가미했다.

지금까지의 마력 덩어리보다 분명 훨씬 강력한 공격.

《죽…어…!》

후웅!

마력 덩어리가 섬뜩한 파공음을 이끌며 날아온다.

지크도 마력 덩어리를 확인했다. 몸을 돌린 후 윈두르를 들어 올렸다.

강력한 마력이 확연히 지크의 몸을 감돌았다.

윈두르를 휘둘렀다. 단순한 휘두르기처럼 보이지만, 그 안엔 지크의 신묘한 기술들이 다수 섞여 있었다.

결과는 극명했다.

서걱!

직접적인 소리가 들리지는 않았지만 시각적인 이미지는 분명 그런 소리와 크게 다르지 않았다.

그렌의 공격은 정말로 깔끔이 두 동강 났다.

콰앙! 콰앙!

마력 반쪽은 섬기슭을 강타했고, 다른 반쪽은 호수 한가운데 처박혔다.

쏴아아아아!

섬기슭이 무너지며, 안 그래도 호수면보다 낮아져 있던 섬 안으로 호숫물이 말 그대로 물밀 듯이 밀려들어 왔다.

지크는 틸을 루벨라의 곁에 내려놨다. 루벨라가 급히 틸의 나머지 치료에 들어갔다.

지크의 시선이 물이 쏟아져 들어오는 섬기슭으로 향했다.

“이곳도 물이 찰 것 같습니다. 일단 호수면보다 높은 곳으로 가죠.”

“끙! 그래야겠군.”

윌위스가 너덜너덜해진 지팡이에 의지해 몸을 일으켰다.

“역시 성녀의 성법이 좋긴 하군. 요통이 씻은 듯이 사라졌어.”

“지금 베풀어드린 성법에 그런 기능은 없는데요.”

“그보다 너 얼마 전까지 요통은커녕 어디 아픈 데 하나 없이 정정하다고 맨날 떠들고 다녔잖아.”

레오나가 망가진 활을 새 걸로 교체하며 기가 막혀 했다.

“그랬나? 역시 나이가 들면 기억력이 떨어져서 큰일이야. 혹시 치매가 아닌가 걱정까지 되는군.”

“멀쩡한 곳을 아프다고 착각하는 치매가 있어?”

“있을지도 모르지.”

둘이 대화를 나누는 사이 부상을 회복한 틸이 일어섰다.

“괜찮습니까?”

“성녀님의 성력으로 모두 회복됐습니다. 구해주셔서 감사합니다.”

“애초에 틸 씨가 먼저 도와주지 않았습니까. 그리고 같은 파티인 이상 동료의 목숨을 구하는 건 당연한 거죠.”

지크는 답지 않게 혀가 조금 매끄럽지 않다는 걸 느꼈다.

동료의 목숨을 구하는 게 당연하다니. 지크 모어라면 상상도 못 할 소름끼치는 말이다.

하지만 그러면서도 자신의 입에서 그런 말이 나왔다는 게, 이젠 신기하기까지 했다.

“그럼그럼. 동료끼리 돕는 건 당연하지.”

“꼭 무리한 부탁을 하기 전에 명분을 다지는 듯한 말씀이시군요.”

“이거 참, 지크 군이 내게 그렇게 불신감을 가지다니. 내 인생이 헛된 것처럼 느껴져 슬프구먼.”

“그런 생각 전혀 없는 주제에 엄살 피우지 마.”

“하여간 이래서 철딱서니 없는 놈에게 농담을 하면 안 된다니까.”

“농담이 재미가 있었다면 나도 그저 웃고 말았겠지.”

레오나의 빈정거림을 흘리고 윌위스는 지크의 윈두르를 쳐다봤다.

“그래, 그게 자네의 ‘믿는 구석’이었나?”

“구체적인 건 몰랐습니다만 예, 맞습니다.”

“예전에 자네가 사용하던 검이지?”

“그렇죠.”

대답을 하던 지크가 뒤로 검을 휘둘렀다.

서걱! 서걱! 서걱!

그들을 노리던 마력 덩어리가 아까와 똑같이 반으로 갈려 호수로 떨어졌다. 그걸 보며 윌위스는 고개를 끄덕였다.

“뭐였는지 모르지만 효과는 확실하군.”

“여러분은 조금 떨어진 곳에 기다려 주시기 바랍니다. 지금부터 저 주제도 모르는 용사 병신에게 교육을 좀 해 줘야겠거든요.”

“안 그래도 요 며칠 늙은 몸에 무리하느라 몸이 좀 안 좋긴 했어. 좋은 거 먹으면서 푹 쉬어야겠네.”

그렇게 말한 윌위스가 레오나를 바라봤다.

“이번엔 뭐라 안 하느냐?”

“내가 뭐 네 말에 무조건 시비 거는 엘프인 줄 알아?”

“아니었단 말이냐?”

“헛소리 그만하고 움직일 거면 빨리 움직여. 슬슬 물이 들어차잖아.”

들어온 호수 물이 어느새 그들의 발밑 아래로 넘실댔다.

지크를 뺀 일행은 천천히 아직 호수면 아래까지 주저앉지 않은 땅으로 걸음을 옮겼다.

얼마 전 위기에 빠진 자들답지 않게 그들의 행동은 여유로웠다.

실력이 있는 만큼 그들도 안 것이다.

지금의 지크는 절대로 그렌 제너드에게 밀리지 않는다는 걸.

“자리 좋은 곳에서 구경할 테니 열심히 두드려 패게나.”

“열심히 해, 지크!”

“지크 님의 그 특성을 저 빌어먹을 벌레에게 유감없이 발휘하길 바라요!”

“…힘내십시오.”

일행에게 손을 한 번 흔들어주고 지크는 몸을 돌렸다.

서걱!

날아온 마력 덩어리를 이번에도 가볍게 가른다.

지크는 그렌을 올려다봤다. 그는 시뻘게진 얼굴로 씩씩 대고 있었다.

《왜…! 왜 안 죽…어어어어…어어어!》

“네가 너무 약하니까.”

쿠웅!

지크가 검을 허공에 찔렀다. 가벼워 보이는 행동. 하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달랐다.

퍼어어엉!

《아아악!》

뾰족하게 날아간 지크의 마력이 그렌의 방어 대다수를 뚫어버리고 그렌을 가격했다.

몸 위에 걸치고 있는 마력 갑옷은 부수지 못한 듯, 그의 몸에 직접적인 외상은 없었다.

하지만 처음으로 그렌의 목에서 비명 소리가 나왔다.

저 비명 소리를 들으니 스트레스가 싹 풀리는 것 같다.

지크는 빙글빙글 웃었다. 라일라가 봤다면 또 한 사람 멘탈을 갈아 버리려는 표정이라며 혀를 찰 그 표정이었다.

《이…이이이이익!》

그렌이 지크를 향해 마력 덩어리를 마구잡이로 집어던졌다.

지금까지 지크 일행은 저 공격에 그저 웅크린 채 방어만 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의 지크는 달랐다. 그의 팔이 움직이며 윈두르가 움직였다. 평소보다 훨씬 더 빠르고 강력하게.

엄청난 수의 검기가 하늘로 솟아 마력 덩어리와 충돌했다.

그리고 단 하나의 예외도 없이 마력 덩어리를 모두 두 동강냈다.

그 모습을 보고 잠시 얼이 빠졌던 그렌이 급히 방어 준비를 갖췄다.

펼쳐진 마력의 벽을 검기가 찢고 가르고 부순다. 이번에도 간신히 그렌은 지크의 검기를 막아냈다.

그러나 두 사람이 전력 차이는 이미 뚜렷했다.

지크는 싱글싱글 웃으며 나직이 내뱉었다. 그렌이 들을 수 있을 거라 믿어 의심치 않으며.

“잠깐의 희망은 달콤했어?”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