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회귀한 마왕은 착하게 산다-590화 (590/628)

제590화

라일라는 제어 장치를 한 번 쓸어 내렸다.

“혹시 도움이 필요하신가요, 스승님?”

그녀의 뒤를 쫄래쫄래 따라다니던 엘레나가 물었다.

“아니, 괜찮아. 너도 힘들 테니 쉬렴.”

라일라는 윈두르를 들어 보였다. 나뭇가지 같이 여러 갈래로 뻗어 있는 날들 중 하나의 날 끝이 깨져 있다.

라일라는 다른 손에 든, 엘레나로부터 받아 든 운명의 열쇠를 그 날 끝에 끼웠다.

스으윽!

조각 나 있었다는 것이 거짓말이라도 되는 양, 운명을 비트는 열쇠는 그 어떤 흔적 하나 없이 윈두르의 일부로 변했다.

“아….”

“저거 윈두르의 일부였구나.”

옆에서 일행이 신기하듯 바라봤다.

윈두르를 단단히 손에 쥔 라일라는 다른 손으로 제어 장치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역시 마력이 제멋대로 움직이고 있어서 장치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아.’

엘레나와 일행들이 자신을 깨운 것 자체도 무척이나 대단한 일이었다.

이제 이 장치엔 가치가 없다. 라일라는 망설임 없이 장치에서 손을 뗐다. 그녀는 몸을 돌려 세계수가 있는 곳으로 향했다.

세계수는 언제나 그랬듯 용암 한가운에 떠 있는 섬에 뿌리를 내리고 웅장하게 서 있었다.

그 거대함에 본능적으로 경외감이 들 만도 하건만, 세계수를 보는 라일라의 눈은 어디까지나 냉정했다.

라일라는 몸을 띄웠다. 그리고 섬을 향해 내려가기 시작했다.

“어떻게, 따라갈 거야?”

스녹이 물었다. 엘레나는 조금 고민했다. 하지만 결과는 나와 있었다.

“아니, 스승님의 일을 방해할 순 없지. 그냥 여기서 지켜볼래.”

“그래.”

일행은 낭떠러지 앞에 모여서 아래를 내려다봤다.

라일라는 곧 섬에 내려앉았다.

용암의 열기가 훅 끼쳐온다. 일반인이라면 바로 피부는 물론이고 내부 장기까지 익어서 사망에 이를 정도의 온도다.

라일라는 마법으로 엷은 결계를 몸 위에 덮었다.

그녀는 세계수를 일견한 뒤, 윈두르를 이용해 세계수를 중심으로 한 마법진을 섬에 그리기 시작했다.

하나의 선을 그릴 때도 최선을 다한다. 마법 문자를 새길 때는 획의 기울기조차 조절한다.

그녀의 이마에서 땀이 흘렀다. 꽤 오랫동안 신체를 움직이지 않은 터라 그녀의 몸은 꽤 약해져 있었다. 하지만 그녀는 묵묵히 계속 움직였다.

“도와드려야 하나.”

한스가 중얼거렸다.

“문자의 기울기 하나하나에도 의미가 있는 게 마법진이에요. 그리고 저건 스승님이 아니라면 못 그려요.”

“아는 마법진이야?”

“전혀요. 멀어서 잘 보이진 않지만, 그래도 윤곽 정도로 어떤 종류의 마법진인지는 추측이 가능하거든요. 그런데 저런 형태는 처음 봐요. 분명 머릿속에서 즉흥적으로 생각, 조합해서 그리시는 걸 거예요.”

“…저걸?”

엘레나와는 달리 한스는 눈에 마력을 집중해 라일라가 그리고 있는 마법진을 정확하게 볼 수 있었다.

복잡하면서도 정교하다.

한스로는 몇 날 며칠을 배워도 마법진은커녕 마법진 안에 들어가는 마법 문자 하나도 제대로 그릴 수 없을 게 분명했다.

한데 저걸 즉흥적으로 그리고 있다니.

‘괜히 지크 님이 당신과 동급의 천재라고 하신 게 아니라니까.’

마지막 문자를 새겨 넣는 걸 끝으로 마법진이 완성됐다.

그녀는 혹시 틀린 곳이 없나 다시 한번 꼼꼼히 확인했다.

턱까지 흘러내린 땀을 한 번 닦고 세계수 곁으로 향했다. 세계수의 거대한 몸체가 그녀의 시야를 모두 가렸다.

손을 세계수에 올렸다. 맥동하는 세계수의 마력이 느껴진다. 느끼는 것만으로도 숨이 막히는 압도적이고 강렬한 마력.

우웅!

윈두르가 반응했다. 자신의 본체와 만난 것이 반가운 것일까. 맑은 공명음을 토해냈다.

세계수 또한 약하게 진동했다.

라일라는 윈두르에 마력을 흘려보냈다. 동시에 세계수에도 마력을 흘렸다.

윈두르는 라일라의 마력을 부드럽게 받아들였지만, 세계수는 라일라의 마력을 거세게 튕겨냈다.

라일라는 한 번 더 마력을 집어넣었다. 여전한 반발. 그녀의 입이 열렸다.

“자유를 원하지?”

윈두르를 들어 올려 세계수에 접촉시킨다. 그녀는 시선이 윈두르에 닿았다.

“알아. 아직 브뤼셀 시스템의 영향 때문에 네 의지대로 움직이지 못한다는 걸. 저 장치는 저렇게까지 망가졌는데도 불구하고 여전히 널 놓지 않고 있지.”

브뤼셀 시스템은 세계수의 확보를 최우선으로 설계됐기에 일어난 일이었다.

“회귀의 부작용 때문에 그렌에게 일방적으로 마력을 착취당하고 있기도 하고.”

타앙!

세계수의 안으로 집어넣은 마력이 다시 튕겨나갔다. 그녀의 손에서 피가 흐른다.

하지만 그녀는 다시 한번 세계수에 손을 댔다.

“하지만 네가 정말로 자유를 원한다면, 그 오랜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면 힘을 빌려 줘. 많은 걸 바라지는 않아. 어차피 그렌은 네 마력을 모두 품지 못해. 어디까지나 극히 일부일 뿐, 대부분을 아깝게 방출하고 있잖아.”

기분 탓일까. 다시 튕겨나가긴 하지만 그녀의 마력이 조금은 더 버틴 느낌이 들었다.

“내가 도와줄게.”

라일라가 윈두르를 거꾸로 들어 지면에 꽂았다.

그곳엔 이미 텅 빈 동그라미가 마법진의 일부로서 그려져 있었다. 마치 윈두르를 위해 만들어진 공간 같다.

우우우웅!

라일라의 마력이 윈두르를 타고 흘러나가 마법진에 공급됐다.

“그 방출된 마력의 일부만 지크에게 건네주면 돼. 그러면 나머지는 그가 알아서 해줄 거야.”

이번에 들어간 마력은 방해받지 않았다.

우웅!

세계수가 작게 진동했다. 마치 그녀에게 ‘정말로 그렇게 생각하냐’고 묻는 것 같다.

라일라는 환하게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당연하지. 너도 그를 봐왔으니 알잖아? 본인은 아마 질색을 하겠지만 그는 우리들의 영웅이니까.”

덥석!

마치 그녀의 손을 잡듯, 세계수의 마력이 그녀의 마력과 연결됐다. 동시에 윈두르와 마법진에 거대한 공명이 일었다.

* * *

콰앙!

“크윽!”

“윽!”

그렌의 파상적인 공격은 가장 먼저 전위인 지크와 틸에게 향했다.

실력과 경험으로 둘은 그렌의 공격을 막아내는 벽의 역할을 성공적으로 해냈다.

그러나 언제 무너질지 불안한 것도 사실이었다.

우웅!

뒤에서 다시 루벨라의 성법이 펼쳐졌다.

채 막아내지 못한 여파로 몸에 새겨진 상처가 급속도로 회복됐다.

그사이 윌위스의 주문이 완성됐다.

콰아아아아앙!

인페르노.

지크조차 혀를 내두른 그 마법이 다시 펼쳐졌다.

이 마법엔 그래도 경계심을 가지는 듯, 그렌이 대응 자세를 취했다. 하지만 레오나의 화살이 계속 그를 방해했다.

후웅!

그렌이 마력을 뾰족한 창처럼 만들어 날렸다. 목표는 레오나였다.

하지만 레오나는 아랑곳 않고 묵묵히 계속 화살을 날려댔다.

콰앙!

마력의 창이 지크의 검에 걸려 사라졌다.

“동료라고 지껄이더니 태연하게 죽을 만한 공격을 하고 있네, 저놈.”

“동료 아니라니까!”

레오나가 핀잔을 줬다.

그사이 인페르노가 그렌을 가격했다.

콰아아앙!

“됐어!”

윌위스가 주먹을 불끈 쥐었다.

“예전에 자네에겐 빈틈을 찔렸지만 이번엔 다를 걸세!”

윌위스가 지크를 향해 눈을 찡긋햇다. 목소리에 자신감이 넘쳤다. 그럴 만도 했다.

예전 지크에게 파훼된 것이 충격이었던 듯, 지금의 인페르노는 지크가 회귀 전 본 완성형에 못지않았다.

‘근데 회귀 전에도 내가 힘으로 깨버렸잖아.’

과연 단순 마력만은 지크보다 월등한 그렌에게 통할 것인지.

지크의 우려는 적중했다.

꽈아아앙!

“…뭐!”

윌위스가 경악성을 내질렀다. 딱 회귀 전에 지크가 인페르노를 깨부쉈을 때 보인 그 표정이었다.

얼굴은 많이 다르지만, 지크는 그와 마도의 마왕이 동일 인물임을 새삼 느꼈다.

윌위스의 뒤에서 레오나가 담담하게 내뱉었다.

“깨졌네?”

“…허, 참 대단한 녀석이로군. 적어도 어느 정도 상처는 입힐 줄 알았거늘.”

한탄을 하면서도 윌위스는 다시 다음 마법을 준비했다. 빠른 회복이다.

회귀 전 지크가 인페르노를 깨뜨렸을 때도 소스라치게 경악을 할지언정 바로 다음 대응을 하던 그다.

‘경험을 무시할 수가 없지.’

아마 순간적인 판단력은 지크를 제외한다면 그가 최고일 것이다.

그렌의 공격은 계속됐다. 지크 일행도 서서히 한계에 몰렸다.

《죽어…! 죽…어…!》

공중에 떠 있는 그렌의 광소가 들린다.

《지, 지, 지…크…. 너만… 죽이…면… 다시… 내가…용…사…다…!》

“그렇다는군. 우리 지크 군을 저 녀석에게 던져주는 게 어떻겠느냐.”

거대한 얼음벽을 세워 마력을 막던 윌위스가 말했다.

“무슨 헛소리야? 던져주려면 너를 던져줘야지.”

“그 성능 좋은 긴 귀는 어따 두고 다니는 게냐? 지금 저 녀석이 지크 군을 콕 찍어 노리는 게 들리지 않으냐?”

《마, 마도…의 마왕도… 재난의 마…왕도 하, 한꺼번에….》

“그렇다는데? 너도 저 녀석의 목표에 포함된 모양이야.”

“지크 군은 당연히 지켜야지. 그 누가 소중한 파티원을 적에게 던져 준다는 게야. 그런 놈이 있으면 내가 먼저 불살라 버릴 테다.”

“뻔뻔함이 정도를 넘어서지 않았어?”

“쯧쯧. 너는 녀석이 동료 취급 한다고 여유가 넘치는구나.”

“누가 저런 놈 동료야!”

아직 저런 여유 있는 대화를 나눌 정도는 되지만 그게 얼마나 갈까.

“지크 군. 이건 심각하게 말하는 건데 이런 식으로 가면 얼마 버티지 못할 걸세. 성녀의 성력이 고갈될 때가 한계 시간이 될 게야.”

그리고 그들은 이미 울텔 및 울텔의 부하들과 며칠에 이르는 사투를 벌인 직후다. 여유 마력 및 성력은 확실히 줄어 있었다.

“자네의 그 ‘믿는 구석’은 언제쯤 오는 겐가?”

“아쉽게도 저도 잘 모릅니다.”

라일라와 소통할 수 있는 운명을 비트는 열쇠는 이미 한스 일행에게 넘긴 상황.

“오는 건 확실한 게지?”

“물론이죠.”

단 한 점의 망설임도 없이 지크는 단언했다.

그의 단언에 자신감을 얻은 것일까.

윌위스는 물론이고 다른 일행들도 다시 힘을 내기 시작했다.

그러나 전력의 차이가 너무도 컸다.

콰앙!

너덜너덜해진 루벨라의 결계를 그렌의 마력이 뚫었다. 급히 틸이 그 마력을 막아섰지만 조금 늦었다.

“악!”

레오나의 팔에 커다란 구멍이 뚫렸다. 피가 넘쳐흘렀다.

상처는 루벨라의 성력으로 금방 회복됐다. 레오나도 아무렇지 않은 듯 다시 활을 들었다.

그런 경우가 증가하고 있었다.

퍼어엉!

또 다른 마력 덩어리가 방어를 뚫었다. 그것은 루벨라 쪽으로 향하고 있었다.

회복계는 최우선 보호 대상이다. 지크는 에스텔레이드로 그 마력을 요격했다.

콰직!

다행히 시간은 늦지 않아 마력은 허공에서 분쇄됐다.

하지만 그 때문에 지크 자신의 방어가 소홀해졌다.

퍼억!

“큭!”

빈틈 사이를 비집고 들어온 마력이 지크의 옆구리에 구멍을 냈다.

괜찮다. 이 정도면 충분히 버틸 수 있는 상처다. 그리고 곧 루벨라가 치료도 해줄 것이다.

지크의 생각대로 그의 상처가 급속도로 아물었다.

그는 다시 바로 다른 마력 덩어리를 쳐냈다.

검이 점점 무거워지고 있다. 정신력이 약한 이라면 미래를 포기하고 절망에 울부짖을 것 같다.

그러나 지크는 믿음을 놓지 않았다.

‘섬에도 문제가 생겼을 가능성이 있지만, 녀석들이라면 잘해 줄 거다.’

그들은 성공적으로 라일라를 부활시키고, 라일라는 분명 그에게 도움을 가져다 줄 것이다. 그게 어떠한 것이든.

‘그때까지만 버티면 돼.’

의지를 불태우며 지크가 다시 한번 에스텔레이드를 휘두를 때였다.

키잉!

날카로운 소리가 뇌리를 흔들었다. 귀로 들리는 소리가 아니다. 일종의 마력 진동.

허공에서 갑자기 어떤 거대한 존재감이 나타났다.

그것은 그렌의 마력을 찢어버리며 대지에 내리꽂혔다.

모두의 시선이 그것에 쏠렸다. 지크도 마찬가지.

갑자기 나타난 그 물건은 그에게 너무도 익숙한 물건이었다.

“윈두르.”

우웅!

마치 대답이라도 하듯 윈두르가 짧게 진동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