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9화
한스와 라라가 마력을 토르니움에 주입하기 시작했다.
우우우웅!
토르니움이 특유의 광폭한 소음을 냈다. 탈수 직전의 사람이 간신히 찾은 물을 들이켜듯 둘의 마력을 빨아들인다.
토르니움은 그 마력을 거칠게 증폭시켜 둘의 의지에 따라 노웸의 몸으로 보냈다.
크륵!
노웸의 몸이 꿈틀거렸다. 급류처럼 몰려오는 마력을 환수의 힘을 이용해 천천히 전환한다.
원래 남의 마력을 몸 안에 받아들여 저장할 순 없다. 자기 뜻대로 사용할 수도 없다. 그게 가능하다면 타고난 마력량을 그다지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을 것이다.
그건 환수인 노웸도 마찬가지.
하지만 적어도 자신의 몸에 들어온 마력을 대지 속성으로 변환시켜 밖으로 내보낼 순 있었다.
그렇게 노웸은 자신이 얼굴을 괴고 있는 스녹에게 대지의 속성으로 변한 마력을 보냈다.
아무리 친숙한 대지의 마력으로 변했다지만 스녹도 남의 마력을 다룰 순 없다.
환수의 계약자로서 계약 대상인 노웸의 마력은 충분히 자신의 힘으로 다룰 수 있지만, 지금 들어오는 마력은 애초에 노웸의 것이 아니다.
몸 밖으로 방출한 순간 남의 마력은 그 어떤 현상도 일으키지 못하고 허공에 스며들어 사라질 것이다.
그러나 이번에 마력을 주입할 곳은 브뤼셀 시스템의 제어 장치.
장치는 그게 어떤 마력이든 착실히 반응한다. 그리고 한 번 장치에 주입된 마력은 속성의 친화성으로 스녹이 충분히 조종할 수 있었다.
“천천히 따라와.”
“알았어.”
엘레나의 마력이 세계수의 마력 일부를 툭툭 건드린다.
그러나 세계수의 마력은 미동도 없이 여전히 날뛰었다. 마치 오리할콘이나 미스릴을 다 썩기 직전의 나뭇가지로 건드리는 것 같다.
“느껴져?”
“응.”
“일단 이쪽 마력을 진정시켜 안정적으로 흐르게 해야 해.”
“쉽지 않겠네.”
“그러니까 이 난리를 치는 거지.”
“좋아, 해보자.”
쿠웅!
스녹의 마력이 날뛰는 세계수의 마력을 억제하려 했다.
한스와 라라의 마력이 섞여 있어 엘레나의 것보다 훨씬 강한 그의 마력과 부딪치자 세계수의 마력이 약간 반응했다.
“한스 씨, 라라 씨. 마력을 조금 더 많이 부탁드릴게요!”
“알았어!”
“응!”
들어오는 마력이 늘어났다. 스녹은 그것으로 계속 세계수의 마력을 계속 내리눌렀다.
하지만 움직임이 조금 둔해졌을 뿐, 엘레나가 원하는 결과가 나오진 않았다.
스녹은 점점 더 출력을 올려갔다. 토르니움의 검명이 더욱 커졌다.
어느 순간, 세계수의 마력의 움직임이 멎었다.
“지금이야! 그 마력의 흐름을 이쪽으로!”
엘레나의 마력이 시스템의 통로를 이동한다.
스녹은 세계수의 마력을 엘레나의 마력이 움직인 쪽으로 이끌었다.
“좋아, 여기는 안정됐어! 그쪽 마력은 계속 제어하고 있어 줘.”
“알았어.”
스녹은 안정시킨 마력이 다시 날뛰지 않도록 일부의 마력을 남겨 계속 억누르면서 다시 엘레나의 마력을 쫓았다.
어마어마한 난도의 일이었지만 스녹은 능숙하게 해냈다. 엘레나가 스녹에게 이 일을 맡긴 이유였다.
“스녹!”
“응!”
스녹이 또 다른 세계수의 마력을 이끌기 시작했다.
“마력이 좀 더 필요해요!”
“맡겨 둬!”
노웸으로부터 공급되는 마력이 늘어났다. 마치 거친 야생마를 길들이려는 조련사처럼 스녹은 최대한 마력에 집중했다.
엘레나와 스녹은 계속 날뛰는 세계수의 마력들을 안정시켰다. 동시에 엘레나는 마력을 조율하며 장치의 제어를 진행했다.
두 사람의 이마에 땀이 흥건하게 맺혔다. 노웸이 날카로운 손톱이 달린 커다란 손에 한스가 꺼내준 수건 하나씩을 들고 두 사람의 땀을 조심스레 닦아줬다.
우웅!
장치가 가동되는 게 느껴진다. 아직 대부분의 세계수 마력은 제멋대로 날뛰고 있지만. 적어도 엘레나에게 필요한 기능이 작동될 수 있는 최저한의 안정적인 마력 흐름은 만들어냈다.
장치를 작동시킬 준비가 끝났다.
하지만 여전히 긴장을 늦출 수 없었다. 지금도 스녹이 간신히 자신의 마력으로 억누르고 있을 뿐, 만약 구속이 풀린다면 세계수의 마력은 다시 아까의 상태로 돌아갈 것이다.
시간도 별로 없다. 스녹의 호흡이 거칠어진 게 느껴진다.
한스도 라라도 노웸도 익숙하지 않은 마력의 운용에 피로가 스며들고 있었다. 솔직히 마력을 주고받는 이런 행위가 상식적이지 않은 일이다.
특히 스녹의 부담이 컸다.
그들의 여력이 다하기 전에 라일라를 부활시켜야 했다.
엘레나의 마력이 제어 장치 곳곳을 노닌다. 지금 상황은 무너지기 일 보 직전인 모래성에서 작업을 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작업에 들어간 이상, 여기서 잘못된다면 라일라의 기억이 모두 날아갈 것이다.
그녀가 태어난 후 이렇게 집중한 적이 있었던가.
오로지 운명을 비트는 열쇠에서 보내져 온 방법을 구현화하는 데 몰두할 뿐, 주변 상황은 완전히 인식의 밖으로 처박혔다.
그녀가 마지막 공정을 마쳤다
우우우우우우웅!
제어 장치가 크게 진동했다.
“후우우우!”
엘레나가 크게 숨을 내쉬며 털썩 주저앉았다.
“이제 그만둬도 돼요. 수고들 하셨어요.”
마력이 공급이 멈췄다. 약간의 진동음을 내던 제어 장치가 침묵했다.
“어때? 성공했어?”
그녀의 옆에 똑같이 주저앉으며 스녹이 물었다. 조그마한 형태로 돌아간 노웸이 얼른 자신의 지정석인 스녹의 어깨로 올라탔다.
“몰라. 일단 할 수 있는 건 다 했어. 나머지는 결과를 봐야 해.”
“성공 가능성은?”
“반반이에요.”
“반반이라….”
한스가 조용히 되뇌었다.
“결과는 언제나 돼야 알 수 있지?”
“저도 몰라요. 전 스승님이 가르쳐주신 대로 시스템을 조작했을 뿐이니까요. 하지만 성공했다면 그리 오래 걸리지 않을 거라고 말씀하셨….”
유적에 새로운 마력의 흐름이 느껴졌다.
“엘레나. 이 마력은 뭐야?”
“모르겠어.”
마력이 규칙적으로 재배열되기 시작한다.
그 양이 상당한 터라 일행은 긴장했다.
“혹시 라일라 님이 오시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다행이지만.”
하지만 혹시 모르는 일이기에 그들은 자신의 무기를 쥐고 사방을 경계했다.
마력의 흐름이 한쪽으로 쏠리기 시작했다.
“느껴지나요, 한스? 순간이동진이 있는 방이에요.”
“설마 적들이 다시 순간이동을 복구한 건 아니겠지?”
“그럴 리 없어요. 순간이동 마법을 유지시키는 마력을 잘라냈으니 탑에서 적이 넘어올 순 없어요. 스승님의 확언이 있었으니 절대 그건 아니에요.”
“그렇군.”
라일라의 보장이 있었다면 적어도 탑에서 넘어온 놈들은 아닐 것이다.
“하지만 누군가 순간이동으로 넘어오는 건 맞는 것 같은데요.”
쿠우!
마력을 끊었기에 순간이동은 불가능해졌다. 따라서 탑에서 넘어오는 적은 아니다.
한데 지금 누군가 그 순간이동 마법을 다시 구사하고 있다.
엘레나는 과연 그럴 사람이 누가 있을까 생각을 했다.
마력이 끊긴 순간이동진에 원격으로 마력을 불어넣고 진에 개입을 할 수 있는 실력자.
“스승님?”
역시 가장 먼저 떠오른 건 라일라였다.
스승일지 모른다는 생각에 엘레나가 바로 튀어 나가려 했다.
하지만 급히 그녀의 로브를 부여잡는 스녹에 의해 가로막혔다.
“진정해, 엘레나! 아직 정말로 라일라 님인지도 모르잖아!”
“하지만 이 정도의 말도 안 되는 일이 가능하리라 생각되는 사람은 스승님밖에 없어!”
“나도 그 가능성을 부정하는 건 아냐! 하지만 만에 하나라는 게 있잖아!”
“스녹의 말이 맞다. 조심해서 나쁠 건 없어.”
한스가 스녹의 의견에 힘을 실어주자 엘레나의 움직임이 멎었다.
“그렇다고 여기에 가만히 있자는 것도 아니다. 확인은 하되, 어디까지나 조심히 행동해야지.”
일행은 순간이동진이 설치된 방으로 향했다. 그들이 방에 도착한 순간, 마력의 움직임도 절정에 다다르고 있었다.
분명 한스 일행이 떠날 때 마력의 공급이 끊겨 빛을 잃고 있던 마법진이 환하게 빛을 뿜어내고 있었다.
일행은 긴장한 채 마법진을 노려봤다.
그들의 기대대로 라일라가 도착을 하느냐, 아니면 적들이 예상치 못한 방법을 써서 다시 넘어오기 시작한 것이냐.
그도 아니라면 전혀 새로운 존재의 등장이냐.
빛이 사라졌다. 마법진은 아까 떠날 때처럼 완전히 마력이 끊겨 침묵했다.
마법진 위로 사람 한 명이 보였다.
일행에게 무척이나 익숙한 사람이었다. 최근엔 보지 못했지만, 그들의 여행에 꾸준히 함께해 준 최강의 마법사.
라일라였다.
“…스승님?”
엘레나가 조심스럽게 그녀를 불렀다. 그녀의 눈이 가늘게 떨렸다.
당장이라도 스승과 해후의 인사를 나누고 싶었다. 뛰쳐나가 그녀를 꼭 안고 싶었다.
하지만 혹시 자신이 실패해 라일라가 기억을 잃은 것은 아닐까 하는 걱정이 그녀의 발목을 붙들었다.
자신을 타인처럼 보는 라일라의 눈빛이 상상되어 몸서리가 쳐졌다.
라일라가 그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엘레나는 라일라의 입가에 생긴 옅은 미소를 볼 수 있었다.
“오랜만이구나, 엘레나.”
그 말은, 엘레나는 물론이고 긴장 된 눈으로 둘을 보고 있던 다른 일행의 우려를 일거에 날려버리는 것이었다.
엘레나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하지만 그 얼굴엔 빛나는 미소가 피어올랐다.
“스승님!”
그녀가 쏜살같이 튀어나갔다. 라일라의 품에 와락 안겼다.
“그래, 그래. 고생했다, 고생했어.”
라일라는 엘레나의 등을 토닥여줬다.
다른 이들은 그 장면을 조용히 바라봤다.
그들도 라일라의 귀환이 반가운 건 마찬가지였지만, 사제 간의 해후를 나누는 순간을 방해하고 싶진 않았다.
라일라가 엘레나의 어깨를 잡고 그녀를 바로 세웠다.
“자, 엘레나. 회포는 나중에 실컷 풀자꾸나. 아직 할 일이 남았으니까.”
그녀는 엘레나를 데리고 다른 이들이 있는 곳으로 다가갔다.
“오랜만입니다, 라일라 님. 건강한 모습을 뵙게 되어 다행입니다.”
한스를 필두로 스녹과 라라도 라일라와 인사했다. 노웸도 짧은 앞다리를 들어 그녀를 반겼다.
“오랜만이야. 일단 밀린 얘기는 나중에 나누자. 지금은 지크 쪽이 급하니까.”
“그렌 제너드가 부활했단 이야기는 들었습니다.”
한스는 힐끗 라라 쪽을 바라봤다. 이제 완전히 그에 대한 미련을 끊어버린 듯 라라는 덤덤했다.
“나도 지크도 완전히 오산이었어. 설마 놈이 세계수의 마력을 끌어 쓰게 될 줄이야. 녀석의 집착을 얕본 거겠지. 아니, 그렇게 말하면 좀 억울한가? 그 인간이 아무리 집착 때문이라도 그 공포를 뛰어넘을 줄은 누구도 몰랐으니까.”
마지막의 말은 혼잣말에 가까웠다.
“아무튼 아무리 지크와 그 일행들이 대단하다고 해도 이대론 못 버텨. 세계수의 마력이란 그런 존재야. 오히려 지금까지 버틴 게 지크와 그 일행의 대단함을 보여주는 거지.”
“놈이 세계수의 마력을 쓰지 못하게 하실 건가요?”
“아쉽게도 그건 무리야. 녀석은 지금 너무도 세계수와 친숙해져 있어. 제어 장치로 어떻게 제어할 방도를 넘어설 정도로.”
“그럼 어떻게….”
라일라는 제어 장치 앞에 도달했다.
기억을 완전히 되찾은 지금, 무척이나 익숙한 장치였다.
“저쪽을 끊을 수 없다면 이쪽에 동등한 힘을 줘야지.”
“지크 님에게 세계수의 힘을 공급하실 생각입니까?”
“응.”
“그게 가능합니까?”
“원칙적으론 불가능해. 하지만 믿어 봐야지.”
라일라는 자신과 함께 다시 세상에 나온 윈두르를 내려다봤다.
“자유를 바라는 세계수의 의지를.”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