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6화
자신들도 선택을 할 권리가 있다는 걸 그렌의 귀에 대고 소리를 질러서 그 어처구니없는 정신머리에 박아주고 싶을 정도였다.
물론 자신이 막지 않을 시 둘 다 그렌의 동료가 된다는 걸 알고 있는 지크였지만, 둘의 정신건강을 위해 그에 대해서는 입을 다물었다.
누구도 행복하지 않은, 게다가 일어나지도 않은 현실을 왜 들먹인단 말인가.
지크는 그저 둘의 의견에 조용히 동조할 뿐이었다.
“저놈이 미친놈인 거야 놀랍지도 않은 일이잖아.”
“그래도 이런 쪽으로 미친놈일 줄은 몰랐단 말이야! 으, 소름끼쳐!”
마치 몸에 벌레라도 기어 다니는 듯 레오나가 자신의 몸을 긁었다. 루벨라도 오한을 느끼는 것처럼 몸을 떨었다.
그런 둘의 모습을 그렌도 본 모양이었다.
《아이네… 레오나….》
“제 이름을 부르고 있는데요.”
“내 이름도야.”
《내… 동…료… 왜… 악당의 곁…에….》
“지크 님의 말이 맞는 모양이네요.”
“지크가 틀렸다고 생각하진 않았지만, 이번만큼은 부디 틀렸으면 했어.”
둘이 혐오스러운 시선을 그렌에게 던진다.
그렌도 그걸 느낀 것일까. 그에게서 터져 나오는 마력이 더욱 강해졌다.
《악당을… 죽여야… 해….》
“그러니까 네가 악당이라고.”
“그만두죠, 레오나. 지금 저 작자에게 말이 통할 것 같지 않아요.”
《동료를… 구해야… 해…!》
“그래도 동료를 구한다는 기본적인 생각은 있나 보구먼.”
“동료 아니라니까!”
《저… 녀석들이 동료…라야 내가… 더… 빛…나… 내가 더… 위대해…져….》
“…그것도 아니었구먼.”
“…울텔은 그냥 나쁜 놈이라고 생각했지만 쟤는 완전 혐오스러워.”
“…제가 본 밸리드 벌레들 중에서도 정말 수위에 꼽힐 만한 인간이네요.”
“…용병들 중 온갖 미치광이가 다 있었어도 저런 작자는 없었는데.”
후우우우웅!
사방으로 휘날리는 마력이 안 그래도 내구력이 약해져 있는 탑을 부수기 시작했다.
《완벽한 인생을 만들어야 해!》
그렌의 손에 마력이 모여들었다.
“옵니다!”
지크가 에스텔레이드를 들고 앞으로 나섰다. 다른 일행도 각자의 무기를 들어 올리며 지크의 뒤를 받쳤다.
콰아아아아아앙!
거대한 굉음이 탑을 강타했다. 무너질 듯 무너질 듯 버티고 있던 탑의 숨통을 끊어버리는 충격이 터졌다.
쿠르르르르!
흙먼지와 함께 퍼진 붕괴음이 탑의 종말을 알렸다. 탑이 산산이 부서져 아래로 떨어져 내린다.
그건 섬에 있는 것들에겐 재앙 이외의 무엇도 아니었다.
콰앙! 콰앙! 콰아앙!
지면에 충돌한 파편들이 커다란 구덩이를 만들며 흙먼지를 뿜어낸다.
섬의 규모가 꽤 크긴 했지만, 탑도 무척이나 높았기에 섬 전체가 재앙의 영역권 안으로 삼켜지는 건 어렵지 않았다.
아직 섬에 남아 있던 몬스터 대부분이 막대한 질량에 짓이겨졌다.
당연히 탑의 붕괴는 탑 안에 있던 자들에게도 영향을 미쳤다. 그게 누구든 아무도 살아남지 못할 것 같다.
그러나 지크의 질문에 무언으로 긍정을 했듯, 지크 일행에게 탑의 붕괴는 별 위협이 되는 요소가 아니었다.
후웅!
떨어지는 파편들 사이로 틸의 모습이 보였다. 오로지 육체적 능력만을 키워온 그에게 추락을 막을 방법은 없었다.
그리고 본인 또한 막을 생각이 전혀 없었다.
지면이 빠르게 가까워 온다. 틸은 몸을 움직여 다리를 아래로 뻗었다.
쿠우웅!
그의 다리가 지면과 충돌했다.
발이 힘을 이기지 못하고 먼저 떨어져 있던 잔해를 파괴하며 움푹 들어간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였다.
그 어떤 부상도 없이 틸은 몸을 바로 세웠다.
그의 위로 새로운 파편들이 쏟아져 내린다. 틸은 검을 치켜세웠다.
후우웅!
마력을 휘감은 커다란 휘두르기.
콰아아아앙!
떨어지던 파편들이 일제히 분쇄되며 다른 곳으로 튕겨져 나갔다.
동시에 검을 휘두른 여파로 일어난 거센 폭풍에 흙먼지가 휩쓸려 나갔다.
곧 틸의 머리 위엔 다른 곳과 달리 새파란 하늘이 그대로 비쳤다.
대검을 어깨에 걸친 채 틸은 동료를 찾기 위해 주변을 살폈다.
탓! 탓! 탓!
굉음밖에 들리지 않을 이 공간에서 가벼운 뜀박질 소리가 들린다.
하늘에서 레오나가 떨어지는 파편들을 밟으며 사뿐히 내려오고 있었다.
과연 엘프. 저런 가벼운 몸놀림에는 자신이 없는 틸은 그녀를 보며 감탄했다.
탓!
마지막 착지하는 소리까지 가볍다. 레오나는 틸의 곁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다른 사람들은?”
“저도 찾고 있습니다.”
“그래. 무슨 일이 생겼을 리야 없지만 그래도 빨리 찾아보자. 지크와 루벨라도 멀지 않은 곳에 있을 거야.”
“귀염성 없는 엘프야. 누구 하나를 잊지 않았느냐.”
허공에서 비행 마법을 사용해 천천히 내려앉으며 윌위스가 레오나를 타박했다.
하지만 그녀는 콧방귀도 뀌지 않고 그의 말을 무시했다.
“지크는 둘째 치고 일단 루벨라를 일단 먼저 찾아야….”
용암 속에 던져놔도 멀쩡히 기어 올라올 것 같은 지크보다 아무래도 회복역이라 직접적 전투 능력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루벨라와 먼저 합류해야 했다.
문득 틸과 레오나가 동시에 위를 올려다봤다. 흙먼지를 뚫고 새하얀 구체 하나가 떨어져 내리고 있었다.
쿠우우웅!
구체가 큰 충돌음을 내며 지면에 충돌했다. 그 위로 탑의 파편이 우르르 쏟아져 내렸다.
하지만 빛의 구체를 뚫는 건 단 하나도 없었다.
번쩍!
구체에서 빛이 솟아 하늘까지 뻗었다. 빛에 닿은 파편들이 옆으로 튕겨나갔다.
안전을 확보한 후, 구체가 서서히 사라졌다. 안에서 루벨라의 모습이 드러났다.
옷에 묻은 흙먼지를 툭툭 털어내는 모습이 별다른 부상이 있는 것 같진 않았다.
“찾았군요, 성녀님.”
“그러네.”
동시에 영원히 떨어질 것 같은 파편의 낙하가 멈췄다.
섬 중앙에 오연히 서 있던 탑의 모습은 더 이상 없었다.
새파란 하늘 아래 지면을 덮은 흙먼지와 그 아래에 뒹굴고 있는 잔해만이 방금 전까지 서 있던 탑의 웅장함을 간접적으로 증명해 줄 뿐이었다.
하지만 다른 이들은 탑의 붕괴 따위엔 이미 관심이 없었다.
“…역시 걱정할 필요 없었구나.”
“카르위먼의 성녀라면 당연하지. 대대로 괴물들이 이어받는 게 카르위먼의 성녀 자리다. 게다가 이번 성녀는 훨씬 더 특출난 것 같고.”
“괴물이라뇨. 말씀이 너무 심하신 거 아닌가요?”
윌위스의 곁으로 걸어오며 루벨라가 투덜거렸다. 그러곤 일행을 슥 훑어봤다.
“지크 님은요?”
“몰라. 우리도 찾고 있어.”
“뭐, 걱정할 필요 있겠느냐. 그 지크 군인데 무슨 일이라고 있을라고. 당장 용사 병신 그놈과 싸우면서 등장하더라도 이상할 게….”
콰아아아앙!
“…탑주 관뒀댔지? 어디 가서 점집이나 차려보는 게 어때?”
“이 나이에 새로운 적성을 찾게 되다니. 너무 기뻐 오히려 당혹스럽군.”
저 하늘에서 연신 폭음이 들려온다.
마력의 거센 충돌이 지면까지 닿아 전투의 격렬함을 알렸다.
하늘에서 두 개의 인영이 충돌하고 있었다.
마치 하나의 태양이 더 떠 지상의 악을 단죄라도 하듯, 빛무리를 두른 채 연신 마력의 빛을 쏘아내고 있는 한 사람.
그리고 거대한 마력을 동원해 말 그대로 오직 힘으로만 밀어붙이는 또 다른 한 사람.
콰아아앙!
또 한 번 충돌이 일었다. 충격파가 호수에 닿아 거센 물결을 일으켰다.
“지크 군이 하늘도 날 수 있었나?”
“난다기보다는 강력한 마력으로 공중을 차서 이동하는 모양입니다.”
“자네도 할 수 있나?”
“하려면 할 수 있지만 저렇게 정교하게 움직이는 건 무리입니다.”
“여러모로 사람 놀라게 해주는 청년이야. 늘그막에 만난 인연으로서는 참 즐거워.”
“계속 그렇게 여유롭게 있어도 되는 거야? 아무리 봐도 지크가 밀리고 있는데?”
정말로 온갖 화려하고 정교한 기술로 그렌과 대적하고 있는 지크였지만, 상대의 마력이 너무도 압도적이었다.
그렌의 공격 한 방 한 방에 지크가 버거워하는 모습이 확연하게 보였다.
“당연히 두고 볼 수야 없지.”
윌위스는 지팡이에 마력을 주입했다. 그의 의지대로 조합된 마력이 곧 커다란 불덩이를 만들어냈다.
“자, 거리는 상당히 떨어져 있지만 모두 제 나름대로 지크 군을 도와줄 수단은 있을 걸세. 어서 지원을 하세나.”
“그 마법, 척 보기에도 화력과 범위가 엄청날 것 같은데 괜찮겠어? 지크도 휩쓸릴 수도 있어.”
“휩쓸려? 누가?”
“…미안. 말을 잘못했네.”
그 지크가 고작 아군의 마법에 휩쓸린다? 도저히 상상이 되지 않는다.
“저 녀석의 말대로 우리가 나름 적절한 판단으로 지원을 하는 이상 나머지는 지크 군이 알아서 할 걸세. 이래서 우수한 인재와 함께 움직이면 편한 법이지.”
지팡이가 하늘을 향했다. 동시에 불덩이도 움직였다.
그때, 지크는 한창 그렌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다.
콰아아아아아아아!
거대한 마력의 급류가 그렌의 손에서 뻗어 나왔다.
피하기에는 범위가 너무도 넓다. 지크는 발에 마력을 가득 집어넣어 허공을 걷어찼다.
동시에 에스텔레이드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에스텔레이드가 빛을 뿜었다.
퍼어엉!
지크의 검이 마력의 파도를 꿰뚫었다.
한 점에 집중된 힘에 파도에 구멍이 뚫렸다. 그 사이로 지크는 공격을 피했다.
하지만 그 뒤를 이어 연신 압도적인 마력들이 밀려들었다.
‘강해.’
무척이나 간단한 감상. 지금 그렌의 능력은 딱 그 한 단어로 정리할 수 있었다.
뭔가 움직임이 대단해진 건 아니다. 기술적 능력은 지크가 아는 그렌 제너드의 수준 딱 그 정도다. 오히려 단순해진 감조차 있었다.
문제는 마력.
‘마력으로 압도당한다라. 마력을 모두 해방한 이후에는 한 번도 해보지 못한 경험인데.’
하지만 지금 그가 밀리는 이유가 그것인 것도 사실이었다.
‘저 멍청한 놈이 제대로 사용하지 못하기에 망정이지, 조금만 더 제대로 사용했다면 이미 승부가 났을 거야.’
그 점에 한해서는 지크에게 무척 다행이었다.
그러나 이 상태로는 패배할 수밖에 없는 것도 명확하다.
‘대략적인 마력의 정체는 파악했어.’
피부 위로 느껴지는 소름끼치는 그렌의 마력에서, 그가 지금껏 느꼈던 세계수 분신들과 비슷한 느낌이 진하게 났다.
‘대략적인 상황은 짐작이 가.’
울텔은 그렌도 회귀의 한계를 넘었다고 했었다. 그리고 저 힘은 클로원의 마지막 황제도 가지고 있었던 것이라고도 했었다.
‘결국 회귀의 한계를 넘어 목적에 매몰된 후에도 회귀를 계속한다면 저 상태가 되는 거겠지.’
일종의 폭주라고 해야 할까. 오로지 머릿속에 목적밖에 없어진 게 한눈에 보였다.
하지만 그나마 이성적으로 생각을 하고 계획과 음모를 짜는 게 가능하던, 한계를 막 넘었던 이후와는 다르게 지금은 맹목적으로 자신의 희망 사항을 중얼거리며 무조건 힘만 써대고 있었다.
‘혹시 한계에 다다르기 전에 느낀다는 공포란 건 저 상태에 이르기 전 육감이 하는 일종의 경고일 수도 있겠어.’
하지만 지금 중요한 건 그렌이 완전히 돌아버린 것이냐 반만 돌아버린 것이냐 같은 것이 아니었다.
그렌이 휘두르고 있는 막대한 힘.
‘회귀를 거듭해 계속 세계수의 마력에 노출되어서 자연스레 세계수의 마력을 끌어다 쓸 수 있게 된 걸까.’
어쩌면 폭주하게 된 이유 자체도 저것 때문일지 몰랐다.
하지만 어디까지나 짐작일 뿐 확실한 건 아니다.
그리고 지금 중요한 건 더더욱 아니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