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5화
그렇다고 당장 전투를 앞두기라도 하듯 활발하게 움직이는 건 아니었다. 슬슬 걸음을 내디디려 하는 정도일까.
때문에 지크 일행도 그리 급하게 움직이려 하지 않았다.
“브뤼셀 시스템이란 뭔가?”
윌위스가 이런 질문을 할 정도의 여유는 있었다.
“그 외에 뭔가 호기심을 불러일으키는 단어가 몇 있었는데 말이야.”
“그게 뭐든 모르시는 게 좋습니다. 당신이라면 그 정체를 아는 순간 그게 꿈속에 아른거려서 잠을 못 주무실 테니까요.”
“그러니 더 궁금하지 않은가!”
윌위스가 닦달했지만 지크는 냉정히 고개를 저었다.
“그 어떤 것도 말씀드릴 수 없습니다. 그리고 그게 뭐든 곧 박살 나 사라질 테니 신경 쓸 필요도 없어요.”
저렇게 냉정히 잘라 말하니 윌위스도 더 이상 질문을 하지 못했다. 지크의 성격상 저 정도로 단호히 끊은 일에 두말을 할 리 없었던 것이다.
게다가 저런 반응을 보이는 걸 보니 정말로 심상치 않은 물건임에 분명했다.
호기심이란 것은 마법사에게는 무엇보다 중요한 것이지만, 이 세상에는 호기심을 발휘하지 말아야 할 곳도 있는 법.
노련한 마법사인 윌위스는 그걸 잘 알고 있었다. 때문에 더 이상 그 화제에 대해서는 입을 열지 않았다.
“그렇다면 저 반지는 어떤가? 저것도 알면 안 되는 것과 관련이 있는가?”
윌위스가 울텔이 끼고 있는 반지를 가리켰다.
“음….”
지크는 울텔의 손가락에서 반지를 빼냈다.
상당히 거친 손길이라 울텔의 손가락이 꺾일 수 없는 방향으로 꺾였지만 그것을 신경 쓰는 사람은 없었다.
‘아마도 윈두르의 예비이자 마이너판이 아닌가 싶은데….’
황제의 상징이 윈두르인 건 확실하다. 이 반지보다 권한이 적을 리 없다.
‘정말로 이 반지가 윈두르와 똑같은 권한을 가지고 있다면 놈이 다른 유적을 이미 찾아냈겠지.’
울텔은 지크가 가지고 있는 윈두르를 반지와 동등한 권한을 가지고 있는 녀석으로 오해했지만, 사실 반지는 윈두르와 비교될 수 있을 정도의 물건이 아니었다.
“아마 확인을 거쳐야겠지만, 이건 그렇게까지 중요하진 않을 겁니다. 나중에 드리죠.”
아마 탑이 무너지고 브뤼셀 시스템이 박살 나면 반지로 할 수 있는 것들은 없으리라.
그 정도면 윌위스의 연구 물품으로 던져줘도 위험은 없을 것이다.
그래도 혹시 모르니 라일라에게 한 번 정도는 보여줄 요량이었다.
“꼭 좀 부탁하네!”
드디어 이 신비의 유적에서 건질 물건을 하나 찾아냈다는 것에 윌위스가 크게 기뻐했다.
“아, 그래도 확인은 해야지. 혹시 이 반지에 관심 있는 이가 있나?”
일단 파티를 맺어 함께 타도한 울텔이니만큼 반지의 소유권을 윌위스가 일방적으로 차지할 순 없었다.
물론 그건 지크 또한 마찬가지지만, 이미 그에 대한 신뢰가 강한 파티원들은 지크가 먼저 반지를 알아본다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윌위스의 간절한 눈빛 때문인지 반지에 대한 소유권을 주장하는 이는 없었다. 그건 매일 윌위스와 투덕대는 레오나 또한 마찬가지였다.
“그렇다고 하네, 지크 군.”
“알겠습니다.”
윌위스는 무척 기뻐했다.
“좋아, 좋아. 그럼 어서 저 위의 놈을 해치우고 일을 끝내자고.”
일행은 다시 고개를 들었다. 약간 풀어졌던 일행의 긴장감이 다시 팽팽해졌다.
“본격적으로 움직이려는 모양입니다.”
틸이 경고를 했다. 감각이 예민한 이들은 모두 느꼈다. 그렌의 움직임이 점점 커지고 있었다.
“상대는 저 울텔과 부하들이 일방적으로 당할 정도로 강합니다. 아까 느껴졌던 마력의 반응도 심상치 않았죠. 우리들이 예전에 알던 그 그렌 제너드를 생각하면 안 될 겁니다.”
지크의 말에 누구 하나 할 것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탑의 진동도 더 강해지고 있어요.”
“무너지기까지 얼마 걸리지 않을 걸세.”
“전투가 시작되면 당장이라도 파괴될 것 같은데?”
“…전투에 확실한 방해가 될 겁니다.”
일행의 말대로 탑은 이제는 언제 무너져도 이상하지 않았다. 하지만 지크는 태연히 말했다.
“그래서 여기 있는 분들 중 위험을 느끼는 분이 계십니까?”
대답하는 이는 없었다.
“그럼 됐군요. 이제 올라가 봅시다. 우리의 친우 그렌 제너드가 얼마나 변했는지 확인해 봐야죠.”
* * *
이번에도 역시 지크가 뚫어 놓은 구멍을 통해 움직이던 일행은 올라가며 여러 시체들을 볼 수 있었다.
울텔과 동행했던 그의 부하들이었다.
그나마 멀쩡해 보이는 시신도 있었지만 대부분의 시신은 압도적인 힘에 갈기갈기 찢겨 있었다. 저들도 그렌 제너드에게 당한 것이리라.
그렇게 위로 올라가길 얼마, 일행은 드디어 그렌 제너드를 볼 수 있었다.
“심각하네.”
레오나가 그렌의 몸을 보고 눈살을 찌푸렸다.
온갖 고문을 당한 그렌의 몸은 누가 봐도 끔찍하기 이를 데 없었다.
레오나의 목소리를 들은 것일까. 그렌이 고개를 돌렸다. 안구 없이 텅 빈 눈이 지크 일행을 향했다.
“눈이 뽑혔군.”
“상태를 보아하니 고막도 손상된 것 같아요.”
“어라? 그럼 이상하잖아. 저 녀석, 분명 내 목소리에 반응하지 않았어?”
“소리를 감지할 순 있지만 아마 귀가 아닌 다른 수단으로 감지하고 있는 것 같아요.”
“상처를 보니 손목과 발목의 힘줄도 끊겼습니다. 용병 일을 할 때 저런 부상을 당해 은퇴한 이들이 꽤 있었죠.”
“보통 그러면 제대로 못 움직이지 않나? 한데 저 녀석은 꽤 자유롭게 움직이고 있는 것 같다만.”
“즉, 몸은 완전히 박살 났는데 다른 무언가로 인해 그 결손을 메꾸고 있단 소리군요.”
지크가 깔끔하게 정리했다.
“마력이겠지. 아까 느껴진 마력이라면 신체 일부의 기능 정도야 충분히 메꿀 수 있을 터이니. 한번 연구해보고 싶은 몸이로군.”
“인체 실험이라도 하게?”
“걱정 마라. 아무리 호기심이 강하더라도 인간을 버리면서까지 채우고 싶진 않으니까. 그게 아무리 극악무도한 놈이라고 하더라도 말이야.”
“그건 다행이네.”
윌위스와 레오나의 대화를 뒤로하고 지크는 그렌을 향해 한 걸음 내딛었다.
스으으.
그렌의 시선 아니, 텅 빈 구멍이 지크를 향했다.
‘눈으로 보는 것도 아닐 테고. 아마 주변 마력을 감지해 외부 정보를 받아들이는 걸 텐데 고개는 움직이는군.’
아마도 눈이 있었을 때의 버릇 때문일 것이다.
“어이, 그렌 제너드. 나 기억하냐?”
“…우…아….”
“혀도 잘렸군.”
정말로 철저하게 고문을 당한 모양이었다.
군데군데 심한 고문을 당했다고 하기에는 상처가 없는 깨끗한 피부도 존재하는 것을 보아하니, 죽겠다 싶으면 포션 따위를 이용해 치료한 후 다시 고문한 것 같았다.
소름이 끼칠 정도로 철저한 고문.
물론 동정심이 일어나는 일 따위는 없었다.
《지…크….》
“오, 재미있는 재주를 깨우쳤네.”
분명 입에서 나오는 언어는 발음이 완전히 뭉개져 알아들을 수 없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꽤 뚜렷한 언어가 귀를 울렸다.
“마력으로 소리를 만들고 있군.”
윌위스가 흥미롭게 중얼거렸다. 그에 비해 레오나는 얼굴을 찡그렸다.
“말이 들릴 때마다 느껴지는 마력이 굉장한데, 그걸 고작 목소리를 대체하는 데 사용하고 있다고?”
“마력의 양이란 상대적이지. 그만큼 녀석이 사용할 수 있는 마력이 많다는 뜻이다. 동시에 녀석이 그 막대한 마력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소리이기도 하고. 마력을 세밀하게 조종할 수 있다면 네 말대로 고작 목소리를 흉내 내는 데 저만한 마력을 쓸 필요가 없으니까.”
“하지만 마력량만은 진짜란 거지?”
“그래.”
지크도 언뜻언뜻 느껴지는 그렌의 마력을 살폈다.
‘양만은 나보다도 많은 게 확실하군.’
마력량만으로는 드래곤과도 비견되는 지크보다 많은 마력량이라니. 정말로 경악할 정도의 양이다.
“그래. 울텔을 처리한 것 같은데, 기분은 어때?”
《울…텔…?》
“정신은 온전치 못한가?”
지크는 조금 실망했다. 그렌이 제정신이어야 자신의 말에 팔딱팔딱 반응을 할 게 아닌가.
그러나 지크의 실망은 좀 일렀다.
《울텔… 울텔… 날 이용하고 고문한… 개자식!》
아무래도 기억은 또렷이 있고 감정도 어엿하게 동작하는 모양이다. 저 정도면 충분히 조롱할 수 있다.
《지크… 모어… 악당….》
“악당이라니. 그 무슨 섭섭한 말을. 지금 나는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용사님이라고. 오히려 악당은 너야. 더러운 밸리드의 끄나풀 그렌 제너드.”
《나, 난… 용사….》
“용사는 무슨 놈의. 끝났어, 인마. 네가 원하던 태양의 용사라는 이명은 한스가 가져갔고. 넌 그저 사람들의 미움을 받는 악당일 뿐이야.”
《그, 그럴 리… 없….》
“완벽한 인생을 원한다고 했지? 안됐네. 네가 원하는 완벽한 인생은 이미 끝났어. 네가 정말로 그렌 제너드라고 한다면 알 거 아냐?”
《아…아…아…냐….》
“아니긴 뭐가! 네놈이 끝난 건 사실…!”
《아…냐…아아아아아!》
우우우웅!
그렌의 몸에서 엄청난 마력이 뿜어져 나오기 시작했다. 아까부터 느껴지던 그 마력이다.
지크조차 안색이 살짝 굳었다.
틸이 지크의 옆으로 다가섰고, 윌위스와 레오나가 각각 지팡이와 활을 들었다. 루벨라도 지팡이를 들어 올렸다.
《지크으으으으! 악, 악, 악, 악다아아앙! 주, 주, 죽여야, 죽여야 해애애애!》
“그것참, 저런 꼴이 되고도 집착 한번 엄청나군. 저 녀석에게 뭐 원한 산 거라도 있나?”
“억울한 누명입니다. 오히려 제가 피해자죠. 저 녀석, 꿈이 세상을 구하는 용사인데, 그 최후의 적인 마왕 역할을 제게 맡기려고 했던 모양입니다.”
“음, 인선은 참 잘 짰다는 생각이 들긴 하다만, 그래도 저놈이 용사 운운할 능력이나 행적을 갖고 있진 않은 듯하이.”
“그래서 울텔과 제가 계속 말한 겁니다. 용사 병신이라고.”
《아, 아, 아, 아아아아아…! 마, 마, 마도의 마, 마와아아아앙!》
“저놈, 나를 보며 말하고 있군. 혹시 저놈이 나도 저가 쓰러뜨려야 할 적으로서 생각한 건가?”
“마도의 마왕이라더군요. 나름 이름은 괜찮죠? 당신의 아들을 끌어들여 음모를 꾸민 것도 다 당신을 타락시켜 마왕으로 만들려는 의도였습니다.”
“하! 그 빌어먹을 짓을 했던 이유가 고작 제 용사 놀이에 나를 끼어들게 하고 싶어서라고?”
“드웨인 님만이 아닙니다. 틸 씨도 마왕 후보 중 하나였습니다. 이른바 재난의 마왕이죠. 힘의 마왕이 될 저를 포함해 3마왕으로서 세상에 공포를 뿌리게 주변 상황을 조작하려 했습니다. 여러분이 당한 음모가 그 시작이었죠. 제가 전부 분질러 버렸지만요.”
《재, 재, 재, 재난의 마와, 와, 왕…!》
“저 보세요.”
“…불쾌하군요.”
그리 감정을 드러내지 않는 틸조차 몹시 기분 나빠하는 티를 냈다.
“3마왕이라. 만약 그 말대로 됐다면 정말 소름끼치네.”
자신들의 파티가 얼마나 강한지 레오나는 잘 알고 있었다.
지크는 말할 것도 없고 틸의 그 무시무시한 완력과 마력에서 나오는 파워는 그의 뒤에 있는데도 불구하고 가끔 소름이 돋을 때가 있다.
게다가 그녀와 티격태격하는 윌위스도 마법사로서 무척이나 뛰어났다.
나름 상당한 수준의 마법도 구사할 수 있는 그녀가 마법을 배제하고 활과 화살을 주로 사용하는 이유도 윌위스의 존재 때문이 아니었던가.
한데 저 셋이 마왕이 되어 세계를 휩쓴다?
‘정말로 어마어마한 피해가 일어날 거야.’
절로 고개가 저어지는 상상이었다.
“혹시 저희 둘도 뭐가 있나요?”
루벨라의 질문에 레오나도 혹시나 자신들도 마왕이나 그에 준하는 무언가가 될 음모가 있었나 지크의 태도를 살폈다.
그러나 돌아온 대답은 전혀 예상외의 것이었다.
“두 사람은 동료로 삼으려 했다는군요.”
“…다시 한번 말씀해 주시겠어요?”
“저 쓰레기가 뭘 하려 했다고?”
둘이 일제히 되물었다. 말의 내용은 달랐지만 표정만은 동일했다.
딱 벌레를 씹었다는 사실을 알게 된다면 저런 표정이 될 것이다.
“두 사람을 동료로 삼으려 했다고요.”
“미친놈이네요.”
“미친놈이네.”
이번엔 말의 내용까지 완전히 일치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