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4화
한계를 무시하고 계속 회귀를 시도하다, 결국 미쳐버려 제국을 말아먹어 버린 암군.
반란군과 공멸을 했다는 말만 듣고 별 신경을 쓰지 않았는데 아무래도 그에게도 뭔가 특별한 어떤 것이 있었던 모양이다.
“마지막 황제의 힘이라…. 그거 굉장한 것처럼 들리는데. 조금 더 자세히 말해 봐.”
“흐… 필요 없…다. 곧… 보게 될… 테니까.”
역시 울텔은 쉽사리 협조할 생각이 없는 모양이었다.
“마지막 황제. 내가 그놈에 대해 아는 거라곤 놈이 브뤼셀 시스템을 과용했다는 것뿐인데….”
머리를 굴리던 지크의 눈이 가늘어졌다.
“설마 그렌 제너드, 그놈도 한계를 넘은 건가?”
“크흐흐!”
“웃지 마, 인마!”
“끄아아아악!”
내장이 짓눌리는 고통에 울텔은 다시 비명을 질렀다.
“멍청한 놈. 너는 그런 낌새도 눈치 못 채고 뭐 했냐?”
“낌새는 없…었다. 그리고 나라도… 놈의 모든 걸 다 보진… 못했으니까.”
울텔은 헐떡이며 말을 내뱉었다.
“그래도 눈치 정도는 챘어야 하는 거 아냐. 놈이라면 공포에 길길이 날뛰었을 텐데. 그러고 보니 그냥 대충 훑어봤다고 했나?”
그렌이 회귀를 한두 번 한 것도 아닐 테니 그것을 일일이 보는 것만으로도 일일 터. 납득이 안 가는 것도 아니다.
하지만 그렌의 공포가 겉으로 많이 티가 났다면 충분히 눈치챌 수도 있었을 것이다.
“놈의 공포가 그리 크지 않았던 건가?”
“오산…이었지. 놈이라면… 바로 티가 날 거라고… 생각했는데. 헉! 헉!”
다시 증상이 심해졌는지 울텔의 호흡이 가빠졌다.
지크가 눈짓하자 루벨라가 다시 그 질색하는 표정을 지으며 울텔을 치료했다.
“한데 난 아직도 이해가 안 가. 그 놈이 그렇게 정신력이 높았나? 그 공포를 떨쳐낼 정도로?”
회귀라는 능력이 없으면 아무것도 못하는 게 그놈이 아니던가.
한데 클로원 제국의 역대 황제들도 단 한 명밖에 견디지 못했다는 걸 놈이 할 수 있을 줄이야.
“정신력이… 아니다.”
“그럼?”
“집착. 완벽한 삶에 대한… 상상도 못 할… 집착. 그렇게밖에… 생각할 수 없어.”
“…그래, 그렇다면 조금 이해가 가는군.”
원래 어떤 한 가지에 미친놈들은 평범한 사람들은 상상도 못 할 일을 버젓이 저지르기도 한다.
그걸 생각하면 그렌이 그 공포를 억눌렀다는 것에 설득력이 생긴다.
‘참 여러모로 대단한 녀석이긴 해.’
지크의 인정을 받는다는 엄청난 위업을 그렌은 마침내 해냈다.
물론 본인이 그 사실을 안다고 해서 그다지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래, 그 용사 병신의 집착이 대단하단 건 알겠어. 그럼 이제 그 마지막 황제의 힘이란 것과 네가 겪은 그 녀석의 힘에 대해 말해 봐.”
“말했을… 텐데. 알려줄… 생각 없다…아아아아아아아악!”
“에이, 그러지 말고. 내가 안마도 해줄 테니까 생각 좀 바꿔 봐. 어느 내장이 결려? 여기? 여기? 아니면 여기?”
“아아아아악! 끄아, 끄아아아아아악!”
“어이구, 그렇게 시원해? 그렇다면 조금 더 해드려야지. 내가 또 서비스가 죽이거든. 사양 말고 마음 편히 받으라고. 자자, 힘 빼고, 힘 빼고.”
“끄으으으으으! 어, 어떤 짓을 하더라도… 네놈의 이득이 될 짓은…하지 않아!”
울텔이 어디서 그런 기운이 나왔는지 거세게 소리쳤다. 하지만 지크가 다시 내장을 누르자 고래고래 비명을 질렀다.
그러나 그가 한 말이 빈말은 아니었던 듯, 그가 입을 여는 일은 없었다.
‘슬슬 관둘까.’
시간만 충분하다면 얼마든지 더 심문을 할 수 있다. 하지만 역시 그렌 제너드가 걸린다.
‘마지막 황제의 힘이라는 게 궁금하긴 하지만, 알 방도가 없는 것도 아니고.’
그에게는 라일라가 있지 않던가.
‘물론 당장 얻는 게 가장 좋겠지만.’
그렌과의 싸움이 바로 앞이다. 정보는 하나라도 더 많은 편이 좋다.
하지만 어쩔 수 없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지크는 울텔에게 더 이상의 정보를 뽑아내는 걸 포기했다. 그렇다면 남은 건 하나뿐이다.
원래는 순간이동이 중단됐다는 것을 확인하고 울텔이 절망에 빠졌을 때 이리저리 두들기며 한층 더 절망을 주다 죽일 생각이었지만, 그 계획은 어긋났다.
그렇다고 곱게 죽게 해줄 생각도 없다. 적어도 분노와 증오와 절망 속에 허우적대다가 죽게는 해줘야 할 거 아닌가.
“좋아, 울텔. 네 돌 같은 의지를 존중해서 그 용사 병신에 대한 것이든 아니면 그 외의 다른 것이든 묻는 건 그만두도록 할게.”
지크가 내장에서 손을 떼자 울텔은 숨을 헐떡이며 축 늘어졌다.
“생각해 보니까 네게 묻는 게 바보 같은 짓이긴 해. 제 꼭두각시조차 제대로 간수 못 하고 역습을 받아 죽게 생긴 멍청한 놈의 조언이라니. 손해가 되면 됐지 도움이 되리라곤 생각할 수 없는걸.”
얼굴을 바닥에 댄 채 고개만 조금 돌려 울텔이 지크를 올려다봤다.
“지금의 놈은… 예전과 다르…다. 네놈도 곧 내 꼴이… 될… 테지. 흐….”
마치 얼마 후의 지크의 모습을 상상이라도 하듯, 울텔은 고통에 뒤덮인 얼굴을 뒤틀어 일그러진 미소를 만들어냈다.
나름 지크를 조롱하는 것이다. 그러나 그런 면에서 울텔이 지크를 능가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그놈을 마음대로 부릴 수 있다고 착각해 선택한 놈은 너지. 아까 기억 나냐? 놈을 용사 병신이라고 열렬히 비웃었잖아. 그런데 결국 어떻게 됐지? 그 용사 병신에게 몸이 두 동강 나서 완벽한 벌레가 된 게 지금의 너네?”
울텔의 얼굴에서 일그러진 웃음이 사라졌다.
“그럼 너는 어떻게 불러야 하자? 용사 병신에게 당한 흑막 병신인가? 아, 병신에게 당한 놈이니 병신보다는 병병신이라고 칭하자. 흑막 병병신. 너에게 딱 어울리는 별칭 같아. 캬, 내가 이런 센스는 또 죽인다니까.”
“내가 말했… 듯… 너도 나와 똑같…은 꼴이…될… 거다!”
“전혀! 의심나면 한번 확인해 보든지.”
그러다 지크는 뭔가를 깨달은 것처럼 이마를 탁 쳤다.
“아, 넌 뒤져버릴 테니까 못 보지.”
지크는 상체를 숙여 울텔의 뺨을 툭툭 쳤다.
“그리 억울해하진 마라. 오래 살았잖아? 원래 네 능력은 보잘것없는 주제에 네 야망은 너무도 컸어. 사람은 주제를 알아야지. 너 같은 놈은 다 좋은데 그 주제 파악을 제대로 못해서 탈이라니까.”
“닥…쳐…!”
“지금까지 헛짓하느라 수고했어. 머리 좋은 척하더니 결국은 제가 키우던 개에게 물려 죽는군. 그림으로 그린 듯한 비참한 인생이야. 감상이 어때? 가르쳐줘. 이건 가르쳐줘도 되잖아. 기분 참 더러울 것 같은데. 나는 아무리 노력해도 도달할 수 없는 찌질한 최후라 호기심이 너무 난단 말이야.”
“닥…치라고 했…! 쿨럭! 쿨럭!”
울텔이 피를 토했다. 지크는 얼굴을 찡그리며 오물을 피하듯 튀는 피를 피했다.
“으갹! 찌질한 최후를 맞는 흑막 병병신의 피다! 맞았다간 나도 찌질해질지 몰라!”
“너! 너어어어…! 쿨럭! 쿨럭!”
울텔이 지크를 향해 손을 뻗었다. 하지만 그의 손은 지크에게 닿지 못 했다.
“아까는 벌레 흉내를 내다가 생선 흉내를 내더니 이번엔 다시 벌레 흉내냐? 하나만 해, 하나만. 벌레든 생선이든 네가 인간은커녕 웬만한 동물들보다도 떨어지는 건 잘 아니까 그렇게 ‘나는 인간과는 비교조차 할 수 없는 하찮은 놈이요!’ 하면서 격하게 주장을 할 필요 없어.”
“이 자시이이…!”
“아, 그만 건드리려고 해! 찌질함이 옮으면 어떻게 하려고 해!”
지크는 울텔에게서 크게 한 걸음 물러났다.
울텔은 지크를 잡으려는 듯이 상체만 남은 몸을 질질 끌었다. 그러나 그런 몸으로 지크를 잡을 수 있을 리 없었다.
“여러분도 좀 가지고 노시겠습니까?”
지크가 일행에게 물었다. 울텔에게 원한이 있는 건 그들도 마찬가지다.
“아니, 됐네.”
“괜찮으시겠습니까? 아드님에 대한 복수를 해야 하지 않습니까?”
“저놈이 저리 고통스러워하는 모습을 보는 것으로 충분하네. 솔직히 자네 이상으로 지금의 저 녀석을 괴롭히는 방법도 모르겠고.”
울분을 토하며 꿈틀대는 모습이 속이 후련했다.
다른 이들도 윌위스와 비슷한 생각을 가진 것인지 자신이 직접 복수를 하겠답시고 나서는 사람은 없었다.
“그럼 이만 죽이겠습니다.”
지크는 에스텔레이드를 뽑았다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다시 집어넣었다.
‘이 녀석에게 에스텔레이드는 너무 과분하지.’
그리고 마법 상자에서 검 한 자루를 꺼냈다. 평범한 검이었지만 사람의 목숨을 끊기에는 충분한 검이다.
날카로운 검날이 자신 앞에 드리워지자 울텔의 눈가가 파르르 떨렸다.
정말로 죽음이 코앞까지 다가온 것이다.
회귀라는 힘을 얻게 된 후 울텔은 자신의 죽음에 대한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죽음이란 끝이 아닌 재시작에 불과했으니까.
“왜, 사신의 낫이 목덜미까지 찾아오니까 이제야 겁이 나나?”
“웃…기지… 마….”
“그래?”
지크가 순간 검을 울텔의 얼굴 바로 앞까지 찔러 넣었다. 울텔의 몸이 크게 움찔거렸다.
“아니긴. 꼬랑지를 만 개도 지금의 너보다는 용감하겠는데. 아, 개에게 너무 모욕적이었나? 그럼 뭐에 비교를 한다.”
지크는 턱에 손을 대고 마치 고민에 빠진 것처럼 고개를 몇 번 갸웃거렸다.
“아, 그러고 보니 그 용사 병신이 있었지.”
지크는 울텔을 내려다봤다.
“그래그래. 이미 그 용사 병신이라는 비교 대상이 있는데 내가 왜 애먼 개를 들먹였는지. 네가 그 용사 병신보다 못한 놈이라는 건 이미 밝혀진 후였는데.”
“닥…쳐…!”
“부정하는 거야? 그러면 그놈한테 반격을 당해 그 꼴이 되지 말든가. 이미 멋지게 ‘나는 그렌 제너드보다 못한 놈입니다!’라고 증명을 했잖아.”
“이이이…!”
울텔이 이를 갈았다. 하지만 땅바닥에 뒹굴고 있는 이가 얼마나 위협이 될까. 본래의 상태로도 지크에게 위협을 주지 못한 그다.
지크가 검을 치켜들었다.
지금껏 조롱기를 가득 품고 있던 지크의 눈이 거짓말처럼 서늘해졌다. 욕설을 내뱉으려던 울텔의 입 또한 닫혔다.
끝을 내려는 것이다. 울텔에게 진정한 죽음이 달려오고 있었다.
“…기, 기다려….”
울텔이 중얼거렸다. 하지만 지크의 눈초리는 바뀌지 않았다.
그게 세계를 마음대로 주무른 흑막으로서의 자존심이든, 신앙심은 없다 하더라도 한 교단을 이끌던 교황으로서의 자부심이든, 아니면 자신을 몰락시킨 원인인 지크에 대한 반항심이든 울텔은 절대로 지크에게 목숨을 구걸할 생각이 없었다.
하지만 사신의 손길이 자신의 뺨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진 순간, 울텔의 입이 저도 모르게 열렸다.
“사, 살려…!”
울텔의 말은 계속 이어지지 않았다. 지크가 든 평범한 검이 울텔의 목을 갈랐다.
데구르르!
울텔의 머리가 바닥을 굴렀다. 공포에 물든 그의 얼굴이 멍하니 하늘을 쳐다봤다.
브뤼셀 시스템을 차지한 후, 그렌을 끌어들여 세상을 무수히 회귀시켜 장난감처럼 가지고 놀던 자의 최후였다.
“목숨 구걸이라니. 결국 그것밖에 안 되는 놈이었네요.”
루벨라가 울텔의 머리를 내려다보며 차갑게 말했다.
“놈을 조롱하려고 그렌 제너드보다 못한 놈이라고 했습니다만, 정말로 그럴지도 모르겠습니다. 적어도 놈보다 낫진 않을 겁니다.”
지크는 평범한 검을 다시 상자 안으로 집어넣었다.
“마지막에 저 녀석 마음이 꺾이지 않았어? 그렇다면 정보를 토해내게 만드는 게 좋지 않았으려나?”
“저런 놈은 일단 살려주면 또 머리를 굴릴 놈이야. 어떻게든 목숨을 보장받아야만 정보를 토해내려 하겠지. 물론 저 정도로 꺾였으니 고문을 하면 끌어낼 순 있겠다만….”
지크가 위를 쳐다봤다. 질문을 했던 레오나도 다른 이들도 지크의 시선을 따라 고개를 젖혔다.
“저놈을 처리해야 하니 그럴 시간이 없어.”
그렌의 기척이 조금씩 움직이기 시작했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