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3화
콰아아아아앙!
거대한 폭발음이 들려온다. 탑이 더욱 거세게 흔들렸다. 남은 로브들을 전부 지옥의 구석으로 처박고 위로 올라가던 지크 일행도 그것을 느꼈다.
“심상치 않은 일이 일어나는 건 확실한 것 같군.”
“뭐야, 겁먹은 거야? 마탑의 탑주까지 했었다면서 겁이 많네.”
“겁이 아니라 조심성이다. 용기와 만용은 구분해야지. 나이를 헛먹은 철없는 어떤 엘프는 모르겠지만 말이다.”
다행히 일행의 전투 의지가 꺾인 건 아닌 모양이다. 애초에 고작 이런 걸로 겁을 집어먹을 인간들이면 이곳까지 데려오지도 않았다.
하지만 우려가 되는 것도 사실이다.
“대체 뭘까요?”
레오나에게 업힌 루벨라가 위를 쳐다봤다. 하지만 보이는 건 균열이 가고 돌 부스러기들을 흘리고 있는 천장뿐, 아쉽게도 사건이 일어나고 있을 구역은 보이지 않았다.
“지금 추측해봤자 아무런 의미도 없습니다. 올라가서 상황을 봐야죠. 다만 그렌 제너드가 아닐까 하긴 합니다.”
“그 작자요?”
카르위먼 내부의 배신자들과 작당하고 명예 성기사의 칭호를 받아 마음껏 그 위세를 뒤집어쓰고 다닌 개자식. 그에 대한 루벨라의 인식이 좋을 리 없었다.
아니, 예전에 카르위먼의 명예 성기사랍시고 상당한 신뢰를 품고 있었으니 웬만한 밸리드 신도들보다도 적의가 더 컸다.
“그 작자가 여기 있나요?”
“울텔에게 잡혀 온갖 고문을 받고 이 탑 상층에 감금당한 걸로 알고 있습니다.”
“그거 꼴좋네요.”
“꼴좋죠. 하지만 이 힘이 만약 정말로 그 녀석의 것이라면 각오가 필요할 수도 있겠습니다.”
“걱정 마세요. 각오는 성녀란 직위를 받아들일 때부터 한 상태니까요.”
“그거 좋군요. 그럼 올라갑시다.”
지크 일행은 널브러져 있는 로브들의 시체를 지나쳐 위층으로 가는 계단을 올랐다. 몇 층이나 지났을까.
“마력이 사라졌구나.”
“그럼 해결된 건가?”
윌위스와 레오나가 천장을 올려다보며 대화를 나눴다.
“그렇게 쉬울 것 같진 않습니다. 감이 좋지 않아요.”
“용병의 감이란 무섭지. 그것도 실력 있는 용병의 감은 더더욱.”
윌위스도 현 상황을 그다지 긍정적으로 보지 않았다. 거기에 틸의 감상을 듣고는 더욱 그런 생각을 굳혔다.
“계속 올라갑시다.”
일행이 다시 계단을 오르려 할 때였다.
콰아아아앙!
탑이 크게 흔들렸다. 동시에 들리는 커다란 폭발음.
“역시 상황이 그리 쉽게 흘러가진 않겠지.”
윌위스가 혀를 끌끌 찼다.
폭음은 계속됐다. 그에 따라 탑도 계속 흔들렸다. 그때마다 느껴지는 막대한 마력.
“지금부턴 빨리 올라가죠.”
“빨리? 지금까지도 충분히 속도를 내….”
레오나의 의문은 금방 풀렸다.
콰아앙!
에스텔레이드의 빛이 천장을 가격했다.
거대한 빛기둥이 거꾸로 솟아올라 탑을 관통한다. 곧 탑의 천장에 구멍 하나가 뻥 뚫렸다. 위로 파란 하늘이 보였다.
지크는 입을 다문 레오나에게 말했다.
“지름길이야.”
“…그래, 지름길이네.”
아주 탑의 천장까지 바로 갈 수 있는 지름길이었다.
“지크 군의 말마따나 굳이 계단을 따라 올라갈 필요는 없겠지.”
하지만 내용과는 달리 윌위스의 목소리에는 힘이 없었다.
포기했다고는 해도 마법사로서 연구 욕심이 샘솟는 마탑의 중앙에 구멍이 뻥 뚫린 것이 무척 허탈한 모양이었다.
지크 일행은 지크가 뚫어 놓은 이른바 지름길을 통해 올라가기 시작했다.
윌위스는 마법으로 날아올랐고 지크와 틸, 레오나는 날랜 몸놀림으로 뛰어올랐다. 루벨라는 여전히 레오나가 업었다.
“왜 지름길을 빨리 뚫지 않았죠?”
루벨라가 지나온 구멍을 슬쩍 내려다보며 물었다.
공급되는 마력이 중단되어 탑을 부술 수 있게 된 지는 꽤 되었다. 아까 지름길을 뚫었다면 울텔을 따라잡을 수도 있었을 터.
“울텔이 고통받기를 원해서요.”
“구체적으로 어떻게요?”
“그놈이 탑을 올라간 이유라면 뻔합니다. 어떻게든 순간이동진을 고치려는 거겠죠. 그런데 그거 안 고쳐지거든요.”
세계수의 마력을 섬 쪽에서 끊어버렸는데 여기서 뭔 짓을 한들 고쳐질 리가 없다.
“하지만 놈은 희망을 놓지 못할 겁니다. 어떻게든 순간이동진을 고쳐 보겠답시고 아득바득 온갖 시도를 하겠죠.”
“즉, 녀석은 희망에 몸부림치다 결국은 절망할 거다?”
“마음에 들죠?”
“무척이요!”
역시 울텔을 괴롭히는 일이라면 무척이나 마음이 맞는 둘이었다.
몇 층 더 올라간 지크 일행은 탑의 일부분이 박살 나 커다란 구멍이 뚫린 외벽을 마주했다. 몇 층에 걸쳐 생긴 구멍 너머로 새파란 하늘과 호수의 푸른 물결이 그대로 보였다.
아래를 내려다보자 모여 있는 몬스터와 언데드들이 탑의 잔해에 짓이겨져 있다.
잔해는 상당히 멀리 날아가 섬의 바깥, 바다에 떨어져 있는 녀석까지 보였다.
한눈에 봐도 엄청난 힘이 탑의 외벽을 단숨에 날려 버렸음을 알 수 있었다.
“이게 아까 그 굉음의 결과인 것 같군.”
윌위스는 파괴 흔적을 자세히 살폈다.
“뭔가 마법을 사용한 것 같지는 않고 무기로 도려낸 것 같지도 않아. 그저 마력을 방출해서 때려 부순 모양이야.”
“얼마나 강한 상대인 것 같아?”
“내가 아무리 현명한 마법사라도 고작 이걸로 상대의 수준을 알 순 없지. 넌 알 수 있겠느냐?”
“엘프의 기술에도 그런 건 없어.”
“그럼 역시 상대를 직접 봐야겠군.”
아직 남은 층은 있었다. 그리고 그 층이 줄어드는 만큼 미지의 존재와 조우할 가능성도 커지리라.
하지만 그들이 먼저 발견한 것은 거대한 마력의 주인이 아니었다.
“끄으, 끄으으으으…!”
억눌린 신음이 기어 다니고 있다. 아니, 그건 억눌린 것이 아니었다.
너무도 강렬한 고통에 차마 목소리를 높이지 못하는 것이었다.
“…벌레가 진짜 벌레가 됐네요.”
루벨라가 신음의 주인을 보고 차갑게 말했다.
울텔이 바닥에 쓰러져 있었다. 힘겹게 허우적대며 앞으로 나아가는 모습은 루벨라의 말대로 벌레 그 자체였다.
그의 하반신은 보이지 않았다. 복부에서 튀어나온 내장이 질질 끌리며 바닥에 시뻘건 피 칠을 한다. 누가 봐도 그의 목숨이 얼마 가지 않을 거라는 걸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저 부상을 입고도 아직까지 숨이 붙어 있다는 사실이 울텔의 범상치 않음을 보여주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금방이다. 아무리 대단한 자라도 인간인 이상 저런 상처를 감당할 순 없다.
루벨라라면 치료를 할 수 있겠지만, 그녀가 울텔에게 그런 은혜를 베풀 리 없었다.
즉, 울텔에게 남은 건 죽음뿐이었다.
지크는 그에게 다가갔다.
자신의 앞에 발이 보이자 울텔이 고개를 들었다. 입가로 피를 잔뜩 흘리고 있는 울텔의 눈은 흐렸다.
하지만 상대가 지크인 걸 확인하자 그의 눈에 어느 정도 빛이 돌아왔다.
“지…크….”
“그래. 네 친구 지크야.”
지크는 울텔의 옆에 쪼그려 앉았다. 그의 시선이 울텔의 사라진 하반신 쪽으로 향했다.
“어이구, 아파 보이네. 괜찮아?”
“아아아아아악!”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상처 부위를 꾹꾹 누르자 울텔이 비명을 질렀다. 지금껏 억눌린 신음 소리만 흘린 게 거짓말인 것처럼 보였다.
“그래도 아직 건강하네. 이렇게 비명 지를 기운도 있고.”
그러며 마치 엄살 부리는 사람을 타박하듯 상처 부위를 때린다. 하지만 그게 당연히 엄살 부리는 사람에게 하는 행위와 같을 리 없었다. 애초에 손에 담긴 힘도 상당히 강했다.
“끄아아아아아아아악!”
당연히 이번에도 울텔은 목이 찢어져라 비명을 질렀다.
“어라? 엄살이 아냐? 이거 참 걱정되네. 어디가 아파? 여기야? 여기? 아니면 여기?”
“그, 그만… 아아아아아악!”
지크의 손이 순식간에 피로 흥건해졌다. 울텔이 지크를 막으려 허우적댔지만 소용없었다.
잠시 울텔을 갖고 놀던 지크가 루벨라를 불렀다.
“성녀님, 이 녀석 좀 치료해 주시겠습니까?”
“네? 왜요? 세상 모든 만물을 품으시는 카르나 님이라도 밸르와 밸리드 족속들은 보는 족족 밟아 죽이라고 했지, 당신의 은혜를 베풀라고 하진 않으셨는데요?”
“당연히 모두 회복시켜 달라는 건 아닙니다. 저도 이놈의 면상을 계속 보고 싶은 생각은 없어요. 지금 당장 죽어 나자빠질 것 같으니, 조금만 더 숨이 붙어 있으면 됩니다.”
“그렇다면야….”
루벨라가 울텔을 향해 지팡이를 뻗었다. 지팡이에 자애로운 성력이 감돈다.
하지만 그녀의 표정은 집에 침입한 벌레를 잡기 위해 어쩔 수 없이 손을 뻗을 때 짓는 딱 그것이었다.
루벨라의 성력이 닿자 울텔의 표정이 한결 편안해졌다.
그러나 그 차이는 미미했다. 치료를 한다고 해봤자 활활 타오르는 거센 불길에 고작 물 한 바가지 붓는 일에 불과한 것이다.
그러나 지크의 의도대로 울텔의 수명을 조금 더 늘려 주기에는 충분했다.
“헉! 헉! 헉!”
호흡이 조금 편해지자 울텔은 가쁜 숨을 몰아쉬었다.
“누구한테 당했냐?”
지크가 단도직입적으로 물었다.
“혹시 그렌 제너드냐?”
“……!”
“맞구나?”
울텔의 표정에 스친 분노와 증오를 보고 지크는 짐작했다.
“참, 너도 너다. 당할 놈이 없어서 그렌 제너드에게 당하냐?”
“네… 네놈은… 뭔가 다를 줄 아느냐!”
“다르지. 아주 많이.”
표독스러운 울텔의 목소리에도 지크의 표정은 변하지 않았다.
“적어도 너처럼 이렇게 내장을 질질 흘리며 벌레처럼 기어 다니진 않아. 아, 벌레처럼이 아니라 이젠 정말 벌레가 되었나?”
“네놈도 저번… 크아아아악!”
울텔이 저번 시간선에 대해 언급하려 하자 지크가 그의 상처를 꾸욱 눌렀다.
지금의 동료들을 신뢰하고 있긴 했지만, 회귀에 대해서까지 알려 줄 필요는 없었다.
“확실히 나도 그놈에게 당한 적은 있지. 하지만 결국 난 이렇게 팔팔하게 살아 있어. 결국 싸움이란 최후에 서 있는 놈이 이기는 거야. 그리고 넌 여기서 쓰러지고. 더 이상 다음 기회도 없이.”
“네 놈도… 마찬가지일 거다.”
“난 아니라니까 그러네.”
“흐, 흐흐! 네놈은 지금… 그렌 제너드가 어떤 상태인지… 모르지.”
“그래, 그건 궁금하다. 말 좀 풀어 봐. 폐인이나 마찬가지였던 그놈이 어떻게 그런 마력을 갖게 된 거냐?”
“그걸… 알려 줄 것 같으냐!”
“너무 그렇게 뾰로통하게 굴지 말자. 우리 사이에.”
“끄아아아아악!”
지크가 상처 부위를 다시 짓누르자 울텔이 팔딱팔딱 날뛰었다.
“그것참, 너는 신앙심이라고는 조금도 없는 줄 알았는데. 그래도 밸리드의 교황이라고 너도 생선 흉내를 곧잘 내는구나. 어떤가요, 성녀님? 예전 생각나지 않나요?”
“지크 님을 처음 만났을 때 말이군요. 그러고 보니 그때 그 작자도 생선 흉내를 잘 냈죠.”
피범벅이 된 채 고통에 몸부림치는 인간을 앞에 두고 지크와 루벨라는 잠시 추억을 회상했다.
“자, 이제 슬슬 그렌 제너드에 대해 다시 얘기해 보자고. 아, 우리 시간에 대해서는 걱정해 줄 필요 없어. 적어도 그렌 제너드가 움직이기 전까지 시간은 많으니까.”
지크는 위를 올려다봤다. 느껴지는 기척이 있었지만 그건 일절 움직이지 않고 있었다.
“흐, 흐흐…! 저 녀석이 본격적으로 움직이는… 순간… 네놈의 생도… 끝이다.”
“내가 말했지? 나는 너와는 다르다고. 언제쯤 돼야 이해해 주려나?”
“아무리 네가 대단하다고… 해도…제국 마지막 황제와 같은 힘에… 대적할 순… 없어.”
제국의 마지막 황제. 신경 쓰이는 단어가 튀어나왔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