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1화
“이, 이, 이…!”
울텔의 눈에 핏발이 섰다. 입에서는 말인지 신음인지 모를 정체불명의 음성만이 흘러나온다.
어두운 밤에 본다면 바로 발을 돌려 도망갈 모습이다. 아니, 환한 대낮에 본다고 해도 한참 거리를 두고 돌아가리라.
그러나 지크에게 그런 감정은 없었다. 저 모습은 지크에게는 무척 익숙한 모습이다.
그에게 덤비다가 이리 처맞고 저리 던져지며 눈물 콧물 쏙 빼게 된 인간들이 최종적으로 보이는 꼴이 딱 저것이었으니까.
물론 저런 모습이 되었다고 지크가 봐줄 리는 없었다.
“왜 그런 표정이야? 세계를 가지고 놀던 흑막이라면 이런 위기 상황에서도 무게를 잡아야지. 고작 한 번 그렇게 처맞았다고 부들부들 떨면 어떡해? 그렌 제너드는 이런 상황에서도 꿋꿋이 버텼다고.”
회귀 전, 지크를 쓰러뜨리기 위한 온갖 정보를 모을 때 그렌은 정말로 어마어마하게 지크에게 당했다. 브레이브가 아닌 모어가 상대였으니 당연히 모욕과 굴욕은 덤으로 따라왔다.
하지만 그렌은 그 모든 걸 버티고 끝끝내 자신의 목적인 ‘완벽한 삶’을 이루기 직전까지 갔었다.
한데 울텔은 고작 몇 대 맞았다고 어린아이처럼 얼굴을 붉힌 채 씨근덕대고 있지 않은가.
물론 그렌과 울텔의 경우는 다르다.
그렌이야 회귀라는, 모든 걸 없었던 것으로 만드는 능력도 있었고 지크에게 수없이 당하리라는 예상도 하고 있었지만 울텔에게 지금의 사건은 예상 밖의 재앙일 뿐이었다.
하지만 지크가 그걸 알아줄 리 없었다.
“아까 너랑 나랑 그렌 제너드를 한껏 비웃었잖아? 그런데 지금 꼴을 보니까 네가 그렌 제너드보다 딱히 나은 점이 보이질 않아. 오히려 네가 그렌 제너드보다 훨씬 못난 것 같은데. 설마 네가 세상에서 그렇게 희귀하다는 그렌 제너드보다 못한 놈? 이야, 설마 그런 희귀 생물을 보게 될 줄이야! 이건 분명 착한 일을 많이 하고 다닌 내게 하늘이 준 선물이 분명해!”
“이 개자시이이익!”
“아하하하! 역시 지크 님이야! 저러실 줄 알았다니까!”
울텔의 고함 소리가 커질수록 루벨라의 웃음소리도 따라서 커졌다.
“역시 저 벌레가 지크 님과 얘기를 나누자고 할 때 찬성하길 잘했어요!”
“어, 루벨라. 그때 혹시 찬성한 이유가 따로 있었어?”
레오나가 물었다. 윌위스와 팀이 눈짓으로 말렸지만 치솟는 호기심을 억누를 수 없었다.
“지크 님의 성격을 생각해보면 그 대화에서 상대를 조롱할 건수를 찾은 후에 철저하게 써먹을 거라고 믿었거든요! 제 신뢰가 옳았네요!”
“…그걸 신뢰라고 할 수 있나? 신뢰라는 단어가 그리 값싼 단어였던가?”
윌위스의 말은 루벨라에겐 닿지 않았다. 그저 지크가 혓바닥으로 울텔을 사정없이 후려 패는 걸 열렬히 응원하고 있을 뿐.
그런 와중에도 일행들에게 상처가 나면 바로바로 회복시키고 있으니 뭐라 할 말조차 없었다.
쿠르르르르릉!
그렇게 말을 하는 와중에도 탑의 흔들림은 더더욱 커졌다. 이제 몬스터나 언데드 같은 수준이 낮은 것들은 제대로 중심을 잡지 못할 정도였다.
루벨라와 윌위스도 제대로 서지 못해 레오나와 틸이 부축했다.
그 와중에도 그들은 철저하게 적을 잡아 죽였다.
“이보게, 지크 군. 정말로 탑을 무너뜨려야 하나?”
아무리 봐도 연구거리가 흘러넘치는 탑의 붕괴에 윌위스는 가슴이 찢어지는 것 같았다. 때문에 윌위스의 목소리는 반쯤 애원조였다.
“적들도 약체화되었으니 이대로 꼭대기까지 쳐들어가서 놈들을 족치면 될 것 아닌가.”
그러나 윌위스의 희망은 받아들여지지 않았다.
“아까 말했듯이 탑을 무너뜨리는 게 목적이 아닙니다. 그저 목적을 이루기 위한 과정 사이에 탑이 무너진다는 결과가 나올 뿐이죠.”
탑은 세계수의 마력으로 유지되고 있다.
당연히 세계수의 마력이 끊기면 탑은 무너질 수밖에 없다.
그리고 지금 한스 일행, 정확히 말해 엘레나는 일단 세계수의 마력부터 끊어 놓는 중이었다.
“정말로 어쩔 수 없는가?”
“어쩔 수 없습니다.”
윌위스는 눈앞의 먹이를 빼앗긴 강아지처럼 풀이 죽었다. 그의 어깨가 축 처졌다.
“그렇다면 할 수 없지.”
한숨을 길게 내쉰 윌위스가 지팡이를 높이 치켜들었다.
“저놈들에게 화풀이나 할 수밖에.”
“그거 아주 좋은 생각이에요!”
“그렇지? 이제 보니 성녀도 나름 말이 통하는 상대였구먼.”
“실망감에 정신까지 놓지 마!”
아무리 평소 티격태격하는 사이더라도 얼마 안 남은 정상인이 사라지는 걸 볼 수 없던 레오나가 빽 소리를 질렀다.
우스꽝스러운 모습이었지만 윌위스의 화풀이는 절대 우스꽝스럽지 않았다. 순식간에 뻗어간 화염이 눈 깜짝할 사이에 적들을 태워버린다.
그 모습을 보며 울텔은 이를 악물었다. 상황은 계속 악화되고 있었다.
대체 어떻게 해야 할까. 계속 여기서 지크 일행을 막아야 할까. 아니면 저들을 남겨 두고 섬으로 가서 일단 침입자들을 제거해야 할까.
하지만 그의 망설임을 한 번에 날려주는 보고가 들어 왔다.
“주인님!”
누군가 위에서부터 황급히 달려 내려왔다.
그는 간신히 탑 위로 올려 보낸 몬스터와 언데드들을 섬으로 보내는 역할을 하던 이였다.
그런 이가 자신의 임무를 방기하고 내려왔다. 무척 당황한 모습으로.
당연하게도, 울텔은 좋은 느낌을 받지 못했다.
“무슨 일이냐! 네 임무는 어쩌고 내려왔어!”
“수, 순간이동진이 작동을 중지했습니다!”
“……!”
울텔의 시선이 절로 지크에게 돌아갔다.
그의 눈에 비친 건, 또다시 얄미운 웃음을 짓고 있는 지크의 얼굴이었다.
도저히 참을 수 없는 울분이 터져 나와 지크에게 비명 같은 욕설을 내뱉으려 할 때였다.
쿠쿠쿠쿠쿠쿠쿠쿵!
지금과는 비교도 할 수 없는 진동이 탑을 흔들었다.
* * *
“후우!”
엘레나는 크게 숨을 들이쉬다가 내쉬었다. 온몸에 땀이 흘러 그녀의 로브를 흥건히 적셨다.
하지만 그녀는 젖은 옷 따위는 신경 쓰지 않았다. 지금은 장치의 제어에 온 힘을 쏟아야 했다.
‘일단 탑으로 흘러가는 마력은 중단시켰어.’
생각 같아서는 당장 그녀의 스승을 깨우기 위한 작업부터 하고 싶었다.
하지만 스승의 의향은 달랐다. 그녀는 자신이 깨어나는 것보다 적의 제압을 우선시했다.
저 멀리서 전투음이 들려온다. 동료들이 적과 교전을 하는 소리다. 소리만으로도 전투가 얼마나 격렬한지 짐작이 간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을 것이다.
더 이상 탑에서 적의 원군이 오진 않을 테니까.
‘울텔이란 인간은 오지 않았지.’
세계를 뒤에서 주무르는 흑막. 그녀의 아버지를 타락시킨 이는 그렌 제너드였지만, 그 그렌 제너드가 날뛸 터전을 만들어준 이가 바로 울텔이라 했다.
당연히 원한이 가득했다.
하지만 원한만으로 움직일 순 없었다. 이건 세계를 구하기 위한 싸움이기도 했으니까.
무엇보다도….
‘원한이라면 지크 님이 원 없이 풀어 주시겠지.’
여러 면에서 믿음직한 지크지만 상대를 조롱하고 골리는 데 있어서 그만큼 적임자가 없다는 것을, 그녀의 짧은 견문으로도 충분히 알 수 있었다.
‘아니, 그런 사람이 세상에 더 있다는 것 자체가 좀 그렇지?’
분명 그녀의 스승과 같이 경애하는 상대였지만, 마법사인 만큼 그녀의 평가는 몹시도 객관적이었다. 불경한 생각도 아니다.
본인에게 그런 말을 해봤자 불쾌해하지도 않을 것이다. 껄껄 웃으며 긍정하거나 조금 투덜거리며 부정하고 끝일 터.
‘일단 첫 번째는 성공이야.’
적의 정예를 분단시켰고 나머지 자잘한 적은 탑이 붕괴할 때 같이 몰살당할 것이다. 탑의 순간이동도 작동을 멈췄으니 더 이상 적의 지원군이 도달하지도 못한다.
울텔이 지크 일행을 탑에 가둔 것이 아니다.
지크가 울텔과 그 부하들을 탑에 가둔 것이다. 그것도 탑을 붕괴시킨다는 재난을 더해서.
물론 탑이 당장 무너지진 않을 것이다. 세계수의 마력으로 유지되고 있다 하더라도 일단 지면이 탑을 받치고 있는 것도 사실이니까.
그러나 그리 오래 걸리지도 않을 것이다.
‘그럼 이젠 스승님을 깨워야지.’
드디어 기다리던 시간이 왔다. 울텔과 그 잔당을 처리하는 건 다른 이들에게 맡기면 된다.
그녀는 운명을 비트는 열쇠에서 전해지는 지식을 받아 다시 한번 장치에 마력을 집어넣었다.
‘어?’
엘레나가 당황했다. 장치 안으로 흐르는 마력이 그녀의 의도대로 움직이지 않았다.
그녀는 마력을 조금 더 주입해 장치를 컨트롤하려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마찬가지. 도도하게 흐르는 세계수의 마력은 조금 전과 달리 제멋대로 흐를 뿐이었다.
‘왜, 왜 이러지?’
경애하는 스승을 깨우기 위한 마지막 한 걸음이 도저히 진행되지 않는다.
안 그래도 땀으로 흠뻑 젖었던 그녀의 이마에 새로운 땀이 스며 나오기 시작했다.
제어 장치의 마력이 제멋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아니, 이건 제어 장치의 오류가 아니었다. 그녀의 시선이 세계수가 있는 구멍 쪽으로 향했다.
‘세계수가…!’
우우우우우웅!
구멍 안에서 거센 진동음이 터져 나왔다.
* * *
그렌은 여전히 탑 안에 묶여 있었다.
지크 일행과 울텔과 그 부하들의 전투가 격렬해지며 탑의 진동이 연신 울려댔고, 이제는 세계수의 마력이 끊긴 탑이 점점 무너지며 흔들리고 있었지만, 그렌의 움직임은 미미했다.
아니, 그건 그저 탑의 흔들림에 같이 따라 흔들리고 있을 뿐, 그가 의도한 행동이라고 볼 순 없었다.
온갖 신체가 잘리고 패였으니 이상한 일도 아니었다. 이대로 그는 붕괴되는 탑에 휘말려 최후를 맞을 것 같았다.
끔찍한 고통과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모든 생각이 정지되길 얼마. 점점 그렌의 사고가 다시 움직이기 시작했다.
그러나 그건 일반적인 사람들의 사고와는 달랐다.
보통 이런 상황에 처한 사람이라면 극심한 분노와 증오에 휩싸이며 상대에 대한 저주를 쏟아내기 십상이다.
혹은 더 이상 평범하다고 말할 수 없는 자신의 신체에 절망해 이 희망 없는 삶이 빨리 끝나길 기원할 것이다.
단, 극소수의 사람은 자신의 신념을 지키고 실행하기 위해 어떻게든 마음을 다잡을 것이다.
하지만 그렌의 상태는 그 어느 쪽에도 속하지 않았다.
‘…어야 해.’
차츰차츰 그렌의 생각이 선명해지기 시작한다.
‘…만들어야 해.’
그건 자신의 인생을 조종한 울텔에 대한 증오도, 자신의 음모를 작살낸 지크에 대한 원망도 아니었다.
그저 수도 없는 회귀를 하게 한 그의 목표.
‘완벽한 인생을 만들어야 해.’
오직 그 하나만을 위해서 달려 왔다.
아름답고 능력 있는 동료들과 함께 모험을 하고 정의를 실현하며, 그 시대 최강 최악의 악당을 물리치고 역사에 길이 남는 영웅이 되는 삶.
그의 수많은 회귀는 오로지 그걸 위한 것이었다.
힘들기도 했고 고통도 많이 받았다.
특히 무엇 때문인지는 모르지만 한동안 극도의 공포를 느낀 적도 있었다.
회귀를 하는 것이 두려웠다. 더 이상의 회귀를 거부하고 그 시간선의 삶만을 이어나간 후, 다른 이들과 같이 죽음을 맞이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샘솟았었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걸 극복했다. 그만큼 그는 ‘완벽한 인생’이란 목표에 매료되어 있었다.
그 후부터는 어떤 잡념도 섞이지 않았다. 공포를 느끼기 전에는 잠깐 잠깐 다른 생각이 든 적도 있었지만, 그 후로는 일절 없었다. 오로지 목표를 향해 매진하게 됐다.
어쩌면 그 공포는 그의 의지를 시험하는 최후의 장애물이었을지도 몰랐다.
그리고 그렌은 이 꼴이 된 지금도, 그의 목표를 포기하지 못하고 있었다.
‘완벽한… 인생을….’
착각일까. 조금 힘이 돌아온 것 같았다.
(다음 편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