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80화
문 안으로 들어온 한스 일행은 브뤼셀 시스템을 찾아다녔다. 처음 오는 곳이었지만 그들의 발걸음에 망설임은 없었다.
이미 지크에게 이 유적 안의 지형을 철저하게 학습받았다. 과장 좀 보태서 처음 온 이곳이 숫제 고향처럼 느껴질 정도였다.
거칠 것 없던 그들의 발걸음이 멈춘 곳은, 보기만 해도 기가 질릴 정도로 거대하고 정교한 장치의 앞에서였다.
“이게… 브뤼셀 시스템인가?”
한스의 목소리에 경외감이 섞였다.
지크를 따라 온갖 유적들을 돌아다녀 본 한스였지만, 눈앞의 장치는 앞서 보아 왔던 그 어떤 것들과 비교해도 따라올 수 없는 어떤 신비로움이 있었다.
“이거 봐, 노웸. 이게 지크 님이 말한 그 장치인가 봐. 대단하다.”
쿠우우.
스녹과 노웸도 한스와 비슷한 눈으로 장치를 쳐다봤다.
“한스, 저길 봐요.”
자신의 옷소매를 당기는 라라의 말에 한스가 고개를 돌렸다.
그곳엔 벽면에 뻥 뚫린 구멍이 있었다. 저 구멍에 대해서도 지크에게 들었었다. 한스와 일행은 구멍으로 다가가 그 너머를 쳐다봤다.
“…….”
네 명은 일제히 입을 다물었다.
구멍 너머에는 커다란 구덩이가 있었다. 벽면으로 흘러내리는 시뻘건 용암이 구덩이 바닥에 커다란 용암 호수를 만들고 있다.
그 용암 호수 중앙에 존재하는 커다란 섬에 뿌리를 내린, 엄청난 규모의 나무.
“…세계수.”
지크는 그 나무를 그렇게 일컬었다.
그들이 여행을 하며 본 여러 개의 특별한 나무들. 하나하나가 막대한 힘과 경이로움을 보여준 나무들이다.
하나, 그것들은 이 나무의 분신에 지나지 않는다고 했다.
나무에 자그마치 ‘세계’라는 이름을 붙이는 건 너무 오만한 명명이 아닌가 생각이 들 수도 있다.
하지만 한스 일행은 세계수의 실물을 본 순간, 너무도 당연하게 세계수란 이름을 받아들였다.
그건 그 정도의 존재감을 흩뿌리고 있었다.
세계수의 모습에 넋을 잃은 것도 잠시, 한스는 정신을 차렸다.
“자, 정신들 차려요!”
그는 아직 정신없이 세계수를 보고 있는 동료들을 일깨웠다.
“시간이 많지 않습니다. 어서 주어진 일들을 하죠.”
한스는 능숙하게 일행을 재촉했다. 명령을 내릴 것도 없었다. 이미 자신이 할 일은 각자 철저하게 숙지하고 왔으니까.
한스는 엘레나에게 운명을 비트는 열쇠를 내밀었다.
“부탁한다.”
“네!”
어떻게 보면 이번 작전에서 가장 중요한 역할을 맡은 것이 그녀다. 엘레나도 그것을 아는 듯 굳은 얼굴로 운명을 비트는 열쇠를 움켜쥐었다.
엘레나가 장치 앞으로 갔다. 한스는 스녹과 라라를 데리고 다른 지점으로 향했다.
“노웸.”
쿠!
단, 노웸만은 언제나 있던 스녹의 어깨에서 뛰어내려 엘레나의 옆에 자리를 잡았다. 혹시나 하는 상황에서 그녀를 지키기 위함이었다.
세 사람이 도착한 곳은 어느 커다란 공간이었다. 바닥에 복잡한 문양의 마법진이 그 공간이 범상치 않은 곳임을 알렸다.
“예상대로 상당히 많은 사람이 있었던 모양이에요.”
라라가 발로 바닥을 슥 훑었다. 바닥에는 사람들의 발자국이 어지럽게 찍혀 있었다.
“여기 있었던 모든 이가 돌아오진 않겠지만, 그래도 상당히 많은 적이 올 건 확실합니다. 준비 단단히 해요.”
“네!”
“알았어요!”
스녹이 마법 상자에서 온갖 금속들을 꺼내 주위에 흩어 놓았고, 라라도 검을 뽑았다.
한스도 허리춤에 찬 검집에서 검을 뽑아 들었다. 익숙한 에스텔레이드의 손잡이는 아니다. 검을 뽑아 들자마자 번쩍이는 검신도 없다.
그러나 평범한 검을 들더라도 지금껏 지크에게 훈련받으며 쌓아 온 한스의 실력은 여전히 강력했다.
우우우우웅!
마법진이 빛을 뿜기 시작했다. 주변 마력이 요동치며 공명음이 일었다.
“옵니다!”
한스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마법진에서 일단의 무리가 나타났다. 한스의 일행과 무리의 눈빛이 마주쳤다.
다음 순간,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두 무리는 전투에 돌입했다.
한스 일행이 유적으로 되돌아오려는 이들을 막고 있을 때, 엘레나는 브뤼셀 시스템의 제어 장치에 손을 댔다.
다른 손에는 운명을 비트는 열쇠를 꼭 쥐고 있었다.
조심스럽게 제어 장치에 마력을 넣는다.
우웅!
장치가 기동하는 소리가 울렸다. 엘레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마력을 조금 더 깊숙이 집어넣었다.
‘이건…!’
그녀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그녀도 나름 마법 장치에는 빠삭한 인간이다.
마력을 사용하지 못할 때도 온갖 마법 지식을 섭렵하며, 비록 마력이 빠져 있긴 했지만 아티팩트마저 만들었던 그녀다. 그러니만큼 웬만한 마법 장치를 다루는 데 어려움은 없다.
하지만 지금, 이 장치는 완전히 달랐다.
그 정교함은 소름 끼치고 그 마력의 흐름은 강력하다.
자신의 미약한 마력 따위로는 어떤 변화조차 이끌어내지 못할 것 같았다.
뭘 어떻게 손을 대야 이 장치가 움직일지 감조차 잡히지 않았다.
하지만 그녀의 당황은 운명을 비트는 열쇠에서 전해져오는 기억에 차츰 가라앉았다.
‘스승님….’
그녀의 강하고 아름다운 스승이 이 아티팩트를 매개로 가르침을 주고 있었다.
지크와 함께 이 세상 그 어떤 것도 해낼 수 있을 것 같은 스승이다. 그녀가 자신을 지원해주고 있다.
‘할 수 있어!’
연습도 많이 했다. 엘레나는 눈을 부릅뜨고 마력을 집어넣어 본격적으로 장치를 운용하기 시작했다.
* * *
콰앙! 콰앙!
탑에서는 여전히 격전이 펼쳐지고 있었다.
울텔을 비롯해 밸리드 군세는 지크 일행을 필사적으로 막아섰지만 점점 더 밀려났다.
아무래도 섬에 병력을 보낸 여파가 발생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고 섬에 만족스러운 수의 병력을 보낸 것도 아니었다.
‘젠장!’
울텔은 이를 갈았다.
간신히 얼마의 몬스터와 언데드를 탑 위로 올려 보내긴 했지만, 대다수는 지크 일행에게 막혔다.
지크 일행만이 문제도 아니었다.
지금껏 지크 일행에게 쏟아 부은 막대한 물량은 고스란히 시체로 화했다.
탑이 상당히 넓다지만 아무래도 계속 시체가 쌓이다보면 언젠가는 한계가 오기 마련.
울텔은 가득 쌓인 시체 때문에 지크 일행을 수월하게 공격하지 못하여 지크 일행이 회복할 시간을 갖게 되는 것을 원치 않았다.
때문에 몬스터나 언데드, 그림자들은 몬스터의 시체나 언데드의 잔해를 뒤로 치우는 임무도 맡고 있었다.
하지만 하나의 병력이 급한데 그런 명령을 내릴 수 있으랴. 지크 일행을 막고 섬으로 약간의 병력이라도 보내려면 시체나 잔해를 치울 여력은 없었다.
그렇게 차곡차곡 쌓인 시체와 잔해들이 어느새 벽처럼 쌓여 아래층에서 올라오는 병력을 막고 있었다.
“젠장! 당장 잔해를 치워!”
몬스터, 언데드, 그림자들이 울텔의 명령에 일제히 시체와 잔해를 치우기 시작했다. 숫자가 숫자인지라 시체와 잔해는 빠른 속도로 사라졌다.
하지만 틈이 생기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지크 일행은 그 틈을 치명상으로 만들 능력이 충분했다.
콰아아앙!
울텔은 허겁지겁 뒤로 물러났다. 그가 있던 자리를 휩쓴 빛이 사그라진다. 빛에 휩쓸린 그의 소맷자락이 깔끔하게 사라져 있었다.
“왜 자꾸 뒤로 가. 네가 그러면 내가 자꾸자꾸 탑의 꼭대기로 올라가게 되잖아. 최선을 다해 막아야지.”
“닥쳐라!”
울텔이 지팡이를 휘두르자 물기둥이 쏟아졌다.
하지만 울텔의 공격은 허무하게 빗나가 괜한 몬스터들의 목숨만 앗아갔다.
“왜 자꾸 네 편을 죽이는 거야? 그렇게 저 녀석들이 마음에 들지 않았어? 그런데 내가 보기엔 저 녀석들이 외모며 성격이며 세상에 끼치는 해악까지 너보다 조금은 더 낫거든? 그냥 네가 자살하는 게 조금 더 낫지 않을까?”
“…….”
“대꾸를 안 하네? 설마 네가 죽인 녀석들에게 면목이 없어서 입을 다문 거야? 그럴 거면 대체 왜 불쌍한 녀석들을 죽이냐고. 죄책감이 솟아올라서 미치겠지? 손톱보다도 작을 게 분명한 더러운 양심이 근질근질거리지? 그런 너에게 자살을 추천하겠어!”
“…….”
“어이쿠, 또 빗나갔네. 진심으로 충고하건대 아까처럼 부하들 뒤에서 무게 잡고 서 있는 게 어때? 설마 위대한 울텔께서 세우신 계획이 어긋나 허겁지겁 전면으로 나선 건 아닐 거 아냐. 설마 그럴 리가! 난 울텔을 믿어요! 그렇게 야망을 떠들어대던 멋쟁이가 그런 졸렬한 짓을 하진 않을 거라고!”
“닥치라고 했다!”
“싫은데? 싫은데? 싫은데? 싫은데?”
저렇게 격렬하게 검을 휘두르면서 어떻게 저리 입을 놀릴 수 있는지. 심지어 발음마저 짜증나도록 정확하다!
지크 일행조차 지크의 조롱에 혀를 내둘렀다.
“지크와의 친분을 떠나서 정말로 지크랑은 싸우기 싫어.”
“내가 말했지 않느냐. 녀석이 이룬 업적만 아니었다면 난 저 녀석을 마왕 같은 거라고 생각했을 거라고.”
“…음.”
다만 이번에도 루벨라는 열렬히 지크를 응원했다.
“하여간 생선 대가리를 신으로 모시는 놈들답게 대화라는 게 안 된다니까요! 지크 님의 저 완벽한 논리에 놀아나는 걸 보세요!”
“…완벽?”
“그만두거라. 상대가 밸리드라면 성녀도 지크 군과 별다를 것 없어 보이니.”
“…음.”
울텔은 미칠 것 같았다.
당장이라도 섬으로 달려가고 싶은 마음에 계속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 중이다. 그런 와중에 쏟아지는 지크의 조롱.
당장 지크의 목을 쥐어뜯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게 더 분통이 터졌다.
그때였다.
쿵!
탑이 흔들렸다.
단 한 순간의 흔들림이었지만 알아채지 못한 사람은 없었다.
사람들의 시선이 절로 바닥을 향했다.
“뭐지?”
울텔이 당혹스럽게 내뱉었다.
탑이 흔들리다니. 지금껏 경험해본 적 없는 일이다. 혹시 지진이라도 일어난 것일까.
하지만 그가 알기로 이 시기, 이 근방에서 지진이 난 적은 없었다. 따라서 자연 현상은 아니다.
그렇다면 인공적인 현상이라는 것이 되는데, 문제는 탑은 세계수의 마력으로 보호받고 있어 거의 모든 인공적인 힘을 무효화시킨다.
전성기의 힘을 손에 넣은 지크조차 흠집도 못 내고 있는 탑이 아니던가.
그러나, 빌어먹게도 그리고 불운하게도 울텔에게는 짚이는 점이 있었다.
“설마 섬에 침입한 놈들이…!”
“짜릿하지?”
지크가 웃었다.
무척이나 비열해 보이는 그 웃음은 상대의 심부를 긁어대는 놀라운 기능을 갖고 있었다.
“너희들이 여기에 둥지를 틀었을 때부터 짜증이 났었거든. 땅바닥이나 기어 다녀야 할 밸리드가 감히 이런 높은 탑에 살다니. 불이 물을 연료 삼아 타고 바위가 하늘로 떨어지는 일만큼이나 말도 안 되는 일이잖아?”
루벨라가 연신 고개를 끄덕였다.
“물론 탑의 붕괴를 목적으로 움직인 건 아냐. 이른바 부작용 같은 거지. 하지만 그게 중요하겠어? 너를 엿 먹이게 된다는 결과가 중요할 뿐이지.”
“너, 너…!”
울텔은 말을 제대로 내뱉지 못했다. 속에서는 온갖 욕설과 비난이 소용돌이 치고 있었지만 어느 걸 먼저 내뱉어야 할지 분간이 되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생각나는 모든 것들을 한꺼번에 쏟아 붓고 싶었지만 불행히도 그의 입은 하나였다.
쿠구구궁!
다시 한번 탑이 흔들렸다. 진동도 시간도 분명 아까보다 훨씬 더 늘어났다.
“소설이든 현실이든 악의 세력의 근거지는 최후에 무너져야 제맛이지!”
해맑은 지크의 목소리가 메아리쳤다. 그리고 그는 덧붙였다.
“그래서 내가 말했잖냐. 뒷감당 가능하냐고.”
(다음 편에서 계속)